한글 비율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네요!1

by 정섭규 posted Jul 0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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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비문도 지난날의 비문에 비해

이해하기 쉽군요.

한글세대의 입장에서 부탁드리면

좀 더 한글의 비율이 많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탁드려요.



:대종회 문사연구회 5차회의를 개최하고
:
: 대종회 이사회. 회장단 연석회의에서 위윔한
:
: 원. 시조 비문과 시조 양렬공 묘지석을 제작
:
: 세우는 건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거쳐 선정된
:
: 비문을 소개드리니 종친님들께서 검토해 보시고
:
: 좋은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 ~ 제 4차 문사연구회의
:
: * 참석자 : 정현필. 정성천. 정병국. 정후영. 정삼봉
:
: -. 묘지석 건립키로 함
:
: -. 원 시조 묘비문 제작 건립 결정.
:
: * 협의 내용
:
: 각 연구원 비문작성 제출 검토.
:
: ■ 종합 검토결과
:
: * 비문제작의 기본을 후세 종친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함.
:
: * 꼭 한문이 필요한 것을 제외한 가능한 한글을 많이 사용.
:
: * 비문 전체를 한글 맞춤법에 맞도록 제작함.
:
: * 비문 선정은 4차 기준을 적용하여 5차 회의시 확정하기로 함.
:
:
: ■ 5차 회의
:
: 참석자 : 현필님. 성천님. 병국님. 삼봉님. 참석
:
: * 후영님은 사정으로 불참 결과에 적극 동참하기로 함.
:
: * 회의결과
:
: * 비문 원안 종합검토
:
: * 비문 초안 검토 비문 선정
:
: * 일부 수정후 인터넷 공지 및 총회자료로 배포용 제작함.
:
: ■ 원조 원외랑공과 시조 양렬공 새 비문.
:
: ▣ 性理學者 瑞山鄭氏 元祖 員外郞公!!
:
: 瑞山鄭氏 元祖 원외랑공(員外郞公) 諱 신보(臣保)는 400여년간 中國 中原一帶를 통치한 鄭나라 太祖 환공(桓公)의 69世孫으로 宋나라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낸 當代의 有名한 성리학자(性理學者)이다
:
: 宋朝末 中國大陸의 대부분을 장악(掌握)한 蒙古가 人才를 求하고자 蒙古의 將帥 요추(姚樞)로 하여금 學文과 人品이 뛰어난 公을 모시기 위해 懷柔와 脅迫 등 온갖 수단을 다 하였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즉 不事二君 節義로 高麗國 충남서산 간월도(看月島)에 亡命하여 高麗에 性理學을 최초로 전파(傳播) 많은 후학(後學)을 배출하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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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高麗는 불교를 크게 崇尙하는 나라로 公이 儒敎 學文인 性理學을 傳授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宗敎的 개념을 떠나 生活哲學이 담긴 성리학을 최초로 가르키고 지도하니 고려의 선비들이 처음으로 宋나라 性理學의 大家 程伊川. 程明道, 兩程의 글을 보게 되었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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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日 인주수(麟州首)로 子 仁卿과 共助 林衍 등 武臣들의 반란을 평정100여년의 武臣 獨裁時代를 終熄시키고 王權統治時代로 회복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功勞로 正二品 벼슬인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으며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리고정문(旌門)을 세워 功을 기렸으며 후일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대표적 忠臣으로 등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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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公의 先代는 儒家의 標本으로 360여년간 3000여명의 大家族이 한 울타리 안에서 同苦同樂하며 살아와 國家級重點文化財로 보호를 받고 있는 中國浙江城浦江縣 江南第一家 同居人으로 동거1世인 判將作監 沖應公이 曾祖父이며 祖는 軍器監 儀요 禮賓事同正 秀琚공이 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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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公은 고려에 망명 후 儒學의 大家이며 毅宗 明宗時代 東方의 七賢으로 존경을 받아 온 玄靜 吳世才선생의 증손녀 高敞吳氏 슬하에 都僉議中贊을 역임한 長子 仁卿과 次子 中郞將 俊卿을 두었으며 현재 公의 位牌가 중국 江南第一家와 충남서산시 松谷嗣에 모셔져 春秋로 配享 모시고 있으며 충남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墓域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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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都僉議中贊 襄烈公은 瑞山鄭씨 始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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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瑞山君 襄烈公 諱仁卿은 瑞山鄭氏 始祖로 文武를 겸비한 高麗 最高의 벼슬 正一品 壁上功臣都僉議中贊을 역임하였으며 公의 父 員外郞公 諱臣保는 中國 宋朝末 不事二君 節義로 高麗國 忠南 瑞山 看月島로 亡命 高麗에 性理學을 최초로 傳授하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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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公은 1241년 8월 충남 서산시 부석면 看月島里에서 父 員外郞公과 大夫人 高敞吳氏 슬하의 長男으로 탄생 9세 때 도비산 정원사에 올라 故國을 바라보며 그리워하시는 父의 애타는 심정을 望鄕詩에 담아 바위에 새기니 모두 神童이라 칭송하였으며 門下侍郞平章事 韓自喜선생으로부터 受學 14세에 科擧에 及第하고 父로부터 性理學과 中國語를 익혀 外交官으로 國威宣揚에 큰 역할을 담당하는 동량(棟樑)으로 成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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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에 마별초(馬別抄)에 자원입대 新昌. 稷山 등지에 주둔한 蒙古軍을 습격 戰功을 세우는 등 武官으로 많은 활약을 보여 首都防衛軍 主要指揮官으로 昇進하였으며 1269년 高麗 太子(충렬왕) 심(諶)이 使臣으로 元나라에 다녀올 때 護衛武官 겸 通譯官으로 수행(隨行) 중 귀국길 婆娑府에 이르러 林衍 등 武臣들의 반란으로 24代 元宗王이 페위 되었다는 소식에 元나라 황제를 설득 元軍의 支援과 麟州守 父 臣保公의 도움으로 반란군을 鎭壓하여 世子를 安全 歸國토록 하고 元宗을 復位시켜 王室 保全과 武臣政權을 終熄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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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公은 大將軍, 上將軍, 鷹揚軍 등 軍 要職을 두루 거치며 國家保衛에 큰 功을 세움은 물론 對元外交 力量을 십분 발휘하여 蒙古의 侵奪로 빼앗겼던 東寧府 西. 北邊 54城과 자비성 以北의 六個城을 되돌려 받음과 동시 被拉 된 수 많은 백성들을 歸化 시키는 등 업적을 남김으로서 1等功臣으로 책봉 되어 忠烈王으로부터 丹券을 下賜 받았으며 100여년간 타 지역에 復屬되었던 故鄕 瑞州의 官號를 復權시켜 오늘의 忠南 瑞山이라는 官號를 갖도록 하여 鄕里의 民.官 모두가 萬世의 功이라 극찬하며 300여년간 祭를 모셔 公의 공적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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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功勞로 公은 國家最高의 벼슬인 正一品 壁上三韓三重大匡推誠定策安社功臣匡靖大夫都僉議中贊上護軍判典理司事에 올랐으며 예빈윤(禮賓尹) 진수(陳琇}의 女 郡夫人 楊洲陳氏를 배필로 맞아 슬하에 5男2女를 두어 長男 유(柔)는 贊成事右文館大提學 次男 신영(信英)은 판도정랑(版圖正郞)이었다 또 三男 신구(信丘)는 속세를 떠나 조계사(曹溪寺)에 入籍하였고 四男 신화(信和)는 도염서령(都染暑令) 五男 신수(信綬)는 회릉직장(懷陵直長)이었다 또한 長女는 삼사우윤(三司右尹) 채종서(蔡宗瑞)에게 次女는 사복관좌랑(司僕官佐郞) 김광식(金光軾)에게 出嫁 모두 政丞家門 子女들과 緣을 맺어 훌륭한 人材들로서 國家社會에 奉仕하도록 하였다.
:
: 그러나 哀惜하게도 乙巳 1305년 世數 65세(高麗史 69세)를 一期로 下直하심에忠烈王이 이를 애도(哀悼)하여 有司에게 장례(葬禮)를 직접 치르게 하였으며 襄烈이라는 시호(諡號)를 下賜하고 公의 업적과 人品을 칭송하는 글을 詩와 묘지석에 남겨 후손들로 하여금 公의 遺德을 널리 기리도록 하였다.
:
: <忠烈王이 襄烈公의 遺德을 기리는 哀悼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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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英英鄭公人中之龍 빼어난 정공이여 사람가운데 용이로다
: 性寬膽大色溫貌恭 성품은 너그럽고 담대하며 모습은 온화하고 공손하도다
: 克勤乃職惟正之供 맡은 바 직책을 부지런히 수행하고 오로지 정도로 하였다
: 四方奔命一節匪躬 국가를 위해 사방을 오가며 몸들 돌보지 않은 채 절개를 지켰도다
: 功高壁上位極侍中 공로는 벽상에 높이 올랐고 지위는 시중(국무총리)에 이르렀다.
: 富貴壽考哀榮始終 부귀에다 천수를 누리며 슬프거나 영광스럽거나 한결 같도다
: 門庭赫赫蘭玉蕙蕙 가문은 크게 빛나고 자손들이 번창하도다
: 餘芳不盡百福攸同 남은향기 다하지 않아서도 온갖 복을 똑같이 받도다
: 宜刻厥石傳於無窮 마땅히 이 돌에 새기어 무궁히 후대에 전해야 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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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정씨대종회 문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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