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史 世家(忠烈王)에 나오는 始祖 鄭仁卿 -1280년

by 杓先 posted Nov 19, 200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庚辰 6年 (1280년)
11월 壬寅에 3관 5군을 사열하였다. 丙午에 총랑 김원, 장군 조윤번의 딸로써 (원의) 아합마에게 시집보냈다. 무신에 탑납 합백나를 신전에서 향연하였다. 己酉에 우승지 조인규, 대장군 인후를 원에 보내어 중서성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소국이 이미 병선 900소와 초공 수수 15000명과 정군 10000명과 병량은 한두로 계산하여 110000석을 준비하였고 집물과 기계는 가히 낱낱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되어 거의 힘을 다하여서 성덕을 보답할까 하나이다. 내가 예전에 조정에 있을 적에 일찍이 행성의 일을 관장할 것으로써 신소에 아뢰었으나 명강(밝은 강지)을 받잡지 못하였나이다. 그윽이 생각건대 제후가 입상하는 것은 고래의 도리인데 요와 금 양국이 우리 조상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를 삼았고 내 또한 외람이 성권을 입어 일찍이 특진 상주국에 배하였으니 이로써 헤아려보면 제후로서 상국 재보의 직을 띄는 것은 고금에 예가 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잘 아뢰어서 행성으로 하여금 무릇 대소군정과 공사는 반드시 나와 상량한 연후에 시행케 하고 사신을 차발하여 써 조정에 갈적에도 또한 반드시 천개로 더불어 같이 가게 하소서 이제 행성의 문자에 ?우자고려국왕?이란 것이있고 봉에는 ?도국왕개탁?이라 하였으니 그윽히 살피건데 중서성의 행래 문자는 글자가 근엄하고 종이가 두터운데 매첩에 ?청조험? ?근첩?이라 하였으니 아지못하게 행성의 문자가 이 무슨 체예인지 내가 헤아리건대 행성이 국왕에게 이미 의기가 없으니 비록 자관 차부71)라도 가할 것이외다 만일 모든 부마처에게 부득이한 행이 문자가 있을 때에는 마땅히 어떠한 체례를 써야 할지 예전에 독련가국왕은 우리 부왕에게 일찌기 직접으로 문자를 행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달노화적에게 내려서 행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데 피차에 왕환하는 문자의 격식을 작정하여 회시하소서 소국은 해를 이어 화곡이 부등하여 백성이 다 먹을것이 핍절하기 때문에 군량을 일찌기 뜻대로 수저하지 못하였나이다 현재의 병량 70727 한석을 제한 외에는 내외로 공사의 것이 함께 갈핍하여 이로써 대소관원의 월봉과 국용에 다반으로 부세를 다 수취하고 다시 중외에 호감하여 겨우 40000 한석을 준비하였는데 이를 초과하면 써 응부하기가 어렵나이다 정군 10000명의 1삭량을 계산하면 무릇 3000 한석인데 저 대군은 많으면 3~40000에 이르고 그 활단적(군속이 또한 적지 아니하며 또 초공과 수수가 15000명에 불하할것이외다 근자에 행성의 문자가 왔는데 이르기를 ?명년 춘수에 발정하여 온다? 하니 만일 제로관원이 합쳐 래도하면 청초시절을 기다리지 못하여 군량도 오히려 충족하지 못하겠거던 마료는 장차 어찌 지응하리까 또 듣건데 장차 5,6월로써 바다로 떠나간다 하니 우리 나라는 해마다 5,6월에는 매우(토우)가 그치지 아니하고 조금 서풍이 있으면 해도가 안개끼고 어둡게 되는데 혹시나 시일이 끌려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면 그 가을에 대일 구량과 배에 실을 행량을 또 어찌 능히 지공하리까 오직 군민이 일시에 절식될까 걱정되나이다 정실로써 미리 먼저 신복치 아니하였다가 오착이 생기면 리해가 가볍지 아니할가 하니 청컨대 조험하여 시행하소서 탐라에 진수한 소국의 1000군은 전자 동정시에 본국의 5300군액에 계속되었던 것이온 바 그윽히 생각하건데 소방은 땅이 좁고 사람이 희소하여 군과 민이 분별이 없는데 다시 정토군 4700을 첨가한다면 수를 다하여 응부하기가 어려울까 깊이 걱정되나이다 원컨대 전항의 진수 1000군으로써 신첨하는 정토군액에 보충케 하소서 소국이 전일 달노화적이 있을 때에 내외인호에 쓰는 궁전은 타포호에 이르기까지 있는 것을 모조리 취하였으며 또 전일 동정시에 5300군이 가지고 간 의갑과 궁전은 기실한 것이 많은데 겨우 수습하여 부고에 쌓아둔 것이 지용에 불감하거던 하물며 이제 신첨한 4600군은 원래 일물도 없느지라 무엇으로써 몸을 막으리까 엎드려 바라건대 잘 아뢰어 의갑 5000과 궁 5000과 궁현 10000으로써 사하시와 그 기력을 돋우어 주소서 소국의 군민은 일찌기 진도 탐라 일본 3처에서 여러번 전공이 있으되 아직 관상을 입지 못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공을 추록하여 각각 패면을 사하여 써 장래의 공을 권하소서 매 1000군에 총관 천호가 각 1인 총파 각 2인으로서 이름을 아래와 같이 열거하오니 청컨대 상장군 박지량 대장군 문수 라시곡 한희유 조규 친종장군 정수기 대장군 리신 박보 로정유 안사 등 10인으로 총관을 삼고 대장군 조변 장군 안적재 허홍재 김덕지 서정 임개 김신정 이정익 박익환 등 10인으로 천호를 삼고 중랑장 류보 김천록 리신백 신혁 최공절 려문취 안흥 이순 김복대 차공윤 이당공 랑장 박성진 고세화 중랑장 송인윤 랑장 옥환 계부 김천고 이정 서광순 함익심 등 20인으로 총파를 삼으소서 현금 뽑은 바 소방 군액은 경내가 2500 경상도가 2390 전라도가 1880 충청도가 1900 서해도가 1190 교주도가 160 동계가 480 총계 10000인이오 병선이 총900소인데 300소에 초공 수수 18000을 써야 할 것이외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소국의 호구는 자래로 조폐한데 왕년 동정할 때에 대선 126소의 초공 수수도 오히려 충족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이제 300소를 무엇으로써 수를 채워 응부하리까 이로써 농민에게 까지 징발한 정장이 무릇 15000인데 그 충당치 못한 수수 3000을 어디에서 조발하리까 동령부가 소관하는 제성과 및 동경로의 연해주현에 초공 수수가 많이 있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3000인을 발견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하겠나이다 배신 중찬 김방경은 공직한 이래로 무릇 조정의 조명을 응봉하여 일심으로 힘을 다하였고 또 진도 탐라 일본 등 3처에서 관군을 따라 토벌하여 여러번 첩공이 있었으므로 호두패를 선수하여 장유하고 로고에 보답하옵소서 이제 다시 정군 10000과 수수 15000명을 관령하여 일본에 왕정케 되었는데 만일 군사에 참령하지 아니한다면 호령하기 어려워서 혹 위오케 될까 두렵나이다 방경의 년령은 비록 높으나 장심은 오히려 있어 다시 진력하여 써 천은에 보답하고자 하니 청컨대 잘 주달하와 원수부에 참여하여 공사를 맡아보도록 허락하소서 병량의 1년소수가 총계 16732석인데 왕년의 수저와 및 금년의 소수가 총계 70727한석이외다 소국의 첨기한 정군이 10000 수수군이 15000인데 중찬 김방경으로 두령을 삼아 외교를 맡게 하고 밀직부사 박구 김주정 등으로 만호에 기용하여 먼저 일본에 가게 하소서 내가 조정에 진예하였을 때 만호패면을 사해 주시기를 빌(걸)었으나 아직 명강을 받잡지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잘 주달하여 박구 김주정 등에게도 또한 호두패를 사하여 써 래효를 권하시고 우승지 조인규는 몽한어에 통효하여 무릇 조정의 조지와 상사문자를 명백히 전역하여 위오됨이 없었으며 내가 석일에 천연에 뫼실 때 종시 수종하였고 또 공주의 측근에서 조석으로 각근히 일하여 공로가 적지 아니하니 또한 패면을 사하시와 써 왕경의 탈탈화손(역전관)겸 추고관 두목에 충당케 하소서 라고 하였다. 경술에 중서성이 회동관사 장헌과 리부주사 야선해아를 보내어 견 20000필을 가지고와 쌀을 사(시)서 병량에 충당케 하였다. 임자에 왕이 사판궁에 있으면서 팔관회를 설하였다. 을묘에 김방경이 다시 글을 올려 퇴관을 빌거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기미에 일관에게 명하여 이제로부터 동지 원정력을 바치지 말도록 하였다. 경신에 중찬 김방경과 밀직부사 박구 김주정이 동정군사를 사열하였다.
丙寅에 중찬 김방경, 장군 정인경(鄭仁卿)을 원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해석=>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고려의 피해가 매우 심했다. 중찬 김방경은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기를 원했지만 이를 받아 들이 지지 않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중찬(국무총리) 김방경과 장군 정인경(鄭仁卿)이 원나라에 가서 외교 교섭을 벌였다. 여기에서 고려에 유리한 많은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Articles

7 8 9 10 11 12 13 14 1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