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보(鄭臣保)선생

by 정성천 posted Mar 2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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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보 (鄭臣保) 선생
정 신보(鄭臣保? ~1271) 선생은 남송(南宋) 형부 원외랑(尙書 刑部 員外郞)으로 있다가 나라가 망할 무렵 충신은 불사이군의 절의로 고려에 망명하여 충절을 지킨 성리학자(性理學者)로 고려에 성리학을 최초로 전래 시켰다. 1269년(원종 10)인주수로 있을 때 아들 인경과 협력하여 세자 심 (諶;후에 충렬왕)이 파사부 (婆娑府)에 이르렀을 때 임연등 반란에 적절한 대응조처로 원종(元宗)을 복위시키고 세자를 무사히 귀국시켰으며 무신정권을 종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조선조에 와서 충절의 대표적인 인물로 신속삼강행실도에 올라있다.(고려사,고려사절요,서산정씨세보)정신보는 남송(南宋)이 망할 무렵 총각의 젊은 나이에 상서형부 원외랑 (尙書刑部 員外郞) 벼슬에 있다가 몽고가 강성하여 중국을 점령할 때 몽고에서는 한족 선비가 없는지라 양양(襄陽)과 회촉 (淮蜀)을 점령하고 덕안 (德安)골이 함락될 때 양유중 (楊惟中)을 시켜 그 지역에서 강한 (江漢) 선생이라 부르는 조복 (趙復)을 얻고 원 태조는 크게 기뻐 했으며 조복은 학덕 높은 정신보 (鄭臣保)를 추천하여 몽고의 장수 요추 (姚樞)로 하여금 수차 회유와 협박을 해왔으나 충신은 불사이군이라하고 죽을지언정 북정에 신하가 될 수 없다고 거절하여 이를 요추가 원태조 (元太祖)에 보고하니 충절을 가상히 여겨 더 이상 강요하지 안했다.

이때 소항으로부터 고려땅 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 (看月島)에 망명하니 1237년 (고종24)이다. 정 신보의 부는 예빈사 동정 (禮賓事同正) 수거 (秀거)요 모는 태자첨사 (太子詹事) 최수랑 (崔守郞)의 여요 아내는 위위승 동정 고창오씨(高敞吳氏) 오영로(吳永老)의 여로 현정 (玄靜) 오세 재(吳世才)선생 의 증손 여이다.
1269년(원종10) 6월 환도의 의견차이로 세력기반을 잃을까 염려한 임연 (林衍)등이 원종(元宗)을 폐위시키고 안경공 (安慶公)창 (창)을 왕으로 세우고 추밀원부사 김방경(金方慶)을 몽고에 보내어 배신의 표문에 “ 전 왕이 병에 걸려 위독하므로”.칭병 양위했다고 거짓으로 몽고에 보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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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토벌한다는 핑계로 서북면 병마사 기관(記官) 최탄 (崔坦) 전 교위(校尉) 이연령(李延齡) 한신 (韓愼) 등이 용강 (龍岡) 함종 (咸從) 삼화 (三和) 사람들을 소집하여 함종 현령 최원(崔元)을 죽 이고 가도 영(營) 에 들어가 분사어사(分司御史) 심원준 (沈元濬) 감창 (感倉) 박수혁 (朴守奕)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서북면 일대의 많은 수령과 백성을 죽일 때 여러 번 죽임을 당할 뻔 했으나 살아남아 고려에 충성을 다하니 몽고의 사신 탈타아 (脫朶兒)가 영주 (靈州)에 와있을 때로 서경을 포함한 북계 54성및 황해도 자비 령 이북 6성을 갖다 바치니 국토의 약 1/4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민심은 어지럽고 유랑민이 되어 흉흉한 무법천지가 되었다. 이 지역 (西北面)을 원 (元) 나라에서 통치하는 기구로 동녕부 (東寧府)를 두었다. 이보다 앞서 그해 9월 세자 심 (諶;뒤에 충렬왕)이 원(元) 세조 [世 祖;쿠빌라이(忽必烈)]의 등극을 축하 하기위해 축하사절로 갔다 귀국길에 파사부 (婆娑府)에 이르렀을 때 원종의 폐위 소식을 듣고 일행이 당황 할제 인주 수(麟州守)로 아들 인경과 협력하여 원종을 복위 시키고 세자를 무사히 귀국시켜 왕권의 정통성을 찾아 주고 무신 정권을 종식 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 했다. (고려사, 왕조사)

이때 고려의 풍속은 불교를 숭상 하는지라 정신보가 성리학 (性理學)으로 후학을 가르치니 고려 선비들이 주렴계 (周濂溪) 주자학서와 양정 (程明道, 程伊川)의 글을 처음으로 보았다고 했다.(고려사, 채상국 묘갈명)이때가 우리나라에 성리학(性理學)이 처음 들어온 시초가 된다. 보다 깊은 체계적인 연구로 역사를 바로 잡는 인식이 있어야겠다. 정 신보 (鄭臣保)의 변함없는 충절을 높이 사 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판예빈사(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 平章事 判禮賓事)를 추봉 하고 행 인주 수 남송 형부 원외랑(行 麟州守 南宋 刑部 員外郞)을 역임하였다. (고려왕조사,정인경 묘지명,서정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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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는 충절을 높이 받아 드려 아들과 함께 정려 (旌閭)를 세워 주니 300 여년을 기려 왔다고 하나 기록으로만 남아있고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니 아쉬운 일이며 충절의 대표적인 인물로 신속 삼강행실도 (新續 三綱 行實圖)에 올라 있다.(조선사실록, 호산록, 서정세보) 정신보는 송곡향현사(松谷鄕賢祀)에 아들 양렬공 정인경, 금헌 유방택 후송 윤황, 저정 유백유, 위촌 유백순,무동처사 유윤,단구자 김적, 미암 김위재, 등 아홉 현인이 함께 배향되어있고 오현정(五賢亭;일명 오현각)에 서산지역 다섯 분의 현인으로 추모시가 각판 하여 걸려있다. 묘지는 성연면 오사리 산 641-2번지에 아들 인경 묘 계상에 있다.

정 신보 (鄭臣保)의 선대는 누대를 살아오던 절강 성 포강 현에서 조각배로 푸른 바다를 건너왔다. 선대 태시조 환공 (桓公)으로부터 64세 회 (淮)공이 목주 (睦州)에서 절강성 (浙江省) 포강현 (浦江縣)으로 옮긴 시천1세요 정신보의 증조가 되는 호 충응 (충應) 판 장작감 (判將作監) 온 (縕)이 66세로 시천3세 동거공식 1세로 15대를 360 여년간 3.000 명이 한울타리에서 먹고 자는 공동생활을 하였다. 명 (明) 태조 (太祖) 주원장 (朱元璋)이 강남 여러 문중에서 제일이라는 강남제일가 (江南第 一家)요 효행과 의로움이 남달라 효의가 (孝義 家)라 사액 (賜額)했다. 이때부터 의문정씨 (義門鄭氏)로 불러 왔다.(중국 의문정씨세보)
그 공동생활 규범이 훗날 명나라의 국법의 모태가 되였고 옛 봉건 가족 사회의 연구 자료로 매우 중요시되고 있으며 사옥 (祀屋)은 예술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중국 국가 급 중점문물 보호단위(中國 國家級 重点 文物保護單位)로 지정 되였으며 세계 문화유산 에 등재 신청 중 이다.(중국 의문정씨 세보)

정 신보는 태 시조 정 환공으로부터 69세가 되며 주(周)나라 34대 여(엄할)왕의 자 우(友) 환공 (桓公)이 수봉정국(受封鄭國)하여 형양 (滎陽)에 정(鄭)나라를 세우고 14대 23군이 431년간 다스려 왔으며 강성 기엔 중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정환공 (鄭桓公)으로 인해서 정씨(鄭氏)가 형성 되었다. 원(元), 명(明), 청조(淸朝)를 거치며 많은 정표(旌表)를 받았다. 2001년 선조를 찾고자 일족 대표가 하 남성 (河南省) 형양 시 (滎陽市)에 세계정씨 연의회 중심 (世界鄭氏 聯誼會 中心)을 찾아 논의 하고, 2002년 절강성(浙江省) 포강현 (浦江縣) 의문정씨 (義門鄭氏) 종사를 찾아 심의 양쪽후손들이 합의하에 합족귀족경전식 (合族歸宗慶典 式)을 거행하고 귀원금희서 (歸源金禧書)에 서명하니 760여년 만에 선조님을 찾게 되다.(의문정씨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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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보 관련 사적으로는 석림동 마을 앞동산 전망 좋은 곳에 대를 세워 이름 하여 망 운대(望雲臺; 맛대봉)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올라가 고향을 그리워하였다.(호산록,서정세보)
후에 정인경이 망운대 주변에 도랑을 파고 연못을 만들어 대를 수축하여 부의 뜻을 그리워했으며 남원마을 앞에 760 여년을 지켜온 은행 나무는 정신보 (鄭臣保?~1271)가 심어 이곳에서 아들과 학문을 닦았고 성리학으로 후학을 가르치니 고려선비들이 양정의 글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채상국 묘갈명)이때가 고려에 성리학이 처음 들어온 때다 그러나 망운 대도 또한 땅 임자가 빼앗아 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역사와 전통이 이렇게 허물어지고 소멸되고 마는 현실이 안타깝다. (2008년)

서산시 인지면 (仁旨面) 송곡향현사 (松谷鄕賢祠)에 원외랑(員外郞) 정신보(鄭臣保), 양렬공(襄烈公) 정인경(鄭仁卿), 금헌(琴軒) 유방택柳方澤), 충간공(忠簡公) 후송(後松) 윤황(尹璜), 저정 (樗亭) 유백유(柳伯濡),위촌(葦村) 유백순(柳伯淳), 무동처사(楙洞處士) 유윤(柳潤),단구자 (丹邱子) 김적(金積), 미암(迷庵) 김위재(金偉材), 등 아홉 현인이 배향되어 있고 성연면을 지나 화천 네거리에서 서북쪽으로 오리쭘 가면

부성산 (富城山)이 보이는데 오현정 (五賢亭;일명 오현각)에 오르는 계단이 있고 이곳에는 문창후 고운 최치원 (文昌侯 孤雲 崔致遠), 성리학자 원외랑 정신보 (性理學者 員外郞 鄭臣保), 양렬공 춘수 정인경(襄烈公 春수 鄭仁卿), 문희공 사암 유숙 (文僖公 思菴 柳淑), 충렬공 제봉 고경명 (忠烈公 제峰 高敬明)등의 다섯 현인의 문장과 도덕 충절 충효의 고매한 정신을 받들어 전 하고자 오현 영시 (五賢 詠時)를 판각 하여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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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7년(고려 고종 24) 간월도 망명하여 5년 살았으며 인경이 9세 때 남원마을로 이사했다. 후일에 독서와 학문을 닦은 곳으로 원 통대 (圓 通臺)를 세워 기회 있을 때 마다 와서 학문을 닦고 후 학을 가르쳤다. 채상국(蔡謨) 묘갈명에 이르기를

편주창해(片舟滄海) 오도여동(吾道輿東) 기자지촉(箕子之足+蜀)
노연지풍(魯連之風) 가혜후학(嘉惠後學) 백세사표(百世師表)
*足+蜀=머뭇거맇촉

“조각배로 푸른 바다를 건너와 유학을 동방에 전 하니, 기자의 어진발 자취요 노 중련의 아름다운 풍속이로다. 후학을 가르치고 지도하였으니 백세의 빛나는 스승이요 선비의 표범이로다”. 그 말씀을 외우고 그 풍모를 상상 하니, 또한 반드시 주 렴계 (周濂溪)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에 사숙한분이 틀림없는 것 같으나 그 유문이 전하지 못하고 전수가 들림이 없구나, 가선대부 원임 한성부 우윤 오위도총부 부총관 목 만중 찬 (嘉善大夫 原任 漢城府 右尹 五衛都摠府 副摠管 四水 睦萬中撰) (서정세보권지 7)


# 오현정. 오현각(五賢亭,五賢閣) 원외랑 추모 시
*원외랑 정신보 추모시
송계유원외 기자후일인: 宋季有員外 箕子後一人
호진폐천지 하처망위신: 胡塵蔽天地 何處罔爲臣
평생일편주 만리창해빈: 平生一扁舟 萬里滄海濱
간월낙오수 망운족이신: 看月落吾手 望雲足怡神
사업금하수 구인이득인: 事業今何守 求仁而得仁
자도익소사 천년여격신: 自到益所思 千年如隔晨

송나라 말기 원외랑이 계시니 기자 후 일인자라 하겠 네
오랑캐 풍진이 천지를 가리니 어느곳에 간들 신하노릇 못하겠나?
평생에 일편주를 타고 만리 창해 건너 오셨네.
간월 도에 도착하여 구름을 바라보고 안도 하였도다.
사업은 이제 무엇을 지켜냈는가 어짐을 구하여 어 짐을 얻었다.
더욱 생각을 간절하게 하는 것은 천년전일이 바로 어제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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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보의 공적 요약

1.몽고에 항복하지 않고 충절을 지켜 충절의 대표적 인물삼
강행실도에 오르다.
2.인주수로 있을 때 아들 인경과 협력 임연등에 폐위된 원종
복위와 세자를 무사히 귀국 케하다.
3.최탄등에 죽임을 무릎쓰고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무
신정권을 종식시키는데 기여했다.
4.고려에 최초로 성리학을 전래시켰다.

※참고자료;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왕조사, 정인경 묘지명
,서산정씨 세보, 채상국 묘갈명, 호산록 . 고창오씨 세보
, 평강채씨 세보, 광산김시 세보 등

2011년2월초순

서산정씨 대종회 고문 정성천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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