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렬공 정인경 선생

by 정성천 posted Mar 2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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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렬공 정인경 선생
양렬공 정인경(鄭仁卿)선생은 고려 충렬왕때 벽상삼한삼중대광,추성정책 안사공신, 광정대부, 도첨의 중찬, 상장군, 판전이사사, 서산군에 봉해진 서산정씨(瑞山鄭氏)의 시조로 본관은 서산이요 자(字)는 춘수(春수)요 호는 간월재 (看月齋) 시호는 양렬 (襄烈)이다. 서산시 (瑞山市) 부석면 (浮石面) 간월도 (看月島)에서 1241년 (고려고종28) 8월에 태어나 1305년(충렬왕31) 12월 17일 졸하니 향년 65세요 묘지(墓地)는 서산시 성연면 (聖淵面)오사리 (梧沙里) 산 641-2번지다.(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왕조사, 정인경 묘지명 )

1256년(고종43)에 19세 나이로 몽고와 전투로 항몽 하며 국가수호에힘쓰고 망명하여 온 아버지로부터 외국어를 배워 능통한언어로 12차례 이상 외교사절로 원나라에가 약소국에 불리하고 힘든 정책조정과 국익 대변에 심혈을 기우렸으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 결과 평소의 인품과 성실함을 보여 원(元) 황제에 자세하고도 구체적이고 조리 있게 설득시켜 동녕부 (東寧府)를 찾아오니 국토의 약 1/4의 크기이다. (고사,절요,왕조사)

1269년 몽고가 원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세조가 황제로 즉위하여 축하사절로 갔던 세자 심[諶;후에 충렬왕(忠烈王)]이 귀국길에 파사부 (婆 娑府)에 이르렀을 때 무신정권 말기 개경으로 환도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원종(元宗;1260~1274)과 이에 자기세력 기반을 잃을까 염려를한 임연(林衍)등에 의해 원종(元宗 9)을 폐위한 소식을 듣고 수행원들이 고향의 부모 형제를 걱정하여 우왕좌왕 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있을 때 호위무관 겸 통역관으로 수행하던 정 인경은 인주수 (麟州守;현 신의주의 옛이름)로 있던 부(父) 정신보 (鄭臣保)에 밤을 타 조용히 강을 건너 국내사정을 상세히 듣고 와 그 상황을 세자에 자세히 보고하여 모두 받아 드리니 다수가 귀국 할 것을 주장했으나 정 인경이 홀로 단호히 세자의 귀국을 만류하고 아버지 정 신보와 협력하여 원종 (元宗)을 복위 시키고 세자 심을 무사히 귀국케 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찾아주고 무신 정권을 종식 시키는데 결정적으로 막중한 역할을 했다 친원파와 반원파의 알륵과 반목을 조정하여 국정을 안정시키니 나라는 정치적으로 평온을 찾게 되었다(고사. 절요. 왕조사) -1-

정 인경의 부(父) 정신보(鄭臣保)는 남송이 망할 무렵 형부 원외랑으로 있다가 몽고가 강성하여 중국대륙을 점령하니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고 몽고의 신하됨을 뿌리치고 1237년 (고종24)고려땅 부성 현 [富城縣;당시는 운주(運州)지금의 홍성땅] 간월도 (看月島)에 망명 하 였다.(고사.절요.세보)정인경의 모(母)는 위위승 동정 고창 오 (高敞 吳) 씨 오영노(吳永老)의 여로 현정(玄靜) 오세재(吳世才) 선생의 증손 여이다.부인은 예빈윤 우윤을 거친 진수 (陳琇; 여양진씨 시조 여양군 진총후 의 부)의 여와 혼인 4남 2녀를 두었다. (서산정씨세보, 고창오씨세보)정인경은 어려서부터 바닷가에 살면서 고기 잡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책상에 앉자 글 읽는 일에 몰두 하였다.1250년 (고종38) 9세에 가족이 간월도(看月島)에서 대사동(大寺洞;현 석림동, 석남동)남원 마을로 이사 했다.

이해 봄 도비산 (島飛山) 정원사 [正元寺;현부석사 (浮石寺)]에 올라 아버지가 그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던 고국을 바라보며 시 한수를 지어 바위에 새기니 신동이라 불렀다. 문수사 (文殊寺)를 왕래하며 문하 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한 한자희 (韓自喜) 선생에 글을 배웠고 14세가 되는 해 1254년(고종41)과거에 급제하고 무신정권 (1170 ~1270)의 횡포와 몽고와의 오랜 전쟁 (1231~1259)으로 지친 민중은 정치 경제적으로 몹시 피폐 했으니 당시의 생활은 형언하기 어려운 지경 이였다.(고사,호산, 청주한씨세보, 세보)

1256년 (고종43) 몽고의 6차 침입 때 신창 (新昌) 직산 (稷山)등에 주둔해있는 몽고군을 19세의 나이로 자원입대 천하 군 마별초군에 편입 되어 야습으로 크게 전공을 세워 제교에 보임되었다.(고사, 절요,왕조사) 이후 연이은 승진을 거듭하며 원종의 신임이 각별하여 항상 곁에 두고 떨어지지 않으려 했으니 원(元)나라에 갈 때나 국내에서도 항상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1272년(원종13) 32세로 원종의 호위 장군 겸 외교관으로 수행 하였고 원종 폐위 사건 후 두터운 신용을 받고 여러 번 승진 된다.1274년 34세에 충렬왕이 즉위하자 1등 공신으로 신임을 받아 흥위위(興威衛) 정용장군(精勇將軍)등으로 거듭 승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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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9년(충렬왕5) 장군 정인경은 정조부사(正朝副使)로 원 나라에 다녀 왔으며 1280년(충렬왕6) 40세로 군부판서 춘궁익위 판전에 제수되고 서산군 (瑞山君)에 봉해 진다(고사,절요,왕조사)
1281년(충렬왕7) 41세로 밀직부사 이존비(李尊庇)와 함께 원나라에 성절을 하례하고 원(元)수부의 전함수리 하는 일에 홍다구 (洪茶丘)의 지나친 횡포와 안하무인으로 권력을 남용하니 수부에서 일하는 민,군의 불평불만이 비등하였으므로 지나친 간섭을 하지 못하게 청원하여 원 황제로부터 허락을 받아왔다. (고사,절요,왕조사)

1282년(충렬왕8) 5월 42세로 1등공신의 격을 높여 삼한후벽상공신이 되고 토지100결 노비 5구의 추가 녹권을 받는다. 그해 9월 친종장군 (親從將軍)으로 중랑장 정복균 (鄭福均)을 대동 원나라 요양 (遼陽)과 심양(瀋陽)에가 오랜 전쟁으로 피랍된 유리 민과 물품을 찾아왔다.1283년(충렬왕9) 대장군 정인경은 별장 정량 (鄭良)과 원 나라 북경(北京)과 요양(遼陽)에 보내 피랍된 유리 민과 물품을 찾아왔다. 1284년(충렬왕10) 정인경의 고향 부성현 (富城縣)이 100 여 년간 운주 (運州;현 홍성)에 부속되어 군명도 없던 곳을 정인경의 공로가 크고 (고사,왕조사,호산, 세보) 공신노비 50구를 나라에 헌납하여 서주군 (瑞州郡), 서주목 (瑞州牧)으로 복군(復郡)되면서 승격되니 오늘날의 서산 (瑞山) 이란 지명을 있게 했다. (고사,절요,왕조사)

1182년 (명종12)년 과거 수령 때 반란의 폐해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흩어진 주민과 아전을 찾아 모아 전답을 주고 죄를 사해주니 새롭게 인구가 증가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져 정상 (鄭相;정인경 재상, 정인경 장군)의 공을 못 잊어서 정상(鄭相)의 기일에 군수는 군무를 파하고 주민과 관료가 군사(郡舍)에 보관했던 관복과 관대모를 진설하고 소를 잡고 목욕재계하여 자기부모 제사처럼 정성을 다해 모시길 300 여년을 이어 왔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경제가 극도로 어려워 제를 이을 수 없었으나 이제는 옛 축제를 되살려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이으며 정체성을 찾아주고 관광자원화가 필요하다고 보겠다. (고사,호산,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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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5년(충렬왕11)원에 사신으로 갔다 와 동정 (東征; 일본정벌)을 중지하였다고 보고하여 왕은 전함건조를 중단시켰다. 1286년 대장군 정인경이 원나라에가 신정 (新正)을 하례하고 피폐해져 어려운 고려 재정과 민심을 달래며 서민들의 삶을 도왔다. (고사,절요,왕조사)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과 원 세력에 의존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등 권력 쟁탈전에 혈안이 되어온 친원파 와 관료들을 조정하여 평온한 정치를 할 수 있게 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1287년(충렬왕12)응양군상장군 겸 군부판서에 오르고 1등 공신 단권을 받다. 춘궁익위판전, 판전부사가 되다. 1288년(충렬왕14) 세자 원 (言+原;후에 忠宣王)의 생일 축하 연회에서 왕과
더불어 춤을 추고 난장이 놀이를 했다.(고서, 절요, 왕조사, 정안록권) 앞서1269년 임연(林衍)등이 원종을 폐위 시킨 봐 있는데 이들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반역자 최탄 (崔坦) 이연령(李延齡)등이 군을 일으켜 주변 많은 수령과 관료 주민을 죽이니 서북면 (西北面)과 서경을포함한 북계 54성및 황해도 자비 령 이북 6성을 원나라에 갖다 바쳤다. (고사, 절요, 왕조사)

원(元) 나라에서 이 땅을 통치하는 기구로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고 고려를 간섭하니 고려를 사실상 지배 통제해 왔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 지나친 간섭과 발호가 심해졌으니 고려에서는 동녕부를 하루라도 빨리없애고 국토를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대한 지상 명령으로 여겼다. 정 인경은 원나라에서 통치하던 동녕부를 돌려받기 위한 목적으로 원나라에 갈 때 마다 원 (元) 대신들과 학문 교류와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는데 노력을 다해왔으며 본심이 어질고 성실함을 지켜본 황제의 신뢰를 얻어 무덕장군 (武德將軍) 정동성이문관 (征東省理問官)을 받음이 우연치 않은 일이다. 1289년 (충렬왕15) 상장군 정 인경은 봉익대부 (정2품 문산계관작)를 받고 삼사사 상장군이 된다. 1290 년 부지밀직사사, 전법판사에 오르고 오랜 전쟁으로 흐트러진 법과 제도를 새롭게 정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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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년 (충렬왕16)원 나라에서 통치하던 동녕부 (東寧府)를 돌려받을 때 정인경의 외교의 능란함과 개인적인 인품에 기인한 봐 크며 원나라 황제에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진술하여 돌려받게 되니 이에 충렬왕이 대단히 기뻐하여 부지밀직사사인 그를 돌려받은 땅 서북면 도지휘사에 이어 곧 서경유수를 겸하게 했다. 그해 12월 내안의 잔당인 합단군[哈丹軍;칭키스칸의 동생 합적온(合赤溫)의 후손들] 수만 명이 침입하여 쌍성총관부 (雙城摠管府)가 위협을 받고 등주(登州;안변) 화주(和州;영흥)가 함락 되어 왕은 강화도로 피신하고 고려 정부가 옮겨가니 이때 정 인경이 강화도에 머물러 살면서 정인경의 이름을 따 인 경리 (현 불은면 삼동리 일대)정 인경을 유수로 불러 유수 골이라 부르는 (현 삼동암리 박공재 남쪽) 곳도 있다. 강화군지에 상세히 기술되어있다. (고사,절요,왕조사)

1291년에는 합단군을 원주 (原州)와 연기 (燕岐)에서 원나라 지원군과 함께 크게 무찔러 1년여의 대전 끝에 섬멸하고 왕은 개경으로 환도 하였다 1292년 정인경은 우상시로 승진한고.1299(충렬왕25)4월 판 삼사정 인경과 판통 예문사 유거(柳거)를 원나라에 보내 인후(印候)가 거짓으로 무고 한 것을 밝히다. 그해 5월 판삼사 정 인경을 원나라에 보내어 사은 (謝恩)하다. (고사,절요,왕조사)

7월 도첨의 참리, 곧이어 도첨의 찬성사를 받는 다 12월 찬성사로 원 나라에가 신정을 하례하니 한해에 네 번을 승진하고 세 번씩이나 원 나라에 다녀오곤 했다. 나라의 다급함과 국왕의 신임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사, 절요. 왕조사)
이때 탐라를 원 나라로 부터 고려에 복귀시키며 제주도라 했다. 1302년 (충렬왕28) 찬성사 정인경은 최고의 관직과 관작을 받는다. 이름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 추성정책 안사공신, 광정대부, 도첨의중찬,상장군, 판전이사사, 서산군, (壁上 三韓 三重大匡, 推誠定策 安社功臣匡靖大夫, 都僉議中贊, 上將軍, 判典理司事. 瑞山君.)으로 공신당의 벽상에 초상화를 그려 걸도록 하였고 녹권을 받았다.(고사,절요,왕조사,묘지명) 1305년(충렬왕31)12월 17일 65세로 졸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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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년(충렬왕32) 양렬(襄烈)이라는 시호 (諡號)를 내리다. 4남 2녀를 두니 장남은 신유 (信王柔)로 증 찬성사 우문관대제학 행 판상서 상장군 이요 차남은 전의령, 신화, 신수도 모두 정 3품 이상 현관을 지냈으며 장녀는 평강 채씨 관신(寬愼)공 찬성사 채모 (蔡謨)의 차남 첨의정당문학 지밀직판도사사 판사 상호군 채종서(蔡宗瑞)에 차녀는 광산김씨 문정공 태현(台鉉)의 장남 총부의랑 (摠部議郞) 김 광식 (金光軾)이다. 겸손하고 부 지런 하며 온화한 인격에 원나라 황제로부터 무덕장군 (武德將軍) 정동 성이문관 (征東省 理問官)에 임명되기도 했다.

근면 성실하고 불편 부당한 정 인경에게 권력에 탐익한 총애 받던 내시의 시기로 4년간 귀양을 가니 유식한 사람은 모두 눈물지으며 아쉬워했다.(고사, 절요, 왕조사,정신보 묘갈명, 평강채씨 세보,광산김씨 세보, 묘지명) 사람을 반드시 가려 쓰는 형부의 좌집법 (左執法)을 세 번씩이나 겸직했다면 얼마나 성품이 곧고 강직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으며 원나라의 지나친 공여의 압력에 매빙사 (媒聘使) 초욱 (肖郁)의 금혼 령을 어기고 딸을 혼인시켜 전찬성사 송분(宋 王+分)과 해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연이은 부와 모상으로 6년 간 시묘(侍墓) 기간에 단한 번도 집에 내려오지 않했으니 효심의 지극함과 정성이 가히 비길 데 가없으며 공무 중에는 어떠한 어렵고 힘든 경우에도 사사로움을 뒤로 하고 공명정대함이 맑은물과 같았다.(고사, 절요, 왕조사, 세보)

정인경의 父 정신보 (鄭臣保? ~1271)는 남송이 망할 무렵 총각의 젊은 나이에 상서형부 원외랑 벼슬에 있다가 몽고가 강성하여 중국 대부분을 점령할 때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고 죽을지언정 북정에 신하가 될 수 없다고 거절하고 소항으로부터 고려 땅 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 (看月島)에 망명하니 1237년 고려 고종 24년이다. (고사, 세보) 정신보의 父는 예빈사 동정 (禮賓事同正) 수거 (秀 王+居)요 母는 태자첨사 (太子詹事) 최수랑 (崔守郞)의 여요 아내는 위위승 동정 고창오씨 (高敞吳氏)오영로(吳永老)의 여로 현정(玄靜)오세재(吳世才)선생 의 증손여이다.(세보,고창오씨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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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9년(원종10) 6월 환도의 의견차이로 세력기반을 잃을까 염려한 임연 (林衍)등이 원종을 폐위시키고 안경공 (安慶公) 창 (아래물수+昌)을 왕으로 세우고 거짓 칭병 양위했다고 추밀원부사 김방경(金方慶)을 시켜 몽고에 보고하였다.(고사, 절요, 왕조사)
이를 토벌한다는 핑계로 최탄 (崔坦) 이연령(李延齡)등이 군을 일으켜 서북면 일대의 많은 수령과 관료를 죽일 때 여러 번 죽임을 당할 뻔 했으나 살아남아 충성을 다하니 몽고의 사신 탈 타아(脫朶兒)가 영주(靈州)에 와있을 때 서경을 포함한 북계 54성 및 황해도 자비령 이북 6성을 갖다 바치니 국토의 약 1/4이다. (고사, 절요, 왕조사)

민심은 어지럽고 유랑민이 되어 흉흉한 무법천지가 되었다. 이 지역 (西北面)을 원 (元) 나라에서 통치하는 기구로 동녕부 (東寧府)를 두었다. (고사, 절요, 왕조사) 이보다 앞서 그해 9월 세자 심(諶;뒤에 충렬왕이 됨)이 원 (元) 세조 [世祖;쿠빌라이 (忽必烈)]의 등극을 축하 하기위해 축하 사절로 갔다 귀국길에 파 사부 (婆娑府)에 이르렀을 때 원종의 폐위 소식을 듣고 인주수 (麟州守)로 있는 아버지 신보공과 협력하여 원종을 복위 시키고 세자를 무사히 귀국시켜 왕권의 정통성을 찾아주고 무신정권을 종식 시키는데 크게 기여 했다. (고사, 절요, 왕조사)

이때 고려의 풍속은 불교를 숭상 하는지라 아버지 정신보가 성리학(性 理學)으로 후학을 가르치니 고려 선비들이 주 렴계 (周濂溪)와 양정(程 明道, 程伊川)의 글을 처음으로 보았다고 했다.(세보.채상국갈명,합전 서 목만중) 이때가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처음 들어온 시초가 된다. 보다 깊은 연구로 역사를 바로 보는 인식이 있어야겠다. 정신보 (鄭臣保)의 변함없는 충절을 높이사 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판예빈사 (金 紫光祿大夫 門下侍郞 平章事 判禮賓事)를 추봉하고 행 인주 수 남송 형
부 원외랑 (行 麟州 守 南宋 刑部 員外郞)을 역임하였다.(고사,왕조사,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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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는 충절을 높이 받들어 정려 (旌閭)를 세워 주니 300 여년을 기려 왔다고 하나 기록으로만 남아있고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니 아쉬운 일이며(호산록,세보) 충절의 대표적인 인물로 신
속 삼강행실도 (新續 三綱行實 圖)에 올라있다.(조선조실록)
송곡향현사에 배향되어있고 오현정(五賢亭;일명 오현각)에 다섯 분의 서산지역 현인 과함께 판각하여 걸려있다. 묘지는 성연면 오사리 산 641-2번지에 아들 인경 묘 계상에 있다.선대는 태 시조 환공으로부터 64세 회(淮)공이 목주 (睦州)에서 절강성 (浙江省) 포강현 (浦江縣)으로 옮긴 시천1세요(중국 의문정씨 세보)고조가 되는 호 충응(충應) 판 장작감 (判將作監) 온(縕)이 66세로 시 천3세 동거공식 1세로 15대를 360 여 년간 3.000명이 한울타리에서 먹고 자는 공동생활을 하였다.

정 인경은 정 환공으로부터 70세가 되며주(周)나라 34대 여(여) 왕의 자 우(友) 환공 (桓公)이 수봉정국 (受封鄭 國)하여 형양 (滎陽)에 정(鄭)나라를 세우고 14대 23군이 431년간 다스 렸으며 강성 기엔 중원의대부분을 차지했다. 정환공 (鄭桓公)으로 인해서 정씨 (鄭氏)가 형성 되었다. 원(元), 명(明), 청조(淸朝)를 거치며 많은 정표(旌表)를 받았다.(중국 의문정씨 세보)
명 (明) 태조 (太祖) 주원장 (朱元璋)이 강남 여러 문중에서 제일이라는 강남제일가 (江南第一家)요 효행과 의로움이 남달라 효의가 (孝義家)라 사액 (賜額)했다. 이때부터 의문정씨 (義門鄭氏)로 불러 왔다.

그 공동생활 규범이 훗날 명나라의 국법의 모태가 되였고 옛 봉건 가족사회의 연구 자료로 매우 중요시되고 있으며 사옥 (祀屋)은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중국 국가 급 중점문물 보호단위로 지정 되였으며 세계 문화유산 에 등재 신청 중이다.
2001년 선조를 찾고자 일족 대표가 하남성 형양시(滎陽市)에 세계정씨 연의회 중심(世界鄭氏聯誼會中心)을 찾아 논의하고,2002년 절강성(浙江省) 포강현 (浦江縣) 의문정씨 (義門鄭氏) 종사를 찾아 심의 양쪽 후손들이 합의하에 합족 귀종 경전식 (合族歸宗 慶典式)을 거행하고 귀원금희서 (歸源金禧書)에 서명하니 760여년 만에 선조님을 찾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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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경 관련 사적으로는 父 정신보가 석림동 마을 앞동산 전망 좋은 곳에 대를 세워 이름 하여 망운대 (望雲臺; 맛대봉)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올라가 고향을 그리워했던 것을 못 잊어 정인경은 망운대 주변에 도 랑을 파고 연못을 만들어 대를 수축하여 父의 뜻을 기렸으며 남원마을 앞에 760 여년을 지켜온 은행나무는 정신보 (鄭臣保?~1271)가 심어 이 곳에서 아들과 학문을 닦았고 정 인경은 틈틈이 말달리고 무술을 연마 하여 훗날 무관으로 서도 뛰어난 전술의 장군이 되는데 이때에 기초를 닦았으며 몽고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다.(세보,호산) 그러나 망운 대 또한 땅 임자가 빼앗아 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고 말 았다.이 위대한 역사와 전통이 이렇게 허물어지고 소멸되고 마는 현실이 안타 갑다.

서산시 인지면(仁旨面) 송곡향현사(松谷鄕賢祠)에 원외랑(員外郞) 정신보 (鄭臣保), 양렬골(襄烈公) 정인경 (鄭仁卿), 금헌(琴軒) 유방택(柳方澤), 충 간공(忠簡公)후송(後松)윤황(尹璜), 저정(樗亭)유백유(柳伯濡), 위촌(葦村) 유백순(柳伯淳), 무동처사(楙洞處士)유윤(柳潤), 단구자(丹邱子)김적(金積) 미암(迷庵) 김위재(金偉材)등 아홉 현인이 배향 되어 있고 성연면을 지나 화천 네거리에서 서북쪽으로 오리 쭘 가면 부성산 (富城山)이 보이는데 오현정 (五賢亭;일명 오현각)에 오르는 계단이 있고 이곳에는 문창후고운 최치원 (文昌侯 孤雲 崔致遠), 성리학자 원외랑 정신보 (性理學者 員外郞 鄭臣保)와 양렬공 춘수 정인경 (襄烈公 春수 鄭仁卿) 문희공 사암 유숙(文僖公 思菴 柳淑) 충렬공 제봉 고경명 (忠烈公 제峰高敬明)등의 다섯 현인의 문장과 도덕 충절 충효의 고매한 정신을 받들어 전하고자 오현영시 (五賢詠時)를 판각 하여 걸었다.

정인경은 또한 간월도 에서 태어나 9세까지 살았으며 후일에 독서와 학문을 닦은 곳으로 원통대 (圓通臺)를 세워 기회 있을 때 마다 와서 학문을 닦고 후 학을 가르쳤다.
고려 통일 대전(高麗統一大殿)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성동리 산 72(京畿道 坡州市 炭縣面 城東里 山 72)에 배향되어 있다.
정인경 인물평을 보면 고려사(高麗史)에서 그는 성품이 근엄하고 정직 하였으며 처음에는 통역원으로서 명성이 있었는데 그후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일찍이 황제의 명으로 무덕장군 정동성이문관이 되었다. 고려왕조사에서는 성품이 근직하여 통역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이르는 곳 마다 성적(聲績)이 있었다. 일찍이 황제의 명을 받아 무덕장군 정동성이문관이 되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정인경은 성품이 근직하여 통역으로 이름이 알려 졌다(고사,절요,왕조사) 묘지는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산 641-2 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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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경 묘지명(鄭仁卿 墓誌銘)1306년(충렬왕 32) 인물평에서


영영정공 인중지용(英英鄭公 人中之龍)정공의 빼어남이 사람가운데용이로다
성관담대 색온모공(性寬膽大 色溫모恭)너그럽고 담은 큰데다 모습은 온화하고 공손하도다
극근내직 유정지공(克勤乃職 惟正之供)맡은바 직책을 부지런히 수행하여 오로지 공무에충실 하였도다
사방분명 일절비궁(四方奔命 一節匪躬)명에따라 사방을 오가며몸을 돌보지 않고
공고벽상 위극시중(功高壁上 位極侍中)공로는 벽상에 높이 올랐고 지위는 시중에 이르렀도다
부귀수고 애영시종(富貴壽考 哀榮始終)부귀에 천수를 누리고 슬프거나 영광스럽거나 한결같도다
문정혁혁 난옥총총(門庭赫赫 蘭玉총총)가문이 빛나고 빛나 난초와 옥이(자손)무성하도다
여방부진 백복유동(餘芳不盡 百福攸同)남은 향기 다하지 않아 온갖복을 똑같이 누리도다
의각궐석 전어무궁(宜刻厥石 傳於無窮)그돌에 새기어 영원무궁 전 해야 겠도 다

# 조의대부 판예빈시사 충사관 수찬관 지내지 방우선 술 (朝議大夫 判禮賓寺事 充史館 修撰官 知內旨 方于宣 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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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정. 오현각(五賢亭,五賢閣) 양렬공 추모 시
양렬공 정인경 추모시

중찬원외아 소소래오동: 中贊員外兒 少小來吾東
관기구세작 분필토정충: 觀其九歲作 奮筆吐精忠
극구함인읍 사야기정홍: 劇寇陷隣邑 四野旗旌紅
공시정신기 지휘수대공: 公時挺身起 指揮收大功
거연복구주 이방흘숭용: 居然復舊州 二方屹崇墉
사사금부계 탄식상아충: 祀事今不계歎息傷我衷

중찬은 원외랑의 아들이니 소년 때 우리 동방에 왔도다.
9세에 지은 글 보니 분방한 붓으로 충의를 토출하였네.
극렬한 적군이 이웃 골을 함락하니 사방에 붉은 깃발이 날리었네.공이 이때 몸을 짚고 일어서서 군중을 지휘하여 대공을 이루었네. 응주 땅을 수복하니 두 고을이 안도가 되었도다.
모시던 제사가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으니 탄식하여 내 마음 상하누나.

*조선1887년(고종24) 최 학순등이 호산록에서 다섯 분의 시를 찾아 재 판각하여 당시 서산군수 서옥순(徐玉淳), 권익채(權益采) 군수 현재 이수원(李守遠)군수, 김환욱(金煥旭) 군의회 의장의 주선으로 김종필 (金鍾泌)전 국무총리 친필간판이 팔각형 오현정 (五賢亭)에 걸려 있다.
전에 제1판각 김대덕(金大德)군수 제2판각 서옥순(徐玉淳)군수 제3판 각에 권익채(權益采) 군수등 여러 차례 중보수 했다. 충청남도 현인 100인에 선정중 명현으로 지정되고, 옛 터전에 6차선 양렬로가 명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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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경의 9세때 망향시 (望鄕詩)

수등 고령고(愁登 高嶺고)시름 속에 높은 산에 올라
요망 운비북(遙望 雲飛北)멀리 바라보니 구름이 북으로 날더라
홀억 선인묘(忽憶 先人墓) 문득 조상님을 생각하니
누수 춘우락(淚隨 春雨落) 눈물이 봄비 따라 흐른다
호진 창우주(胡塵 漲宇宙)오랑캐 풍진이 우주에 뻗혔으니
만리 락고신(萬里 落孤臣) 만리 밖에 떨어진 외로운 신하로다
하일 건곤정(何日 乾坤整)어느 날 하늘과 땅이 평온 하게 되어 .중회 조씨춘(重回 趙氏春) 옛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을꼬!

#정인경이 9세 때 도비 산에 올라 아버지께서 늘 고국을 바라
보며 그리워하던 고국을 바라보며 바위에 새긴 글로 당시에
그 재주를 신동이라 불렀다. (고;字는 머리늘어질표+아래에 告)

♧정 인경의 공적 요약

①몽고와의 전쟁에 국가수호에 힘쓰다.
②12차례 이상 외교사절로가 약소국의 의견 실현에 힘쓰다.
③심혈을 기우려 동녕부를 돌려받아 잃은 땅을 찾아오다.
④폐위된 원종을 복위시키고 세자를 무사히 귀국케 하다.
⑤원의 내정간섭과 친 원파를 설득시켜 국정을 안정시키다. ⑥서산이라는 지명을 있게 하다


♧현대에서 본 역사적 의의
①한평생 국가를 위해 힘쓰고 전쟁에 직접 참전하였다.
②동녕부라는 광역의 땅을 찾아와 국력을 신장 시켰다.
③능통한 언어와 사람 됨됨이로 외교안보에 큰 도움을 얻었다. ④원만한 인격으로 적이 없었으니 정치적 안정을 갖게 하였다.
⑤고려와 원나라와의 관계 정상화를 이룩했다.

※첨부;
①고려사권[107][열전] 권 20
②고려사절요 귄 18, 37, 41
③고려왕조사 3,4 (충렬왕~충정왕)유재하;고려숭의회
사료편집 주간
④고려사 국역본 허흥식 교수 편
⑤고전국역총서 국역 고려사절요 민족문화추진회
⑥.고려 묘지명 집성 김용선 편저 정 인경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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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고려사 권 제107 열전 제 20 정인경편
*한국의 지식 콘텐츠 역사 고려사 충렬왕 2
*고려 왕조사 제3권 24대 원종 순효 제왕기~제4권 25대 충렬왕
경효 대왕기편
*고전국역 총서15 국역 고려사절요 Ⅲ 민족 문화 추진 회 발행
*고문서 연구 남 권희 여 은영 지음 정안 공신녹권 편
*고려 묘지명 집성 김용선 편저 정 인경 묘지명
*표기범례;고려사→고사, 고려사절요→절요, 고려왕조사→왕조사, 서산정씨세보→세보호산록→호산 , 정인경 공신록권 정안
→공신록권
2012년 1월

서산정씨 대종회 고문 정성천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