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리학의 기원과 서산

by 정성천 posted Oct 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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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리학의 기원과 瑞山

-鄭臣保의 남송성리학 고려 전래를 중심으로-
최영성(한국전통문화대학교)
Ⅰ. 고려시대 귀화인의 역사적 의미
‘귀화’의 사전적 의미는, 외국인이 국내에 들어와 영주하면서 내국인으로 동화되는 것을 말
한다. 귀화는 문명 교류사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대로 정치적 선전에도
이용되었으니, 역사서에 등장하는 ‘투화(投化)’나 ‘내투(來投)’ 등의 기사가 그것을 뒷받침한
다. 정치적, 문화적으로 자신감이 있는 나라일수록 귀화인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높았다. 문
화 교류의 필요성에 따라 귀화를 유도하는 경우가 상당하였다. 문명사학자 정수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275개(1985년 통계) 성씨 가운데, 귀화성이 136개나 된다고 한
다. 절반가량이다. 또 절대다수인 130개가 중국계이며, 시대별로는 신라 때 40여 개, 고려
때 60여 개, 조선시대에 30여 개의 귀화성이 생겨났다고 한다.

고려에서는 초기부터 인재 확보라는 자국의 필요성에 따라 중국의 지식인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였고 귀화인에 대한 우대정책을 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고려에 과거제를 도입하
도록 한 후주(後周) 출신의 쌍기(雙冀)다. 고려사 열전에 등재된 10명의 귀화인은 쌍기의
경우처럼 고려의 필요에 따라 고려로 온 사람이 대다수다. 고려는 주체적 구심력이 강했다.
초기에는 ‘오는 자는 막지 않는다’(來者不拒)는 다소 소극적인 정책을 폈지만 나중에는 귀
화인의 수용 및 관리 정책을 적극적으로 폈다. 그 결과 많은 귀화인이 고려의 품에 안겼다.
그들은 고려의 문화 발전 및 외교·교육·과학․기술 등 여러 면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귀화인 가운데 문교상으로, 정치상으로 고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례를 꼽으라고 한다
면, 필자는 위에서 말한 쌍기와 이정(二程)의 학문을 고려에 전한 남송 출신 정신보(鄭臣
保)를 먼저 꼽고 싶다. 정신보는 1237년 충청도 서산 간월도에 정착한 뒤 고려에 귀화하였
고, 그의 아들 정인경(鄭仁卿: 1237∼1305)은 불세출의 정치가요 외교관으로서 14세기 누
란(累卵)의 위기에 빠진 고려를 구원하였다.

Ⅱ. 남송의 금화(金華)에서 서산 간월도까지
고려 고종 24년(1237), 남송의 한 관료가 몽골의 회유와 압박을 피해 뱃길로 고려국 서산에
들어 왔다.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낸 삼십 대의 정신보가 그 사람이다. 그는 서산에
정착하여 고려 학인들에게 성리학을 전수하였다. 첨의밀직사사(僉議密直司事)를 지낸 채모
(蔡謨: 1229~1302)는 「원외랑 묘갈명」에서 정신보가 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의 학
문을 고려에 처음으로 전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정신보는 남송의 명문 포강정씨(浦江鄭氏)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문치(文治)를 기조로 한 남송은 세력이 강한 몽골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몽고의 침략을 자주 받아야만 했다. 이에 남송은 때로는 화의(和議)를, 때로는 항전
(抗戰)을 통해 사직을 지켜냈다.

정신보가 주로 활동했던 때는 남송의 제5대 황제 이종(理宗: 재위 1224~1264) 연간이다.
그 시기 북쪽의 몽골 고원에서는 몽골 제국이 급속도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1234년 몽골은
남송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그 뒤 몽골이 일시 북쪽으로 물러나고 남송 군이
북상, 낙양(洛陽)과 개봉(開封)을 점령하였다. 몽골은 남송이 평화조약을 위반하였다 면서
여러 번 남송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남송의 명장 맹공(孟珙)에게 고전하는 등 전쟁은 일진
일퇴를 거듭했다. 1260년에는 몽케칸의 친정군(親征軍)이 침공해 왔지만,전투 중에 몽케가
죽음으로써 몽골군은 회군 해야만 했다.
전후 50여 년에 걸친 남송의 항거는 끈질겼다. 역사가들은 대개 남송을 약체(弱體)로 평가
하지만, 남송보다 강성했던 금나라도 30년을 버티지 못하였다. 약체로만 보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정신보가 동래한 1237년은 남송의 멸망과는 거리가 있었던 시점이었다. 그가 남송
이 멸망할 기미를 파악하고 신절(臣節)을 지키기 위해 고려로 망명했다는 ‘정치적 망명 설’
은 설득력이 높지 않다.

그렇다면 동래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산 정약용은 정신보가 표류(漂流)했다고 하였다.
2) 또 평소 정신보에 관심이 많았던 석재(碩齋)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은 정신보가
가족을 이끌고 바다를 건넜다고 하였다. 3) 그러나 이 ‘표류 설’과 ‘정치적 망명 설’은 사실
과 다르다. 정신보의 현손 정제(鄭儕)가 찬한 「양렬공실기」에는 다른 자료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이 들어 있다. 「실기」는 정신보․정인경과 시간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현손이 직접 찬술한 것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위 「실기」에 의하면, 정신보가 원나라 세력에 의해 고려국 서산 간월도에 귀양 보내졌고, 이후 정신보가 고려에 눌러 있으면 서정 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4) 「실기」에는 간월도를 ‘적소(謫所)’라고 못박고 있다. 이 ‘귀양설’은 후일 정신보의 후예로 조선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이 뒷받침함
으로써 무게를 실어주었다.
5)정인홍은 광해군 9년(1617)에 유근(柳根) 등이 왕명을 받아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편
찬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노력에 의해 자신의 선조 정신보의
충절을 담은 ‘신보도해(臣保渡海)’ 조가 ‘몽주운명(夢周殞命)’, ‘길재항절(吉再抗節)’ 조와 함
께 당당히 입전(立傳)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정인홍이 ‘귀양 설’을 근거 없이 내세우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더욱이 중국에서 자기 나라 사람을 주변국인 고려 등 외국으로 귀
2) 여유당전서 제1집 권15, 「海防考敍」“鄭臣保漂至瑞山.”
3) 碩齋稿 권9, 海東外史, 「文可尙」“臣保挈家渡海.”
4) 鄭儕, 「襄烈公實記」“元世(太祖, 混一天下, 流刑部於海外萬里, 乃高麗國馬韓瑞州南去(看月島, 其謫所也.”(서산정씨가승 상, 7b)
* 이 「실기」는 오자가 散見된다. 또 후인이 붙인 주석이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한 예로 ‘高敞縣’을 “지금의 山德(德山이다”고 한 것이라든지, 오늘의 서산시 海美인 ‘餘美’를 “지금의 부여이다”고 주석한 것이 그런 예이다.
5) 來庵集 권13, 「高祖考務安縣監府君墓銘」“公諱成儉, 字□□, 其先浙江人也. 浙江之鄭, 實出榮陽,以國氏也. 八世祖諱臣保, 仕宋爲刑部員外郞. 宋亡, 元人謫刑部于高麗瑞州月島, 始爲國人.”(문집총간43)

양을 보낸 사실이 있었던 점에 비추어 ‘귀양설’은 설득력이 있다.
역사적 사례를 보면, 충렬왕 6년(1280)에 원제(元帝)가 황태자 애아역(愛牙亦)을 대청도
(大靑島)로 귀양 보낸 일이 있다. 6) 또 충렬왕 18년(1292) 3월에는 원나라에서 반란 사건
의 일당인 합단하(哈丹下)․ 아리독(阿里禿) 대왕을 잉분도(芿盆島)로 귀양 보냈다. 이어 4월
에는 탑야속(塔也速)을 백령도에, 도길출(闍吉出)을 대청도에, 첩역속(帖亦速)을 오야도(烏
也島)에 각각 귀양 보냈고, 며칠 뒤에는 합단 하 대왕을 다시 영흥도(靈興島)와 조월도(祖月
島)에 귀양 보냈다고 한다. 7) 비록 원나라시기에 이루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정신보
가원의 세력에 의해 고려 국으로 강제 추방된 사실을 방증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정신보가 고려 간월도에 정배된 이유는, 그가 원나라의 회유에 응하지 않고 남송에 대하
여 고절(苦節)을 지키려 한 데 있었다. 관신공(寬愼公) 채모(蔡謨)가 찬한 「원외랑 묘갈명」
에 의하면, 당시 원나라 태조는 정신보의 고명(高名)을 듣고 낙양 출신 요추(姚樞: 1202~
1279)를 시켜 그를 만단으로 회유하였으나 정신보가 원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하자,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원태조는 그릇이 큰 인물
이라 정신보의 기개를 높이 샀지만, 그 휘하 사람들은 정신보를 위험인물로 여기고 그를
제거하려 들었을 것이다. 정신보의 유배는 남송 조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원태조 휘하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은밀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사실상의 강제 추방이다. 당시 덕안(德
安)에 살던 명유 조복(趙復)이 원나라의 침략 당시 포로가 되어 북원(北元)으로 끌려가 정
주의 성리학을 북쪽에 전파한 최초 학자가 된 것과 대비가 된다.
정신보가 강제 추방될 당시 나이는 대개 3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8) 이전에 그는 남송 조
정에서 형부원외랑을 역임하였다. 원외랑은 육부에 소속된 6품직의 벼슬이었다. 30대라는
나이에 비해 빠른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도해(渡海) 이전 정신보는 가정을 이루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고려로 올 때 가족
들을 데리고 왔다는 기록은 없다. 고려에 온 뒤 고려 출신 오영로(吳永老)의 딸 고창오씨
(高敞吳氏)를 만나 아들 인경과 준경을 낳아 오늘날 ‘서정(瑞鄭)’의 기원을 이루었다. 그가
설가(挈家)를 하지 않은 것은 자의에 의한 ‘정치적 망명’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해준다. 유배
가 아닌 계획적 망명이었다면 그가 가족들을 데리고 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정신보의 며느리이자 정인경의 부인인 복주진씨(福州陳氏)는 위위윤(衛尉尹)을 지낸
진수(陳琇)의 딸이다. 정인경 묘지를 보면 “공은 처음 예빈윤(禮賓尹) 진수의 큰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고, 뒤에 그 둘째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다”고 하였다.
정인경의 전처와 후처가 친자매임을 알 수 있다.

정인경의 장인 진수는 본디 남송 사람이며 고려에 귀양 온 ‘폄적인(貶謫人)’ 9)이라 한다.
조선 정조 때의 학자 여와(餘窩) 목만중(睦萬中: 1727~1810)도 「원외랑․양렬공 합전」에서
진수를 ‘천인(遷人)’ 10)이라 하였다. 진수가 고려에 귀양 온 이유는 무엇일까? ‘북로(北虜)’인
6) 옹진군향리지 편찬위원회, 甕津郡鄕里誌, 인천광역시 옹진군, 1996 참조.
7) 고려사 권30, 세가 제30, 충렬왕 18년(1292) 3월 무오조 ; 4월 계해조, 4월 경오조 참조. 8) 의문정씨 동거 제1세조 정기의 생년은 1118년이다. 그의 형 정온(충응거사)이 그보다 2~3세 위일 것으로 추정할 때, 정온의 증손 정신보는 대체로 1205년을 전후한 시기에 태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1대 30년 기준). 원나라를 섬긴 요추와 동년배였을 것이다.
9) 鄭儕, 「襄烈公行狀」“妻陳氏, 乃唐福州人,衛尉尹致仕陳琇女也.此亦宋州(朝)貶謫人也.”(서산 정씨가승 상권, 8a)

원나라에 협조하지 않고 남송에 신절(臣節)을 지키다가, 저들의 미움을 사서 천리 타향인
고려로 귀양을 오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정신보가 같은 폄적인 출신을 가려 혼인 관계를
맺었던 것은, ‘의리사상’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진수의 큰 딸이 죽자
작은 딸을 후처로 맞아들인 데서 정신보와 진수 집안의 가도(家道)가 엄격하고 철저하였음
을 엿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남송 사람들의 고려 이주 사례가 적지 않았음과, 이주민
들이 혼맥 등을 통해 하나의 집단으로 뭉쳐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였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
겠다.


Ⅳ. 귀화(歸化)와 이후의 활동

정신보가 간월도에 오기까지의 역정이라든지, 간월도에 도착한 이후 어떤 생활을 했는지
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소주(蘇州)․항주(杭州)를 출발, 절강성의 대표적 항구인
영파(寧波)를 통해 물길을 거슬러 한반도의 서산까지 왔을 것이라는 윤용혁 교수의 선행 연
구가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영파를 통한 항해는 당시 고려와 송나라 사이의 일반적인 노선
이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강제 추방인 만큼 정상적인 항로가 아닐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
한다.
간월도에서의 정신보의 생활은 간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만리 타향에서 생활하면서 말
이 통하지 않아 겪었을 어려움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 도학(道學)으로 자임했던 정신
보는 간월도에서 강학 활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대사동(大寺洞)으로 옮겨 간 뒤에는 더욱
활발하였을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여 성리학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
이 매우 드물었다. 이 때 그는 생도를 모아 성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남송 시
기 성리학의 온실이요 금화학파의 본거지였던 절강11) 출신 정신보가 고려에서 뿌리를 내리
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정주성리학의 전파였는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하여 채
모는 「원외랑 묘갈명」에서 “동방 사람들이 이정(二程)의 저술을 비로소 보게 되었다”고 하
였다. 목만중은 「원외랑․양렬공 합전」에서 정신보의 성리학 창도(倡導)를 ‘개황지공(開荒之
功)’에 비하였다. 이 때는 안향이 연경으로부터 성리학을 들여왔던 1290년에 비해 약 50년
이 앞선다.

강학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정신보의 명성이 고려의 사인(士人)과 관인(官人)들 사이에
알려졌고, 마침내 그들의 인정을 받은 것 같다. 고창오씨 집안의 저명한 인사로 위위승동정
(衛尉丞同正)을 지낸 오영로12)가 그를 눈여겨 보게 되었고, 마침내 정신보를 사위로 삼기
에 이르렀다. 오영로는 고려 의종․명종 때의 석학이자 문장가로 유명했던 현정(玄靜) 오세재
(吳世才: 1133~1187)의 손자이다. 1292년에 작성된 정인경의 준호구(准戶口)에 따르면,
10) 서산정씨가승 상권, 6a ; 餘窩集 권16 참조(문집총간 속집 제90권, 310~320).
11) 朱熹․張栻과 함께 東南三賢으로 꼽혔던 呂祖謙(東萊: 1137~1181)은 절강성 金華府 출신이다.
이후 절강성은 金華學派의 본거지가 되었다. 黃榦주자의 문인)의 계통을 이은何基․王柏․金 履祥․許謙은 금화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세칭 ‘金華四先生’이라고 한다.12) 1292년에 작
성된 정인경 준호구에 의하면 오영로의 古名은 ‘愈然’이다(서산정씨가승). 정인경의 증
손 儕가 찬한 「양렬공 행장」에는 “오영로는 고창현 사람이다”고 하였고, 同註에 “고창은 지금의 山德(德山의 오기인 듯)이다”고 하였다. 후손들은 이에 근거하여, 정신보가 당시 충청도 덕산에 살던 오영로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거가 충분한
것 같지 않다.

당시 정인경의 모친 고창군부인 오씨의 나이가 72세로 되어 있다. 서기로 환산하면 1221년
생이다. 정신보와는 15세 가량 차이가 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한 지 5년째 되던 고종 28년(1241, 辛丑) 8월 정신보의 장남 인경이 태어났다.13) 그
로부터 10년 뒤인 고종 38년(1251, 辛亥) 2월, 마침내 간월도 생활을 청산하고 서주(瑞州)
대사동(大寺洞)으로 거처를 옮겼다. 비로소 고려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정신보는 대사동에
살면서 늘 망운(望雲)의 심사를 달랬다. 뒷날 정인경이 망운대(望雲臺)를 쌓고 부친의 뜻을
이었으니, ‘기부기자(其父其子)’라 할 것이다. 망운대는 당나라 때 공신 적인걸(狄仁傑)의
고사를 딴 것이다.

14)정신보가 생각한 고려는 일찍이 공자가 ‘승부부해(乘桴浮海)’15)하려 했던 곳이었다. 또
몽고의 침략을 받아 수십 년 동안 끈질긴 항쟁을 하면서 국맥(國脈)을 유지해온 나라였다.
이에 그는 조국 남송을 사랑하는 마음을 고려로 돌려 귀화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되
었다. 후학들의 교육에 힘쓰면서 한편으로는 노구(老軀)를 이끌고 국가에 봉사하였다. 원종
10년(1269)에는 육십 대의 나이에 지금의 의주(義州)인 인주(麟州)의 태수가 되어,16) 국토
방위의 일선에 나가기도 하였다.

정신보는 성리학으로 아들 정인경 및 후학들을 가르쳤다. 남송 성리학은 북방 오랑캐의잦은
침략 속에서 체계화되었기 때문에 ‘의리사상’이 유난히 강렬하였다. 이 의리사상은 춘추의
‘복구사상(復仇思想)’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였다.17) 정신보의 집안이
본디 춘추 학을 가학으로 하였던 만큼(이하 後述함), 춘추대의는 정신보 교학사상의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정인경이 열 살 때 지었다고 하는 시를 보면 부사(父師)의 가르침이 어떠 하 였는 지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胡塵漲宇宙 오랑캐 먼지가 온 천지에 가득한데
萬里落孤臣 만리에 유락한 외로운 신하.
何日乾坤整 어느날 이 세상 바르게 되어
重回趙氏春 또다시 우리 조씨(趙氏)의 봄이 돌아올거나.18)
동사강목(東史綱目)을 보면 “정인경은 처음에 통역으로 이름이 알려졌다”19)고 한다. 이
를 통해 정인경이 가학으로 중국어(몽고어)를 습득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어 뿐 이겠
13) 고려사 권107, 「정인경 열전」및 「정인경 묘지」 서산정씨족보 등에서는 정인경의 생년을 1237년이라 하였고, 1292년에 작성된 호구단자 및 鄭儕의 「행장」에서는1241년생아 이라 하였다. 관찬 사료에 신빙성을 부여하는 것이 학계의 통례이지만, 정신보가 渡東하던 해 들을 낳았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중국인 부인과 함께 고려로 왔다면 문제가 없지만, 고려 출신 여인을 만난 뒤 낳은 아들이라면 전후 정황으로 보아 무리가 많다. 족보는 오․탈자 가 많고, 전후의 기록에 차이 나는 것이 적지 않다. 눈 밝은 이들이 眞僞를 잘 분별해야 할 것이다.
14) 적인걸(630~700)은 당나라 초기의 공신으로 후일 梁國公에 봉해져 狄梁公으로도 불렸다. 그는 일찍이 태항산(太行山)에 올라 흰구름이 외롭게 떠가는 것을 보고 “내 어버이 집이 저 아래에 있다”며 구름을 슬프게 바라보았다는 ‘白雲故事’가 있다.
15) 논어, 「公冶長」“子曰, 道不行, 乘桴浮于海. 從我者 其由與!”
16) 고려사절요 권18, 원종 10년(己巳)조 참조.
17) 절강성 항주에는 복수와 원한의 화신 伍子胥의 사당이 있다. 오자서는 남송인의복수정신 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18) 李睟光, 지봉유설 권12, 文章部(五), 「元詩」19) 동사강목 권13, 충렬왕 31년(1305) 12월 卒記 참조.

계에 이르러 남방의 의리지학이 적극 수용되어, 북방 성리학 중심의 고려 학계가 새롭게 사
상적 전환을 하고, 이것이 배원 향명(排元向明) 정책을 뒷받침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볼때,
26) 정인경의 선구적인 위상은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Ⅴ. 서산 정신보 유적지의 활용 방안
서산시는 서해안 거점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지난 2006년 10월, 국제
종합무역항인 대산항이 개항하였고, 2017년 4월에는 충청권 최초로 국제여객선이 취항하게
된다. 물길이 완전하게 열리는 것이다. 하늘 길도 열릴 예정이다. 2016년 현재, 서산공항의
건설이 확정되었고, 민항(民航) 유치를 위해 시 당국에서 잰걸음을 걷고 있다. 물길과 하늘
길이 열리면 세계 각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서산을 찾아올 것이다. ‘다시 찾고 싶은 서산’을
위해 서산시에서 얼마나 사전 준비를 하여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관광객을 유치하려면 ‘먹
거리’, ‘즐길거리’, ‘볼거리’ 등 다양한 것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역사문화와 관련된
‘볼거리’가 많아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지리적 여건상 서산에는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을 의식하
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인들은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떼어놓고 말하기 어렵다. 저들은 대개
자국문화의 해외 전파를 ‘자존심’의 차원에서 이해한다. 이점을 잘 활용해야 한다. 잘 알려
진 바와 같이 서산은 신라 말의 사상가요 대학자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태수를 지
낸 곳이다. 최치원은 중국인들에게 지명도(知名度)가 가장 높은 우리나라 역사 인물이다.
2013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한・중 정상회담에서 최치원의 시 ‘범해(泛海)’ 일
부를 소개한 적이 있을 정도다. 최치원은 8∼9세기 신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인이자 국
제통이었다. 열두 살 때 당나라에 조기 유학하였던 그는 당시의 동아시아 공동어문학(漢文
學)의 수준을 가장 높이 끌어올린 신라인이었다. 당나라가 요구하는 기준에 도달했던 외국
인이었다. 이렇게 볼 때 최치원은 한·중 간의 친선과 우의를 상징하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최치원의 유적지를 개발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부성산성(富城山城)의 발굴이 그
시금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 함께 중국의 성리학을 한반도에 처음으로 전한 정신보의 유적지를 개발하는 것이 반
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최치원은 동방에서 태어나 서국(西國: 중국)에 유학 가서 ‘동방에 문
화가 있고 인물이 있음’을 알린 사람이요, 정신보는 중국에서 고려로 옮겨와 이국땅에 새
학술문화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다. 둘 다 문화교류의 아이콘이다. 현재 서산에 남아 있는
최치원 유적지가 적은 데 비해 정신보의 유적지는 그 후손들에 의해 비교적 잘 보전되어 왔
다. 정신보의 무덤과 그 아들 정인경의 의관총(衣冠塚)을 포괄하는 묘역을 잘 정비하여, 필
수 관광코스로 개발하면 좋을 듯하다. 아울러 묘역 주변의 부지에다 서산정씨의 본향(本鄕)
인 중국 절강성의 강남 제일가(江南第一家)를 축소, 재현하는 것은 중국인들의 발길을 끊어
지지 않게 하는 방안의 하나라고 본다. 서산에 포강정씨의 강남제일가가 재현된다면, 영화
나 드라마의 세트장으로도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서산정씨 대종회와 협의할 필요가 있다.
동방에서 태어나 동방의 존재 의미를 서국에 한껏 알린 최치원, 그리고 당시 중국의 선진
26) 윤남한, 「유학사」 한국문화사신론, 중앙문화연구원, 1975, 468쪽 참조.

학문이던 성리학을 최초로 동방에 전한 정신보를 서산의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양대 축으로
삼아 나가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서산이 국제도시로 발돋움하는 데 기반이 될 것이다. 한 마
디로, 한국의 역사문화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을 끌어 올리고, 아울러 중국인의 자존심까지
배려하는 것이 최상의 방안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