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임란창의 사적비문 이서

by 정성천 posted May 1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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陜川壬亂 倡義事績碑文(합천밈란 창의사적비문)2012년 정성천 이서
 나라가 平和로우면 뜻을 펴서 그 繁榮에 힘을 보태고 어지럽거나 危殆로우면
憤然히 일어서서 그 收合에 身命을 바친다.國家에 興亡이 있고 民族에게는 盛
衰가 있다는것을 알기에 이땅 陜川 고울의 사람들은 歷史의 고비마다 樂善好義
하는 美德으로,내 나라 내 겨레 내 고장을 온몸으로 가꾸고 다듬고 지켜왔다.
 그 중에서도 고울안 男女老少 모든 사람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섬나라 오랑
캐의 침입에 항거한 壬辰倭亂은 피눈물로 되새겨지는 民族의 受難이 아닐 수
없다.壬辰丁酉 7年戰爭이라고도 하는 이 史上 未曾有의 戰爭은 朝鮮王朝 宣祖
25年(1592)4월13일 倭軍이 釜山浦에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다14일釜山鎭城 
에 이어 이튼날 東萊城을 함락시킨 倭軍은 마치 疾風처럼 드센 기세로 이 나라
江山을 짓밟으면서 북상했지만 우리의 官軍은 가랑잎 마냥 맥없이 敗走만 거듭
했다.1백여 년 동안 群雄割據하는 戰國時代를 거치면서 倭人들은 殺傷의 戰爭
에 단련된 集團戰術과 新武器인 鳥銃으로 무장하고 모두 9개 軍團으로 나뉜
15만9천명이 이땅에 상륙하고,水軍과 後方豫備兵力까지 약 30만5천명에 이
르는 空前의 大兵力이 總動員 되었다.이에 비해 우리는 太平烟月를 구가하고
富國强兵을 소홀히 하여 戰爭態勢를 전혀 갖추지 못한 형편 이였다.
官軍이 무너지자 民衆이 일어섰다. 선비는 붓을 던지고 농부는 괭이를 팽개
치고 창과 칼을 잡고 싸움터로 달려갔다. 이것이 義兵이다.義兵은 온 나라안에
서 陜川이 가장 먼져 規模를 갖추어 일어났다.고울안의 선비들이 來庵 鄭仁弘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四方에 檄文을 띄웠다.敬과 義를 主旨로 하는 實踐儒學의
巨儒 南明 曺植의 高弟인 鄭仁弘은 掌令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後進養成에 전념 
하고 있었다.그는 同門인 郭율.金沔.등과 뜻을 같이하고 陜川을 비룻하여
草溪.三嘉.居昌.安陰.咸陽.高靈.星州등 이웃 고울에 通文을 보내자 그의 門人 
인 朴而章.河渾.權瀁.曺應仁.文弘道등을 核心으로 本郡義兵만 해도1천6백 여명
 의 장정이 모여들었다.觀察使 金쉬는 陜川.三嘉.草溪.高靈.星州등 5邑 軍隊를
 그에게 소속시켜 주었고,前僉使 孫仁甲을 보내 中衛將으로 삼도록했다.
후에 高靈선비 金應聖이 1천명의 군사를모아 麾下에 들어왓고,招諭使 金誠一에
 의해 金沔과 더불어 義兵大將의 직책을 부여 받았으며,宜寧義兵將 郭再祐와 함께
 嶺南三大義兵大將의 일컬음을 듣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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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草溪와 三嘉에서도 義擧를했으니,草溪에서는 5월 초순에 全致遠.李大期
등이 주동이되어 일어났고,三嘉에서는 尹鐸.銑 從兄弟 朴思齊등이 앞장서
서 募兵을하고 軍糧을 모았다 5월하순에는 鄭仁弘 義兵軍은3천명 精銳軍士
를 헤아리는 戰鬪能力을 갖추게되었다.宜寧의 郭再祐,居昌의 金沔 草溪의 全致遠.
李大期,高靈의 金應聖,星州일면을 지키는 文勵.李弘宇등 義兵將들과
연계하면서 右道일대의 討伐作戰을 총괄하여 수행하게 되었다.
陜川 義兵은 내 고장만 지킨다는 防禦爲主의 態勢에서 한 걸음 나아가 險峻
한 右道의 地形地物을 이용해여,이 땅에서 侵略軍을 물리쳐야한다는 積極的 
이고 戰術的 차원의 作戰을 전개하였다.첫째는 敵軍의 生命線인 洛東江水路를
차단하고,둘째는 穀倉地帶인 湖南 진출을 저지함으로써,壓倒的으로 우세한 敵軍
의 사기를 꺽으며 擊滅하는데 주력했다.아울러 全國 義兵倡起의 嚆矢가 되고,
 패퇴만을 거듭하던 官軍의 反擊態勢를 갖추게 하는 동시에,明나라 支援軍이
 도래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여, 전세를 역전하는데 이바지 하였다.
 主要 戰鬪를 들어보면 茂溪津 戰鬪,蛇院洞 伏兵 作戰,草溪 戰鬪,玄風 戰鬪,
安諺譯 戰鬪,晉州城 赴援作戰.半年에 걸친 星州城 收復作戰,나아가 開寧의7番隊 
本陣 攻圍作戰등 수많은 싸움에서 莫强한 倭軍을 맞아 오직 決死 抗爭하여
 당당하게戰鬪에 임해 놀라운 戰果를 올렸다.
丁酉再亂 때는 全國的으로 擧義가 전무함에도 유일하게 倡義起兵하여 구원차 도래한
明軍의 嚮導가 되어 作戰을 원만하게 수행하도록 지원하였으며,7年戰爭을통해서엄청난 
文物을 掠奪당하였으나 끝내 이 고장을 防圍하는데 世界的文化 遺産인 海印寺
八萬大藏經을 戰火와 掠奪에서 온전하게 지켜내었다.
그로부터 400여년,世界戰史上 類例없는 참혹한 國際戰爭인 壬辰倭亂을 격으면서
우리의 祖上님들이 얼마나 의롭게싸웠던가를 새삼스럽게 보는 모임을 가졌다. 뜻있는
몇 몇 분이 앞장서서 陜川壬亂倡義記念事業會를 결성한것이다 이 모임에 주동이
 되어 돌을 깍아 來歷과 動功을 새기고 ,祠堂을 지어 倡義將과 義士님 110위와
아울러 荒凉한 戰場터에서 이름없이 散華한 無名勇士님들의 忠魂義魂을 奉安하게 되었다.
祖國이 興亡의 기로선,그날 오직竭忠報國 殺身成仁의 불꽃으로 활활타올라,民族正氣를
 宣揚하시고 나라와 겨례의 守護神이 되신 英靈들이시어 ! 부디 萬世토록 이 나라
 ,이 겨레, 이 고장을 지켜주옵소서

倭敵을 물리친지400돌이 되는 戊寅 1998년 寒露節
 成均館長 國際儒學聯合會 理事長 崔根德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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