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원외랑공 / 시조 양렬공 비문 초안!

by 鄭昞國 posted Sep 1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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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性理學者  員外郞公 鄭臣保 墓碑銘 公의 이름은 臣保요 宋나라 浙江인으로 400여년간 중국 中原一帶를 통치한 鄭나라 太祖 桓公의 69世孫으로 宋나라 刑部員外郞을 지낸 當代의 유명한 性理學者이다 宋나라 末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장악한 蒙古가 國政運營에 필요한 人才를 求하고자 학문과 인품이 뛰어난 公에게 회유와 협박 등 온갖 수단을 다 하였으나 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不事二君 節義로 고려고종 24년(1237년) 충남서산시 看月島로 망명 고려에 처음으로 性理學을 傳授한 분이다.  당시 高麗는 불교를 크게 숭상하는 나라로 儒敎 학문인 性理學을 傳授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종교적 이념을 떠나 生活哲學을 가르치니 高麗 선비들이 처음으로 宋나라 性理學의 大家 程伊川, 程明道 兩程의 글을 보게 되었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後日 公은 평안북도 義州 일대를 관할하는 麟州首로 子 仁卿과 함께 林衍 등 武臣들의 반란을 평정 100여년의 武臣독재시대에서 王權統治時代로 회복시키는데 기여한 功勞로 贈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나라에서 旌閭를 내리고 旌門을 세워 公의 偉業을 기렸으며 後日 아들 仁卿과 함께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대표적 忠臣으로 등제되어 推仰을 받아왔다. 公의 先代는 儒家의 표본으로 360여년간 3000여명의 대가족이 同居同樂하여 중국의 國家級重點文化財로 보호를 받고 있는 江南第一家 同居 1世인 判將作監 沖應公이 曾祖父이며 祖父는 軍器監 儀요  父는 禮賓事同正 秀琚이며 毅宗 明宗時代 동방의 七賢으로 존경을 받아 온 玄靜 吳世才선생의 증손녀 郡夫人 高敞吳氏와의 사이에 長子 都僉議中贊 仁卿과 次子 中郞將 俊卿을 두었으며 현재 公의 位牌가 중국 江南第一家와 충남서산시 松谷嗣등에 모셔져 春秋로 配享 公의 遺德을 기리고 있다[ 망망창해에 조각배 하나로 儒道(性理學)가   동쪽으로 왔으니 箕子의 발차취요 盧仲連의 풍도로다  후학들에게 크나 큰 은혜 베푸셨으니 百世의 스승이시다 ]        奉翊大夫 知密直司事 上將軍 世子元賓 / 蔡謨의 追慕 詩                            2011년  10월    일                                瑞山鄭氏大宗會 文史硏究會------------------------------------------------------------▣ 高麗一等功臣 襄烈公 鄭仁卿 墓碑銘          襄烈公 이름 鄭仁卿은 高麗 최고벼슬 正一品 壁上功臣都僉議中贊 現 國務總理級 要職을 역임한 瑞山鄭氏 始祖로 1241년 父 員外郞公과 母 君夫人 高敞吳氏 사이에長男으로 태어나 문무를 겸비한 將軍, 外交官으로 國威宣揚에 큰 業績을 남기신 분이다. 公은 19세에 騎馬兵 특수부대인 馬別抄에 자원입대 新昌. 稷山 등지에 주둔한 몽고군을 습격 혁혁한 戰功을 세우는 등 武官으로 뛰어난 활약 首都防衛 주요 지휘관으로 발탁되어 1269년 高麗太子가 使臣으로 元나라 방문시 호위무관 겸 통역관으로 隨行 중 武臣들의 반란으로 元宗王이 廢位 되었다는 소식에 父 麟州首 臣保公 등과 함께 叛亂軍을 진압한 후 元宗을 復位시켜 武臣 독재시대를 終熄시키는 게기를 만들었으며 10여차례 對元 外交力量을 발휘하여 善隣友好 관계를 구축 國政에 간섭배제와 抗蒙 30년 전쟁을 끝내도록하여 國泰民安의 평화시대를 열었다.  이후 고려 大將軍, 上將軍, 軍簿判書 등 軍 要職을 두루 거치며 國家保衛에 큰 功을 세웠으며 蒙古가 政治的 지배를 위해 설치한 東寧府를 비롯한 서북변 54城과 자비성 以北의 여섯개 城을 되돌려 받음과 동시 피납된 수많은 백성들과 유민들을 歸化시키는 등 큰 업적을 세워 忠烈王으로부터 1等 功臣으로 丹券을 下賜 받았으며 100여년간 관호를 잃고 타 지역에 復屬되었던 고향의 地名을 오늘의 瑞山이라는 官號를 갖도록 함으로서 鄕里의 民.官 모두가 萬世의 功이라 극찬하며 300여년간 祭를 모셔 公의 功績을 기렸다.  위의 功勞로 公은 正一品 壁上三韓三重大匡推誠定策安社功臣匡靖大夫都僉議中贊上護軍判典理司事라는 최고의 벼슬에 올랐으며 禮賓尹 陳琇의 따님 大夫人楊洲陳氏를 배필로 맞아 슬하에 5男2女를 두어 長男 柔는 贊成事右文館大提學, 次男 信英은 版圖正郞, 三男 信丘는 속세를 떠나 曹溪寺에 入籍하였고 四男 信和는 都染暑令, 五男 信綬는 懷陵直長이었으며 長女는 三司右尹 蔡宗瑞에게 次女는 司僕官佐郞 김金光軾에게 출가 모두 政丞家門 子女들과 緣을 맺어 훌륭한 人才로 육성하였다.그러나 1305년 世數 65세(高麗史 69세)에 殞命하심에 忠烈王이 그를 哀悼하여 有司에게 장례를 직접 치르게 하고 襄烈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 하는 등 公의 인품과 업적을 칭송하는 글을 墓誌石에 남겨 後孫들로 하여금 公의 훌륭한 遺業을 널리 기리도록 하였다. <忠烈王이 墓地石에 襄烈公의 遺德을 기리는 哀悼詩>英英鄭公人中之龍   性寬膽大色溫貌恭   克勤乃職惟正之供  四方奔命一節匪躬   功高壁上位極侍中   富貴壽考哀榮始終   門庭赫赫蘭玉蕙蕙   餘芳不盡百福攸同   宜刻厥石傳於無窮   정공이어 그대는 사람가운데 빼어난 용이로다.성품은 너그럽고 담대하며 모습은 온화하고 공손했으며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오로지 맡은 바 책임을 바르고 부지런히 수행하였다.공로는 벽상에 높이 올랐고 지위는 시중에 이르렀다.부귀에 천수를 누리며 슬프거나 영광스럽거나 한결 같았고 가문은 크게 빛나 자손들이 번창하였으니 남은 향기 다하지 않았어도 마땅히 돌에 새기어 오래도록 후대에 전하려 한다.                        2011년     월      일                               瑞山鄭氏大宗會 文史硏究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