來庵 鄭仁弘의 改革思想-권인호 著

by 개혁사항 posted Jun 0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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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庵 鄭仁弘의
至治主義的 學問傾向性과 改革思想

權 仁 浩
(大眞大學校 敎授)

目 次

1. 序論
1) 經史一體의 哲學과 歷史
2) 歷史人物의 再照明과 그 正當性
2. 士林派와 南冥學派의 學問的 特性 및 出處論
1) \'五賢士\' 拔擢과 人才登用論
2) 出處論과 隱逸思想 그리고 山林政治
3) 朝鮮 後期의 山林政治의 評價
3.『大學』의 政治思想과 民本的 改革思想
1)『大學』의 \'修己治人\'的 政治思想
2) 保民制産과 損益思想 및 府民告訴之法
4. 自主的 國防思想과 崇明事大主義 批判
1) 義兵倡義 및 衣冠之盜와 干戈之寇
2) 自主的 對明·後金(淸) 外交
5. 學問思想의 實踐的 特性과 그 批判繼承
1) 王位繼承과 外戚政治 그리고 廢母殺弟論
2) 仁祖反正과 歷史의 眞實歪曲捏造
6. 後世影響과 評價를 겸한 結論


來庵 鄭仁弘의
至治主義的 學問傾向性과 改革思想


權 仁 浩



1. 序論

1) 經史一體의 哲學과 歷史

\'모든 歷史가 勝者의 자기변명과 정당화\'라고만 한다면, 우리는 기록된 역사와 인물에 대한 신뢰와 교훈에 더하여 모멸감과 회의에 휩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사실에서, 지나간 역사와 인물을 새롭게 조망하고 당시 승자인 기록자들의 왜곡된 의도를 간파하여 객관적인 평가와 서술을 하는 것은 역사에 대하여 이 시대 현실을 사는 우리의 몫이다.
최근 우리는 \'역사 바로 잡기\'와 \'개혁과 보수(수구)정치\' 및 \'쿠데타(Coup d\'Etat)\'와 \'革命\'이란 단어와 뉴스 보도를 자주 접하게 되었다. 동서고금의 역사의 일반적인 예와는 다르게 근현대 우리의 역사는 그 褒貶이 무상하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찾아보기 힘든 과거 국가원수(대통령이나 왕) 두 사람을 나란히 재판정의 피고석에 세우고 재판하여 복역케 하고 동시에 풀려나와 대통령 취임석상에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받으며, 나라를 온통 망국 지경으로 만든 대통령도 청와대를 무사히 떠나는 이 시대 이 나라가 과연 역사나 철학이 있는 나라인가? 과연 구두선으로 말하고 있는 \'개혁정치와 역사 바로잡기\'란 무엇을 어떻게 바로잡고 개혁을 하여야 할 것인가. 그리고 한 가지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왜 여러 가지 해석을 하여 그 功과 罪를 묻는 역사적 비판과 포폄이 존재해야 하는가.
그리고 역사를 바라보는 眼目과 時刻 그리고 그 인식태도나 서술기준 등을 史觀이라 한다. 인간이 한 가지 사물을 바라보는 것도 인식주체인 나의 신분계급이나 상황과 의식정도에 따라 다르듯이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經史一體\'라는 말은 곧 \'哲學(經學)과 歷史는 하나\'라는 뜻이다. 또한 철학은 \'시대사상의 精華\'라고 하였다. 철학이 없는 역사는 唯物論的으로 인식된 세계에서 기계적이고 불변적인 힘이 작동하는 역사인 셈이고, 역사가 없는 철학은 상하좌우로 이유없이 부는 唯心論的 主義 사상적 敎義의 바람일 뿐이다. 둘 다 괴물일 것이다. 그러나 철학에 의해 풍부해진 역사와 역사에 의해 풍부해진 철학은 인간정신 개척과 새로운 세계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2) 歷史人物의 再照明과 그 正當性

鄭仁弘(호는 來庵, 1535-1623)은 仁祖反正이란 궁정반란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斬刑을 당한 인물로서 289년 후에야 伸寃復爵되었다. 그렇지만 일찍이 申采浩와 그 후 소수의 몇몇 학자 및 관련된 후손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당시의 객관적인 자료를 읽어 보지도 않고 명색이 학자교수들까지도 鄭仁弘을 廢母殺弟의 元兇으로 보고 공개된 학회에서도 그것이 인물평가의 모든 가치기준이 되는 양 떠드는 한심한 실정에 있는 점에서, 다시금 이를 재론하여 밝혀야 할 필요성을 통감한다.
인조반정 이후로 그들의 쿠데타를 합리화하고 西人-老論 정권의 정통성을 보장하기 위해 계속해서 왜곡조작하였기 때문에 거의 정설화 되어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鄭仁弘은 분명히 폐모살제에 대하여서는 분명한 반대입장을 표명하였다.
반면 무신년(1608년, 광해군 즉위년 2월)의 변란을 일으켜 다음해 4월에 臨海君을 처단한 것은 周公의 예에 비하고서, 이미 그 행실이 부정하고 무뢰배를 모아 거느리고 토지와 이권을 민중에게서 빼았아 원성이 높았으며, 명나라 사신이 조선의 왕위계승에 대한 位階問題로 대질심문을 하자 임해군은 왕위에 대한 욕심을 분명하게 드러낸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鄭仁弘은 그를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문제 때문에 후에 全恩說과 割恩說과 함께 전은설의 德을 말하나 이는 인조반정으로서 사실이 확인된 셈이고 광해군 입장에서 보면 임해군에 대한 전은설은 바로 護逆임이 틀림없고 나중에 결과적으로 綾陽君 역모 곧 인조의 반란(仁祖反正)을 부추긴 꼴이다.
또한 정인홍은 仁穆大妃 金氏를 폐모하자는 논의에 대하여 당시에 의론이 분분하였지만 분명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인홍은 인조반정을 예언이라도 하듯이 \'아들이 어머니를 폐하면 신하의 의리는 어디에다가 둘 것인가\' 반문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논의는 반대당의 反正 名分이 되었다. 분명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버릴 수 있는 것은 군왕이 민중을 가렴주구하고 민중에 대하여 살인하기를 즐겨 그 본분을 떠났을 때이다. 폐모살제 하였다는 비윤리적 행위를 이유로 임금을 몰아낼려면 동서고금의 君王은 거의 대부분 정통성이 없거나 쿠데타에 노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잘못된 임금은 放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려면 그들이 신봉해 마지않는 유교에서 혁명의 당위성 논의, 즉 \'앞의 왕이 桀紂처럼 폭군이고 뒤의 왕이 湯武처럼 賢君이라야 가할 것\'이라고 일찍이 朱子는 이야기 한 바가 있다. 그러나 민중에 올바로 복무하는 자가 어진 임금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다. 모든 역사사실을 동원하여도 仁祖보다는 光海君이 당시 백성과 역사에 더 나은 정치를 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서인-노론세력은 쿠테타를 위한 구실로 폐모살제의 죄를 산림정승인 정인홍에게 덮어 씌움으로써 광해군 정권의 비도덕성을 왜곡 날조 선전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朝野의 重望을 받고 있던 鄭仁弘을 즉각 체포 압송하여 바로 처형하였다는 점에서 반정세력들의 급박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정인홍은 供招에서 \"나는 일찌기 古史를 읽으면서 漢나라의 皇后 楊氏가 廢하여 질 때의 일을 보았는데, 그 때 옛날 사람들의 正論은 \'자식이 어머니를 廢하는 道理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故事를 인용하여 都堂의 물음에 답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은 광해군 정권의 비도덕성을 확대과장하여 비판해야만 그들 쿠데타의 비리를 호도하여 정권의 정통성과 명분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쿠데타가 동서고금의 사례와 똑같이 앞 정권을 부정하기 위한 상징조작으로써 광해군과 정인홍 등 대북의 개혁세력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 살해하고 이를 기정사실화 하려고 한 것이다.

2. 士林派와 南冥學派의 學問的 特性 및
出處論

1) \'五賢士\'의 拔擢과 人材登用策

鄭仁弘은 그의 39세 때에 \'卓行之士\'라는 遺逸로서 당시 이른바 \'五賢士\'의 一人으로 薦擧되어 六品職을 제수받고 경상도(후일 충청도로 됨) 黃澗縣監이 되어 당대 최고의 善政官으로 뽑혔다. 이것은 당시 문정왕후에 이어 명종이 죽고 선조가 등극하자 정국이 쇄신되고 사림파가 중앙정계에 새롭게 등장하였다. 그렇게 되자 선조 6년(1573년) 5월에 당시에 왕명으로 吏曹에서 과거를 치루지 않은 인물들 가운데 학문과 실천행동으로 나라안에서 가장 명망있는 인물 다섯 사람을 추천하여 바로 六品職을 제수하게 되었다.
최근 이른바 문민정부의 개혁실패와 실정으로 인한 IMF 체제의 초래도 바로 인사행정, 곧 인재등용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人事는 곧 萬事\'라고 한다.
광해군 시대의 개혁정치도 알고 보면 인사정책의 혁신에서 비롯하고 있는데, 정인홍이 좌의정 때 올린 箚子에서 다음과 같이 인재수습을 진달하고 있다. 즉, 정인홍은 \"옛 규례를 준용하여 빠뜨린 인재를 수습하소서. 신이 듣건대 孔子가 이르기를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다.\' 하였고,『周易』에서는 \'띠풀의 연이은 뿌리를 뽑는지라, 그 무리와 더불어 가는 것이 이롭다.\' 하였고, 『書經』에서는 \'널리 뛰어난 선비를 구하여 뭇 관직에 나열해 둔다.\' 하였으며,『論語』에서 子游가 고을 수령이 되자 孔子께서는 사람을 얻었느냐고 물으셨으니, 크게는 한 나라로부터 작게는 한 고을에 이르기까지 인재를 취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인재등용이 나라의 개혁정치의 관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어서 조선 왕조의 祖宗朝와 先王(宣祖) 때의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그런 다음 그는 다시 \"근년에는 전혀 이러한 거조가 없어서 선비들이 다투어 과거에 달려가고 다시 선비의 행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니 만일 고무시키는 거조로써 그들의 시야를 새롭게 하지 않는 다면 무너진 풍조를 진작시키고 인심을 수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조종조의 옛 규례를 생각하시고 인재를 혹 빠뜨렸는가 염려하시어 해당되는 부서로 하여금 널리 찾아내어 분류해 적게 하여서 그 재주의 고하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여 맡기소서. 그러면 큰 물을 건널 때의 배나 큰 가뭄의 장마비와 같은 재상의 자질을 지는 사람을 반드시 얻는다고 장담하지는 못하더라도 오늘날의 여러 집사들과 비교해 볼 때 같은 수준으로 말할 수 없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爵祿은 中等의 사람을 면려하는 것이니 이로써 규례를 만든다면, 저 집에서 행실을 닦아 조정에서 쓰이기를 구하는 자들도 마땅히 聖明의 임금을 기다려 일어날 것이니, 장차 자손을 위한 좋은 계책을 내어서 이루 다 쓸 수 가 없을 것입니다\" 라고 상소하였고 이에 앞서서도 이와 같은 인재발굴과 그 등용을 계속 직접 임금을 登對 進達하여 至治主義的 정치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2) 出處論과 隱逸思想 그리고 山林政治

鄭仁弘은 南冥의 出處大節을 南冥의 「行狀」에서 말하기를 \"선생은 구차하게 복종하지도, 구차하게 잠잠히 침묵하지도 않았다. 아는 이는 비록 좋아하나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못 치우치게 이를 미워하였다. 은퇴하였으나 시대(현실)를 자세히 살폈고 스스로를 지켰지만 사람들에게 이를 자랑하지 않았으며 깎아지른 요새의 높은 바위 구멍에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를 일컬어 천길을 (높히) 나르는 봉황새라 하면 가할 것이다\"라고 하여 高弟답게 가장 적절하고 정확하게 표현하였다. \'구차하게 복종하지 않았고 침묵하지 않았다\' 함은 구차하게 혼란한 세상에 굽혀서 나아가 벼슬살이 하려고 지조를 버리지 않았고, 그러나 儒學者로서 世上과 政治의 非理와 墮落을 못본 체하지 않아 올바른 자세를 지켰음을 말한다. 그래서 쉽게 나아가고 물러나는 자들이 자기들이 하지 못하는 실천을 南冥이 行하자 시기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알아주지 않고 비판을 가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유학자는 시절을 잊지 말고 현실을 똑바로 인식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老莊과 佛敎와는 다른 것이다.
鄭仁弘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隱逸로 薦擧되어 재상에까지 이른 사람이다. 유학사상에서 學行과 孝廉으로 천거하여 세상에 나아가는 것은 바로 출처의리 사상과 연관이 있다. 조선 후기의 정치에 있어서 山林이 가지는 정치적인 비중은 매우 높다. 그러나 山林政治는 仁祖反正 이후 왜곡된 정치질서를 유지하고 재야의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존재로 타락되었다. 그리고 가장 비판받아 마땅한 外戚政治가 민중을 외면하는데도 오히려 그들과 결탁한 산림은 그들을 두둔하고 비호하는 세력으로 작용한 모습을 서인과 노론의 정치질서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 山中과 林下에서 독서를 하며 과거를 외면하고 벼슬을 구하지 않은 유학자들이 본래 \'山林\'이라고 불려지던 사람들이다. 鄭仁弘은 司馬試는 신분과 관련되어 통과하나(生員) 직접 벼슬로 나아가는 문과의 대과를 포기하고 曺植 門下의 제자가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중종 말기 己卯士禍로 신진사류가 숙청되고 난 후 勳戚派들이 집권하자 이미 과거가 공정한 인재 등용문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丁若鏞도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과거란 뜻 있는 선비들이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하였다. 李瀷의 [朋黨論]에서도 지적한대로 조선후기에 올수록 과거는 빈번하여 사람은 많이 뽑았으나 문벌있는 훈척파의 자손이나 등용되고 고관이 되니 다른 능력있는 사람은 紅牌를 가지고서도 매미의 배와 거북의 腸처럼 굶주리면서 탄식하고 배를 어루만질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유학자는 현실정치를 외면하지 않는다. 만약 끝내 민중과 정치를 외면하였다면, 老莊의 高士나 佛門의 比丘僧일 따름이지 유학자로서 \'山林\'이라 칭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處山林하면서 論執政하는 태도를 지니면서도 왕에 의해 徵召를 받아야 \'산림\' 칭호를 가질 수 있었다. 이는 진정한 권위의 정치참여라고 하겠다.
이러한 在野에서의 정치비판과 참여의 태도 및 권위부여는 중종 시대 일시적으로 사림파가 집권하여 보다 개혁적인 정치질서를 이룩하였으나, 몇 차례에 걸친 훈척파들의 집요한 반격(己卯. 乙巳. 丁未士禍)으로 좌절되었다가 선조 초에 사림파들이 다시 중앙정계에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조식이 끝내 과거와 벼슬을 거치지 않으면서도 국가의 징소를 받고 현실정치를 비판하며, 유학의 정치사상이 왜곡되어 나타난 것을 바로 잡고자 하였던 태도는 제자인 정인홍이 더욱 본받았다. 조식이 세상을 뜬 후에 朝廷의 대신들 사이에서는 과거출신이 아닌 산림의 인물을 천거해 쓰는데 있어서 品階과 補職을 제한하는 것이 인재를 얻는다는 본래의 의도에 어긋난다는 강력한 건의를 하여, 후세에서는 산림의 處士가 臺諫을 통해 정승의 반열로 나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 중에 대표적 인물로는 來庵 鄭仁弘을 필두로 하여 龍洲 趙絅, 眉 許穆, 尤庵 宋時烈, 明齋 尹拯, 遂菴 權尙夏 등이 있다.
이들처럼 산림 출신으로 유명한 학자적 관료가 많이 나오니 선비들 또한 더욱 學行에 힘쓰고, 자존과 긍지를 가지고 직분을 다하려는 새로운 기풍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산림정치의 시작은 曺植의 산림적 학풍에 의하여 鄭仁弘이 개척한 것이다. 특히 정인홍은 광해군 때에는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지만 끝내 사양하고 재야에 있으면서 상소문을 통해 정치를 지도하고 이끄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산림정치의 기원과 그 전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黃玹과 李佑成 등은 광해군 때 李爾瞻 등이 정인홍의 盛名을 惡用하여 정국을 주도한 사실을 말하여 廢母殺弟의 처사에 대하여도 책임이 있는 것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견해일 뿐만 아니라 이들 두 사람의 서술에서 후세의 서인-노론의 왜곡된 산림정치의 기원이 정인홍으로부터 연유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지 못하고 그 시대상황과 함께 광해군의 지치주의적 개혁정치를 폄하하는 것으로 오류다.

3) 朝鮮 後期의 山林政治의 評價

인조반정(쿠데타) 이후에는 광해군 정치에서 커다란 업적을 쌓았던 정인홍의 산림정치를 형식적으로만 본받은 서인세력은 오직 명분만을 확보하고 왕비를 자파에서 배출하여 정권을 영구적으로 장악하고 경제적 이익도 취하려 하였다. 그래서 李建昌은 \"세상에 傳하기를 \'仁祖反正한 직후에 勳臣들이 모여서 密約하기를 國婚(왕실과의 혼인)을 잃지 말고 山林을 올려 쓰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기네들의 정치적 세력을 공고히 하면서 名分과 實利를 동시에 거두려 함이다.\" 라고 하여 정확하게 평가하였다.
즉 서인 스스로 功臣과 外戚이 되고자 하였으니, 문자 그대로 \'勳戚化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인조 쿠데타 후에 정인홍의 山林政丞으로서의 그 역할만을 모방하여 金長生(1548-1631)이 산림으로 추앙되었지만, 민중을 위한 사회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과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지 못하고 利權과 名望만을 위해 서인 勳戚派와 \'山黨(山林黨)\'이다 \'漢黨(서울 漢城朝廷黨)\'이다 하여 권력다툼에 연연하였다.
우리는 오늘날에 와서 儒學思想 가운데 출처사상에 투철한 선비정신이 아쉽다. 옛날부터 領議政이나 대제학보다도 출처에 엄정한 處士나 先生을 더 귀하게 여기고 존숭한 진정한 이유를 되새겨야 한다. 유학이란 \'인간에게 필요한 학문(人+需)\'을 뜻한다고 말한다면 오늘날의 모든 대학과 세상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은 유학의 선비이다. 세상과 중생의 일보다는 道와 깨달음이 더 중요하다면 그러한 것은 佛敎의 승려나 道敎의 도사들에게 맡기자. 유학의 선비나 학자는 끊임없이 배운 학문으로 세상을 맑게 해야하는 책무가 있다. 즉 민중과 사회를 위해 淸議로서 올바른 여론형성하고 나라의 정치와 사회 풍속을 감시하고 잘못 되었을 경우 탄핵하고 교화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유학의 선비가 이 출처에 분명하지 않으면 그 외에 것은 볼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바로 정권의 정통성이 없는 왕과 조정에 학자의 양심과 명예를 팔아먹는 꼴이 되고, 나아가 백성과 세상을 외면하고 오히려 이에 군림하는 비리와 악의 무리에 동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으로부터 원망을 듣는 조정일수록 지조있는 학자를 끌어내어 그들의 정권조직에 참가시키려 한다. 그것은 바로 비판세력을 무마하고 또 학자를 우대한다는 미명하에 그 학자의 재야적 명망을 퇴색시켜 버리고 끝내 올바른 비판세력마저 잠재우기 위해서다.

3.『大學』의 政治思想과 民本的 改革思想

1)『大學』의 \'修己治人\'的 政治思想

정인홍의 일시적인 출사도 정치에 오불관언하는 태도는 아닌 것인데, 이것은 유학자의 인식과 실천에 있어서 그 지침으로 {大學} 重視의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유학자의 출처사상과 직접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참고로 太祖 李成桂의 『大學』을 공부하고 강의를 듣기를 좋아하고, 려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학문발전에 기여한 太宗 李方遠에게서 기초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世宗의 憂國愛民의 경세사상과 그리고 민본사상에 기초한 일련의 治績도 『大學』의 \'三綱領 八條目\'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曺植과 鄭仁弘은 그의 중심사상이라 할 수 있는 修養論的 \'敬意\'思想과 實踐論的 經世思想, 즉 합하여 출처사상은 {大學}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그는 四書五經가운데 {五經}이 어려운 것은 {四書}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기 때문으로 보았으며, {大學}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曺植은 \"古今의 학자가 周易을 궁리 연구하기를 매우 어렵게 여기는데, 이것은 四書를 熟讀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릇 『大學』은 經書의 근본이니 반드시 『大學』을 읽어서 자세히 이해하고 꿰뚫어 알게 되면 딴 글을 보는 것도 쉽다. 朱熹도 \'평생의 정력이 다 대학에 있다\' 하였다\"라고 하여 유학사상의 핵심이 {大學}에 들어있음을 강조하고 \'下學而上達\'의 사상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鄭仁弘도 \"臣이 삼가 六經의 책을 보건대 帝王의 정치를 도모하는 기술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본말을 겸비하고 綱目이 갖추어지고 열거되어 모든 경전을 꿰뚫어 있는 것은 大學 한 권 만한 것이 없어 明德新民의 요점은 그 첫권을 열면 분명하게 보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大學}에 대한 이들의 문제의식은 朱熹의 의지와 사상도 마찬가지였다고 보아진다. 다만 朱熹는 보다 修己로서의 \'格物致知\'라는 認識論에 비교적 몰두한 반면 曺植과 鄭仁弘은 \'治國 平天下\'의 經世論에 역점을 두었고, \'誠意正心\'도 내적인 데서부터 외적지향의 실천적 \'敬意\'로 나타났다고 보아진다.
曺植이 {大學}을 중시하는 학문태도는 鄭仁弘에게 그대로 이어져, 眞德秀는 程朱의 性理學的인 {大學} 해석과는 다른 {大學衍義}를 43권을 남겨 그 속에 은근히 南宋 朝廷의 폐해를 논하여 {大學}의 經世思想的 측면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鄭仁弘은 상소문 곳곳에서 이 眞德秀의 문장을 인용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曺植은 鄭仁弘에게 金海의 山海亭에서 鄭仁弘에게「格治誠正歌」와 「大學八條歌」를 지어주었다. 그것은 바로 儒學의 종지이고 경전에서 보다 구체적으로는 『大學』의 핵심사상이라 할 수 있는 \'修己治人\', 즉 \'修己\'란 것은 出處의 \'處\'로서, \'治人\'이란 \'出\'로서 인식한다면 『大學』이야 말로 출처사상의 典範이 되는 책이라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어느 학파보다도 江右의 南冥學派가 『大學』을 중시하여 出處大義에 엄정함을 보여서 時勢가 正當하지 않을 때는 벼슬이 내려도 견고하게 움직이지 않았고, 때가 되자 일어나 出將入相의 모습을 보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曺植의 『大學』에 대한 학문사상과 그 실천이 鄭仁弘을 통하여 至治主義的 改革政治로 표출된 것이라 생각된다.

2) 保民制産과 損益思想 및 府民告訴之法

鄭仁弘은 백성을 보호하면서 지배상층부의 치부재산을 제한하는 \'損上益下\'의 정치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왕에게 직접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를 베풀어 민심을 기쁘게 하소서. 백성은 전하의 赤子입니다. 그들의 굶주리고 떠도는 상황은 지난날의 차자에서와 두 번 입시했을 때 이미 대략 진달하였으니, 특별히 시사의 걱정스러운 것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근년에 안으로는 반역의 변란이 일어나 인심이 두려워 떨고 무고하는 자들이 계속해서 나왔기 때문에 몸조심 말조심 하느라 분위기가 참담하며, 밖으로는 가뭄과 흉년이 극심하여 군민이 원망하여 부르짖으니 장차 땅이 무너지듯 와해될 근심이 있는데, 전하께서는 그 뒤를 어떻게 선처하시렵니까? 듣건대 江都(강화도)의 粟는 한 말 한 섬의 저축도 없이 집으로 들어갔고 統營의 군수 물자는 모조리 京江으로 실어날랐다 합니다. 수백 년 이래로 내외가 판탕된 것이 오늘날 같은 적이 없었고 인심의 이반이 오늘날과 같은 적이 없었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뿌리가 뽑히지 않고 미혹하는 異論이 그치지 않으니, 신은 불손한 무리들이 틈을 요행으로 여기어 엿보는 근심이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鄧禹가 시세의 어려운 때를 당하여 임금에게 계책을 올리기를 \'영웅을 맞아들이고 민심을 기쁘게 하라.\' 하였는데, 바로『周易』의 어진이를 길러서 백성에게 미친다는 뜻과『孟子』의 백성을 보호하여 왕노릇하면 막을 자가 없다는 의미에 합치되는 것으로서 漢나라 중흥의 첫 번째 가는 계책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세금을 적게 거두어들이고 낭비를 줄이며 일년 농사를 완전히 실패한 지역에 대하서는 부역을 감면해 주고 수령의 貪汚한 습관을 다스려서 민심을 기쁘게 하며 중외에 포고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성명께서 백성을 근심하는 성대한 뜻을 알게 하신다면, 죽어가던 백성들이 모두 감격하여 그 굶주림조차 잊을 것입니다. 아, 빠뜨린 인재를 수습하고 곤궁한 백성들을 기쁘게 하여서 풍화로 일시를 고무시킨다면 거의 만분의 일이나마 세도를 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소서\"라고 하여 곡진하게 진달하였다.
또한 의정부 좌의정 鄭仁弘이 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臣이 지난 번 입시하였다가 물러나려 할 적에 \'오늘 미처 하지 못한 말은 물러나서 다시 글로 진달하여도 좋다.\'는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습니다. 신이 명을 듣고 감격하여,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시는 성상의 성대한 뜻에 장차 어떻게 부응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신은 듣건대『書經』에 이르기를 \'신하는 위를 위해서는 德을 위하고 아래를 위해서는 백성을 위한다.\' 하였으니, 위를 위한다는 것은 임금의 덕을 도와 이루는 것이고 아래를 위한다는 것은 민생을 위하는 것입니다. 신하의 도리는 이 두 가지에 불과합니다. 신이 지난 날 아뢴 바, 儒臣들을 자주 접하여 정치의 道를 講論하고, 賦役을 덜어주어 굶주린 백성을 구하고, 좋고 싫음을 밝히고 취하고 버릴 것을 결정하여 사대부의 풍조를 바로잡고, 宮僚를 택해 전적으로 맡겨서 날로 진보하는 효과를 기약하고,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어 사람과 귀신의 울분을 풀어주는 등의 일은 모두가 신하로서 임금을 위하고 백성을 위하여 마음 속에 늘 담아두고서 聖上께 아뢰고자 했던 것들인데, 이제 그 한두 가지를 올리자 과연 聖上의 너그러우신 비답을 받아 거의 행해질 희망이 있게 되었으니, 너무나 감격스러워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라고 하였다.
鄭仁弘의 정치적 태도가 산림정치의 기원을 이루었다는 점이 후세의 왜곡된 산림정치의 시초라는 점에서 비록 비판할 수도 있고, 차라리 후일에 인조반정으로 폐모살제의 원흉으로 무고한 죄명을 뒤집어쓰는 것을 볼 때 차라리 직접 조정에 참가한 것이 옳은 태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튼 구체적으로 정인홍의 당시 국가 大(元)老로서 카리스마적 권위를 가지고 유학의 이상적 왕도정치, 즉 지치주의의 실현을 위해 왜곡된 현실정치를 비판한 것은 時宜 적절한 것이었다. 즉 민중을 국가의 근본으로 철저히 인식한 점이나, 그 민중이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열에 한 둘 정도밖에 남지 않았던 당시의 참혹한 민중을 \'餘民\'으로 표현하여 국가정책이 이들을 우선적으로 保護恤養해야 한다는 점 등은 이에 해당한다. 또 이러한 임진왜란의 참상은 궁극적으로 책임이 왕과 지배세력에 있음을 지적하고 \'위(신분과 계급적으로 높은)의 것을 덜어서 아래 것에 더한다(損上益下)\'는 對民觀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收取體制와 토지제도의 재정비로 井田法을 거론하면서 구체적으로 재난을 당한 후세상의 토지가 公土化 되었을 때(境界가 불확실해졌을 때) 새롭게 토지분배를 통해 시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주장과 함께 정인홍의 지치주의적 정치사상이 가지는 민본적 성격과 실학적 요소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물론 이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국토전체가 황폐화 되었을 때를 이용하여 맹자의 정전법으로 당시 대토지소유의 중앙귀족에 대해 보다 민중의 입장에서 토지정책을 실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는 세종 시대 이후로 사적으로 銀鑛을 개설하는 것을 금지하였었다. 그러나 국제무역(주로 중국과의 조공무역)에서 당시 중국은 銀 본위 제도였으므로 무역에서 銀이 필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민중은 철저히 배제된 중국의 사치품을 勳戚이나 王室, 駙馬家들이 독점하여 사오기 위해서 능력이 있는 훈척파들이 사사롭게 은광을 개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로 인한 富의 독점현상이 더욱 심해지자 정인홍은 하층민중도 은광을 개설하는 데에 참여하게 하여 민중을 살리게(活民) 하자는 이론을 내세운다. 다시 말해 이익의 독점을 權貴富豪家에게만 특권을 줄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이를 평등하게 실시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훈구척신계열과 보수적 사림파가 아니며, 일부 학자들이 주장한 대로 지방의 부호권귀가 아닌 순수한 재야 사림출신으로 서민들의 착실한 살림살이가 곧 나라의 경제를 살릴 수 있고 그것이 곧 유학의 민본 정치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며 光海君의 大同法실시 등 개혁정치 실현에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훗날 인조반정 후에 곧바로 반정훈신들과 권귀부호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한 세법개혁이 실시되는 점을 보아도 정인홍의 정치사상과 광해군의 개혁정치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제도적 장치로써 백성은 누구나 탐관오리를 고소할 수 있게 하고 軍卒도 將官의 비리를 보고할 수 있는 \'部民告訴之法\' 같은 것이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지배상층부와 君權을 강화하고 民權을 제한하고자 한 太宗·世祖·燕山君 등의 時代 이후 당시의 전제적인 왕권정치와 지배층 중심의 사회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으로 민본적인 유교정치 이념의 새로운 개혁사상이라 하겠다. 이렇게 보다 민중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변하고 왜곡된 현실정치를 비판하였으므로 정인홍이 왕의 徵召에 의해 上京하자 서울의 일반 민중들은 거리에 나와 그에게 자신들의 어려움을 하소연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고 일찍이 정인홍이 산림으로서 장령이 되었을 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비리를 고발척결하여 당시 고관들과 결탁하여 장시의 특권을 행사하던 시전상인들과 민중들 그리고 지방관의 탐오한 행동을 고발척결하자 도성의 백성들과 서울에 왔던 한 무장이 정인홍을 보고자 목을 빼고 聲名의 진실됨을 확인하고 있다. 즉 이러한 정인홍이 당연히 부패탐오한 훈구척신과 권귀 부유층들의 질시의 대상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정인홍은 언론과 간쟁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마음을 비우고 諫言을 받아들여 간쟁의 길을 여소서. 신이 듣건대 임금은 머리이고 大臣은 팔다리(股肱)이며 臺諫은 귀와 눈(耳目)이라고 하였습니다. 고굉과 이목은 각자 맡은 직분이 있으므로, \'수족이 갖추어져야만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며 고굉도 마찬가집니다. 이 네가지가 자기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면 머리가 혼자 위에서 어떻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먹줄로 곧아지는 것은 나무요 간언을 따라 聖人이 되는 것은 임금이다\'라고 하였으니, 예로부터 물 흐르듯 간언을 따르는 것을 임금의 성덕으로 여긴 것은 이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어서 당시 구체적인 면에서 \"듣건대 臺諫이 뇌물받거나 세금 도둑질하는 관리(贓吏)와 역적을 도우는 자들을 탄핵하여 논하는 것이 오랫동안 윤허받지 못하여 정지하지 않을 수 없다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대간의 기풍이 쇠퇴해져 가고 서로 속이며 사사로이 개인 가문을 위해 변방의 저축을 탕진하고, 지방의 장수들이 호랑이처럼 재물을 긁어모아 서울로 실어날아 관아의 창고는 비고 산과 바다는 벌거숭이가 되었다. 그래서 만약 수천 명 군사의 수개월 양식이 필요하게 된다면 거북이 잔등에서 털을 긁어모으는 격이고 밀가루 없이 수제비 만드는 격이니 나라가 온전할 수 있겠는가 통탄하였다.
또한 鄭仁弘은 이에 앞서 올린 箚子에서도 당시 가뭄이 혹심한데도 예년과 같은 세금을 거두고 궁궐 修繕을 계속하는 것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백성을 救恤토록 하여 시행할 수 있게 하였다.

4. 自主的 國防思想과 崇明事大主義 批判

1) 義兵倡義 및 衣冠之盜와 干戈之寇

최근 日本은 우리의 獨島가 자기들의 다께시마(竹島)라 하며 일본 근해의 우리 어선들을 납치하며 공격적인 외교노선을 강행하고 있다. 또한 몇 년 전에 P.K.O 法案을 통과시키고 다시 \'世界平和\'를 운운하며 일본군대의 해외파병을 서두르며 그들의 이른바 평화헌법을 스스로 파기하며 세계 2-3위의 군사강국을 획책하고 있다. 일제말에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나 19C 말 대한제국을 침략하면서 말한 이른바 \'동양평화\'와 함께 임진왜란 때 豊臣秀吉이 떠든 \'征明假道\'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歷史를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는 말이나 역사를 모르면 똑같은 비극을 다시 당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우리의 對日 경제예속과 함께 오늘날의 IMF 체제를 바라보며 조선조말 민씨정권의 부패와 재정파탄으로 망국으로 치달았던 역사를 우리는 망각하고, 왜곡된 뮤지컬 \'명성황후\'나 \'미국 브로드웨이 성황리 공연\' 등을 외치며 민중을 오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일제의 閔妃弑害 이후 100년간이나 IMF 체제에서도 친일매국노나 그 후손이, 또는 있는 자는 그 시대의 영향없이 계속 잘사는데, 대다수의 서민대중은 망국으로 목숨과 함께 살림살이가 쪼그라 들고 있는데도 그 근본적인 원인과 비판 그리고 대처에 대한 談論은 없고 對證療法식 말장난이 난무하고 있다.
당시 임진왜란을 끝내 이긴 전쟁으로 초기부터 이끈 실질적인 세력은 李舜臣과 元均의 연합함대인 慶尙右水營과 全羅左水營의 水軍과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한 각 지방의 義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400년 전에 유사 이래 한일관계에서 일본이 최대의 군사동원으로 이 민족과 이 강토를 짓밟고 유린했으나, 끝내 우리는 그들을 물리쳤고 비록 戰場이 우리나라라 피해는 컷지만 한치의 땅도 割讓 해주지 않고 바다 저쪽으로 쫓아버린 임진왜란의 역사적 교훈이 시급하다.
그것을 크게 몇 가지로 원인을 간단히 분석하면 경상우도 의병의 중심세력이라 할 수 있는 바로 합천(삼가, 초계) 의병의 눈부신 활약과 수군인 이순신과 원균의 남해안에 대한 철통 같은 방위 즉 관군의 임진왜란 삼대첩(한산도, 진주, 행주)과 권율의 이치대첩 등으로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 해안가의 평야지대를 우리가 끝내 방어하여 곡창지대를 확보하므로써 우리와 援軍의 軍糧米 조달에 차질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왜군에게 있어서는 군량미 조달을 위하여 일본으로부터의 그 보급선이 길어진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왜군은 보급과 수송을 위해 전방병력을 후방에 배치하고 성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전력의 분산과 낭비를 초래하여 왜군 스스로 강화를 우리에게 제안해 오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왜군을 남해 바닷가로 후퇴케 하여 울산에서 사천선에 이르러 농성하는 데 그치도록 하였고 끝내는 일본으로 竄鼠처럼 도망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鄭仁弘 의병 창의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채 한달이 지나지 않은 임진년 5월 10일에 金沔과 함게 陜川의 崇山洞에서 회합하여 同志之士 들인 郭 , 河渾, 權瀁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경상우도 57인의 의병장들은 대개 경상우도에 散在되어 있던 曺植과 鄭仁弘 門人들로 주축을 이루어 倡義하였다.
정인홍은 합천 의병군 삼천여 명을 槍兵, 射手, 騎兵으로 조직적인 편제를 하여 거느리고 무과출신으로 무용이 뛰어나고 부산첨사를 지낸 孫仁甲이나 거제현령 金俊民 등을 中軍이나 中郞將(中衛將)으로 삼아 주로 陜川, 高靈, 星州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정인홍은 스승 曺植으로부터 받은 兵法공부와 그의 뛰어난 戰略과 여러 가지 신출기몰한 전술로 경상우도 8-9 郡縣을 왜군의 노략질에서 보호하였다. 구체적으로는 茂溪, 洛江, 安彦驛의 三次에 걸친 戰勝과 晋州城 대첩 때 성밖에서 구원하였고, 丹城에서 포위된 호남 의병장 崔慶會 軍의 구원, 3차에 걸친 치열한 전투로 끝내 星州城을 탈환하는 등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宣祖 25년인 壬辰年(1592년) 6월 6일 고령 茂溪전투 승리는 낙동강 수로를 통한 왜군의 보급부대의 통로를 차단하고 초기 의병장들에게 승리감을 가지고 창의하는 동기를 주었기 때문에 임진전란사에서 특기해야 할 대첩이다.
한편 明나라의 援兵이 오기 전에 관군이 연전연패 후퇴를 거듭하던 전쟁초기에 적의 후방이었던 경상우도 宜寧에서 忘憂堂 郭再祐가 4월 22일 義兵을 최초로 倡義하였다. 그 후 호남에서는 高敬命, 金千鎰, 경상좌도에서는 權應銖가, 호서에서는 趙憲 등이 起兵하였다.
이러한 의병들의 활약과는 다르게 당시 官軍이 처음에 패주를 거듭한 원인이 倭賊의 형세가 大兵이었고 鳥銃 등의 신무기를 휴대하였다는 것과 이전과는 다른 전략 전술상의 문제점이 있었다고 거론될 수 있으나, 그 보다도 당시 우리나라 軍隊의 紀綱이 해이해져 초전부터 전쟁의 기세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전선의 장수역할을 하는 지방수령 들이 民衆들에게 평소의 가렴주구로 인해 인심을 크게 잃고 있었던 데서 관군을 도와 싸움을 더불어 하지 못한 데에 큰 원인이 있었다. 그러한 모습은 鄭仁弘의 상소문에서 지방수령들의 민중에 대한 평소의 탐학과 중앙의 조정대신들에 뇌물로 인해 피폐된 상황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처음 曺植의 제자들이 유교 정치사상의 강한 실천의지로 義兵倡義를 했을 때 관군들은 오히려 의병장들을 역적으로 모는 등 서로 불화하고 있었다. 물론 관군마저도 지방의 守令이나 節度使가 大兵을 지휘하지 못하게 한 조선전기의 制勝方略 체제였고, 私兵의 모집이란 바로 逆謀와 통하는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내적 위험에서 연전연패의 관군과 강한 일본군대를 상대로 한 起兵이란 죽음을 각오한 慷慨한 義에 대한 실천의지가 없고서는 곤란한 문제였다.
특히 곽재우와 김면이 만석군 집안으로서 처음의 그들 의병들은 家奴들이 많이 포함된 반면, 당시 58세의 鄭仁弘은 바로 당시 학덕과 명망으로 그의 문인을 중심으로 많은 의병이 모여든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가 주도한 義兵軍의 이러한 구체적이고 확실한 전과는 낙동강에서 敵의 군수물자 수송을 차단하여, 보급이 끊어진 왜군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경상좌도와 우도의 아군이 상호연락과 합동작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내륙 깊숙히 들어온 敵을 고립시키고 호남으로의 진출을 차단하여, 비록 막대한 피해는 입었지만 끝내 왜군을 퇴각시킴으로써, 壬辰倭亂을 이긴 전쟁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壬辰倭亂의 생생한 현장기록을 담고 있는 {慶尙巡營錄}에서도 \"戰勝을 보고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대부분 보고하지 않아 軍功은 남의 끝에 있으나, 사실인즉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가운데서 仁弘이 첫째다\" 라고 한 데서 그의 선비적 기질과 剛義한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당시 관군들 대개가 軍功을 다투어 서로 질시하고 전쟁수행에도 영향을 미쳤던 일에 비춰보면 단순한 개인적 성격의 참모습에 더하여 曺植의 영향을 받고 修己治人적인 來庵의 정치사상이 修己부분에 매우 철저하여 바로 治人부분의 참다운 형태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鄭仁弘은 丁酉再亂 때에 아무도 倡義하지 않았을 때에도 唯一하게 義兵을 모집하였고, 明나라 將帥들 마저 그를 戰亂 가운데서 최고의 功勳者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의병 倡義와 수훈 등의 결과로 \'嶺南義兵大將\'에 임명되었을 때 이를 사직하면서 올린 [辭義將封事]에서는 유교정치사상 고유의 經世와 義理사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현실을 直視하고 實用的 變通과 時宜에 맞는 개혁정책을 과감하게 진단하였다.
그리하여 정인홍은 아래 사람을 착취해서 위에 있는 사람을 살찌게 하는 자를 유능한 사람으로, 물건을 아끼는 자는 迂闊한 사람으로, 나라 사랑하는 자는 미치광이로 지목하는 습관에 물든지 오래 되었다고 당시 사회정치현실을 비판하였다.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되었으니 外寇가 쳐들어 오는 데에 이르러도 알지 못하였다고 보았다.
鄭仁弘은 바로 당시의 국가의 병을 임진왜란 1-20여 년 전에 지방수령으로 있을 때(39세 때인 1573년 黃澗縣監으로 재직할 때)는 당대 최고의 善政을 베푼 지방관으로 뽑혔고, 그리고 중앙관직인 사헌부 장령에 있을 때(46세 때인 1582년으로 임란 10년전)는 현실비판과 아울러 구체적인 개혁정치를 몸소 실천하였고 임진왜란이 났을 때도 앞에서 살펴본대로이다. 그러기에 {宣祖實錄}에서도 \"鄭仁弘은 非理를 탄핵하는데 있어서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고 국법을 엄하게 지켜 일시에 紀綱이 자못 肅然하였다.\" 라고 史官도 評하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앞서 있었던 己丑士禍에서 최영경을 무고하게 죽게한 것과 왜군과의 화해론을 주장한 서인과 남인들 가운데 특히 成渾에 대한 잘못을 탄핵하여 삭탈관직하였다. 또한 선조 말년에 정인홍을 대사헌에 임명하자 정철과 성혼에게 붙어있던 이귀 등은 성혼 등을 옹호하고 정인홍을 모함하자, 선조는 이를 단호하게 배격하면서 성혼의 죄를 논핵하고 나서 \"네가 감히 정인홍을 배척하여 모함할 계획이나 인홍의 사람됨은 禽獸와 草木도 다 그 이름을 아는 바다\" 라고까지 하였다.
鄭仁弘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의병장으로서 중요한 전략적인 勝捷의 공으로 亂後에 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고, 宣祖 35년 68세로 大司憲에 기용되었다. 光海君 때에는 산림정승으로, 정치의 정신적 지주로, \'大老\'로 추앙을 받았고 수십 차례 정승에 제수하고 사직하고를 거듭하였다. 일찍이 申采浩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세 사람(三傑)으로 陸軍에 乙支文德, 水軍에 李舜臣, 政治에 鄭仁弘을 꼽았다.

2) 自主的 國防政策

鄭仁弘의 국방과 외교적인 정치사상은 당시 구구한 事大的 氣風에 물들지 않고 당당히 자주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明나라 軍隊는 멀리서 왔고 오래 머물 수도 없지만 그동안 軍糧을 대기도 힘들고 하니 스스로의 자주적인 국방책을 도모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光海君 시절에는 明나라로부터 後金정벌에 원병을 요청받았을 때 內修를 주장하여 등거리 외교정치를 표방, 實益없는 사대주의 외교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이것은 仁祖反正의 구실이기도 하였으며 西人-老論으로 이어지는 尊華事大主義의 化身들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가진다. 그리고 실지로 앞에서 살핀대로 明나라의 임진왜란 파병은 明나라 자국의 이익과 방어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이것을 은혜로 알고 자국인 朝鮮을 안위에 위배되는 사대적인 외교노선은 자멸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바로 인조쿠데타의 명분 가운데 하나가 된 光海君의 實利的 외교노선을 비판하여 명나라의 再造之恩을 망각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仁祖정권에서 西人들의 현실에 투철하지 못한 성리학적 명분주의와 \'尊周大義\'는 구체적으로 온나라 民衆이 魚肉이 되고 이 땅에 나라를 세운 이래 가장 치욕스러운 삼전도의 항복과 정치자체를 파탄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 사실을 바라 보아야 한다. 그러나 鄭仁弘의 외교정치는 바로 현실을 냉엄히 바라보고 근본적인 기준이 명분이나 정권유지 차원의 사대주의가 아니라 민본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보수파인 서인은 天理와 人倫을 주장했지만 오히려 민중이 \'호로(胡虜<奴>)자식\'과 \'화냥년\'(還鄕女)이 되도록 하였다.
또한 명나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명분하에 파병한 것은 덕분에 연합군을 형성하여 일본을 이긴 큰 원인 중의 하나지만, 사실 그들의 위험한 국방을 위협하는 왜군을 조선과 함께 조선내에서 격파하고 초기에 의심한 조선과 일본의 합세한 군대가 쳐들어 오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미리 차단하고자 한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만약 전라도가 함락되고 서해안이 뚫렸다면 왜군은 군량미도 확보하고 무었보다도 특히 왜의 수군은 황해와 발해만을 거쳐 北京의 外港인 天津으로 중국을 공격하였을 것이다. 또한 조선이 전체 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육군은 압록강을 건너 랴오뚱반도를 지나 북경으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일본군의 공세에 한발 앞서 쫓기듯이 평양에 이르러 明나라에 援兵을 請하자는 이야기가 李恒福으로부터 나왔으나, 尹斗壽의 明兵에 대한 또다른 우환을 염려한 신중론도 있었다. 이러한 우환은 실제로 나타나 明兵이 朝鮮에 들어 온 후 柳成龍의 {懲毖錄}에서 말한대로 당시 民衆이 \"倭軍이 얼레빗이라면 明兵은 참빗이다\"라고 하였고 정인홍도 [辭義將封事]에서 明나라의 軍事的 後援은 잠시여야지 오래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당시 明나라는 비록 우리의 구원요청에 응하는 형식으로 군사를 파병하였지만 그들도 앞서 밝힌대로 16C 이후 왜구에 시달려 왔고 일본의 [假道入國]說에 주의하였다. 그리고 明나라는 임진왜란 중에도 혹 중국 본토에 대한 일본의 공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위기의식과 전략적 차원에서 조선에 파병하였던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東海外藩이면서 遼左藩籬인 朝鮮을 父母之仁으로 保護하기 위한 것, 즉 藩屬의 위급을 구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실지로는 명나라 자신들을 위한 파병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조선은 \'再造之恩\'라 하여 더욱 중국 明에 대한 事大思想이 정치사상에 배어들어 이것이 정파간의 이데올로기적 작용을 하였고, 명나라는 조선을 더욱 간섭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또한 일본은 300여 년 후 淸日戰爭이나 만주사변 및 中日戰爭을 통하여 이 시나리오 그대로 중국의 주요도시와 당시 수도 남경을 함락시키고 30만 명을 학살강간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城中 6만 명을 어린아이, 부녀자까지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학살한 그러한 잔인하고 야만적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민족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바로 20세기의 현대전쟁인 태평양 전쟁에서도 2천 20여만명의 타민족을 무차별로 희생케 하였다.
이러한 强盜 日本과는 壬辰倭亂 당시 和議란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開戰初인 임진년 4월에서 2개월 간과 정유재란 때 7월에서 9월에 이르는 약 2개월 외에는 우리의 의병과 수군이 그들 일본 본토의 예비병력과 식량의 보급을 차단하고 이 때문에 힘을 잃고 패주하여 경상도 남해안의 일부 군현의 성에 웅크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이 때 그들은 일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강화조건에서 허풍을 치며 화의를 요구하자 조정에서는 영의정 유성룡, 성혼, 이정암 등과 명나라 총독 顧養謙이 화의론을 주장하였고 이항복 등도 여기에 동조하였으며 명나라 遊擊 沈惟敬의 국제적인 사기협잡 같은 중간의 화의거래가 있었으나 뻔한 것처럼 화의는 결렬되었다.
이 때에 南以恭, 文弘道는 유성룡을 탄핵하여 삭탈관작케 하였다. 鄭仁弘을 비롯한 경상우도 의병장들도 끝까지 왜적을 소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화의론을 비판하였다. 또한 내암은 명나라 군대의 힘입은 은혜와 그들 군대의 횡포와 정치적인 압박을 구별하여 논하고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辭義將疏]에서 강조하였다.
국제간의 원조와 파병이란 사실 명분 뒤에는 그 보다도 항상 파병 당사국의 이익이 내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를 간과하고 조선후기 宋時烈 등이 보여준 崇明排淸의 慕華事大主義는 민족이나 국가의 진정한 안보와 민생의 안정에 과연 어떤 이익이 되었는가 따져야 한다. 다시 말하여 자신이나 가문 그리고 속해 있는 당파의 이익을 국가민족에 우선하고 나아가 자주적이지 못할 때 민족을 파는 행위와 다름 없다는 것이다.

5. 學問思想의 實踐的 特性과 그 批判繼承

1) 王位繼承과 外戚政治 그리고 廢母殺弟論

과거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서 父王이 죽고 어린 왕이 즉위하여 그 어미가 王后로 攝政했을 때, 대개의 경우 外戚들이 跋扈하여 정치와 경제가 파탄하여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지고 끝내 망국으로 치달았던 모습을 보게 된다. 중국 漢高祖의 呂后와 王莽의 新나라, 則天武后와 周나라 건설 등과 한국의 조선왕조 때 명종 때 문정왕후, 순조 때 정순왕후 등은 그 간단한 예일 것이다. 또한 淸나라 말기 西太后의 섭정과 독단, 개혁정치의 중단과 개혁파의 처단(무술정변) 매판과 보수반동적 정치상황은 우리나라 閔妃의 보수회귀와 독재, 대원군의 개혁정치 중단과 민씨척족의 부패, 개화파의 新政中斷(갑신정변) 등은 그 결과로 끝내 제국주의 세력에 나라가 결단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인홍의 광해군 개혁정치에 대한 지지와 이항복 등 서인 보수세력과 인목대비를 옹호하고 발호하기 시작하는 역모세력에 대한 처단을 주장한 것은, 훗날 인조반정 후의 인목대비의 처사나 궁정 쿠데타의 성격을 생각할 때, 매우 정당하고 예언적 성격을 가진다. 또한 曺植의 「民巖賦」에서 女謁의 성행이 암초를 쌓는 수레를 비유하며 문정왕후의 비정과 명종시대의 암울했던 시대상황을 아파하고 거침없는 상소문으로 이를 비판하는 것을 볼 때, 광해군 시대의 인목대비와 그 배후 정치세력의 성격 및 조선 후기 시대 \'無失國婚\'이라 하여 왕비배출을 독점하여 \'一王妃가 十政丞보다 낫다\'고 한 서인 - 노론 세력의 보수반동적이고 반민중적이며 반유교적인 당대 현실의 파행을 미리 시의적절하게 정인홍이 과단성있는 상소문으로 지적하였다고 본다.
그렇게 볼 때 태종 이방원이 외척을 제거하고 왕후 민씨를 폐출하고자 하였거나 세자 양녕을 폐출하고 세종을 세운 것이나 漢武帝가 衛太子나 셋째 아들 燕王 旦을 폐출 살해하고 다음의 황제인 5세의 어린 昭帝의 어머니 鉤 夫人 趙氏를 미리 雲陽宮에 유폐하여 죽게 만들었던 것은 깊은 뜻이 있었다. 훗날 한무제가 좌우의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이에 대해 뭐라 하느냐?\'고 묻자 좌우 근신들이 \'사람들은 그녀의 아들을 세우려고 하면서 어째서 그 모친을 제거해야만 했느냐?\'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한무제는 \'그럴 것이다. 이러한 것은 소인배나 어리석은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자고로 국가에 亂動이 있었던 까닭은 황제의 젊은 어미가 혈기왕성한 나이였기 때문이다. 황후가 독단적이며 교만방자하고 음탕하기 이를 데가 없으면 이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너희들은 呂后를 들어보지 못하였느냐\'라고 하였다. 사마천도 평가하기를 \'이것이 어찌 賢聖한 君主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현명하고 탁월한 식견은 사후에 국가의 운명을 위한 계산인 것으로, 이건은 확실히 淺聞耳陋한 멍청한 儒生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늙은 宣祖는 어린 繼妃 金氏가 영창대군을 낳자, 이미 世子로서 임진왜란을 통하여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장년이 된 광해군이 있는데도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 의미에서 확실히 조선의 태종은 이성계의 여러 아들 중 유일하게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한 총명한 자로서 부왕의 易姓革命의 왕업을 도우고 아들 세종을 聖君으로 만드는 기틀을 마련한 영명한 군주였다. 누가 감히 태종을 인륜도덕이 없는 인간백정이라고 욕하는 이가 있고 그 누가 왕위찬탈의 逆謀로 反正을 했는가?
그런데 특히 바로 앞 시대 仁宗의 배다른 동생 明宗이 등극하여 모후인 문정왕후의 폐정과 이로 인한 국가존망의 임진왜란을 겪고 배운 광해군이 왕업을 위한 폐모살제를 반란의 명분으로 삼거나 폐모론에 참가하지 않았다거나 전은설로 발뺌한 것을 구명도생의 명분으로 삼고 이를 惡評하는 후대의 儒者들의 비루하고 천박한 지식과 왕가에 아부하는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왕과 그 신하는 나라의 命運과 백성의 休戚에 그들의 학문언행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거늘, 더구나 그들의 정치가 훗날 純祖 때 영조의 젊은 繼妃였던 정순왕후 섭정과 세도정치로서 19C 조선의 정치를 망국으로 치닫게 한 비정을 배태하기 시작하였음에랴.
하지만 그러나 정인홍은 끝내 그 스스로 정치일선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그러한 개선의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왜곡되었는데 이이첨의 비리문제와 함께 그의 뛰어난 학문사상과 정치적 견해도 올바로 적용치 못하고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2) 仁祖反正과 歷史의 眞實

西人의 鄭澈과 成渾의 제자들이던 李貴와 梁弘澍 등이 鄭仁弘을 비판하는 상소문이『宣祖修正實錄』에 나온다. 당시 \'李貴는 성혼의 用事非理를 비판하는 남쪽의 선비들을 제어하기 위해 선비들의 領袖이던 鄭仁弘을 꺾으면 士論이 수그러들 것이라고 보고 誣告상소를 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인들의 행동유형은 묘하게도 그들의 치부가 들어나면 무고하거나 逆獄을 날조하거나 결국은 쿠데타를 행한다.
그런데 기존의 역사학자들은 『宣祖實錄』은 의심하면서 훗일 서인들에 의한 『宣祖修正實錄』에 있는 기록을 주로 인용하는 태도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吳汝牀은 그의 상소문에서 李貴의 鄭仁弘에 대한 무고상소에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이귀의 인간 됨됨이를 평가하고 있는데, \"이귀는 인재를 禁錮하고 남의 옥사를 결단하며 남의 죄를 결정하고 임금이 막지 않는 것을 막으며, 임금이 내치지 않는 사람을 내쫓았다는 등의 말을 백방으로 꾸며 聖上의 총명을 미혹시켰으니 兇人이 없는 말을 만들어 올바른 사람들을 모함함이 참혹하다\"하다고 한 다음 구체적으로 이귀가 정인홍을 모함해서 날조한 사건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또한 오여은은 \'간사한 무리들이 사람을 모함하기 위해 반드시 불측한 이름을 첨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라고 하며 \'司馬光에 대해서도 章惇이 간사하다고 지목했으며, 朱熹의 正道에 대해서도 胡紘은 僞學이라고 배척했다\'는 예를 들었다. 또한 \'본성이 거짓되고 종적이 무상하여 李珥가 當國할 대는 이이에게 의탁하고 정철과 성혼이 조정을 독점할 때는 그들에게 의탁하며 냄새를 좇아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고 하면서 만약 임금이 \'너그러이 용납하여 덮어주다가 그것이 嚆矢가 되어 혹 君父에게 시험을 하거나 올바른 사람에게 시험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귀의 몸이야 출몰하다가 말더라도 이귀의 말이 뒷날 뜻을 펼날이 있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臣은 사슴을 말이라고 한 秦나라 趙高같은 간신이 또 그 사이에서 틈을 엿볼까 두렵다\'고 하였는데 이 우려는 역적모의에 주동이 된 이귀는 인조반정으로, 서인들에 의해 정인홍의 학문을 이단으로 몰아버린 역사기록을 볼 때 거의 정확한 예언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서인들 스스로 쓴 『仁祖實錄』 등에서도 李貴의 상소문과 언행을 비판하고 있을 정도이니 그는 과연 어떤 종류의 인간부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해군 시대에 특별하게 역적모의를 처벌하는 옥사가 빈번하고 뇌물을 써서 면하기도 하는 등 그 처리가 불분명하였다. 그러면서도 후일 \'廢母殺弟\'에 대한 응징이라는 명분으로써 역적모의와 궁정반란(反正)의 꼬투리를 제공하였는데, 역모처리에 대해서 정인홍은 \'獄事를 엄하게 다스리지 못하여 一罰百戒가 되지않아, 자주 逆謀의 옥사가 일어나고 그 처리와 진행이 지연되므로 마치 자주 뇌성벽력이 치면 사람이 놀라지도 않는 것처럼 인심이 해이해져 가며 무고가 일어나고 역적을 오히려 두호하고 있는 형세\'라 하여 마치 미구의 인조반정을 예언한 것처럼 분명한 의견과 태도를 말하였다. 그러나 온전히 시행되지 못하여 반란을 당하고 말았다.

6. 後世影響과 評價를 겸한 結論

학술논문은 항상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 객관적이란 것이 과거의 역사나 인물에 대한 논문일 때, 왕왕 잘못 이해되어 褒貶이 반반이어야 한다거나 당파성에서 대결구도를 가진 글은 문제가 있다는 논리를 제시하는 이들이 있다. 또한 인문사회과학의 글이 당시의 현실에 바탕을 둔 時代精神에서 초월한 形而上學的 談論을 요구한다면 이는 항상 필자가 주장하였고, 曺植과 鄭仁弘이 일찍이 주장한대로 허위의식에 찬 \'欺世盜名\'의 글이라고 본다.
또한 儒學의 민본적 정치사상과 至治主義나 실학의 근본 의미 자체에 대한 인식부족과 의미를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단편적인 논문 몇 편을 보고 그것을 인용정리하는 수준의 논문을 작성하면서도 왕왕 사회과학 전공학자들이 가지는, 즉 외형적인 것만 보고 쉽게 남을 판단매도하는 학문과 논문 서술 태도는 재고를 요한다.
이 글에서는 광해군 시대에 대한 담론과 그 포폄에서 끊임없이 이야기 되는 廢母殺弟와 割恩說과 그리고 全恩說에 대한 논의에서 기존 학설과는 다른 그리고 전통적인 유학의 윤리강상적인 견해와도 다른 것을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漢武帝가 없는 儒敎文化圈을 생각할 수 없는데, 진정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光海君과 仁祖 시대의 사회정치를 비교할 때 당연히 광해군의 治世와 이를 가능하게 하였던 정인홍의 至治主義的 학문사상과 개혁사상을 짐작할 수 있겠다.
우리는 역사기록과 후세의 평가에 대해서는 항상 당시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 재인식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의 가장 정확한 역사기록이라 할 수 있는 {朝鮮王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