瑞山君 襄烈公 鄭仁卿 略傳(수정본.2010.01.12)

by 杓先 posted Mar 0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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瑞山鄭氏 始祖
瑞山君 襄烈公 鄭仁卿 略傳(수정본)
2010.01.12(수정판) 鄭杓先 (jps99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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瑞山鄭氏 始祖
瑞山君 襄烈公 鄭仁卿 略傳
官爵;三韓三重大匡推誠定策安社功臣匡精大夫都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司事瑞山君襄烈公

1. 양렬공 정인경과 그 시대적 배경

양렬공 정인경은 1241년 - 1305년, 즉, 고려 고종, 원종, 충렬 왕 시대의 인물로, 고려 의종 정중부의 난으로부터 시작된 100년 간의 무신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몽고와의 오랜 전쟁에서 뛰어난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여 고려의 정치적 안정과 고려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며, 고려사 열전에도 기록되어 있고, 그의 묘에서 발견된 묘지석에서도 그의 인물 됨에 대해 잘 기록되어 있다.
그가 태어나던 때는 고려 고종, 辛丑年, 1241년이다. 그 당시의 고려는 최충헌 무신정권 100년의 말기에 해당된다. 이시기,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고, 가문이 중심이 된 門閥 貴族 社會였다. 이들이 높은 벼슬과 경제력, 그리고 군사의 지휘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또한, 양열공 정인경이 태어나던 해, 고려 고종 24년에,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기를 염원하는 뜻에 고려 팔만 대장경이 만들어 지기 시작한 해 이기도 하다. 그 후 팔만 대장경은 1248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고려 고종이전, 12세기 중반에 들어서서 고려는 문신중심의 귀족 문벌 사회로, 문신과 무신과의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1146년에 왕위에 오른 의종 때는 의종의 환관정치, 그리고, 문신과 무신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는 대부분 무신을 천대하는 풍조에서 비롯되어 (무신은 주로 중,하층 계급출신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문신들의 연회에 경비를 서는 무신들의 불만이 도화선이 되어 발생된 정중부의 난(1170년)은 결국, 의종을 거제도(폐왕성: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에 유폐시키고, 동생 호를 명종으로 왕위에 앉힌 후, 모든 권력을 무신들이 차지하였다. 이 때부터 고려는 1270년대까지 100년간 무신의 집권 시대가 되었다.
그렇지만, 집권을 한 무신들은 서로의 목을 겨누는 정권싸움으로 정치는 불안했고, 백성들은 이들의 부패와 수탈로 생활이 피폐해졌다. 정중부는 해주지방의 군졸출신이었고, 이의민은 소금장수의 아버지와 절의 노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후, 많은 군졸 출신과 노비 출신들이 권력의 쟁탈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후, 1213년 8월에 즉위한 고종의 시대에는 최충헌을 중심으로 한 최씨 일당 독재, 무신정권의 안정기였고, 고려조정에서는 실제의 왕권은 크게 약화되어 있고, 최충헌과 그의 가문에서 4대에(최충헌, 최항, 최우, 최의) 걸쳐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정세는 몽고가 크게 일어나 고려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 전체가 몽고의 정복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고려는 몽고의 팽창 정책에 의해 수십 년 동안 영토 수호 전쟁을 하고 있었고, 그리고 중국의 宋나라는 남쪽으로 쫓겨가 南宋으로써 절강성의 항주에 \'임안\'이란 이름의 도읍을 정한다.


2. 최초 朱子學이 東方으로...

중국의 南宋 時代, 瑞山鄭氏의 元祖, 정인경의 부친인 \'鄭臣保(정신보)는 중국 浙江省(절강성) 金華府(금화부) 蒲江縣(포강현)에 살고 있었고, 南宋(남송)의 조정에서 刑部 員外郞을 지냈으며, 절강성지역에서 학문으로 이름난 朱子學者(주자학자)였다.
정신보의 先祖(선조)은 원래 하남성의 鄭州(정주)에 토속제후(중국 춘추시대에 鄭나라의 王)로 살았으나 송나라가 만주의 여진족이 세운 金나라에 쫓겨 절강성 항주로 남하하였는데, 이때 정신보의 선조들은 절강성 금화부로 移居(이거) 했으리라 추측한다.
정신보의 曾祖父(증조부)는 정응충이며 官職은 判將作監(판장작감)이었고, 祖父(조부)는鄭儀(정의)이고, 官職은 儒林郞(유림랑) 검교(檢校) 군기감(軍器監)이었으며, 부친는 정수거이며 관직은 禮賓事(예빈사) 同正(동정)이었다. 부친인 정수거는 太子詹事(태자첨사) 崔守郞(최수랑)의 딸과 결혼하여 정신보를 낳았다. 이가 서산정씨(瑞山鄭氏)의 원조(元祖)이다.

南宋(남송)의 理宗(이종; 1224 -1240년 재위), 國號 嘉熙年(가희년)부터 몽고가 대대적으로 침략하여 襄陽(양양), 淮蜀(회촉)등이 차례로 함락되고, 이에 이 지역의 王旻(왕민), 李佰英(이백영)등이 그 성곽과 창고를 불질러 태우고 서로 이어 몽고에 항복했다. 그리고 이 일대를 장악한 몽고가 각 지역을 침략 정복하고 난 뒤, 그 지역의 명망 높고 학문이 뛰어난 선비들을 뽑아 그 지역을 관할하게끔 하였는데, 원나라 태조는 楊惟中(양유중)을 시켜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높은 선비를 구하고, 모으고자 하였다. 마침, 원태조가 德安(덕안) 함락시키고, 趙復(조복)이란 학문이 뛰어난 선비를 얻었으니, 趙復(조복)은 유학에 뛰어나 그 지역의 선비들이 江漢先生(강한선생)으로 불렀다. 元太祖(원태조)가 학문에 뛰어난 선비를 얻고, 크게 좋아했다. 그리고 金華(금화)에 살던 員外郞(원외랑) 鄭臣保(정신보)의 뛰어난 인품과 학문에 대해 듣고 姚樞(요추)로 하여금 그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 그리하여 요추가 여러 차례 정신보를 찾아와, 江漢先生(강한선생) 趙復(조복)과 같이 元太祖(원태조)를 도와 함께 원나라 조정에서 일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보가 말하기를, 옛 말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하고, 열녀는 두 가장을 모시지 아니 한다 하였으니 차라리 죽을 지언 정 오랑캐 조정에 臣下가 되기 싫다 하였다. 姚樞(요추)가 이 말을 元太祖(원태조)에게 告하자 太祖(태조)가 그 절개를 아름답기 생각하여 더 이상 강요를 하지 않았다.
그 후, 1237년, 절강성의 금화부에 살던 정신보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고려의 瑞州땅(지금의 서산) 看月島로 망명하였다. 그때 高麗 풍속이 불교를 숭상하였는데, 정신보가 성현의 학문 朱子學(주자학)으로 後學를 가르침에 고려의 선비들이 처음으로 정명도, 정이천 양선생의 글을 보았다고 했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 주자학이 들어온 시초가 아닌가 한다.
이것은 정신보가 고려로 망명한 후 약50년이 지난 뒤, 1289년 충렬왕 15년, 고려문신 안향이 최초로 주자학을 고려에 전래했다는 학설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이때 안향은 儒學提擧(유학제거)가 되어 왕과 왕후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朱子全書(주자전서)를 필사해 돌아 왔다. 단지 안향은 유학을 크게 부흥시켰다는 데는 역사적으로 이의가 없으나, 최초로 고려에 주자학을 전래했다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 안향이 유학제거라는 벼슬을 했다는 사실은 이미 누구에선가 주자학을 배웠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고, 또한, 이미 유학이 고려에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정신보는, 辛亥(신해 1251년) 二月, 大寺洞(지금의 서산 석림동 남원마을)으로 이사하여 望雲臺(망운대)를 쌓고, 늘 고향 쪽을 바라보며 눈물 지우며 그리워했었다.
지금도 서산지역의 儒林(유림)에서는 매년 松谷書院(송곡서원)에서 그의 學文(학문)을 기리고 配享(배향)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그의 발자취를 전하고 있다.

片舟滄海 吾道與東 箕子之# 魯連之風 嘉惠後學 百世師表
편주창해 오도여동 기자지촉 노연지풍 가혜후학 백세사표

\"鄭臣保 公이여,
조각배(片舟)로 푸른 바다를(滄海) 건너와
儒學을 東方으로 전했도다.
箕子의 어진 발자취요
魯連(노중련)의 아름다운 風俗이라
後學들을 聖賢之道로 가르치고 傳함에
百世에 빛나는 스승(師)이요,
선비의 表範이로다.\"


3. 정인경의 탄생과 간월도

정인경은 1241년 서산 간월도에서 태어났다. 부친 정신보가 중국 절강성 금화부 포강현을 떠나와서 서산의 간월도에 도착한지 5년이 지나 뒤였다. 서산의 간월도는 옛날부터 아름다운 섬이었다.
태안반도의 남쪽으로 길게 내려 뻗은 천수만은 항시 잔잔한 바다로 석양이 지는 해질녘의 광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또한 간월도는 천수만 한 가운데 떠 있던 섬으로, 예전,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상인들의 배가 황해에서 천수만으로 들어와 이 간월도를 거쳐 서산지역으로 들어오고 나가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간월도에는 10평 남짓한 작은 암자 하나가 자그마한 돌섬 마당 위에 있고, 그나마 하루에 두 번 물이 들 때에는 물에 떠 있는 듯 하였다.
간월도내 조그마한 이 암자는 佛家에서는 중요한 聖地로 여기고 있고, 천수만 안에서는 그 앉은 위치며 내력으로 보아 제일의 명소로 꼽힌다. 그 명성만큼이나 실제 간월암 마당에 서면 천수만 앞 바다의 사방이 그대로 한눈에 들어와 작은 섬으로만 느껴지지 않으며, 특히 천수만에서 보는 밤바다와 달빛.. 또한 그만큼 아름답고 대단하다는 것이다.
천수만 안에는 옛날부터, 갖가지 어패류가 많이 난다. 지금은 간월도 와 7 Km 나 이어지는 긴 방조제가 육지와 연결되어 간월도 주변에는 많은 바닷가 횟집과 배에서 갓 잡아온 어패류가 인기를 끈다. 그리고 해질 무렵의 천수만의 황혼을 바라보며 이 방조제위에 서면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그리고 조선시대 임금님의 수라상에 진상할 정도로 그 맛이 독특한 간월도 어리굴젓은 다른 지방의 굴과 자라는 과정이 특이하여 돌과 바위 등에 붙어 석화로 자라다가 완전히 자란 에는 돌과 바위에서 떨어져 사는 토굴로 변하며 이 토굴로 변했을 때 이를 채취하여 어리굴젓을 담그는데 굴의 색깔이 검고 몸에 날개(굴알에 난 미세한털)가 많이 돋아 있기 때문에 양념이 골고루 묻어 발유됨으로서 특유의 맛이 난다. 조선시대 임금님께 진상할 정도로 유명한 간월도 어리굴젓을 보존, 전승하기 위하여 건립된 세계 최초의 음식물 탑이 바로 \'어리굴젓 기념탑\'이다.
이제 이런 간월도 에서 시작하여 약 780년 전, 1237년 봄, 꽃샘 추위가 한창이던 날, 중국 절강으로부터 망명의 배로 서산정씨의 원조 원외랑공 정신보가 고려에 오게 된다.
정신보는 고려에 와서 많은 선비들에게 주자의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문하에 들어 오게 된다.
그 후 5년 뒤 1241년 8월에 시조인 양렬공이 태어나고 부친에게 어릴 때부터 주자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1253년 13세 되던 해, 봄, 양열공 정인경은 도비산 정원사(지금의 부석면에 있는 도비산 부석사)에 올라가 공부방을 정하고 주자학을 공부하였는데, 하루는 뒷산(도비산) 꼭대기에 올라 바다 멀리 바라보며 부친 정신보가 늘 그리워하던 옛 고향을 바라다보았다.
그러면서 시를 지어 큰 바위에 새기었다.

愁登高嶺곡 遙望雲飛北 #憶先人墓 淚隨春雨落 又
胡塵漲宇宙 萬里落孤臣 何日 乾坤整 重回趙氏春
수등고령곡 요망운비북 총억선인묘 누수춘비락 우
호진창우주 만리낙고신 하일 건곤정 중회조씨춘

시름으로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구름은 북으로 날러라
문득 선고인(조상)의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봄비 따라 흐른다
또한, 오랑캐 풍진(몽고의 침략)은 우주에 뻗쳤으니
만리에 떨어져 있는 외로운 신하로다
어느 날에나 하늘과 땅이 평온하게 되어
옛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을꼬


4 서산의 대사동(지금의 석림동)에서..

1254년, 정인경이 14세 되던 해, 고려 고종은 강화도에서 무신정권의 권신인 최항과 개경환도 문제를 두고 대립하고 있었고 이 시기 정인경은 부친을 따라 서산의 대사동(지금의 석림동 남원마을)으로 移居했다.
移居후 정인경은 학문에 정성를 쏟으며 공부하고 틈틈히 무술을 익혀 장부로써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지금 서산시 석림동 남원마을에는 마을 앞에 큰 은행나무와 유래비가 세워져 있는데, 정인경 장군이 무예를 연마하던 자리로 알려져 있고 그 뒤에는 조그마한 동산이 있는데 그 곳이 정인경이 쌓은 토성으로 망운대이다. 예전엔 원래 남원마을 앞은 넓은 들판이었고 많은 학들이 날아와 살던 아름다운 마을이다. 고려 시대에는 남원마을 넓은 들 앞 가까이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추정되며, 뒷산 망운대에 올라서면 멀리 서해가 보였다고는 하나 지금은 바다가 사라지고 그기에 넓은 들판이 마주하고 있다.
정인경은 그 후 부여로 가서 문수사에서 공부하고 門下侍郞(문하시랑)을 지낸 한자희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1258년, 정인경이 18세가 되던 해부터, 몽고 차라대에 의한 7차의 고려 침공이 시작되고 이로 인해 고려의 전 국토가 전란에 다시 휩싸이게 된다. 몽고는 고려 조정의 출륙환도(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요구하고 고려인 20 만 이상을 살육한다. 이에 고려군과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항거했다.
1259년 여름, 몽고군의 주력부대가 稷山(직산: 지금의 안성시 직산면)에 주둔하게 되는 데, 당시 19세의 정인경은 千下軍의 馬別抄에 들어가, 7월17일, 稷山(직산)에 주둔한 몽고군을 야간에 급습하고 유격전을 펼쳐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별초를 지휘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로 인하여 그 해 8월에 무관의 초급 지휘관인 隊正(대정)의 벼슬을 받았다.
그리고 몽고군 과의 목숨 건 항전을 통해 전과를 올리면서, 1259년, 19세에, 興威衛(흥위위) 소속의 隊正(대정)으로 수도 외곽 방위군 지휘관이 되어 근무하고, 1260년, 校尉(교위)로 승진하여 神號衛(신호위)에서 수도 경비 지휘관으로 근무한다. 이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1260년(정인경이 20세가 되던 해), 고려는, 고려 고종이 사망하고 3월에 고려 원종이 즉위하게 된다. 그 해, 몽고의 세조 쿠빌라이가 국호를 元으로 고치고 중국의 대부분 지역을 평정하게 된다.
1261년, 정인경이 21세 되던 해, 모친이 돌아가시게 되어 벼슬을 버리고 서산으로 낙향하여 분상 3년의 시묘를 한다. 그리고, 1266년, 정인경은 부친의 뜻을 받들어 남원마을 뒤에 토성을 쌓아 망운대를 증축하고 앞쪽에 연못을 판다. 그리고 가끔 대사동의 망운대에 올라 고향을 그리는 마음으로 서해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정인경은 무신 말기의 혼란한 정치 속에서 낙향하여 고향 서산 대사동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때때로, 도비산아래 부석사와 문수사에 들러 승려 學人들과 교류하며 학문 증진에 힘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시기 승려 일연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승려 일연은 大禪師(대선사)로 1261년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 선월사 주지기 되었다가 그 뒤, 경북 영일에 있는 오어사, 달성에 있는 인홍사(인흥사) 등, 충남북 일대의 절을 다니며 설법과 강론을 폈었다. 이런 인연으로, 훗날, 인경의 아들 중 \'信丘(신구)\'가 일연대선사의 제자로, 조계사 승려가 된다.

1268년, 그가 28세가 되던 해, 고려 조정은, 최씨 무신정권의 마지막인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김인준의 무신정권 말기였으며 김인준과 원종은 정치적 견해가 달라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 해 12월, 원종의 지시를 받은 임연이 김인준을 죽이고, 임연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개인 권력을 강화하려는 임연과 왕권을 강화하려는 원종의 정치적 대립은 심화되어 가고 있었고, 이것이, 실제적으로는, 개경 환도를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5. 정인경의 立身과 고려 원종 폐위사건

1269년 2월, 정인경이 29세가 되던 해, 원종의 아들 태자 심(충렬왕)이 고려의 사절단으로 원나라 연경에 가게 된다. 이때 攝校尉(섭교위)이던 정인경이 태자의 護衛武官(호위무관)겸 외교관으로 태자 심과 함께 元의 수도인 연경으로 갔다. 그 해 7월, 태자 심과 정인경이 귀국길에 올라 파사부(지금의 의주에 속하는 압록강 서쪽의 작은 縣)에 도착했을 때 \'원종이 병을 얻어 안경공 ‘창’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태자 심이 정인경에게 그 사태를 파악하게 했다. 이에 정인경은 원나라의 연경으로 선위 서신을 가지고 가던 곽여필을 설득해 그 경위를 밝히고 권신 임연이 개경환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던 원종을 강제로 폐하고 안경공 창에게 왕위를 넘기게 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것은 권신 임연이 원종에 의해 개경으로 환도하면 그의 권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더욱 강화되어, 그의 권력 기반을 잃게 되는 위협을 느껴 원종을 폐위시킨 것이었다.
이에 정인경은 태자 심에게 사태를 보고하자 태자 심은 고려로 되돌아가면 즉시 감금될 것이므로 태자 심은 원나라로 되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함께 갔던 많은 사신들은 그들이 원나라로 되돌아갔을 때 권신인 임연이 보복할 것에 두려워하여 감히 원나라로 되돌아 가려 하지 않았다. 당시의 임연은 교정별감으로 고려 조정에서 왕권을 능가하는 군사권력을 가졌었다.
이에 29세의 젊은 정인경이 여러 신하들을 설득하여 태자 심을 보위하고 원나라의 연경으로 돌아 갔다. 충렬왕의 도움요청에 의해, 9월에 원의 세조 쿠빌리이의 원군이 서북병마사 김방경과 함께 압록강 지역으로 진군하고 정인경은 태자 심과 함께 귀국하게 되는데 또한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임연의 군사적 행동에 대비해 당시 인주太守로 麟州(인주;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를 지키고 있던 정인경의 부친 정신보가 군대를 동원해 태자 심의 일행이 무사히 고려에 도착하게 한다. 이런 결과로 원종은 왕위에 복위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이 사건으로 임연은 원나라의 권력을 잃게 되고 다음해 1270년 2월 병으로 죽게 된다.
이를 계기로, 고려 무신 독재 정권 100년이 무너지게 되나, 30여 년의 오랜 몽고와의 전쟁으로 국력은 거의 소진되고 백성들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다. 또한 허약해진 고려는 정치적으로 원나라의 많은 간섭을 받게 된다.
1269년 원종폐위 사건 이후 정인경은, 원종의 총애를 받아, 그가 죽고 충렬왕이 즉위 시까지 왕의 측근 신하로써 빠른 승진을 거듭하게 된다.
1270년, 30세의 정인경은, 2월에, 散員(산원)겸 牽御龍行首(견어룡행수)의 벼슬을 지내며 왕을 가까이에서 경호하고 보위하는 일을 하게 되고, 4월에 攝別將(섭별장)으로 승진해서 神號衛(신호위) 第2領(제2령)에 근무하고, 12월에 神號衛 左部(좌부) 第1 馬別將(마별장)으로 보직이 전환된다. 이 神號衛(신호위) 군대는 개경(지금의 개성)의 수도를 경비하는 일이었다.
1270년 5월에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고, 그 달에 장군 배중손이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삼별초의 난이 일어난다.
1271년 6월, 그가 31세되던 해, 左右衛(좌우위) 保勝將軍(보승장군)휘하에 있던 右部 第2郞將이 변방 근무 중 도망가는 바람에 정인경이 右部 第2 郞將으로 보직을 받아 변방 방위 근무하게 된다. 그리고 7월, 太子府右指諭(태자부우지유)에 임명되어 태자 심을 보위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 시기, 정인경은 원종페위 사건을 계기로 동년배인 태자 심(훗날 충렬왕 즉위)과 절친하게 지내게 되며 태자를 보좌하는 임무를 가지게 된 것이다.
1272년 9월, 32세에,中軍 神騎都領(신기도령)으로 임명되어 中軍의 騎馬兵(기마병)을 이끄는 지휘관이 된다. 그리고 12월29일 將軍 공소 휘하의 中郞將(중랑장)에서 將軍 득림 휘하의 中郞將으로 보직을 옮기게 되고, 곧, 興威衛(흥위위) 精勇借將軍(정용차장군)으로 승진 발령을 받고, 1273년 12월, 33세에 興威衛(흥위위) 精勇攝將軍(정용섭장군)으로 승진하게 된다. 곧이어 金吾衛(금오위)의 攝將軍(섭장군)으로 보직을 옮겨 고려의 경찰 업무를 지휘하게 된다.
그리고, 정인경은 1274년, 34세에, 興威衛 精勇將軍(정용장군)으로 승진 기용된다. 그는 1269년 원종폐위사건이후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이어 원종의 총애를 받아 고려군의 무관으로써 여러 군 요직을 거치며 빠른 승진을 거듭하게 된 것이다.

정인경은 또한, 무신정권 몰락 후, 원종의 왕권 강화 노력에 적극 보좌하게 되고 고려 조정의 정치 군사적 안정에 기여하게 된다. 이로써 결국 100여 년간 지속되던 무신정권은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되고 30여 년의 오랜 세월 동안 몽고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고려에 군권과 왕권을 강화시켜 고려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고 한다. 그러나 100여 년의 오랜 무신정권 하에서 군부의 핵심 세력들은 그들의 권력을 복권하기 위해 원종의 개경환도에 반대하며 삼별초를 조직해 대항하게 된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우선 왕권을 강화하여 다시 국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몽고의 실체를 인정하고 몽고와의 더 이상 싸움이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1272년, 정인경이 32세 되던 해, 고려 원종은 사절단으로 원나라 연경에 가게 되고 정인경은 원종을 보좌하는 외교관으로 함께 갔다. 이를 계기로, 정인경은 원나라와의 정치적 외교 교섭무대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그리고 정인경은 中郞將(중랑장)으로 승진된 후, 2군 6위의 각 부대에 지휘관으로 순환 근무를 하게 되고, 곧 이어 將軍(장군)겸 入內侍(입내시)로 거듭 승진 제수 받는다.
1273년 3월, 門下侍郞 판추토사 김방경과 몽고의 연합군에 의해 장군 배중손 등 삼별초는 토벌되고, 그 해 7월에 김방경이 문하시중이 된다.
이해 6월에 고려 원종이 죽고 태자 심이 고려 충렬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1274년, 몽고의 원나라는 고려를 강압해서 일본의 정벌을 추진하게 되는데, 문하시중 김방경이 도독사 홍다구와 함께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34세의 젊은 정인경은 고려의 대몽 복속 정책과 여몽 연합군에 의한 일본정벌 정책에 반대를 함으로써 원나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어 충렬왕 즉위 직후부터 4년 동안 閑職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 후 원나라는 고려복속정책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요직에서 배제한 후, 고려의 행정 관제를 격하시키고 결혼 도감을 세워 고려의 부녀자를 공녀로 요구하는 등, 과도한 공물 요구, 일본 정벌을 위한 고려의 군대 요청 및 300여 척의 전함 요구 등으로 고려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
1274년 10월, 문하시중 김방경과 친원파 중심인물인 도독사 홍다구의 여몽 연합군은 장도의 일본 정벌에 나서게 된다.


6. 정인경의 輔國努力과 충렬왕 시대

정인경과 원나라의 고려복속정책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한직으로 밀려나 있던 4년 동안(1274년 충열왕 즉위부터 1278년까지), 고려는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즉, 1274년 10월부터 시작된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이 여러 번 실패가 거듭되자, 고려의 백성들은 전쟁준비와 이로 의해 생활이 매우 피폐해졌다. 또한 고려 조정은 몽고의 계속되는 \'일본 정벌을 위한 전함 300척 요구\' 등, 무리한 요구로 국고가 탕진되고 조정은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또한 원나라의 무리한 공물, 공녀 요구 등으로 정치적, 외교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고려조정은 친몽인사들의 횡포에 정치적으로 혼란하여, 1278년 2월, 僉議中贊(직제개편전의 문하시중)김방경이 大將軍 위득유, 中郞將 노진의.등으로부터 모반혐의를 받아 친원세력의 중심이던 管領歸附高麗軍民摠管(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 홍다구가 김방경을 체포 고문을 하는 하극상 사태가 발생하고, 김방경이 대청도에 유배된다.

이런 정치. 외교적 어려움을 겪던 충렬왕은 1278년, 38세의 정인경을 다시 고려 조정으로 복귀시키는 결단을 내리고, 그로 하여금, 원나라와의 정치 외교적 어려움을 해결토록 요청하며, 2월에 朝散大夫(조산대부)의 文散階(문산계) 官爵(관작)을 제수하고 左右衛(좌우위) 精勇將軍(정용장군)으로 재기용된다.
이에 정인경은 본격적으로 중앙 정치 일선에 나서게 하고, 또한, 1279년 7월에, 밀직부사 이존비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외교교섭을 통해, 도독사 홍다구가 고려 조정에 더 이상 간섭하지 못하도록 요청하고 홍다구를 원나라로 소환토록 조치하였다.
고려사 세가(충열왕 편)에 의하면,
정인경이 원나라에 가서 성절을 하하고 도당에 상서하기를 \'-전자에 조인규 등을 보내어 선즙의 수조사를 신계하였고 아울러 원수부로 하여금 감독케 하지 말 것을 청하였거니와, 원수 \'홍다구\'는 우리와 틈이 있어 백성이 모두 원망하는 터이니 만일 감독케 하면 백성이 반드시 경의하여 도산할 것으로써 일을 쉽사리 이루지 못할 것이오니 바라건데 잘 전총하여 주달하소서\'
하였다.
12월, 39세에, 典法摠郞(전법총랑)에 임명되어 고려 조정의 법제 행정을 정비하고 여러 가지의 元나라와의 불리한 외교 문제들을 조정하게 된다. 이어 1280년 7월, 40세에 版圖摠郞(판도총랑)에 제수된다.
1280년 11월에 중찬 김방경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하정을 하면서, 원의 동정계획(일본정벌계획)으로 인한 고려의 피해을 최소화하기 위한 외교 협상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81년 3월, 고려군의 도원수 김방경과 여몽연합군은 2차 일본 정벌에 나서는데, 5월 합포(마산) 출발, 6월 대마도 정벌, 7월 일본 하까다를 치고 대승을 거두었으나 8월에 태풍과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철군하였다.
그 해 3월 초순에, 41세의 정인경은 龍虎將軍(용호장군)에 승진하여 일본정벌계획으로 경주에 후방 지휘부를 만들어 머물던 충렬왕을 보위하게 된다. 이때 경주에 와서 충렬왕에게 법문과 강론을 하던 승려 일연을 다시 재회하게 된다. 이로 인해 정인경은 충열왕과 대선사 \'일연\'의 대면 속에서 고려 국권회복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리고 3월 중순에, 龍虎軍(용호군) 將軍(장군)에서 左右衛(좌우위) 精勇將軍으로 재 보직을 옮기고, 다시 鷹揚軍(응양군) 將軍으로 전직을 하게 된다.
12월에 왕이 예전 세자시절의 원종페위사건에 공이 많은 정인경.등에 대한 공로를 포상논의를 하도록 했다.
왕이 지를 내려 이르기를,
\'과인이 일찍이 세자가 되어 경사에 입조할 적에 정인경, 나유, 지윤보, 김응문, 차득규, 김부윤, 이지저, 황룡, 김의광, 양저, 주석, 김위량 등이 시종의 노고가 있었고, 옛날 적신 임유무가 군사를 강도에 끼고 帝命을 항거할 적에 찬성사로 치사한 송송례와 전추밀원부사 홍문계, 지밀직사사 송분, 대장군 김지저가 의를 분발하여 소탕한 것은 공이 사직에 있으니 그 아울러 상전을 논의하라\' 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1282년 5월에 예전 원종폐위사건에 공이 많은 장군 정인경, 정오부, 차득규, 이지저, 대부윤 김응분, 랑장 김의광으로 1등공신을 삼고, 대장군 나유, 지윤보, 장군 임비, 총랑 이승연, 장군 김부윤, 중랑장 황취,랑장 섭주석,양저,백좌명, 랑장 전우, 금위량은 2등 공신으로 포상했다. 그리고 9월에 친종장군 정인경이, 중랑장 정복균을 동녕부로 보내고 자신은 북경으로 가서 몽고와의 전쟁 중 포로로 흩어진 고려 유민들을 고려로 되돌아 오도록 외교교섭을 성공시켰다. 또한 12월, 42세에, 監門衛(감문위) 攝大將軍(섭대장군)이 되고, 거듭해서 朝奉大夫(조산대부)로 官爵(관작)을 높여 제수 받는다.
정인경은 이러한 군사요직을 두루 거침으로 인하여, 빠르게 고려군권의 장악할 수 있게 되었고, 고려조정을 이끌게 되었다.
1283년 3월에 대장군 정인경은 별장 정량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고려 유민을 데리고 고려로 돌아와 그들이 고려에 정착할 수 있도록 구제하였다. 그리고 다시 심양으로 갔다가 5월 돌아와서 왕이 복령사에 행차했을 때 정인경은 원과의 외교교섭 결과를 보고하며 원나라의 일본 정벌을 중지 시겼다고 아뢰었다. 12월, 그가 43세되던 해, 知典法司事(지전법사사)를 제수받고, 그날 千牛衛(천우위) 大護軍(대호군)이 된다.
정인경은 오랜 대몽전쟁으로 피폐해진 고려국의 정치적 안정과 자주성 회복을 위해 충렬왕을 설득하고, 元나라 관리들의 불필요한 간섭을 배제시키며, 元軍의 철수, 대몽 전쟁 중 포로 및 인질로 끌려간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여, 1282년과 1283년에 정인경이 직접 원나라의 연경을 방문해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다.
그의 성실하고, 정직하며 온화한 성품과 원나라 고위 관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통해, 원나라 황제를 설득시키고, 직접 랴오둥(遼東;요동), 선양(瀋陽;심양), 랴오양(遼陽;요양), 베이징(北京)에 가서 많은 고려인을 귀국시켰다. 이에, 많은 고려주민들은 정인경을 마음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또한, 정인경은 고려인의 자주성을 일깨우기 위해, 충렬왕을 설득하여, 1281년 승려 일연으로 하여금 삼국유사를 저술케 하여 1285년에 이를 고려 조정에서 편찬하도록 하고 1287년에는 정인경과의 사돈관계(정인경의 아들과 이승유의 아들이 동서간)에 있던 이승휴의 帝王韻紀(제왕운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는 고려의 국가 정통성과 자주성을 일깨우기 위해 여러 歷史書를 저술하게 한 것이다. 제왕운기 등. 당시 원나라의 정치 문화적 지배체제를 극복하고자 저술된 이 책은, 중국과 한국의 지리적 문화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중국과 다른 민족문화적 주체성을 표명하였다. 또한 난세극복의 의지를 표명함에 있어 역사에 그 가치 기준을 두고 저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학사적 측면에서 볼 때 단군기원의 역사의식 환기와, 몽고 간섭 하에서 싹튼 민족의식과 함께 상고사를 한국사에 편입시켜 다루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세계의 인쇄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당시 고려 조정의 관직은, 오랜 무신정권의 영향으로 文官이 武官의 벼슬을 겸임하고 있었는데 이는 고려 왕의 왕권의 강화 목적과 軍權 장악의 방편으로 측근 문신에게 무관의 벼슬을 中庸해서 제수하는 관례로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정인경은 거듭 승진하여, 1284년 2월, 44세에, 司巡衛(사순위) 大護軍(대호군)에 임명되고, 1286년 2월, 46세에 左右衛(좌우위) 大護軍, 12월에 監門衛(감문위) 攝上將軍(섭상장군), 같은 날, 正獻大夫(정헌대부)의 官爵(관작)을 제수받는다.
그 해 12월에 대장군 정인경은 원나라에 하정사로 파견된다.
그 후, 1287년 6월, 47세에, 司巡衛(사순위) 上將軍(상장군), 8월7일에 興威衛(흥위위) 上將軍, 8월15일에 神龍衛 上將軍(상장군). 12월에 鷹揚軍(응양군) 上將軍, 같은 날에 軍簿判書(군부판서)겸 春宮翊衛(춘궁익위), 같은 날, 判典牧使(판전목사)에 임명되었다.
정인경의 나이 47세에 고려 군사의 모든 요직을 두루 거쳐, 고려 군권의 실질적 총수인 鷹揚軍(응양군) 上將軍(상장군)겸 軍簿判書(군부판서)에 임명되어 실질적으로 고려군의 軍權을 총괄 지휘하게 되고 고려 최고의 실권자가 된다.
그 해 1287년, 47세의 정인경이 고려 최고 실권자이던 시기, 사돈관계에 있던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저술되어 충열왕에게 올려지고 고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정인경은 1287년, 1等 功臣으로 錄券(녹권)을 받아 노비 200명, 전답 200 두락을 하사 받고, 본관을 서산으로 제수 받으며 軍簿判書春宮翊衛版殿 瑞山君(군부판서춘궁익위판전 서산군)의 封爵(봉작)을 받게 된다. 이는 충렬왕이 옛 공로를 모두 소급하여 功臣으로 제수한 것이다. 이로써 서산정씨의 본관이 서산이 된 것이고 당시 富城縣(부성현)으로 있던 고을이 瑞山郡으로 격상되고 지금의 서산이란 지명이 생긴 것이다.

정인경이 고려의 모든 군권을 장악하던 이시기, 고려의 군사 편제는 中央軍과 地方軍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중앙군은 2군 6위로 편제되었다. 그리고 지방군은 각 도, 주, 군, 현으로 편제되고 지방의 수령이 군통수권을 가지고 소수의 무관을 두었으며 군졸은 평시에 생업에 종사하고 비상시에 군병으로 징병되는 일종의 예비군 성격의 군대였다. 다만, 국경 지역의 주요 군사 요충지는 정규군으로 편제되고 상장군이 관할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중앙군의 군대 편제는 2軍 6衛로, 각 군의 최고 지휘관은 上將軍이었다. 2군은,
鷹揚軍(응양군;국왕의 친위대 : 1천명으로 구성),
龍虎軍(용호군;국왕의 경비대로 2천명으로 구성)으로 되어 있고
특히, 응양군의 상장군이 2군6위의 총괄기구인 중방을 구성, 국왕을 보좌하여 총괄 지휘했다.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장 겸 육군 참모총장 겸 합참의장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 응양군 상장군이 실질적인 고려군의 軍權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6衛는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 로 되어 있었는데

左右衛(좌우위)는 1만3천명의 군사로 수도방위와 戰時에는 변방방위를 담당했고,
神號衛(신호위)는 7천명으로 수도의 외곽 경비를 담당,
興威衛(흥위위)는 1만2천명으로 수도방위와 변방방위,
金吾衛(금오위)는 7천명으로 경찰업무,
千牛衛(천우위)는 2천명으로 국왕의 의전, 의장업무,
監門衛(감문위)는 1천명으로 궁성의 수비를 담당했다.

1288년, 48세가 되던 해, 8월 세자의 생일을 맞아 왕과 함께 군신이 모여 향연을 했는데, 왕과 절친했던 고려 최고 실력자 상장군 정인경은 주유희 놀이(난장이놀이: 고려시대 궁중 연회에서 즐기던 놀이)를 하고 장군 간홍은 창우희 놀이(광대놀이)를 하면서 왕과 함께 일어서서 춤을 추며 군신간의 의리를 다졌다.
그 해, 정인경은 세자 왕장 (충선왕)을 따라 元(원)나라의 연경을 다녀왔다. 정인경이 원나라에 간 목적은 동녕부를 되돌려 받기 위한 외교 문제 때문이었다. 이 시기 정인경은 동녕부를 고려에 되돌려 받기 위해 많은 외교적 노력을 하게 되고 수 차례 원나라의 연경을 방문하게 된다.
이 東寧府(동녕부)는 고려 서경에 설치된 원나라의 통치기관인데 이는 고려에 대한 정치 간섭을 위한 목적이었다. 동녕부가 설치된 연유는 1269년 서북면 병마사 최탄 등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세운 임연(林衍)을 친다는 구실로 亂을 일으킨 뒤, 서경을 비롯한 북계의 54성과 자비령 이북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를 계기로 원 세조는 이듬해 자비령 이북지방을 모두 원나라 소유로 한 뒤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최탄으로 하여금 동녕부 총관을 삼았었다.
정인경은 이 동녕부를 고려에 재 복귀시키고 자비령 이북지역을 고려에 되돌려 주기를 원나라에 요청하는 외교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
다음해, 1289년, 11월에 충렬왕과 왕후, 그리고 세자가 모두, 원나라로 가게 되는데 조인규, 인후, 염승익, 안향이 따라갔다. 이 행차에 호종하여 공을 세우려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정인경은 고려 최고 실권자로써 고려에 남아 충렬왕을 대신해서 고려 조정을 지켰다. 이때 고려조정 최고권력자인 정인경이 충렬왕에게 청하여 안향으로 하여금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게 하여, 원나라의 주자전서를 필사해서 돌아 오게 했고, 주자학을 연구해 더욱 발전하게 하였다. 또한, 많은 원나라 주자학자들과 왕래하며 학문교류를 하게 하고 고려에 유학을 크게 부흥시키도록 노력했다.
이러한 정인경의 외교 노력과 학문 교류를 통하여 원나라의 많은 관리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원나라 조정 내에 많은 친고려 관계를 유지 시켰다. 그리고, 원나라 세조를 설득하여, 결국, 1290년, 서경에 설치된 동녕부를 요동으로 옮기게 하고 서경을 고려에 복귀시켰다. 또한 서북면 지역의 땅도 회복하게 된다. 이 功으로 정인경은 副知密職司使(부지밀직)이 되고 또한 자비령 이북 지역을 관할하는 西北面都指揮使(서북면도지휘사)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인경은 1289년 6월, 49세에, 奉翊大夫(봉익대부) 三司使(삼사사) 上將軍에 제수되고, 곧이어 1290년 3월, 50세에, 副知密職司使(부지밀직사사)겸 典法判書(전법판서)에 임명된다. 7월에 정인경은 부지밀직사사로써 서북면 도지휘사가 되어 서경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1290년, 12월에 내안의 합단군이 고려에 침입하여 영흥, 안변, 이주을 함락시키고 많은 고려 주민을 죽였다 이에 만호 인후를 보내어 방어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리고 원나라의 평장사 설도간과 도이첩목아와 우승 탑출.등이 원군으로 왔으나 모두 패배하여 개경을 위협하게 되었다. 12월에 충렬왕이 강화도로 被兵(피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는 임시로 수도를 강화로 옮기게 되는데, 지도첨의사사 송빈이 왕경(개경)을 지키며 싸우다가 강화로 퇴각하고, 이런 와중에서도 53세의 정인경은 서경을 지키면서 합단군과 일대의 처절한 전투를 치루며 싸우다가 실패하고, 충령왕의 강화도 사수 지시에 의해 많은 고려주민과 함께 강화도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정인경은 강화도로 들어간 이래, 충렬왕을 보좌하며 강화도 사수에 모든 힘을 모으고, 또한 강화도로 피난간 백성들을 규율하며, 피난 주민들이 모아 마을을 이루고 살게 만들었다. 이에, 정인경의 많은 보살핌을 받은 백성들이 정인경 장군의 이름을 따서 \'인경리\'라 불러, 인경리라는 마을 지명이 생겼다. ‘인경리(仁卿里)’는 지금의 ‘강화도 불은면 삼동암리’일대이다.
1291년, 1월에 세자가 원 황제에게 청하여 합단의 적을 토벌하는 데 필요한 원군을 청하여 나만알대왕에게 명하여 원군을 보내어 왔다. 그러나 이마저 대패하여, 2월에 다시 원군을 청하였으나 원황제는 \"너희 고려는 옛날 당태종이 쳐들어 와도 이기고, 다른 오랑캐가 쳐들어 와도 쉽게 이기지 못하였거늘 어찌 그리 두려워하느냐\" 며 핀찬을 주었다. 3월에 대장군 송화를 원군과 함께 보내어 합단과 싸우며 개경을 지키도록 했다.
1291년 8월, 정인경은 51세에, 世子元賓(세자원빈)을 겸직하게 된다. 9월에 전쟁이 모두 끝나고 왕이 개경으로 돌아왔다.
1292년 윤6월에, 정인경은 합단군 전쟁의 功으로 인하여知密直司事(지밀직사사)에 제수 받게 된다. 이어 7월에, 右常侍(우상시)로 승진되고, 다음날, 中軍使(중군사)를 겸하게 된다.
1292년 충렬왕은 高麗軍(고려군)과 元軍이 合丹軍(합단군)을 격퇴하고 나라가 안정되자 다시 고려조정은 개경으로 완전히 환도하게 된다.
이때의 충렬왕과 함께 환도한 정인경이 개경에 거주하게 되는데 이 거주지가 개경도성내 ‘中部 星化坊1里’ 였다.
그리고 이어 元(원)나라의 세조가 사망하는 혼란기를 틈타, 정인경은 원나라와 외교 교섭을 벌여 원나라가 통치하던 탐라(제주도)에서 원나라 군사를 철수시키고, 또한, 고려군에 의해 장악케 함으로써 탐라를 제주로 개명을 한 후 고려 조정에서 牧使(목사)를 파견하여 고려가 직접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서 제주도에 탐라총관부가 폐지되고 고려에 재 복귀된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원나라는 여러 차례 금혼령을 내리고 고려의 부녀자를 공녀로 요구하며 고려의 행정 관제의 격하를 요구하는 여러 가지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는데 정인경이 원의 복속정책에 강력히 반대하자 1992년 11월, 원나라의 압력에 의해 충렬왕은 어쩔 수 없이 찬성사 송분과 동지밀직사사 정인경을 남해의 섬으로 유배보낸다.
정인경이 57세 되는, 1297년까지, 6년간, 남해의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 시기 고려는 또 한번의 정치 외교적 위기를 겪게 된다.

원나라는, 1293년, 원 세조의 사망 이후 더욱 고려에 정치적 압력을 가하게 되고, 1295년 고려의 행정 편제를 격하시켜 중서문하성과 성서성을 합쳐 僉議府(첨의부)로, 樞密院(추밀원)을 密直司(밀직사)로, 御史臺(어사대)를 監察司로, 6부는 통합되어 典理司, 軍簿司, 版圖司, 典法司로 개칭하게 된다.
그리고 충렬왕과 원나라 조정과의 갈등이 계속되는데, 그 원인은 충렬왕의 왕비인 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고 친원파 권신들과 함께 고려 조정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고 충렬왕의 전 왕비인 정화궁주를 감금하고 그의 세력인 반원파를 축출하는 등, 왕권을 능멸하자 충렬왕은 국사를 등한시하고 잦은 사냥과 폐행을 하게된다. 그리고 1296년 11월, 친원파의 주선으로 세자가 원나라의 연경으로 가서 원의 진왕, 감마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와 결혼하여 원의 부마가 된다.
1297년 5월, 충렬왕의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하게 된다. 이에 별궁에 유폐된 정화궁주가 풀려나고 정화궁주의 정치적 입지가 잠시 강화되지만, 이해 7월, 원나라에 가 있던 세자와 세자비인 계국대장공주가 귀국하자, 다시 원의 힘을 등에 업은 친원파 권신들에 의해 정화궁주와 반원파 권신들 40여명이 축출되었다. 고려 조정은 친원파에 의해 다시 장악되고 이들은 세자를 지지하며 반원파를 지지하는 충렬왕에게 많은 압력을 가했다. 그리고 충렬왕은 고려 조정에서의 정치적 입지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결국, 충렬왕은 친원파의 압력에 의해 왕위를 선위하겠다는 선위서신을 元에 보내게 된다. 그리고 1298년 1월, 충렬왕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태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자가 즉위하게 되는데 이가 충선왕이다.
충선왕이 즉위 후, 원나라에 머물던 계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왔다. 이로써 고려 조정은 친원파로 완전히 장악되고 이들은 충선왕의 母后인 죽은 제국대장공주를 인명태후로 추존한다.
그러나 새로 즉위한 충선왕은 세자 시절과는 달리, 즉위 후, 왕권을 강화하면서 고려의 제도를 복원하는 등, 고려의 자주적 기틀을 마련하고, 반원파 학자들을 등용하는 등, 반원파 신하들과 가까워지고, 또한, 조인규의 딸 조비와 금실이 너무 좋자, 고려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친원파 권신들은 이를 구실로 계국대장공주를 앞세워 원나라에 충선왕을 무고하고 원나라의 군사 무력 시위와 고려 조정의 친원파의 압력에 의해 충선왕은 즉위 7개월만에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 해 8월, 충선왕은 원나라로 압송되어 가고, 그 후 10년을 원의 연경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실질적인 충선왕의 퇴위는 원나라 조정 내에서의 권력승계 문제에 의한 정권 투쟁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후, 원나라의 2인자였던 충선왕이 원나라에서의 생활과 장기간 티베트 유배생활에서 그 당시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7. 정인경의 마지막 榮光...

충선왕이 원나라로 압송되고 충렬왕이 복위되자, 충렬왕은 섬으로 유배되어 있던 정인경을 고려 조정으로 복귀시켰다. 이때, 정인경의 나이 59세 였다.
정인경이 고려 조정의 重臣으로 복귀하자 그것만으로 고려는 곧 바로 정치적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는 親元派(친원파)와 反元派(반원파) 權臣(권신)들 사이에서 양쪽 모두에게 존경과 신망을 받았고 또한 그의 정직하고 온화한 인품과 학문, 그리고 뛰어난 對元外交(대원외교)능력으로 원나라와의 관계에서 큰 외교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299년 3월, 59세의 정인경은 고려 조정에 重臣으로 복귀하여 匡靖大夫(광정대부), 判三司事(판삼사사), 上將軍(상장군)이 되자 그는 곧 바로 고려의 정치적 안정과 민심을 수습하고 또한, 正朝使가 되어 원나라를 방문하여 원나라와의 관계에서 고려의 유리한 외교적 입지를 구축하였다. 4월에 판삼사사 정인경은 원나라가서 고려와 원과의 미묘한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표에 이르기를,
사화(使臣;외교사절)가 이르매 문득 구원(천자의 궁궐)의 명륜(明倫)이 전해지고 제덕(帝德)이 패연하매 문득 일방의 감주가 되었나이다. 기성을 살피매 송구한 느낌이 더욱 깊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데 다행히 천재의 조봉에 양조의 -우를 외람되이 입었나이다. 백성은 못이 길어 고기가 유영하는 것과 같아서 오랜 -린이 목욕하였고 나라는 나무가 늙어 좀이 나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 허물과 후회를 부르게 되었나이다. 액수가 다시 양덕에 겹쳤으며 예언이 일찍이 단총(임금의 총명함)에 미쳤나이다. 비록 산해와 같은 관용이라 하여도 오히려 뇌정과 같은 일로를 두려워 하나이다. 어찌 창궁보다 먼 곳에서 사정을 곡진하게 살피시와 적자의 무지로 하여금 도리어 오욕을 입게 될 줄을 알았사오리까. 이미 법언을 나열하여 계를 내리시니 인하여 한호(큰 호령)를 베풀어 하반을 세척케 하셨나이다. 자손에게 전하는 보훈이 정령하매 거국의 환성이 양일하나이다. 이것은 대저 탕의 창미를 법받고 순의 호생을 체득함을 만나 적은 것을 사랑하는 인을 가하시고 황농(고려를 낯추는 표현)를 포용하는 도량을 넓히시와 무-한 것이 혹시나 억울하게 될까 두려워 하여 차라리 떳떳이 못한데 실수하려 하심이외다. 신이 감히 공경히 신료들을 거느리고 직무를 닦아 거의 천심에 응부라고 길이 -속을 편히하여 정성을 피력하와 성수의 연장을 축원하지 아니하오리까
하였다.
그 해 7월, 知都僉議司事(지도첨의사사), 典理判書(전리판서)에 다시 제수되고, 9월에, 都僉議(도첨의) 參里(참리)에 임명된다. 원과의 원만히 외교관계를 통해 고려 조정이 정치적 안정을 되찾게 된다. 이로 인해, 그 해 12월, 정인경은 또다시, 都僉議侍郞(도첨의시랑), 贊成事(찬성사)에 거듭 승진 제수된다.
12월 찬성사인 정인경이 하정사로 원에 갔다.
그는 누구보다도 元나라로 부터 고려의 국권 회복을 기원하고 있었다. 단지, 오랜 무신 독재정권과 몽고와의 항쟁, 그리고 여몽연합군에 의한 일본정벌.등.으로 민생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지고 국력이 허약해진 고려의 위치를 냉철히 판단하고 원나라와의 실리적 외교 관계를 통하여 고려의 국권회복과 부흥을 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1300년, 그가 60세에, 한 때,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은 친원파 權臣이 정인경의 가문과 혼인하여 정인경을 친원파에 가담시키려고 하자, 그는 반대하여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게 되나 많은 신하들과 백성들이 이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충렬왕의 간곡한 요청으로 다시 고려 조정에 복귀하게 된다.
8월에 상락공 김방경이 죽었고, 10월엔 밀직사사를 치사한 이승휴가 죽었다. 그는 정인경과 사돈관계였다. (정인경의 아들 신수와 이승휴의 아들과 동서지간)
1301년 9월, 61에, 정인경은 匡靖大夫(광정대부), 都僉議侍郞(도첨의시랑), 贊成事(찬성사) 上將軍(상장군) 判典理司事(판전리사사)에 다시 제수된다.
1302년 8월, 62세에, 그는 고려의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국가를 위해 세운 공으로 壁上三韓三重大匡推誠定策安社功臣 匡靖大夫 都僉議中贊 上護軍 判典理司事의 고려 최고의 관작과 최고의 벼슬에 임명된다. 8월에 시랑, 찬성사를 엮임한 채모가 죽었다. 그는 정인경의 사돈이다. (채모의 아들 채종서가 정인경의 사위였다)
정인경이 고려 조정에 재 복귀 한 후, 1305년까지의 고려는 정치적 안정을 꾀하게 되고 친원파, 반원파의 신하들 모든 이를 이끌고 원나라와의 실리적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고려의 국권회복과 국력을 신장하려 하였다.
고려사에서도 이 시기를 짧은 기간이나마 고려의 주체성 회복과 국권회복을 기하려고 노력했던 시기로 기록하고 있다.
그 해 1305년 을사년 12월 17일, 정인경은 죽게 되고 향년 65세였다. 그 후 서산의 송곡서원에 윈외랑공 정신보, 그리고 양렬공 정인경을 기리며 지금까지 매년 배향하고 있다. 고려 조정과 충렬왕은 몹시 슬퍼하며 정당문학 ‘방우선’으로 하여금 그의 묘지에 묘지명을 세우고 三韓三重大匡推誠定策安社功臣匡靖大夫都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司事瑞山君(삼한삼중대광추성정책안사공신광정대부도첨의중찬상장군판전리사사서산군)의 관작과 함께 襄烈이라는 국가에서 예우하는 최고의 諡號(시호)를 하사한다.
이 묘지명으로 고려조정과 충렬왕은 정인경의 업적을 후세에까지 전하도록 하기 위해 정인경의 墓안에 墓誌石을 세웠다. 그리고 고려사의 열전편에 정인경에 대해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고려 묘지명에 의하면, 그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英英鄭公 人中之龍
性寬膽大 色溫[#恭
克勤乃職 惟正之供
四方奔命 一節匪躬
功高壁上 位極侍中
富貴壽考 哀榮始終
門庭赫赫 蘭玉蔥蔥
餘芳不盡 百福攸同
宜刻厥石 傳於無窮

빼어난 鄭公이여 사람가운데 龍이로다
성품은 너그럽고 담대하며 모습은 온화하고 공손하도다
맡은 바 직책을 부지런히 수행하고 오로지 正道로 하였도다
국가를 위해 四方을 오가며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절개를 지켰도다
공로는 벽상에 높이 올랐고 지위는 侍中(국무총리)에 이르렀다.
부귀에다 천수를 누리며 슬프거나 영광스럽거나 한결 같도다
가문은 크게 빛나고 자손들이 번창하도다
남은 향기 다하지 않아서도 온갖 복을 똑같이 받도다
마땅히 이 돌에 새기어 무궁히 후대에 전해야 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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