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공의 후예입니다.

by 93세손 posted Apr 3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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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공의 후예입니다.

김천 대덕에 먼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유가 그랬었군요...

구체적인 유례 감사합니다.



: 文科議政府舍人 ? 墓知禮釣龍大城子座贈資憲大夫吏曹判書
: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성립된 후 많은 고려 말 기록이 사라져, 실제적인 생졸일(生卒日)은 알 수 없으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고려 말 과 조선초기 태조, 정종, 태종의 시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 고려 말, 경상도 김천으로 낙향한 富城府院君 정윤홍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써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성립되어 지금의 김천시 대덕면으로 이거(移居)하였다.
: 윤홍의 다섯째 아들 斯信은 그 후 조선이 왕조를 세워 조정이 안정되어 가자,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文科로 장원급제하고 議政府 舍人 (정4품)으로 벼슬을 한 뒤, 나중에 資憲大夫(정2품관작) 및 吏曹判書(정2품)로 추봉(追封)되었다. 이런 관작으로 보아, 당시 국가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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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舍人 贈吏曹判書 鄭斯信公 신도비를 통한 기록]
: (행정공파와 행촌공파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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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정부 사인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인 鄭公 사신은 대개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이다. 그분의 산소가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대성자좌에 자리 잡은 지 육백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다.
: 사신의 부친은 고려 말 富城府院君(부성부원군 ) 윤홍이고 그 윤홍은 고려 말 王后(왕후)의 부친으로 알려져 있다. (서산정씨 대동보에는 윤홍의 둘째 따님의 기록이 삭제되어 있는 데, 이분이 고려의 왕후, 또는 후궁이 아니었나 짐작할 뿐이다.) 이 분이 고려가 멸망함에 따라 경북 김천의 봉계(김천시 봉산면 인지리, 예지리)로 이거(移居)하였는데 서산 정씨가 최초로 영남지방으로 이거 하여 살게 된 것이 이 때부터 이다.
: 부성 부원군이 고려 말 강양 이판서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낳았는데 그 중, 다섯째 아드님이 斯信이다.
: 斯信은 성장 후 朝鮮 本朝에서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이 의정부 사인을 지내고, 또한 증직이 정2품 資憲大夫의 관작과 吏曹判書를 제수 받았다는 것을 보면 국가에 큰 공을 이루었음에 틀림이 없으나. 실제 조선초기의 기록에 자세히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높은 품계의 贈職을 제수 받은 것으로 추정하여 그의 업적을 추정할 뿐이다.
: 公의 부인은 성산 이씨이고, 四男一女을 낳으니 맏이 효성은 護軍 이고 둘째 효문은 대경이고, 셋째 효경은 조산대부이고 넷째는 효정인데 그 중에서 맏이 둘째 넷째는 후손이 없다.
: 딸은 시집가 조벽의 아내가 되었다. 손자 종하는 執議이고 유하는 副尉이고, 유하등이 모두 조산대부의 아들이다. 증손에 희장, 縣監인 희호와 서자양, 김희철등에게 출가한 딸은 執儀 종하의 소생이고 副司直인 희영은 副尉 유하의 소생이다.
: 다만, 縣監 희호의 손자인 敎官 처우의 호는 杏村인 데 학문이 뛰어나 일대에 重望이 있었고, 司直 희영의 손자인 檢丘 사용의 호는 杏亭인데 정한강 선생에게 공부해 도의가 일세에 추앙을 받았다. 또 더군다나, 오늘날 二杏(杏村, 杏亭)의 후손들이 더욱 더 번창해 자손의 수가 몹시 많은데 모두가 조상을 위함에 돈독한 정성이 있어 마침내 오늘에 이 같은 일을 이룩하니 이점에서도 斯信公의 여험과 유택이 5세가 지나도록 끊기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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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 杏村公 처우는 가례실(김천시대덕면추량리)로 이거하였고,
: 杏亭公 사용은 중사위(김천시대덕면조룡리,중산리)로 이거,
: 이곳이 二村(행촌파, 행정파)의 本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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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정부 사인(議政府 舍人) 이란?
: 舍人은 조선시대의 관직(정4품)이다.
: 의정부에 두었던 정4품직으로 정원은 2명이었다. 정5품 검상(檢詳), 정8품 사록(司錄)과 함께 의정부의 실무를 담당했다. 중요한 나랏일이 있을 경우에 왕과 의정부 사이에서 연락관계의 일을 맡았다. 태종 때 관제개편에 따라 내서사인(內書舍人)을 의정부로 옮겨 의정부사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근대 관제로 바뀌는 갑오개혁 때까지 있었다. 일이 중요하므로 재직기간이 끝나면 승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춘추관의 수찬관(修撰官) 이하 관직을 겸했고, 상피(相避) 규정을 적용받았으며 자리가 비면 검상이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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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관(敎官) 이란?
: 조선시대에 각급 교육기관의 교수요원을 총칭하는 말.
: 삼국시대 태학과 국학의 교관으로 박사(博士)가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조교(助敎)·사업(司業)·주부(主簿) 등이 설치되었다. 고려시대 국자감에는 사업·박사·조교·좨주(祭酒)·승(丞)·주부 등이 있었고, 지방에 설치된 향학에는 문사(文師)·문학(文學)·교수관 등의 교관이 파견되었다. 조선시대 성균관·사학·종학생을 가르치는 관원을 학관(學官)이라고 구별하기도 했다. 지방향교 교관에는 교수·훈도·교도가 있었다. 문과 출신인 삼관권지(三館權知)는 종6품인 교수관, 참외는 종9품인 훈도관, 생원·진사는 교도로 불렀다. 훈도와 교도는 취재를 통해 선발했다. 세종 때 500호 이상의 군현에는 교관을 파견했는데, 이후 도호부·목 이상의 지역에는 교수를, 군현에는 훈도와 교도를 파견하였다. 나중에 향교교육이 피폐해지면서 자격요건이 흐려져 지방유생의 피역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경국대전〉에서는 관찰사가 순행하며 향교생도를 시험하여 결과에 따라 교관을 전최(殿最)했으며, 생도 중에서 문과급제 3명(지방은 1명) 또는 생원·진사를 10명(지방은 5명) 이상 낸 교관은 품계를 올려주었다. 이외 수령을 감찰하고, 외방의 사관(史官)으로 지방관의 치적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길 것을 구상했으나 시행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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