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史 世家(忠烈王)에 나오는 始祖 鄭仁卿 -1298년

by 杓先 posted Dec 2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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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戌 24年 (1298년)
춘 정월 丙申에 세자가 원으로부터 이르렀다. 庚子에 세자비 보탑실련 공주가 오거늘 왕이 금교에 행차하고 백관이 교에서 맞이하는데 의장과 #(지)락이 왕을 맞이하는 예와 같았으며 제가 아목□태자와 □길자석 승상으로 하여금 호행하여 오게 하였다. 신축에 공주 및 아목□ 등을 수령궁에서 향연하였다. 임인에 순마소에 명하여 양가의 딸을 뽑아 장차 제소 및 사신에게 바치려 할제 백료로 하여금 가만히 유녀가를 적어 주사에 투서케 하니 이에□128)□의 원이 있는 자는 비록 딸이 없어도 또한 지목하여서 소동을 일으키니 #(계)견도 편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가만히 납□하는 자도 자못 많았다. 계묘에 교하여서 소동을 일으키니 고(짐)가 #(랑)덕으로써 □구(대위)를 □승한지 25년인지라 이제 또한 늙었으며 그 위에 거세에 상배로 인하여 과#(동)함을 깨닫지 못하였더니 질양이 이에 따라 청정에 게을리 하게 되었도다 오직 너 세자는 영명하고 지용함이 중인의 다 아는 바이니 마땅히 번직을 이어 종사를 공경히 받들지어이다 고도 또한 후궁에 퇴거하여 여□을 안온히 보낼 것이다 충하고 효하는 것은 이 일거에 있도다]하니 세자가 □을 올려 □양하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갑진에 원이 성령후 왕유를 보내어 국인에게 조□하기를 [근래에 고려국왕 왕단는 표를 올려 말하기를 춘추가 바야흐로 노쇠하고 우양이 함께 침노하매 서무의 번노를 염려하여 무거운 짐 멘 것(왕위)을 쉬고자 하여 세자 원으로 하여금 □□케하기를 빌(걸)었도다 짐이 생각컨데 왕은 동사를 □수한지가 30년에 가까웠는데 여러번 충근을 나타내어 훈벌이 성하게 나타났도다 그의 성근을 가□히 여겨 실히 윤허를 사하여 세자에게 개부의동삼사 대위 부마 상주국 일수왕을 가수하여 써 우숭의 뜻을 보이노라 나라에 중무가 있으면 바라건대 모름지기 훈려하여 오직 성취에 이르게 하라] 하고 또 왕에게 조하여 이르기를 [경은 번한에 격거하여 훈공을 성하게 드러냈고 우리 국가에 선력하여 해가 지낸지 오래인데 근자에 쇠질을 진술하여 번로를 벗기를 바라며 모름지기 사작하는 은혜를 빌어 장차 편히 늙기를 꾀하니 곧 충간을 생각하여 마땅히 윤종함을 사할 것이다 경이 비록 기년이나 나라의 중무는 오히려 훈도에 자뢰하여 마침내 써 성취함이 있게 하라 아- 처음을 잘하고 끝을 잘 맺아 이미 수상한 권고를 입었고 오직 충하며 오직 효하여 힘써 보효의 근을 생각하라 공경히 총광에 복□하여 더욱 복리를 편히 하라] 하였다 유는 본국의 종실로써 원조에 벼슬하여 총관이 되었다. 丙午에 강안전에 행차하여 세자에 전위하고 장□룡의 집에 퇴거하여 덕자궁이라 호하였다 세자가 강안전에서 즉위하니 이가 충선왕이다. 을묘에 덕자궁에 나아가 전을 받들어 존호를 올려 광문선덕태상왕이라 하였다 왕이 전국한 뒤 왕이 복위하기까지 무릇 7월인 바 충선왕 세가에 실려 있다.
추 8월 갑자에 원이 패노올를 보내와 충선의 팔조를 재촉하거늘 신미에 충선왕이 원에 가는데 임신에 왕이 김교에서 전송하더니 술이 취하매 패노올이 제명으로써 국왕의 인을 취하여 왕에게 주었다. 계유에 왕이 패노올의 사관에 갈제 의위를 갖추고 드디어 수녕궁에 행차하여 조서를 받으니 조에 이르기를 [전고려국왕 왕거에게 유시라노라 전일에 경이 세자 원에게 수위하기를 표청하므로 이로 써 원에게 조하여 가서 왕작을 잇게 하고 국사는 그대로 경의 훈도를 듣도록 명하였더니 이제 듣건대 리정한 뒤로 자못 전천하여 처결이 마땅함을 잃어 중심이 의구한다 하니 대개 나이 아직 장성하지 못하고 경련이 적으므로 능히 짐의 친임한 뜻을 부응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사신을 보내어 경에게 조하여 전과 같이 국정을 통리케 하고 또 원에게 조하여 궐정에 입시하여 하여금 일을 명습케 하노라]고 하였다. 패노올의 온 것이 10일이나 되었지만 국인은 이 조서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갑수에 좌부승지 권영과 우사의 조간과 총랑 김태현과 전사간 김호로 하여금 선법을 주재케 하였다. 기묘에 패노올이 돌아가거늘 대장군 강순의 딸로써 처를 삼아주었다. 갑신에 명순궁에 이어하였다.

해설=> 춘 정월에 세자가 원나라로부터 돌아와 충렬왕으로부터 선위를 받으니 그가 충선왕이다. 충선왕은 7월에 다시 원나라로 가게 되고 충렬왕이 다시 국왕으로 복귀된다.
표면적으로는 충선왕의 교체는 조비무고사건으로 보지만 실제적으로는 충선왕의 반원정책과 원조정 내부의 권력투쟁에 의한 국왕 교체로 보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이 시기, 정인경은 중앙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유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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