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외랑공 ,양렬공 묘비문 초안 한글본

by 등대지기 posted Aug 1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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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원외랑공과 시조 양렬공 새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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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 한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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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조 원외랑공과 시조 양렬공 새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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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자 서산정씨 원조 원외랑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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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정씨 원조 원외랑공(員外郞公) 휘 신보(臣保)는 400여년간 중국 중원일대를 통치한 정나라 태조 환공(桓公)의 69세손으로 송나라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낸 당대의 유명한 성리학자(性理學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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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조말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장악(掌握)한 몽고가 인재를 구하고자 몽고의 장수 요추(姚樞)로 하여금 학문과 인품이 뛰어난 공을 모시기 위해 회유와 협박 등 온갖 수단을 다 하였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즉 불사이군 절의로 고려국 충남서산 간월도(看月島)에 망명하여 고려에 성리학을 최초로 전파(傳播) 많은 후학(後學)을 배출하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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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고려는 불교를 크게 숭상하는 나라로 공이 유교 학문인 성리학을 전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종교적 개념을 떠나 생활철학이 담긴 성리학을 최초로 가르치고 지도하니 고려의 선비들이 처음으로 송나라 성리학의 대가 정이천. 정명도, 양정의 글을 보게 되었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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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일 인주수(麟州守)로 자 인경과 공조 임연 등 무신들의 반란을 평정100여년의 무신 독재시대를 종식시키고 왕권통치시대로 회복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공로로 정이품 벼슬인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으며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리고 정문(旌門)을 세워 功을 기렸으며 후일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대표적 충신으로 등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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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의 선대는 유가의 표본으로 360여년간 3000여명의 대가족이 한 울타리 안에서 동고동락하며 살아와 국가급중점문화재로 보호를 받고 있는 중국절강성포강현 강남제일가 동거인으로 동거1세 판장작감 충응공이 증조부이며 조는 군기감 의요 예빈사동정 수거공이 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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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 고려에 망명 후 유학의 대가이며 의종 명종시대 동방의 칠현으로 존경을 받아 온 현정 오세재선생의 증손녀 고창오씨 슬하에 도첨의중찬을 역임한 장자 인경과 차자 지론랑장 준경을 두었으며 현재 공의 위패가 중국 강남제일가와 충남서산시 송곡사에 모셔져 춘추로 배향 모시고 있으며 충남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묘역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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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첨의중찬 양렬공은 서산정씨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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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군 양렬공 휘인경은 서산정씨 시조로 문무를 겸비한 고려 최고의 벼슬 정일품 벽상공신도첨의중찬을 역임하였으며 공의 부 원외랑공 휘신보는 중국 송조말 불사이군 절의로 고려국 충남 서산 간월도로 망명 고려에 성리학을 최초로 전수하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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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 1241년 8월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서 부 원외랑공과 군부인 고창오씨 슬하의 장남으로 탄생 9세 때 도비산 정원사에 올라 고국을 바라보며 그리워하시는 부의 애타는 심정을 망향시에 담아 바위에 새기니 모두 신동이라 칭송하였으며 문하시랑평장사 한자희선생으로부터 수학 14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부로부터 성리학과 중국어를 익혀 외교관으로 국위선양에 큰 역할을 담당하는 동량(棟樑)으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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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에 마별초(馬別抄)에 자원입대 신창. 직산 등지에 주둔한 몽고군을 습격 전공을 세우는 등 무관으로 많은 활약을 보여 수도방위군 주요지휘관으로 승진하였으며 1269년 고려 태자(충렬왕) 심(諶)이 사신으로 元나라에 다녀올 때 호위무관 겸 통역관으로 수행(隨行) 중 귀국길 파사부에 이르러 임연 등 무신들의 반란으로 24대 원종왕이 페위 되었다는 소식에 원나라 황제를 설득 원군의 지원과 인주수 부 신보공의 도움으로 반란군을 진압하여 세자를 안전 귀국토록 하고 원종을 복위시켜 왕실 보전과 무신정권을 종식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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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공은 대장군, 상장군, 응양군 등 군 요직을 두루 거치며 국가보위에 큰 공을 세움은 물론 대원외교 역량을 십분 발휘하여 몽고의 침탈로 빼앗겼던 동령부 즉 서. 북면 54성과 자비령 이북의 육개성을 되돌려 받음과 동시 피납 된 수 많은 백성들을 귀화 시키는 등 업적을 남김으로서 1등공신으로 책봉 되어 충렬왕으로부터 단권을 하사 받았으며 100여년간 타 지역에 복속되었던 고향 서주의 관호를 복권시켜 오늘의 충남 서산이라는 관호를 갖도록 하여 향리의 민.관 모두가 만세의 공이라 극찬하며 300여년간 제를 모셔 공의 공적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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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공로로 공은 국가최고의 벼슬인 정일품 벽상삼한삼중대광추성정책안사공신광정대부도첨의중찬상호군판전이사사에 올랐으며 예빈윤(禮賓尹) 진수(陳琇}의 여 군부인 양주진씨를 배필로 맞아 슬하에 5남2녀를 두어 장남 신유(信 王柔)는 찬성사우문관대제학 차남 신영(信英)은 판도정랑(版圖正郞)이었다 또 삼남 신구(信丘)는 속세를 떠나 조계사(曹溪寺)에 입적하였고 사남 신화(信和)는 도염서령(都染暑令) 오남 신수(信綬)는 회릉직장(懷陵直長)이었다 또한 장녀는 삼사우윤(三司右尹) 채종서(蔡宗瑞)에게 차녀는 사복관좌랑(司僕官佐郞) 김광식(金光軾)에게 출가, 모두 정승가문 자녀들과 연을 맺어 훌륭한 인재들로서 국가사회에 봉사하도록 하였다.송곡사,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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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애석하게도 을사 1305년 세수 65세(高麗史 69세)를 일기로 하직하심에충렬왕이 이를 애도(哀悼)하여 유사에게 장례(葬禮)를 직접 치르게 하였으며 양렬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하고 공의 업적과 인품을 칭송하는 글을 詩와 묘지석에 남겨 후손들로 하여금 공의 유덕을 널리 기리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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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왕이 양렬공의 유덕을 기리는 애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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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英英鄭公人中之龍(영영정공인중지용) 빼어난 정공이여 사람가운데 용이로다
: 性寬膽大色溫貌恭(성관담대색온모공) 성품은 너그럽고 담대하며 모습은 온화하고 공손하도다
: 克勤乃職惟正之供(극근내직유정지공) 맡은 바 직책을 부지런히 수행하고 오로지 정도로 하였다
: 四方奔命一節匪躬 (사방분명일절비궁)국가를 위해 사방을 오가며 몸들 돌보지 않은 채 절개를 지켰도다
: 功高壁上位極侍中 (공고벽상위극시중)공로는 벽상에 높이 올랐고 지위는 시중(국무총리)에 이르렀다.
: 富貴壽考哀榮始終(부귀수고 애영시종) 부귀에다 천수를 누리며 슬프거나 영광스럽거나 한결 같도다
: 門庭赫赫蘭玉蔥蔥(문정혁혁난옥 총총) 가문은 크게 빛나고 자손들이 번창하도다
: 餘芳不盡百福攸同(여방부진백복유동) 남은향기 다하지 않아서도 온갖 복을 똑같이 받도다
: 宜刻厥石傳於無窮(의각궐석전어무궁) 마땅히 이 돌에 새기어 무궁히 후대에 전해야 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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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정씨대종회 문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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