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촌공파/행정공파 관련 전설입니다.

by 杏木 posted Sep 1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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杏木님께서 작성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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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정씨 분통골 전설

옛날 추풍령아래 큰 마을이었던 김천의 봉산면 봉계 일대(지금의 김천시 봉계)에는 조선 초기에 개경(개성)으로부터 이주한 瑞山鄭氏들이 많이 살았다.
어느 날 鄭氏 집안에 초상이 났는데, 풍수의 말이 분통골에 명당이 있다고 하며 묘를 쓸 적에는 반드시 관을 11개를 묻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체를 넣은 진짜 관을 묻고 차례로 빈 관을 묻어 나가다 열 개째 관을 묻은 사람들은 한 개쯤 덜 묻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느냐며 마지막 한 개를 포기한 채 봉분을 만들고 말았다.
그런데도 瑞山鄭氏(서산정씨)들은 날로 번창해져서 벼슬이 높은 고관대작이 많이 났고, 뛰어나 학문에 모두 큰 부자가 되어 잘살게 되었다. 한편 조선 朝廷에서는 高麗朝의 명문 사대부 집안이었던 瑞山鄭氏들의 지방세력이 날로 번창해지자 逆賊 謀議(역적모의)라도 할까 봐 두렵게 생각하여 鄭氏(정씨)들이 번창한 이유를 알아보도록 했다. 뒤로는 극락산과 앞으론 금오산을 끼고 자리잡은 선조(先祖)의 묏자리 덕이라는 애기를 들은 王(왕)은 당장 묘를 파도록 어명을 내렸다. 묘를 파헤쳐 관을 열어 보니 빈 관이었다. 그 다음 관이 또 나와 열어 보니 역시 빈 관이 나왔고, 또 빈 관이 무려 아홉 개가 나왔다. 관아에서 나와 묘를 파헤치던 관리들은 빈 관만 거듭 나오자 지쳐서 파 기를 중단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한 관리가 기왕에 팠으니 꼭 한 번만 더 파 보고 또다시 빈 관이 나오면 그만 두자고 우겨서 마지막으로 삽질 을 하니 또 관이 나와 뚜껑을 열어 보니 보오얀 김과 함께 鶴(학)한 마리가 날아갔다.
이렇게 되자 서선정씨들의 가문은 차츰 기울기 시작하였는데, 당초에 풍수의 말 대로 관을 열한 개를 모두 묻었더라면 끝내 진짜 관은 보존되고 집안은 영광을 계속해 누렸을 것인데, 마지막 한 개를 묻지 않은 일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질 지경이라 하여 이곳을 후세 사람들은 \'분통골\'로 부른다. 분통골은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仁義里) 율수재 뒷골을 일컫는다.
(이 이야기는 고려시대의 명문거족이었던 서산정씨가 고려가 망한 후, 조선초에 지방(김천) 등지로 이거한 후, 날로 거 문중이 번창하자, 조선조정에서 많은 견제를 한 사실에 대해 우회적으로 생겨난 지역 전설로 해석되고 있다. 이가 바로 개성에서 김천으로 이거한 5대 부성부원군과 관련된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