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렬공 묘비문 초안

by 사무국장 posted Aug 19, 201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양렬공 묘비문 초
벽상삼한삼중대광, 추성정책 안사공신, 광정대부, 도첨의 중찬, 상장군, 판전이사사, 봉 서산군 시 양렬 휘 인경 지묘
배 양주군 대부인 진씨 지묘 합조 (정경부인 양주진씨 지묘 합조)
선생은 壁上三韓三重大匡 ,推誠定策 安社功臣,匡靖大夫,都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司事 봉 瑞山君이며 諡號 襄烈 휘 仁卿으로 자는 春叟요 호는 看月齊로 瑞山鄭씨 始祖다 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에서 1241년 8월에 출생 하니 父망명 5년 만이다 父 鄭臣保공은 중국 남송이 망할 무렵 동천하여 서산시 간월도에 망명하니 1237년(고종24)이다 남송 형부 원외랑을 지냈고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판예빈사, 행 인주수를 역임한 서산정씨의 원조이다

母는 고창 군대부인이니 위위 승동정 吳永老의 따님이요 玄靜 吳世才 선생의 증손녀이다 祖는 추봉 상서호부 원외랑 행 예빈승 휘 秀琚요 曾조는 추봉 은청광록대부, 상서 좌복사, 행 검교군기감, 휘 儀요 高祖는 호 冲應 판 장작감 휘 縕 으로 시천 3세 同居共食 1세요 6대조 淮공이 목주에서절강성 포강 현으로 이거한 시천 1세이니 太始祖 桓公으로부터 64세요 父 臣保공이 69세 양렬공은 70세가 된다 9세때 도비산 정원사에 올라 父가 고국을 바라보며 그리워하시던 심사를 망향 시로 바위에 새기니 신동이라 했다 문수사를 오가며 문하시랑평장사 韓自喜선생에 배우고 1254년 14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父에 성리학을 배우니 신보공이 고려에 최초로 性理學을 傳來하여 고려학자들이 처음 兩程의 글을 보고 기뻐하였다. 중국어를 배우니 양 국어에 능통하였다 몽고군이 내침하여 新昌 稷山 등에 주둔하니 자원입대 하여 크게 전공을 세웠고 1264년 간월도에 圓通臺 精舍를 증축 하였다

1266년 父가 고국을 그리워하던 白雲의 뜻을 흠모하여 앞東山 望雲臺를 도랑을 파서 연못을 만들어 증축하고 유지를 기렸다.1269년 태자 諶이 사신으로 元에 갈때 호위 무관겸 통역관으로 수행하고 7월 귀국길에 婆娑府에 이르렀을 때 元宗을 페위하고 安卿公 淐에 왕위를 물려 줬다는 소식을 듣고 麟州守로 있던 父 臣保공을 만나 상세히 듣고와 세자에게 보고하고 수행 신하들이 두려워 우왕좌왕 할때 앞으로의 행동을 단호히 세자에게 건의해 받아 들렸다 父의 협력을 받아 元宗을 복위하고 세자를 안전하게 귀국케 하였다.

1272년 원종이 원나라에 갈 때 경호와 사절로 수행하고 이듬해 금오위 섭 장군 이어 장군 겸 입 내시로 승진 한다 2년 후 원종이 죽고 태자 심이 25대 충렬왕으로 즉위 1등 공신이 되고 1276년 예빈윤 陳琇의 따님과 결혼하여 장자 信王柔를 낳으니 당대 재상 良敬公 閔萱의 따님이요 재상 文正公 柳璥의 외 손여에 결혼하고 훗날 증 도첨의 찬성사, 우문관대제학 행 통직랑 상서 이다. 그러나 총애 받던 내시의 시기로 물러난 뒤 2년 후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격던 왕이 다시 불러 조산대부 자금어대 좌우위 정용장군 이듬해 전법총랑 1280년 瑞山君에 봉 해진다. 1281년 밀직부사 李尊庇, 장군 정인경이 성절을 하례하고 元水府의 지나친 감독을 하지 말게 하였다.
1282년 5월 왕은 기사년 시종 보좌한 정인경등에 재차 책공하여 격을 높여 삼한 후 벽상공신으로하고 추가 녹권으로 장획과 토지 100결 관노비 5구를 가급 받는다
9월 친종장군으로 중랑장 鄭福均과 요양 심양에가 물품을 찾아오고 12월 조봉대부 대장군에 임명 1283년 별장 鄭良과 요양 북경에가 유리 민과 물품을 찾아 왔다.
12월 지전법사사와 천우위 대호군에 임명 1284년(충렬왕10)100 여년 동 안 군현의 이름조차 보존하지 못하고 運州(옛홍성)에 복속되어 있던 옛 부성 현을 정인경이 나라에 공이 커서서주군 다시 서주 목으로 승격 흩어진 백성을 모아 토지를 주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니 만세의 공이라 하고 고울 민이 300 여년 공의 제삿날에 군사에 보관했던 도포와 관대 모를 진설하고 군수는 공무를 파하고 民官이 소를 잡아 제사지내기를 부모제사처럼 성심을 다해 모시었다. 사순위 대호군에 둘째를 얻으니 信英이니 典醫令으로 젊어서부터 의학에 밝았으며 숙부인 이천서씨 河允의여 와 결혼 했다.
1286년 정헌대부 상장군이 되고 12월 元에가 신정을 하례하고 다음해 응양군 상장군겸 군부판서가 되고 일등 공신단권을 받아 고려군의 최고 실력자가 된다 1288년(충렬왕14)세자 謜이 원나라에 갈때 동녕부 반환을 위한 외교에 힘쓰고 다음해 봉익대부 삼사사 상장군이 된다. 1290년 (충렬왕 16)元皇帝의 신망과 宰臣들과 학문 교류 및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오며 東寧府를 돌려받을 때 황제에 구체적으로 진언하여 잃은 땅을 돌려받으니 왕은 대단히 기뻐하여 부지밀직사사인 그를 돌려받은 땅 북계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 6성을 관할하는 서북면 도지휘사에, 이어 곧 서경 유수를 겸하게 하였다

8월 합 단군이 침입 1년여 만에 섬멸하고 왕을 개경으로 환도 시킨다 1291년 戶口가이루어지고 세자 원빈겸 밀직사사 전법판서 7월 우상시로 승진 중군사를 겸한다.1292년 지밀직사사로 政案이 작성된다.元황제로부터 무덕장군 정동성 이문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1298년 1월 세자 謜이 충선왕으로 즉위 7개월 만에 무고로 원에 압송 되어 조정이 혼란하자 금혼령으로 유배지에서 다시 불러 수습하니 조정이 안정 된다.1299년3월 광정대부 판삼사 상장군 직책에 복귀 한다 4월에 판삼사사 정인경과 柳琚를 元나라에 보내 印侯가 거짓말로 무고한 것을 밝히다 5월 도첨의 사사겸 전리판서에 9월에 도첨의 참리 11월에 도첨의시랑 곧 도첨의 찬성사로 거듭 승진 된다

12월에 元에 신정을 하례하고1305년(충렬왕28)최고관작과 관직인 壁上三韓三重大匡 ,推誠定策 安社功臣,匡靖大夫,都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司事가된다. 5남 2녀를니 신유, 신영, 신화, 신수모두가 정삼품 이상 현관을 지냈다. 장녀는 재상 寬愼공의 자 平康蔡 宗瑞로 첨의정당문학, 지밀직판도사사, 판사 상호군이요 외손 文弼은 전리판서겸 집현전 대제학이요 차녀는 재상문 문정공 태현(台鉉)의 장남 총부의랑 金光軾이다 1305년 12월17일 졸하니 65세요 조정과 왕은 대단히 슬퍼하여 유사를 보내 후히 장사지내게 하였다 이듬해 시호 양렬을 받다.
고려 통일대전에 배향 도었다.송곡사에 배향,운계서원에 배향된바 도 있다.오현각에 각자되었다.

2011년 8월 서산정씨 문사연구 위원원회
종중님들의 좋은 의견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