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경과 강화도 간척사업

by 杓先 posted Mar 09, 201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양열공 정인경과 강화도 간척사업
2010년 1월 9일 / 鄭杓先

고려시대에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나라는 산악지가 많은 반면 농경지가 협소하여 논으로 활용할 만한 토지가 많지 않으므로, 식량 생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고, 섬 지역에서는, 특히, 농토가 적어 식량 생산에 더욱 어려웠다.
이에 섬 지역에는 바닷가 저습지를 이용하여 제방을 쌓아 간척지 개발을 하고, 논을 개간하여 쌀을 재배, 식량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고종 22년(1235년) 몽고의 침입을 피하여 강화도로 천도한 후, 약 40년간, 몽고와의 전쟁 속에서, 급격하게 증가한 강화도의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식량 생산이 큰 문제였다.
이에, 고려조정은, 전략적으로 연안 방조제를 축조하고, 간척사업을 체계적으로 하였는데, 해상 방어는 물론, 군량미를 조달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간척의 기원이며, 이후, 몽고와의 전쟁 속에서 강화도에 고려조정이 머무르던, 고려 원종, 충렬 왕, 등에 이어서 강화도 간척사업을 실시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1290년 고려 충렬왕 시대, 북쪽 합단군의 침입으로, 고려가 전쟁에 휩싸이는 데, 서경유수였던 정인경이 합단군과 여려 차례 큰 전쟁을 치렀다.
이때, 고려 충렬 왕은, 강화도로 피병, 고려조정을 옮기고, 고려조정과 왕을 보위하기 위해,‘서경유수’이던 정인경에게 군사를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와 왕과 고려조정을 보위케 하였다.
이때, 서경유수였던 정인경은 많은 전쟁 난민들과 함께 강화도로 들어 왔으며, 이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게 하였다.
그러나 강화도의 부족한 식량문제로, 난민들의 생활이 더욱 피폐해 짐에 따라, 불은면 일대 바닷가 저습지에 간척사업을 하여 식량을 생산케 하였을 것이다. 이에, 정인경의 도움에 감복한 많은 난민들이, 그들이 모여 살던 마을을, 서경유수 ‘정인경’의 이름을 따서 ‘인경리(仁卿里)’라고 하였다.
이’인경리’는 지금의 ‘강화군 불은면 삼동암리’ 일대이다.
그리고, 서경유수(西京留守)였던 정인경이 살았던 집이 있어 그 골짜기 일대를 유수골(留守골)이라 하였다. 유수골은 지금의 강화군 불은면 삼동암리 박공재 남쪽에 있는 지역이다.

Articles

7 8 9 10 11 12 13 14 1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