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시 유래비 건립

by 정성천 posted Jul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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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시 유래비 건립 문

2015. 2. 27.
양렬공 정인경선생 기념사업회 (http://www.jeongik.kr/)
사회 | 강문수
개식선언 사회자
국기에 대한 경례 참석자 일동
경과보고 기념사업회 부회장 김형순
한국사에 나타난 서산의 역사 한국 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최영성
식사 기념사업회 회장 문철주
축사 서산시장 이완섭 서산시의회 의장 장승재
인사 서산정씨 대종회장 정포부
제막 참석내빈
폐식
식 순
[전면 비문]
서산(瑞山) 지명 유래비
서산시는 본디 백제의 기군(基郡)이었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부성군(富城郡)으로 고쳤다. 신라 말 엽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부성군 태수를 역임하였다. 고려 인종 때부터는 현(縣)이 되었다. 명종 12년(1182) 부성현의 현령(縣令)과 그 보좌관인 현위(縣尉)가 대립, 갈등함으로써 현민(縣民) 들의 고통이 컸다. 이에 백성들이 봉기하여, 아문(衙門)을 폐쇄하고 현령과 현위를 감금했다. 무신정 권은 부성현을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고을을 없애고 관호(官號)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충렬왕 10년(1284)에 부성현 출신 양렬공(襄烈公) 정인경(鄭仁卿 : 瑞山鄭氏 始祖)이 국가에 끼친 공로를 인정하여 서산군(瑞山郡)으로 독립시켰다. 102년만의 복군(復郡)이었다. 정인경은 남송(南宋)에서 고려로 귀화한 성리학자 정신보(鄭臣保)의 아들이다. 문무를 겸전했던 정인경은 누란 (累卵)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고, 충렬왕이 세자로 있을 때부터 그를 지성으로 받들었다. 충렬왕은 즉위한 뒤 정인경의 공을 여러 차례 기리고 은전을 베풀었다. 가장 큰 포상은 1백여 년 동안 관호가 없이 내려오던 부성현을 독립시키고 군으로 승격시킨 일이다. 충렬왕은 복군을 단행할 당시 ‘상서롭다’는 의미를 넣어 ‘서산군(瑞山郡)’이라 명명하였고, 충렬왕 34년(1308)에는 서주목(瑞州牧) 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서령(瑞寧)’으로 이름이 바뀐 적이 있지만 조선 태종 13년(1413)에 다시 서산 군이 된 이후 지금까지 그 이름을 유지하여 왔다.
정인경이 세상을 떠난 뒤 서산 백성들은 정인경의 공을 기려 해마다 제사를 받들었다. 조선조에는 성황신(城隍神)으로 모셨다. 서산의 향리(鄕吏)들은 매년 성황제 때 정인경의 관복을 관아 앞에 걸어놓고 황소를 잡아 제사를 올렸다. 그 날은 군수도 공무를 쉬면서 정인경을 추념하였다.
그 세월이 3백년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성황제는 단절되었다. 향화(香火)가 끊긴 지 4백년이 훨씬 넘은 2012년 제11회 해미읍성 역사체험축제장에서 정인경에게 고유제를 올림으로써 전통을 오늘에 되살 렸다. 서산이란 이름을 얻게 한 정인경의 성덕(盛德)은 꺼지지 않고 서산시민의 마음 속에 영원히 전할 것이다.
[이면] 서산지명 유래비는 서산시민의 역사적 정체성 확립과 양렬공 정인경선생의 공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서기 2015년 2월 1일
한국 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최 영 성 글을 짓고 양렬공 정인경선생기념사업회장 문 철 주 추진하여 서 산 시 장 이 완 섭 세우다.
서산지명 유래비 입비취지문
충청남도 서북단에 있는 서산시는 근자에 들어 인구 20만 명에 육박하는 비약적인 시세(市勢)를 보이고 있다. 천혜(天惠)의 기후 풍토와 넉넉한 생산자원, 그리고 시민들의 근면 성실함 때문에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낙토서산(樂土瑞山)’이란 슬로건이 시민들의 가슴 속에 다가온다.‘ 상서로운 땅’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도약하고 있으며, 장차 웅비(雄飛)할 날이 도래하리라고 믿는다.
서산이 오늘에 이르게 된 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이제 근본을 되돌아보고 서산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뿌리 없이 가지와 잎이 무성할 수 없듯이, 자신의 근본을 제대로 알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역사를 소중하게 지키고 가꾸어 나갈 때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 에서 서산의 유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백제의 기군(基郡)이었던 서산은 통일신라 때에는 부성군(富城郡)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고려 인종 때에는 현령을 두었다. 그러다가 명종 12년(1182) 부성현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났고, 무신정권은 민란을 진압한 뒤 배반의 땅인 부성현을 없애고 이웃 고을의 속현(屬縣)으로 만들었다. 고을의 총책임자인 현령(縣令)과 교육을 전담하는 현위(縣尉)의 심각한 갈등으로 빚어진 민란은 고을 백성들에게 고통만 가중시킨 채 비극 적인 결말을 보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102년이 지난 충렬왕 10년(1284)에 서산군(瑞山郡)으로 복군(復郡)되었다. 부성현 출신 양렬공 (襄烈公) 정인경(鄭仁卿)이 국가에 끼친 공로 때문이었다. 정인경은 남송(南宋)에서 고려로 귀화한 성리 학자 정신보(鄭臣保)의 아들로, 고려 조정에 나아가 최고의 외교가ㆍ정치가로 활약하였으며, 벼슬이 수상 (首相)에 이르렀다.‘ 상서로운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의미를 담은 서산의 이름은 사실상 정인경의 공로로 얻어진 것이다.
정인경 때문에 서산이 배반의 땅에서 상서로운 땅이 될 수 있었다. 정인경의 아버지 정신보는 고려 땅에 처음으로 정명도(程明道)ㆍ정이천(程伊川)의 성리학을 전한 사람이다. 주자학이 아직 체계화하기 이전의 일이다. 정신보가 오늘의 서산 간월도(看月島)에 정착하여 고려 학인들에게 이정(二程)의 성리학을 전파 하였던 1237년(고종 24년)은 안향(安珦)에 의해 원나라로부터 주자의 성리학이 처음으로 고려에 전해졌건 1290년보다 53년 앞선다. 한국유학사를 새로 써야 할 사건이 서산에서 일어난 것이다.
아버지 정신보는 성리학을 최초로 이 땅에 전하여 고려가 문교(文敎)의 혜택을 입도록 하였고, 아들 정인경은 누란(累卵)의 위기에 빠진 고려를 구출해 냄으로써 그 성명(盛名)이 천대에 이어지도록 했다. 이 두 분 선현의 공로는 서산의 역사에 길이 기록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전 국민이 기억해야 할 것 이다. 서산시민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존경해야 될 선현을‘ 서산정씨’로 구기고 좁혀서 접근 하는 것은 매우 경계해야 될 일이라고 본다.
미래의 주역인 젊은 세대에게 서산의 역사를 알리는 것은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유래비를 세우는 것은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쉬운 글로 써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세우는 것이 좋다. 뿌리를 알고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다. 서산유래비의 건립이 서산시민이 대동단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14년 3월 일
한국 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崔 英 成
역사 속의 서산 - 서산유래비 건립과 즈음하여 -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충청남도 서북단에 있는 서산시는 근자에 들어 인구 17만 명을 넘어섬으로써 비약적인 시세(市勢)를 보이고 있다. 천혜(天惠)의 기후 풍토와 넉넉한 생산자원, 그리고 시민들의 근면 성실함 때문에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낙토서산(樂土瑞山)’이란 슬로건이 시민들의 가슴 속에 다가온다.‘ 상서로운 땅’이 라는 이름에 걸맞게 도약하고 있으며, 장차 웅비(雄飛)할 날이 도래하리라고 믿는다.
서산이 오늘에 이르게 된 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이제 근본을 되돌아보고 서산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뿌리 없이 가지와 잎이 무성할 수 없듯이, 자신의 근본을 제대로 알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역사를 소중하게 지키고 가꾸어 나갈 때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 에서 역사 속의 서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백제의 기군(基郡)이었던 서산은 통일신라 때에는 부성군(富城郡)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고려 인종 때에는 현령을 두었다. 그러다가 명종 12년(1182) 부성현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났고, 무신정권은 민란을 진압한 뒤 배반의 땅인 부성현을 없애고 이웃 고을의 속현(屬縣)으로 만들었다. 고을의 총책임자인 현령(縣令)과 교육을 전담하는 현위(縣尉)의 심각한 갈등으로 빚어진 민란은 고을 백성들에게 고통만 가중시킨 채 비극 적인 결말을 보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102년이 지난 충렬왕 10년(1284)에 서산군(瑞山郡)으로 복군(復郡)되었다. 부성현 출신 양렬공 (襄烈公) 정인경(鄭仁卿)이 국가에 끼친 공로 때문이었다. 정인경은 남송(南宋)에서 고려로 귀화한 성리 학자 정신보(鄭臣保)의 아들로, 고려 조정에 나아가 최고의 외교가ㆍ정치가로 활약하였으며, 벼슬이 수상 (首相)에 이르렀다.‘ 상서로운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의미를 담은 서산의 이름은 사실상 정인경의 공로로 얻어진 것이다. 정인경이 세상을 떠난 뒤 서산 백성들은 정인경의 공을 기려 해마다 고을 차원에서 제사를 받들었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정인경을 성황신(城隍神)으로 모셨다. 서산인은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다. 정인경의 성덕(盛德)은 앞으로도 꺼지지 않고 서산시민의 마음 속에 영원히 전할 것이다.
정인경은 서산의 아버지다. 정인경 때문에 서산이 배반의 땅에서 상서로운 땅이 될 수 있었다. 정인경의 아버지 정신보는 고려 땅에 처음으로 정명도(程明道)ㆍ정이천(程伊川)의 성리학을 전한 사람이다. 주자학이 아직 체계화하기 이전의 일이다. 정신보가 오늘의 서산 간월도(看月島)에 정착하여 고려 학인들에게 이정 (二程)의 성리학을 전파하였던 1237년(고종 24년)은 안향(安珦)에 의해 원나라로부터 주자의 성리학이 처음으로 고려에 전해졌진 1290년보다 53년 앞선다. 한국유학사를 새로 써야 할 역사적 사건이 서산에서 일어난 것이다.
아버지 정신보는 성리학을 최초로 이 땅에 전하여 고려가 문교(文敎)의 혜택을 입도록 하였고, 아들 정인경은 누란(累卵)의 위기에 빠진 고려를 구출해 냄으로써 그 성명(盛名)이 천대에 이어지도록 했다. 이 두 분 선현의 공로는 서산의 역사에 길이 기록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전 국민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서산시민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존경해야 될 선현을‘ 서산정씨’로 구기고 좁혀서 접근하는 것은 매우 경계해야 될 일이라고 본다.
미래의 주역인 젊은 세대에게 서산의 역사를 알리는 것은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유래비를 세우는 것은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오늘 이처럼 좋은 곳에 유래비를 세우고 서산의 미래를 다짐하는 이 자리를 갖게 된 것을 축하하여 마지 않는다. 뿌리를 알고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다. 서산유래비의 건립을 계기로 서산시민이 더욱 대동단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양렬공 정인경선생 기념사업회 연혁 및 사업실적
○ 2004. 9. 24 양렬공정인경선생 기념사업회 창립총회 ( 회원 135명, 임원 14명) ○ 2004. 9. 24 초대회장 김종옥 취임 ○ 2004. 11. 17 제1차 양렬공 정인경의 연구서 발간 (생애업적 중심) ○ 2005. 9. 20 제2차 양렬공 정인경의 연구서 발간 (출자와 계몽활동 중심) ○ 2006. 3. 8 제2대회장 조인환 취임 ○ 2006. 11. 22 제1차 학술세미나 개최 (양렬공 정인경과 서산지역) ○ 2007. 10. 22 제3대회장 이영세 취임 ○ 2007. 12. 10 기념사업회 비영리단체 등록 (충남도지사) ○ 2010. 11. 4 제2차 학술세미나 개최 (사적현창과 문화자원 활용방안) ○ 2012. 2. 10 제4대회장 문철주 취임 ○ 2012. 4. 25 기념사업회 홈 페이지 개설(http://www.jeongik.kr/) ○ 2012. 10. 5 제11차 해미읍성 역사체험축제시 고유제 봉행 ○ 2012. 11. 30 제3차 학술세미나 개최 (한국 성리학의 기원과 정신보) ○ 2013. 10. 11 제12차 해미읍성 역사체험축제시 고유제 봉행 (합동) ○ 2013. 12. 6 서산의 역사 정체성 확립을 위한 역사위인 만화책 발간 배포 (서산을 빛낸 위인 정인경 : 관내 초·중학생 부교재 활용) ○ 2014. 5. 25 「한국 성리학의 기원과 서산」 책자 단행본 발간 배포 ○ 2015. 2. 1 「서산지명 유래비」건립 (서산시, 제막식 2015. 2. 27)
성 명 직 급 주 요 경 력 주 소 연 락 처
문철주 회 장
(전)서산시사회복지 협의회장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정동 317-1 대전드리움@ 2단지 208동 1306호
010-3485-3431
김형순 부 회 장
(전)서산시교육지원청 교육장 충남 서산시 동문동 423-14 041)662-2888 011-431-6359
정수도 상임이사 수도회관대표 충남 서산시 읍내동 545 041)666-0123 011-429-0125
박종성 이 사 풍림산업대표 충남 서산시 인지면 차리 694 041)662-7358 011-458-7358
이 성 이 사 (전)한서대학교대학원장
충남 서산시 고북면 용암리 458-2
041)688-6758 010-4451-6758
오세준 이 사 한서대학교교수
충남 서산시 팔봉면 장군산길 196
041)667-0080 011-436-0992
김정부 이 사 (전)서산시청 총무국장 충남 서산시 읍내동 323-5 011-408-5066
권학회 이 사 (전)삼성협력업체사장
충남 서산시 음암면 부산리 한성@ 104/1001
010-6231-7785
김기찬 이 사
(전)서령고등학교 교장 한서대학교교수
충남 서산시 음암면 문양리 504 041)664-8152 010-5451-1958
김종안 이 사
한서대학교 교육시설종합지원단장
충남 서산시 동문동 311-18 010-5431-3524
강문수 이 사
활란복지재단이사장 서산시사회복지협의회장
충남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293-15
041)663-1900 010-9877-1664
김정겸 이 사
서산시청 문화관광과장 충남 서산시 읍내동 관아문길 1 010-5425-2932
정영화 감 사
(전)서령고등학교 행정실장 충남 서산시 석림동 722-2 041)664-0570 011-456-0571
가명노 감 사 동양카독크대표
충남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481-1
017-335-2322
임 원 명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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