來庵 鄭仁弘의 政治思想과 現實認識-이이화 先生 著

by 정치사상 posted Jun 0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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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仁弘의 政治思想과 現實認識
李離和
(歷史問題硏究所 所長)

<目次>
Ⅰ. 머리말
Ⅱ. 鄭仁弘의 出身과 立身
Ⅲ. 政治思想과 現實認識
Ⅳ. 마무리 말


Ⅰ. 머리말

來庵 鄭仁弘(1535∼1623)은 한국 儒學史와 政治史에 있어서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山林 출신으로 드물게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른 정치가였으나 끝내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그의 정치적 행동이 어떠했기에 역적이라는 이름을 뒤집어 썼던가? 그가 伏誅를 받을 때의 罪籍은 이러했다.

逆賊鄭仁弘 以蛇蝎之性鬼筮或之心 始雖盜名於林下 特一豪强品官 中焉托跡於義兵 惟事武斷鄕曲 收聚頑鈍之徒 私倡怪鬼之學 李彦迪李滉東方大賢 而因憾斥疏 不有餘力 鄭蘊李大期直言被罪 而從而下石略不伸救 士心咸憤 門徒皆叛

위 인용문에서는 ① 士林출신으로 횡포를 부린 品官이라는 것, ② 임진왜란 때 義兵을 일으키면서 武斷으로 위세를 부렸다는 것, ③ 괴귀한 학문을 퍼뜨렸다는 것, ④ 李彦迪 李滉을 배척하고 文廟從祀를 반대하였다는 것, ⑤ 廢妃를 반대한 동료요 후배인 鄭蘊 李大期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것 등이다.
이어 그의 정치적 행각에 대해 이렇게 지적하였다.
與爾瞻 表裏聲勢 迭相推薦 塗沫山野 冒據鼎軸 導昏君必以刑獄 倡 流必以諂 私親入廟之議 該曹數年力寢 而一言贊成 終勸上奏 登筵先薦施文用風水之設 意起土木之役 癸丑之獄 陳箚肆虐 指大君爲圈中 豕 大論之發 首倡先廢後奏之議 至比於哀姜文姜 且以爲不共戴天之讐 幽閉之禍 決於其言 使綱常 絶 人理晦塞
위 引用文에서는 李爾瞻과 함께 光海君의 亂政을 도왔다는 것, 光海君의 어머니인 恭嬪金氏를 宗廟에 들게 했다는 것, 風水說로 交河로의 遷都役事를 벌였다는 것, 永昌大君을 능멸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 廢母論을 내고 仁穆大妃를 유폐케 했다는 것 등이다.
그리하여 그는 陜川의 幽居處에서 잡혀온 지 4일만에 伏誅되어 역적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의 士林으로서의 역할과 정치적 행각을 더듬어보고 解明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어 그런 행동과 함께 그의 政治思想과 現實認識을 더듬어 보아야 할 것이다.

Ⅱ.鄭仁弘의 出身과 立身

1.家門과 修學
鄭仁弘의 本貫은 瑞山이다. 그의 先代 鄭仁弘이 공을 세워 본관이 瑞山으로 下賜되었다 한다.
그의 先祖들은 원래 중국 浙江에 살았는데 臣保가 宋의 燕部員外郞이 되어 있을 적에 南宋이 元에 멸망하자, 그는 고려의 瑞州(瑞山의 옛이름) 月島에 귀양을 보내 고려에 살게 되었다 한다.
그의 아들 仁卿은 高宗末에 蒙古가 來侵했을 적에 공을 세워 軍校가 되었고 忠烈王이 世子로 -경에 볼모로 갈 적에 수행하였다. 世子가 돌아올 적에 국내에 林衍이 변란을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아버지 臣保가 麟州守로 있어서 몰래 압록강을 건너 그 사실을 알아내고 世子에게 고해 난을 평정하는 데에 공을 세웠다. 이로해서 그의 향리 富城縣이 瑞州로 승격하는 영광을 입었다.
그 후 仁卿은 많은 군직을 맡으며 공을 세웠고 對蒙外交에도 활약하여 죽고 난 뒤, 襄烈이라는 시호를 받은 탓으로 瑞州鄭氏의 후손들이 고려조의 名門이 되었다.
鄭仁弘의 6대祖 允弘은 軍器副正을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자, 金陵의 風溪로 옮겨와 살다가 自靖했다. 允弘의 아들 斯仁은 務安縣監을 지냈는데 成儉이 家屬을 陜川으로 옮겨와 살았다.
鄭仁弘의 증조 僖는 三嘉縣監을 지내고 嶺南學派의 종장인 金宗直에게서 修學하여 學行이 높았다. 그리하여 嶺南士林派의 家門이 된 것이다. 鄭仁弘의 조부 彦佑와 아버지 倫은 모두 벼슬에 나가지 않고 士林으로 학문을 닦았다.
이런 가문에서 그는 陜川 象王山아래 南蓑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家學에 힘입어 儒學공부에 침잠하는 한편 과거공부에도 열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23세에 生員試에 합격하였으나 仕宦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南冥 曺植을 언제 만나 修學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曺植은 陜川 三嘉에서 雷龍亭·鷄伏堂을 짓고 많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1561년(명종 6)에는 지리산 밑 德山에 터를 잡아 山天齋를 짓고 학문 이외에 처세·수양을 가르쳤다.
鄭仁弘과 曺植과의 관계에 대해 이런 기록이 전해진다.

童時 從曺植學 植奇其志操凡異兒 誨以持敬 自是堅苦用功 晨夜不懈

이는 그가 卓行之士로 천거되었을 적에 그 내력을 적은 대목이다. 여기에서 보면 그는 적어도 어릴 적부터 曺植에 從學한 것이다. 그리하여 曺植이 山天齋를 연 뒤에 受業을 받은 金宇 ·崔永慶·鄭逑보다 훨씬 앞선 시기였다.
曺植이 山天齋에 있을 적에 鄭仁弘은 出處에 대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과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하는 것에 대한 옳은 의리\"를 물었다. 이에 대해 曺植은 \"이것이 어느 때이고 어떤 자리인데 여기에서 겉모양은 그럴 듯하게 꾸미고 뻔뻔하게도 현자의 지위를 함부로 차지하고 마치 종장인 것처럼 해서야 옳겠는가?\"라는 해답을 보냈다.
이때 鄭仁弘은 아마 출세와 학문과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은 듯하다. 그가 生員試에 합격하고 이어 본격적으로 관계의 길로 들어설 것인지에 대해 회의를 하며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당시 조정은 文定王后가 섭정을 하여 많은 폐단을 낳은 뒤 戚族尹氏가 발호하고 있었고 佛僧 普雨가 세력을 잡고 있었다. 그후 1565년(명종 20) 普雨가 쫓겨날 즈음인 5월에 조정에서는 曺植에게 벼슬길에 나오라는 부름이 있었고 영의정 尹元衡이 관직을 삭탈할 즈음인 8월에는 尙瑞判官이 내려서 일단 임금을 만나고 다음날 還山했다.
이런 曺植이 제자 鄭仁弘에게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기보다 혼탁한 시기에 처신의 신중을 당부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당시 조정에서는 李彦迪 李滉이 벼슬자리에 있었는데 위에서 말한 \'宗\'匠은 이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曺植은 실천과 행동을 중시하여 늘 방울을 차고 다니고 그 소리를 듣고 자기 마음을 깨우쳤고 한편 칼을 머리맡에 두고 의리의 결단을 다짐했다. 이를 曺植은 \"內明者敬 外斷者義\"라 하여 敬義를 행동철학의 상징으로 여긴 것이다.
1572년(선조 5) 曺植이 죽기 직전에 방울과 칼을 각기 高弟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런 내용이 전한다.

植常佩鈴喚醒 劍警昏 末年以鈴與金宇 以劍與仁弘曰 以此專心 仁弘以劍 下擎 經身如一日…….

곧 金宇 에게 방울을 주고 鄭仁弘에게 칼을 주었는데 鄭仁弘은 이로하여 傳心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鄭仁弘은 曺植이 죽은 뒤에 山林處士에서 變身하여 벼슬살이에 나섰다.

2) 山林掌令의 명성

宣祖는 왕위에 오른 뒤, 李珥를 중용하면서 널리 인재를 구하였다. 그리하여 1573년 卓行之士를 뽑게 했는데 吏曺에서는 李之 · 崔永慶·鄭仁弘· 趙穆·金千鑑을 천거하였다. 李之 은 花潭 徐敬德, 崔永慶 鄭仁弘은 南冥 曺植, 趙穆은 退溪 李滉, 金千鑑은 一齋 李恒의 高弟들이었다. 그러므로 黨爭이 있기 전에 각 學派의 경기, 경상 左右道, 전라도의 인물을 고루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에게 모두 6品職이 제수되었다. 보통 遺逸로 천거될 적에는 9품직을 주는 것이 관례인데 이들에게는 出六의 특별 혜택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일찍이 과거공부를 해서 스스로 팔리기를 구했으니 처음부터 학행이 있어 超敍에 합당한 자와 비할 것이 아니다\"고 겸손해 했다.
그리고 이때 黃澗顯監에 제수되었음을 밝히고 그곳에 재직하면서 행정에 소루함이 많았고 胥徒들이 侵陵하여 貢物상납이 제대로 통하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가 黃澗顯監으로 몇 년간 재직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1578년(선조 11)에는 永川郡守가 내려지고 1586년(선조 19)에는 益山郡守가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비록 그가 出六으로 일시 현감을 지냈으나 뜻이 山林에 있어 牧民職이 내려도 이에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달리 그가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놓고 일대 명성을 얻는 계기가 있었다. 1580년(선조 13) 12월, 조정에서는 鄭琢을 大司憲, 李珥를 大司諫, 成渾·鄭仁弘을 掌令으로 삼는 획기적인 조처를 취했다. 곧 山林출신의 道學者로 言官의 책임을 맡긴 것이다. 이들은 당시 명망이 높은 인사들이었다. 이를 두고 뒷날 가장 言官의 자질이 높은 인물로 짜여진 이상적인 형태라고 칭송했다.
成渾은 이미 持平의 관직을 받고 있었으나 鄭仁弘은 향리에서 上京할 적에 \"仁弘 以淸名重於世 及拜是職 人皆望風采\"라 하여 대단한 촉망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鄭仁弘은 45세 장년의 나이로 鄭琢 李珥의 인정을 받으며 交分을 다졌고 또 자기 소신껏 言事를 벌였다. 그는 거리낄 것없이 간언을 하여 지방의 수령·이서들이 벌벌 떨었다고 전해진다. 이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其質性 剛戾自用 與人言語 小有逆於己意 輒忿恙求勝 造言謀害 陰巧不測 雖至親篤交 忽若仇讐 所養愈厚 所發尤暴 其讀書稽古精博過於植 尤長於辨難攻擊之文 人知其非 而畏其强 莫能抗也 李珥 虛心好善 望風傾到 遂與相善 不知其爲壬人也 由此名動朝廷

여기에서는 첫째 성격이 강직하여 누구도 그를 거슬리면 원수처럼 대결한다는 것, 둘째 학식으로는 스승인 조식보다 나으며 論劾의 글에 뛰어나다는 것, 셋째 이로해서 李珥가 그를 남달리 대우하고 친교를 맺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뒷날 修正實錄을 편찬하면서 貶下하려는 분위기가 깔린 史評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명성이 조정에 떨쳤다는 사실은 그대로 전해준다.
어쨌든 그가 장령으로 임명을 받들 적에나 장령으로 재직하고 있을 적에나 커다란 명성을 받았던 것이다. 이런 탓으로 이때를 두고 뒷날의 史評은 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後日儒學之興 可謂極盛 而眞才實學 沈淪枯黃 逐至擧世 無一個眞道學 非徒無益於國家 亦不足爲鄕里之矜式 非徒無退栗諸賢之盛 求其如鄭仁弘李玄逸初年聞望者 亦不可得

곧 19세에 세도정치 아래에서 인재를 제대로 등용치 못하여 退溪 栗谷은 물론 초년에 명망을 얻었던 鄭仁弘·李玄逸 같은 사림이 나올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鄭仁弘은 言官으로서 法令을 지키고 기강을 확립키 위해 上下 貴賤을 막론하고 탄핵을 가했으며 이서들의 부정과 모리배의 농간, 수령의 비리를 적발하여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3년간 장령의 소임을 맡아보다 母喪을 당하여 다시 낙향하였다. 이때 史臣은 그가 言官을 마무리 지을 적에 이런 평으로 그의 업적을 요약했다.

及其承不世之命 起草野而來 君上虛席以待 朝野拭目以望 爲仁弘者 所宜首格君心之非 繼陳時務之急 與一二士類之尤者 同寅協心 論議可否 朝論之是非 用捨之得失 次第正救 務存保合和平之道 則淸流倚重 輿望允恢 或不失朝家期待之意矣

이 평가는 그가 장령에 있을 적에 국한해서 내려진 것이나 名言官으로 그의 소임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母喪으로 고향에 돌아와 학문을 닦으면서, 앞에서 언급한 대로 益山郡守·永川郡守가 내려졌으나 이를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당시는 조정이 東西 黨論으로 시끄러웠고 또 그를 인정하고 아끼던 李珥도 죽은 뒤였다.
이런 속에서 그는 두가지 큰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3. 東人의 탄압과 義兵활동

그는 당론에 대해 이렇게 논단하고 있다.

朝廷之上 全身保位 圖一時之名利者多 赤心殉國 爲聖朝長慮者小偏私之習 日深而益錮 人主之勢 日高而益孤

곧 신하가 없고 또 그런 속에서 派黨의 뿌리가 깊어지고 임금의 권세가 줄어진다고 하였다. 이어 이렇게 또 논단하였다.

依附幽陰 形跡詭秘 投間騁巧 以求必逞者 必小人之黨也 重義輕利進退不苟 雖不見是不求分解者 必君子之朋也 君子小人之進退 而得失治亂之所由判 則取舍之分 不可一日而不定

君子 小人을 가려 小人을 제거해야 黨論의 폐단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宋나라 때의 朋黨論을 빌어 당론에서 君子·小人의 문제는 그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런 속에서 1589년(선조 22) 이른바 己丑獄事를 맞이했다.
전주에 사는 東人 鄭汝立이 역모를 꾀했다고 獄事가 벌어졌는데 이때 鄭澈이 委官이 되어 이를 다스렸다. 그런 속에 東人들이 많이 걸려들었고 그중에 그와 同門受學의 친구요 出仕도 같이한 崔永慶이 잡혀 고문끝에 獄死했다.
이에 鄭仁弘은 崔永慶의 伸 을 위해 두번에 걸쳐 상소를 올리면서 己丑獄事에 연루된 사람들이 조작에 의해 죽음을 입었다는 논증을 대며 격렬하게 鄭澈 등 옥사를 주도한 인사들을 비난했다. 그런 내용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自古 小人之攻君子者 或指以朋黨 或指以謗 而誣以逆謀 未有若足之慘且酷者 可勝痛哉……自世道言之 誣一世之高士 而陷於叛逆之罪 實一國之羞恥也

곧 己丑獄事에서 소인이 군자를 역모·반역으로 몰아 죽였다고 갈파했다. 己丑獄事가 끝난 뒤, 이의 음모를 폭로한 최초의 상소였다. 이로해서 西人들은 비록 그가 초야에 있으나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적으로 지목했다.
1592년 왜군은 승승장구로 부산을 거쳐 서울로 진격했다. 이때 慶尙右道는 洛東江이 水軍의 중심이어서 이를 차단해야 왜군의 후반통로를 막을 수가 있었다.
鄭仁弘은 郭再祐·全致遠 등과 연합전선을 펴서 낙동강 일대를 방어하였다. 鄭仁弘은 총지휘격으로 군사의 모집, 양곡의 염출에 열성을 다했다. 그는 茂溪 丹溪 등지에서 아들을 잃어가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武斷的 방법을 쓰기도 했다.

自起事之初 餉軍無故 或勸出鄕粟 或勤取富家 僅僅繼給

곧 군량미를 관가 또는 부호에게서 강제로 염출했음을 밝히고 있다. 1593년 그에게 義兵將의 직함이 내려직고 실직으로 3품의 濟用監正이 제수되자 이를 사양하였다. 이어 다음해 尙州牧使가 제수되자, 그는 郭再祐, 金沔, 全致遠, 李大期, 全雨 등에게 공을 돌리고 사직하였다.
그리고 관리의 부정, 민생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倭亂을 막을 수 있다는 長文의 상소를 두차례 올렸다. 이들 글에서 그의 현실인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 속에 명나라 군사를 물러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뒷날 이 문제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4. 退溪·南冥門徒의 분쟁

임진왜란 후 그에게 계속 중앙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속에서 1602년(선조 35) 그에게 大司憲이 제수되었다. 당시 西人이 물러가고 北人이 정권을 잡아, 선조는 그를 중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의 나이 68세 때였다.
이때 그는 다섯가지 \'五不可仕\'의 조목을 들어 사직 차자를 올렸는데 그속에 李貴가 자신의 비리를 공격한 사실을 들고 또 偏黨이 혹심한 현실 때문에 大司憲職을 맡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는 잠시 임금을 만나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箚子를 올렸던 것이다.
그에게 大司憲이 제수되었을 적에 西人 李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든 상소를 올렸다.

嶺南之弊 則名爲士人者 劫制守令 徒流杖殺之權 皆出其手 實鄭仁弘爲之倡也……臣因擧道內所聞 仁弘豪强縱恣之狀 移關陜川 推閱其奴……所謂諸處義兵 朝廷皆令罷之 而仁弘則 自爲己物 使監兵使 莫敢下手

곧 鄭仁弘이 의병활동을 벌일 적에 수령들을 마음대로 제어하여 형벌을 가했고 義兵을 私兵으로 키웠다는 것이다. 이에 鄭仁弘의 문도인 文景虎 吳汝牀 등이 李貴를 논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西人들도 이에 맞서 소동을 벌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새로운 적을 만나게 되었다.
1604(선조 37)에는 南冥集을 그의 주도 아래에서 간행했다. 여기에 그가 序文과 行狀·神道碑銘을 썼다. 그런데 行狀 뒤에 『南冥先生與李龜岩 絶交事』로 일컬어지는 附錄을 덧붙였고 또 退溪答李楨書를 幷錄하였다. 이들 글은 李楨이 曺植의 행동과 處身을 두고 논단을 가하자, 이에 절교한 사실과, 또 退溪·南冥의 출처와 인품을 비교, 서로의 寸評 등을 적은 내용이었다. 이런 일들은 실제 두사람이 생존해 있을 적에 일어났던 일이요, 또 약간의 분란이 있기도 했었다.
이런 내용을 담은 南冥集이 반포되자, 成均館 儒生 丁好誠 등이 전국의 鄕校와 書院에 통문을 보내 鄭仁弘을 규탄하고 나섰다. 이것은 내면에 깔려있던 두쪽의 알력이 표면화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春秋館의 史官은 이 문제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兩家門徒 不能明知二公學問之淺深 徒執其跡 互相 數世而滋甚 有志之士慨嘆久矣 今者名爲館學儒生數三輩 挾憾於南溟(冥의 오식)門徒 借鄭仁弘跋南冥集說 馳書各道 侮弄先師 無所不至 觀其指斥仁弘 而潛攻南溟 推尊退溪而 顯排南溟

몇년 동안 이런 논란이 있어 왔다가 丁好誠 등의 通文에 그것이 구체적으로 기술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로해서 退溪門徒와의 간격은 더욱 벌어졌고 뒤에 일어난 文廟從享문제로까지 발전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金忠烈은 이렇게 평했다.

來庵의 南冥集說은 결정적으로 江右, 江左가 서로 반목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니 來庵은 정계에서 西人과 反目하여 그 半을 잃었고 學界에서 江左와 反目하여 또 그 반을 잃은, 이를테면 敵을 많이 만들어 스스로 외로워지는 形勢가 된 셈이다.

그후 宣祖末年에는 小北政權이 이루어져 柳永慶이 영의정으로 用事하고 있었다. 1607년(선조 40) 선조는 병석에 누워 光海君에게 傳位라하고 명했으나 柳永慶은 그 備忘記를 감추고 이를 거두게 하였다. 柳永慶은 永昌大君을 옹립하여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1608년 정월 柳永慶을 斬刑에 처하는 封事를 올렸다.

國君有故 則貳君之監國處守 古今之通規也 臣不敢知永慶之乃謂 群情之外者 何爲也 台諫不得聞 則非國政也 其事也 政院史館同爲私秘 則知有私黨 而不知有王事也

小北派의 台諫·承政院·春秋館의 言官들을 싸잡아 공격한 것이다. 이 일로 鄭仁弘은 74세의 노구로 영변으로 첫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유배 도중에 宣祖가 죽고 光海君이 즉위하여 李爾瞻 등과 함께 유배 조치가 해제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光海君이 즉위하자, 그에게 곧바로 漢城判尹·大司憲·贊成이 내려졌으나 계속 辭職疏를 올려 時政을 논하고 出仕하지 않았다. 이런 속에서 1610년(광해군 2) 9월 5현의 文廟從祀가 있었다. 곧 종래 崔致원 등 先賢 이외 새로이 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彦迪 李滉이 文廟從祀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특히 李彦迪 李滉은 退溪門徒, 曺植은 南冥門徒가 從祀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었는데, 退溪門徒의 요구가 관철된 것이다. 이에 鄭仁弘은 왕이 그의 問病을 위해 內醫와 禮官을 보내고 上京할 것을 당부하자, 贊成의 辭職箚를 올리면서 李彦迪·李滉의 文廟從祀가 不當하다고 논핵했다.

臣嘗見故贊成李滉 誣毁曺植 一則曰傲物輕世 一則曰高亢之士 難要以中道 一則曰老莊爲 目成運以淸隱 認爲偏少一節之人 臣心常憤鬱思一辨明許多年矣……李滉以科目發身 不全進不全退 依違譏世 自以爲中道……稍以儒學名者 其不爲薄物細故也審矣 滉暗於觀己而甚於責人 此亦豈君子之心事乎

李滉이 자기 스승인 曺植·成運을 평한 말을 빌어, 李滉의 出處가 분명치 못함을 지적했고 곁들여 君子의 心事가 아님을 논급했다. 그는 적어도 丁好誠 등이 통문을 돌려 비난할 적에도 참았던 말을 이때 몽땅 털어 놓은 셈이다.
이로 해서 조정과 士林사이에서는 큰 논란이 일어났다. 특히 退溪門徒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成均館의 儒生들은 榜文을 내걸고 捲堂에 들어갔으며 이어 成均館의 靑衿錄에서 鄭仁弘의 이름을 삭제하자는 결의도 하였다.
또, 三司에서 鄭仁弘의 箚子를 규탄하고 나섰다. 光海君은 이에 成均館 유생과 三司의 규탄을 억제하고 靑衿錄의 削名을 엄히 막았다. 더욱이 削名을 주장한 유생을 가려내 啓聞하라고까지 하면서 鄭仁弘을 감쌌다.
이렇게 하여 退溪門徒와 메꿀 수 없는 갈등이 유발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5. 全恩說·割恩說의 내용

光海君이 즉위하자, 그의 형 臨海君은 王位를 넘보다가 불평을 일삼으며 不軌의 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血肉이므로 全恩으로 용서해야 한다고 하고 역모에 걸렸으니 목숨만은 빼앗지 말아야 한다는 논의가 분분했다. 이에 그는 箚子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全恩之說 遽發於其間 物情因而疑惑 國論以此二三 將有不可言者豈謂人心世道之罔極 至於此也 臣竊以爲全恩之說 若起於逆狀未明 獄勢未成之前 則固不免掠 上之美歸恩於己也 出於逆形已具 其情畢得之後 則此二字 不當出於人臣之口 非惟不當出於口 豈合一毫作於其心乎

逆獄을 조사하는 도중, 먼저 全恩說을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결과가 밝혀진 뒤 왕의 재량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1614년(광해군 6)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던 異母弟 永昌大君을 죽일 적에 그는 다시 자기의 주장을 피력했다.

八歲穉童 不知利害趨舍之所在 其不參逆謀 不獨聖敬丁寧 而凡有血氣者 孰不知其必不然也……殿下推先王顧托之意 爲終始保全之慮逈出百王之上……且聞其首發割恩論者 頗有其昔日先唱全恩之說者云 是何厚於不道之瑋 而一何薄於非身犯之王義 耶

여기에서는 永昌大君이 어려서 역모에 가담할 수 없었으므로 全恩을 해야 한다는 것이요, 臨海君獄事에 全恩說을 내세우던 자가 이때에는 割恩說을 내세우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리에 맞는 일관된 주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1618년(광해군 10) 仁穆大妃의 西宮幽閉가 이루어지고 이어 廢母 논의가 일어났다. 이때 좌의정의 직함을 지닌 鄭仁弘은 議政府에 글을 보내 반대의사를 밝혔다. 그에게 연이어 영의정의 최고직위가 주어졌는데 廢母에 대한 都堂의 질의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하였다.

君臣子母之名義 出於天而不可易……今大妃 果有哀文呂后之矢 而朝廷擬議於廢黜之典乎

母子의 명의는 不可易이므로 廢母할 수 없다는 것과 또 예전 중국서 無道한 행실을 한 王妃들의 행동이 仁穆大妃에게는 있지도 않았음을 밝혀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해 3월 영의정을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고 光海君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그후로는 죽을 때까지 5년동안 都城의 출입은 물론, 일체의 상소나 차자를 올리지 않았다. 이런 그를 山林政丞으로 불렀는데 이는 5백년에 걸쳐 처음 있었던 일이다.
仁祖反正후 西人들은 89세의 鄭仁弘을 잡아올려 光海君의 亂政책임을 그에게 물어 죽였던 것이다. 이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學受師友 組知君臣父子之大義 噫矣 身退臥丘園 今垂二十年 紛 世事 不欲聞知而九十頑命 尙今不死 終得廢母之名 今日一死 顧不足恤 而將恐不能暝目於地下 而歸 見先王也

廢母논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부인하면서 그 혐의를 벗고자, 거듭 辨析하였다. 그러나 그런 혐의 때문에 伏誅를 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 그는 從仕한 연한은 黃澗縣監·掌令을 합쳐 줄잡아 5년 안팎이었다.

Ⅲ. 政治思想과 現實認識

鄭仁弘은 철저하게 處士의 삶을 누리려햇다. 그는 관직을 내릴 적마다 그의 정치사상과 現實觀을 피력하면서 국가의 일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그 思惟의 근저에는 처사적 기질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바로 철저한 문도인 그가 스승의 행동철학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다음 몇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學問傾向과 道家的 분위기

그는 \"文尙浮藻而蔑實用\"이라 했다.
이말처럼 그는 실질을 숭상하고 실용을 중시해서 당시 士林과 벼슬아치들이 浮藻에 흐르는 것을 개탄했다.
따라서 그는 유학의 교양을 쌓았으나 당시 풍미했던 性理學에 대한 견해는 별로 밝히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학문적 경향은 현실문제에 밀착되어 있었다.
그가 쓴 많은 公車文에는 倫氣와 正心을 내세우기 보다 실제적인 조항을 들어 그 개혁책을 모색했다. 곧 관념적 心性論보다 실천문제를 중시한 경향이 있다.
그는 스승의 사상과 행동을 충실히 따랐다고 앞서서 말했는데 曺植의 學問傾向은 道家的 분위기를 깊게 풍긴다. 曺植은 죽으면서 제자들에게 \"후세 사람이 나를 處士라 하면 옳겠으나 만약 儒者라고 지목한다면 실지가 아니다\"고 말했다 한다.
曺植은 또 陜川의 書院이름을 雷龍亭이라 하였는데 이는 老子에 나오는 \"尸居龍見 淵默雷聲\"에서 따왔다. 거기에 부기하기를 \"雷則晦冥 龍則淵晦\"라 하였다.
그의 여러 詩에는 이런 老莊의 분위기를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曺植의 代表作으로 일컬어지며 사람 입에 오르내리는 頭流山詩를 보자.

請看千石鍾 非大 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여기의 千石鍾은 자신을 가리키고 知異山에 비긴 것이 아닌가? 莊子의 逍遙游篇을 방불케 한다. 또 다음과 같은 시도 있다.

獨鶴窄雲歸上界 一溪流玉走人間
從知無累飜爲累 心地山河語不看

전설로 전해지는 지리산 靑鶴洞을 두고 신선세게를 읊은 것이다.
이런 曺植을 두고 李滉은 \"老莊으로 빌미를 삼았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曺植의 老莊的 분위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따랐다. 鄭仁弘이 李彦迪 李滉의 文廟從祀를 반대하고 이 문제를 析明하자, 더욱 세차게 논란이 일어났다 것이다.
일찍이 金誠一스승 李滉의 견해에 따라 曺植을 『南冥高風峻節卓乎難及 而至於立言垂敎 有些未盡處』라 평했다. 그의 제자 崔晛은 이 문제를 들어 鄭仁弘에게 도전했다. 鄭仁弘은 \"國乘雖禁士流間傳說亦幾多年 決非妄傳 而一家事 人有手目不可掩 人有頰舌 不可箝 此亦可有所考定而後 得其眞的耶\"라고 하면서 그 진실여부를 따져본 뒤에 논란을 벌어야 한다고 했다.
이와 달리, 崔晛은 李滉 金誠一의 견해에 부연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南冥氣象 嚴毅豪邁 而勇猛奮發 故其發之文章也 淸新奇古 慷慨激烈 如風檣陣馬利劍長戟 眞可以動天地 而泣鬼神矣 譬之退溪春和也南冥秋殺也…且其文字間 多有寓言嘲諷 若從莊騷憤世氣味中出來 退溪無乃指此爲帶得老莊意味耶

비유와 예를 들어가며 李滉의 견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때 鄭仁弘은 스승의 老莊문제에 대해 논의를 막으려 했으나 曺植의 또다른 高第인 金宇 ·鄭逑는 이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鄭仁弘이 비록 士林의 논란과 정치적 핍박을 꺼려 애써 감추려 했으나 이것은 사실에 근접한 것이었고 뒷날 이런 분위기를 지닌 시들을 南冥集에서 삭제하기도 했다. 아무튼 鄭仁弘도 이런 도가적 분위기를 스승처럼 지녔던 것으로 판단된다.

2. 損上益下의 餘民觀

鄭仁弘은 辭職疏를 올릴 적마다 어김없이 정치적 비리를 지적했는데 그중에서도 民 의 條件을 자주 열거하며 이를 개혁하라고 요구했다. 그런 속에 守令 鎭將 등 牧民官의 비정을 신랄하게 지적했다. 이를 그는 衣冠之盜라 표현했다. 이런 衣冠之盜가 倭亂을 불러왔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環列於國中者 無非自伐而內實崩潰 則海賊非自至也 我有以速之也 秀吉非莫强也 我無以禦之也 行長義智 非善用兵也 我自夾攻也

곧 전란의 內因論을 편 것이다. 따라서 이때 겨우 살아남은 백성을 餘民이라 표현했다. 이들 餘民은 \"수령들이 백성의 주림을 구하지 않고 私人을 봉양하는 행위, 邊將은 극도의 부정을 저질러 軍卒을 魚肉으로 대하는 것\"을 막아야 살아남을 수가 있다고 하였다.
이들 餘民이 유리방황하는 원인은 첫째 나라의 과도한 수취가 민생을 곤궁하게 만든다는 것, 둘째 守令 鎭將의 탐학과 부정이 횡행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또 개혁의 세목을 건의했는데 이를 정리하면 이러하다.
첫째, 倭亂 중에 막대한 군량미를 明軍에 공급한 탓으로 國用의 경비가 바닥나서 외로운 殘民이 살아갈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明軍은 철병케 하고 精軍을 모집해서 훈련시켜야 한다.
둘째, 倭亂 중에 赴防軍에 대해 價布 作米를 추징하는 것에 대해 軍需가 모자라는 현실에서 부득한 조처를 인정하나 인심을 잃어서는 안되니 徵布의 令을 거두어야 한다.
셋째, 倭亂이 끝났는데도 貢賦를 供上하는 내용이 燕山君 때의 잘못을 그대로 따르고 있고 또 과거 正貢의 制度가 그대로 尙存하고 있으므로 貢賦를 일체 革罷해야 한다.
넷째, 防納 牟利 人情 그리고 國庫를 私藏化하여 民生을 더욱 곤궁케하니 이의 대책을 급히 세워야 한다.
다섯째, 宗廟와 궁궐 그리고 山陵의 역사 등 공공의 勞役동원은 餘民의 고통을 더하니 중지해야 한다.
여섯째, 조세를 줄이고 財用을 절약하여 번거로운 것은 간소화하고 무거운 것은 가볍게, 많은 것은 적게, 사치스러운 것은 거두어서 民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
그는 또 部民과 軍卒들의 言路에도 언급했다.

弛部民告訴之法 復軍卒外陣之令 使民情庶幾上達 以存先王置石立木之遺意 如有告訴之民外陣之卒 輒加窮詰 果是誣訴 則固當自伏其辜 如其非誣 則貪暴不法 亦自有常刑 如此則窮民有所赴訴 怨怒稍解 而生民幸甚國家幸甚

곧 部民 軍卒들이 수령이나 상관의 부정을 고발케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民意수렴의 방책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公土地를 일정 비율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짓게 하라고 건의했다. 곧 농민에게 恒業을 주어 邦本을 튼튼히하고 생산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조세를 줄이고 貢賦와 勞役을 없애고 하층민의 의사전달을 보장하라고 했다. 이런 주장은 그 當時代에 있어 혁명적 방법들이다. 이런 것은 모두 그의 爲民思想에서 나왔다. 그는 \"一物一事라도 生民을 해치는 것은 없애라\"고 주장했고 또 \"一事一物이라도 民에 해가 되는 것은 옛 것일지라도 다시 따르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가 황간현감으로 있을 적에 부분적으로 이를 시행했던 것이며 尙州牧使가 내려졌을 적에 \"창고가 비어 있어서 牧民官으로서 백성을 구휼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사직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爲民정책은 \'損上益下\'로 표현된다. 그는 \"有人而後 位可守 民心固而後 邦國寧 民與國 不容判而爲二也\"라고 國과 民이 일체임을 강조하고 이렇게 언급하였다.

易以損下益上 爲損 以損上益下 爲益 其義甚明 爲萬世不易之象… 今者 賦役煩重 民若倒懸 防納之害 人情之弊 愈久愈甚 而民不堪命 如欲行仁民之政 圖惟舊之治 當擧此而振正之然後 政敎一新善治可期矣

그는 周易의 損益卦를 들어 損上益下의 참뜻을 설명하고 民苦를 해결해 주어야 政敎가 刷新되고 善治가 기약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民苦를 언급할 적에 항용 損上益下의 爲民思想을 표방했다.

3. 利用厚生의 經濟觀

그는 \'文尙浮藻\'를 꾸짖으며 利用厚生을 주장했다. 그의 \'利其用而厚其生\'의 요지는 경비를 절약하고 사치를 억제하는 보편적 측면도 있으나 좀더 구체적인 제시가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에 국가재정과 국민생활이 여지없이 피폐된 현실을 보고 제도의 개혁과 정책의 일대전환을 주장했다. 특히 明軍이 들어와 그들에게 내는 많은 물자와 군량미로 餘民의 생활이 더욱 곤궁함에 깊이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그는 몇가지 방책을 제시했다.
첫째는 戰士의 수를 줄이라고 하였다. 한 戰士의 경비를 세 장정이 맡고 있는데 당시의 실정으로는 백명의 농부가 그 경비를 맡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므로 精兵을 뽑아 一陣을 만들고 그 나머지는 모두 해산시켜서 일부는 輸運을 전담시켜 精兵의 훈련을 맡은 明軍의 군량미를 공급하고 일부는 농사를 짓게 하여 군량미를 생산케 하라고 하였다. 그렇게 해야 국가재정과 生民의 생활이 다함께 풀린다는 것을 갈파했다.
둘째는 行政制度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시세가 한번 변하면 시무가 그대로 지켜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郡縣을 병합하여 大鎭을 두라는 방책을 제시했다. 그리고 나서 良吏를 가려뽑고 貢賦를 가볍게 해서 餘民을 거두어 들이라고 하였다.
셋째는 銀鑛을 널리 개발하여 백성들에게 이를 채취케 허가해 주고 義州에서 海隅에 이르기까지 沿道에 開市하고 여러 도로에 物貨를 유통케 하라고 했다. 이렇게 되면 죽어가는 餘民을 살릴 수가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可以省遠方負戴之費 天兵或可久駐 而無 乏之患 貧民亦可務遷 而資耕種之業 庶幾救目前萬分之一 而他日足信之治 或可推 於此也

곧 운수의 경비를 덜고 明軍의 軍資에도 걱정이 없고 貧民들이 이익을 찾아 옮겨서 농자금을 마련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金銀鑛은 世宗이후 개인 채굴이 금지되고 국가보호 아래에 있었다. 곧 明이 과다한 金銀을 貢物로 요구하기 때문에 金銀이 조선에서 채굴되지 않으므로 貢物을 인삼 면포 종이 등 특산물로 바꾸어 주기를 요청, 이를 실현시켰다. 그리고 국가에서는 금은광을 보호했다.
鄭仁弘은 이런 정책을 온당치 못한 것으로 보고 이런 특수사정을 明에 납득시켜 개인채굴을 허용, 은을 기본으로 시장경제를 원할히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商工業과 農業문제를 연결시키고 生民을 위해 利用厚生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의 상소와 차자의 내용에 상당히 많이 담겨있다. 광산채굴, 운송수단의 개발, 상업의 장려, 시장의 확대 등의 정책제시는 16세기의 시대사정에 비추어 볼 적에 커다란 경제정책의 전환을 의미하며 후기 실학파의 현실개혁관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다만 정책건의에서 한걸음 나아가 좀더 그 구체적 방법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4. 君主와 朋黨의 관계

그 자신이 당쟁에 휩쓸리고 또 희생을 당했으나 이 문제에 대해 그는 아주 철저하고 분명한 논조를 펴고 있다.
그는 당쟁의 조짐이 있을 적에 조정에 몸담았고 당파가 분열될 적에 鄕里에 돌아가 있었고 또 당론이 격화될 적에 時事문제의 하나로 자기의 견해를 밝혔다.
그의 黨論은 君子 小人論에 기초하고 있다. 곧 宋나라 歐陽修의 朋黨論을 빌은 전통적 이론에 자기의 소견을 덧붙인 것이다. 그는 周易의 \"方以類聚 物以群分\"과 \"同聲相應 相氣相求\"의 구절을 원용하고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小人與小人爲黨 君子與君子爲黨 此自然之理也 君子未嘗不黨 只在人君明辨其君子小人而已

곧 君子의 黨과 小人의 黨이 있게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므로 人主가 이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와 결부하여 黨論이 일어난 이후의 사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自士大夫分裂之後 人心億萬 無人不入 黨字題目中 不北則南 不南則西 正似朔蜀洛三黨 而有甚焉 在當時 或不知孰爲君子黨孰爲小人黨 自今觀之 不 玉石之不同 知人惟帝難之在治 平時則或眞僞滾亂而難知 若於亂世因其自別 而取舍之 雖不能無失 亦可十得其七八矣

당시 南·北·西黨이 갈라져 있음을 지적하고 宋나라의 朔黨·蜀黨·洛黨보다 심하여 모든 士大夫가 빠짐없이 어느 특정 당에 가담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또 君子黨을 人主가 取舍해야 한다고 말하고 자신을 君子黨이라고 한다면 그 치욕을 피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런 原論을 편 그는 초기에는 \"全身保位로 일시의 名利를 도모하는 자가 많고 赤心殉國으로 聖朝를 길이 생각하는 자가 적다\"고 했다. 이때부터 그가 君子 小人論을 펼쳤으나 깊은 우려를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후 己丑獄事를 겪고 임진왜란을 치른 뒤에 이에 대한 그의 견해는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宋의 眞德秀의 말을 인용, \"內有衣冠之盜然後 外有干戈之寇\"가 있게 된다고 갈파하고 이렇게 언급했다.

臣竊見 好偏黨而惡正直 賤淸節而趨勢利 輕名義而重爵祿 何以利吾家 何以利吾身 愛時輩而不知愛君父 畏權要而不得畏典刑 ? 無華者 爲不材 損下益上者 爲能辨愛物者 目爲★憂國者 指爲狂 習染已久 自以爲當然 而不知其不免於致寇也

당시의 관리와 士習이 偏黨을 지어 利益만을 붙좇으며 나라를 그르치는 현실을 타매했다. 그리하여 왜란을 불러왔다는 지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大司憲이 제수되었을 적인 1602년(선조 25) 다섯가지 조건 때문에 官路에 나갈 수 없음을 간파하면서 당쟁으로 士類의 原氣가 빠졌음을 이렇게 지적했다.

臣竊聞 士類者 國家之元氣也 公道者 士類之命脈也 嘗見今之士大夫 分而爲二 偏黨成習 常自笑嘆 今又分而爲四五 各自爲徒 爭名爭利 互相攻擊 而不暇以國事爲念…一人被劾 擧黨同忿 一人異己 盡群 排 朝同暮異 乍合乍分 一似橫連縱合之態

이때에 와서는 당쟁이 고질이 되어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四分五裂하여 각기 도당을 짓고 名利를 다투어 서로 공격함을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是非 曲直을 가리지 않고 同黨이 탄핵을 받거나 배척을 받으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싸움질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離合集散을 거듭하여 온갖 謀事를 꾸민다고 하였다.
당시 言官들은 연일 다른 黨色을 탄핵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이런 논란에 따라 柳成龍의 관작이 복구되기도 하고 李山海의 관작이 追奪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일어난 이런 관례는 뒷날로 이어져 갔던 것이다.
이제 당쟁은 고질이 되어 쉽게 뿌리뽑을 수도 없음을 논단했다. 光海君이 즉위하여 小北 柳永慶을 제거할 즈음에는 이렇게 갈파하고 있기도 한다. 이 때 그에게 贊成의 벼슬이 제수되어 있었다.

臣竊見 令之縉紳間 偏黨習錮 傾輒風成 一國一君一朝廷 而分裂爲秦吳楚趙之敵 常懷妬婦之心 欲 呑三之討 雖有公心不黨之人 强爲指目 必使無所容而後已

이제 黨爭은 한 나라와 한 임금과 한 조정을 분열시키고 마치 적처럼 싸우고 질투하는 여자처럼 물고 뜯으며 그리하여 바른 사람도 黨色으로 지목하여 용납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당쟁은 단계적으로 더욱 심화되는 현실을 질타하고 있다.
그도 비록 大北派로 지목하고 있으나 자신은 여기에 낄 수 없다는 논지이기도 하다. 이런 폐단을 그치려면 10년동안 好惡 取舍를 분명히 해야 \"習非를 고칠 수 있고 士風을 바꿀 수 있어서 뭇 무리가 저절로 제거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의 取舍論은 朋黨의 폐해를 언급할 적에 거의 빠짐없이 나온다. 그는 宣祖에게 \"君爲一國之主 心爲一身之主 國無君 無以華萬民之心身無主 無以制事物之宜\"라고 하여 君主를 心에 비겨 모든 정치를 재단하는 專制權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人才를 수습하여 治功을 이루려면 黨習을 고치지 않고는 안되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물의 取舍 곧 바른 인물을 밝히 알아 제자리에 앉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취하고 小人을 버리라는 것이다. 이 取舍論은 또 君主의 밝은 판단으로만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당쟁을 그치게 하고 君主權이 행사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해서 참다운 王者의 덕을 펼 수 있다고 보아, 黨習을 단연코 뿌리뽑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 것이다. 그의 取舍論은 그가 言官으로 나오기 이전부터 제기하여 정승의 직함을 받을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결국 그는 당쟁의 폐습이 名利를 다투는 데에서 나왔고 이를 바로 잡는 길은 인재의 取舍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당쟁은 외침을 불러들이고 나라의 정치를 그릇침은 물론, 王權을 약화시켜 끝내 파국으로 몰고 간다고 천명한 것이다.
그보다 훨씬 뒤에 산 李瀷은 黨論의 원인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朋黨生於爭鬪 爭鬪生於利害 利害切其黨深 利害久其黨固 勢使然也…夫利一而人二 則便成二黨 利一而人四 則便成四黨 利不移而人益衆 其十朋八黨 宜乎愈岐也

곧 朋黨은 利害에서 생긴다고 본 것이요 利害에 따라 分黨은 거듭된다는 것이다. 이 論旨는 바로 鄭仁弘의 견해와 유사하다.
그 자신은 자기를 黨色으로 지목하는 것 자체를 당쟁의 餘波로 보았는데, 大北派의 추대를 받아 결국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는 직접 당색의 이루어진 시기에 出仕했고 당쟁이 심화되는 과정을 몸소 겪었으며 끝내 그 당쟁에 따라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가 아무리 破黨을 외쳐보아야 이미 고질이 되어 깨뜨릴 수가 없었고 그가 論破한 이론도 특정당파를 감싸기 위한 변설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5. 國防과 擁兵主義

그는 內政에 대해서는 과감한 論斷을 펼쳤으나 事大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현실 인식은 바로 시대적 분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 속에서 그는 明軍의 철수를 주장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 실상은 어떤 것이었는가?
임진왜란 당시, 明의 援兵은 약 3개월 뒤에 파견되어 祖承訓 등 朝明合同으로 평양탈환전을 벌이고 이어 沈惟敬 李如松 등이 來援했다. 이들 援兵에게 조선에서는 필요한 양곡과 물자를 댔는데 이것은 國庫가 비거나 양곡을 뺏긴 탓으로 모두 농민 상민에게서 거두어 들였고 이에 따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듬해 4월 서울을 수복하였는데 이때 일본군은 南下하였고 明將 李如松도 돌아갔다.
당시 朝鮮에서는 明君의 철병을 우려하거나 반대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일본군이 일단 下陸하게 되면 海戰에 약하므로 용이하게 다시 上陸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우리나라는 軍興이 넉넉치 않아 明軍을 오래 머물게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天兵爲屛蔽 暫時以爲安 獨念兵火所及 人物蕩然 蓬蒿千里 烟火絶無 …天兵亦不可保其永久留守 則不知朝廷 有何策以濟之耶 若使天兵 永久屯守 保無他虞 則固幸矣

明軍이 영구히 지켜주지 않는다면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그는 明軍이 오래 屯守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또 이렇게 논란하였다.

以東方千乘之國 仰人鼻息 苟度時日 倚朝夕之勢 以爲國家…爲國之體 所恃者不在人 而恃在我者 我誠有可恃者 則一成猶不爲小 環千里之封疆乎 一旅不爲少 有萬數之精兵乎 伏願殿下 急其在我之可恃 求爲國永久之圖 而勿恃天兵爲必久留 則此實我國家無疆之休也

당시 조선이 작지 않은 나라인데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나라를 유지하는 근본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明軍이 주둔하여 나라를 지켜 주는 것을 믿지 말고 自主國防을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므로 時勢가 一變한 기회를 이용하여 郡縣을 병합하여 大鎭을 두고 良吏를 임명하고 賦稅를 가볍게 하고 銀鑛을 채굴하고 開市하여 物貨유통을 원활히 하여 군사를 기를 재정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바탕에서 精兵을 양성해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그러지 않고 明軍을 오래 머물게 하면 軍資를 오래 댈 수가 없고 양식이 하루 아침에 바닥난다고 하였다.
이런 방책을 내세우며 독자적 방위를 주장한 탓으로 明軍의 철병을 주장하고 조선군만으로 倭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는 이름으로 그를 조야에서는 비난했던 것이다.
다음 對淸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가 어떠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建州에서 일어난 野人은 임진왜란 후 세력을 크게 떨쳐 後金을 세우고 明의 지경을 침범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 대해서는 압박을 가해왔다.
明은 후금정벌계획을 세우고 조선이 援兵을 요청하였다. 곧 임진왜란 때 도와준 恩功을 갚으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에 明의 差官이 와서 借兵의 요청을 해왔고 後金의 사신이 와서 外交官係의 수립을 요구하였다. 임금은 이때부터 兩面外交를 구상하고 있었다. 임금은 南兵使로 北靑에 있던 姜弘立을 통해 後金의 힘과 동정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光海君은 明의 借兵을 굳게 거부하였는데 이에 조정의 신하들은 후환을 걱정하는 諫啓를 연일 올리고 있었다.
鄭仁弘은 당시 좌의정의 직함을 지니고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今若恢復讐之大義 徇擧國之正論 賊書而快示 斬虜使而痛斥 激勵我軍旅 綢繆我藩籬 伊賦形跡 據實輒取本國 情節無隱 且稟恩信 交孚上下 罔間唇齒之勢 彌固皮毛之托 益堅則蠢彼小酋 顔猶豫 畏首畏尾 只守窮穴 將至自斃矣

여기에서는 後金에 대해 交流할 수 없음을 밝히고 그 사신을 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동정을 엿보아 이 사실을 중국에 알리고 굳건히 방비하게 되면 後金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以海內林立之衆 不能敵五六萬之賊徒乎 以海內山峙之粟 不能當一二載之盜糧乎\"라고 하면서 국경지대의 백성들이 義氣에 차 있으니 별로 걱정될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후금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의식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光海君은 이와 달리 倭에 通信使를 보낸 적도 힘을 비교하여 부득이한 조치였는데, 이때에도 부득이하여 通交해야 한다는 批答을 내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惟彼奴賊 曾於我國 無一草一木犯傷之害 頃日我兵 入討之後 尙且斂鋒 不爲長驅者 是果畏我兵威 而如是退縮平

後金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적이 없고 또 우리의 군대가 변경을 토벌하였는데도 아직 쳐들어오지 않은 것은 우리의 군사가 무서워서가 아니라고 밝혔다. 光海君은 이때 벌써 後金의 힘과 明의 힘을 헤아리고 독자적 軍事權 그리고 後金과의 和平을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鄭仁弘은 임전왜란 직후의 自主國防과 같은 맥락에서 後金에 대처하는 의식을 보이고 있다. 光海君과 鄭仁弘은 이때에 와서 後金 문제를 두고 異見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明의 援兵요청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後金에서도 蒲浦僉使를 통해 조선에 글을 보내왔다. 그들은 遼東 정벌의 뜻을 밝히고 이렇게 밝혔다.

朝鮮與我朝 有信之國 若遼東請兵于朝鮮 則會寧三水蒲浦等處 我將當以一枝兵馬 發送攻擊 朝鮮與我將 無嫌怨 謹守封疆 勿使動兵

곧 援兵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고 만약 이 말을 듣지 않으면 국경일대를 침범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런 사정에서 鄭仁弘은 영의정의 직함으로 備邊司에 收議을 보냈는데, 體察使를 뽑아 後金의 동정을 엿보고 거기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곧 종래의 주장을 수정한 것이요 光海君의 양면외교 정책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그는 늙고 병들어 時事에 밝지 못했고 또 大論(廢母논의)을 발한 戊午庭請이래 時政에 관한 글을 일체 올리지 않고 있어 對後金관계에 대한 견해가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4. 마무리 말
앞에서 우리는 그의 철저한 삶과 행동과 현실대처의 과정을 일단 살펴보았다. 그의 이런 모습이 부각되는 글들은 거의 公車文이다. 이런 그의 公車文에서도 周易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흔히 詩文集에 수록된 雜著형식의 經學 時事에 관한 글들이 전혀 없는 것이다.
위의 公車文을 두고 다음과 같은 지적이 있기도 하다.

仁弘每上箚 一切依李爾瞻書報 或日月未及 而疏中有已言者 則乃爾瞻自作疏 代呈而後 以語仁弘者也 仁弘亦不以爲非 反稱其忠焉

곧 李爾瞻이 때에 따라 대신 上疏했다는 것이요 이를 鄭仁弘은 충성스럽다고 칭찬했다는 것이다. 이 언급은 柳永慶을 규탄한 鄭仁弘이 상소 끝에 덧붙인 史官의 기록이다.
鄭仁弘이 李爾瞻을 통해 정보를 받고 자기의 의견을 내는 경우가 많았음을 사실일 것이다. 또 代疏한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극히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곧 廢母논의가 일어날 적에 李爾瞻이 이를 주도했는데 鄭仁弘은 이를 반대했던 사실에서도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鄭仁弘은 李爾瞻의 用事에 말려 많은 貶下를 당한 것은 사실이요 또 향리에 있으면서 이이첨을 견제하지 못한 책임이 있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는 그의 행적과 현실인식을 보고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앞에서 언급한 거의 罪籍을 다시 따져보기로 한다.
첫째 士林출신으로 횡포를 부린 品官이라는 것이다. 鄭仁弘이 遺逸로 6품직의 守令을 얻었다. 그는 수령으로 있으면서 吏胥와 鄕品들의 횡포와 부정을 징치했는데 이를 두고 指斥한 것이다.
둘째 임진왜란 때 義兵을 일으키면서 武斷으로 위세를 부렸다는 것이다. 그는 의병을 일으키면서 官家와 士豪의 곡식을 강제로 거두어 들이고 또 奴婢들을 빼앗아 軍卒로 동원했던 것이다. 이로 인한 비난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이를 指斥한 것이다.
셋째 怪鬼한 학문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曺植의 도가적 분위기에 충실하였고 또 利用厚生의 學을 제창한 것을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전통적 유자의 안목에서 보면 이는 \'怪鬼之學\'에 속할 것이다.
넷째 李彦迪 李滉을 배척하고 文廟從祀를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본대로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의 스승을 먼저 從祀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의 스승을 옹호키위해 이를 비판한 李滉의 言行을 문제삼은 것은 그의 강직한 성격탓이었다. 다시 말해 士林의 公論에 맞서 자기의 주장을 편 것이다.
다섯째 廢妃를 반대한 동료 鄭蘊 李大期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인데, 廢母논의에 그 자신도 반대하고 나섰으나 이것이 정치적 쟁투로 번진 사실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鄭蘊과 李大期는 南人의 입장에서 이를 반대했던 것인데 그 방법에 있어 견해를 달리할 수 도 있었다.
여섯째 李爾瞻과 함께 光海君의 亂政을 도왔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大北派의 추앙을 받고 李爾瞻의 떠받들림을 받았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향리에 묻혀있으면서 李爾瞻의 이용물이 된 혐의가 없지 않다. 그러나 光海君은 永昌大君의 살해, 仁穆大妃의 幽閉등 인륜과 관계되는 失政을 저질렀으나 실제 外交 內治에서는 큰 공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은 다시 말해 光海君 李爾瞻의 책임이지 鄭仁弘이 연류되어야 할 罪籍은 아니다.
일곱째 恭嬪金氏를 宗廟에 들게 했다는 것이다. 光海君은 後宮의 몸에서 태어나 어머니 恭嬪金氏를 王妃로 追封했었다. 이것은 물론 法度에 벗어난 것이나 鄭仁弘의 罪籍으로는 합당치 않을 것이다.
여덟째 風水說로 遷都役事를 벌였다는 것이다. 光海君은 漢陽에서 交河(지금의 坡州 일대)로 천도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것은 外侵의 방어 등이 그 이유였다. 이것도 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합당치 않다.
아홉째 永昌大君을 능멸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永昌大君의 죽음은 光海君의 失政이었으나 그가 주도한 일이 아니고 오히려 全恩說로 이를 반대했으므로 그 책임을 물은 것 또한 합당치 않다.
열째 廢母論을 내고 仁穆大妃를 유폐케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을 끝까지 반대했던 時政문제였다. 이의 주도는 李爾瞻의 用事에서 나왔던 것이다.
더욱이 鄭仁弘이 時事나 時政에 의견을 냈으나 직함만 지니고 향리에 묻혀 있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앞에 열거한 罪籍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정적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특히 仁祖反正을 주도한 西人 李貴와 갈등이 이 죽음을 가져오게 한 직접적 원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많은 정적 또는 반대세력을 만들어냈다. 成渾을 탄핵하여 그 제자 李貴의 반감을 샀고 李滉을 비난하여 嶺左士林에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柳永慶을 규탄하여 小北派의 적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士豪와 守令의 횡포를 남김없이 지적한 탓으로 이들의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掌令으로 있으면서 言論이 준열하여 벼슬아치들의 경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것은 그의 준열하고 강직한 성품탓이기도 했으나 爲民 爲國을 위한 改革意志에 열화같은 정열을 보인 탓이었던 것이다. 그의 주장은 조세 軍役의 부담을 줄이라는 것이나 토지(公田)를 농민에게 분배하라는 것이다. 貢物의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없애라는 것에서 爲民意識의 철저함을 보인다. 또 상공업을 장려하여 國益을 가져오기 위해 利用厚生을 제창한 것은 先進的이고 진보적인 사상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 중기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삼정을 통해 더욱 백성에게 加斂하여 국가재정을 채우려 했던 것이요 士林이나 儒者들은 經學이나 性理學에 빠져 실천적인 학문을 외면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전통적 農本主義에 빠져 商工業을 末利로 보는 경제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척박한 현실에서 그의 改革策 爲民策은 實學派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그 이론적 근거가 되고 또 역사적 의미가 부여될 것이다.
이글은 그를 辨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 시대의 선진적 진보적 지식인이 시대의 모순을 겪으며 거기에 과감히 맞서다가 끝내 保守세력들에 의해 좌절한 역사경험을 얻으려는 의도임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