來庵 鄭仁弘의 學文性向과 政治的 役轄- 李相弼 교수 著

by 경상대 posted Jun 0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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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庵 鄭仁弘의 學問性向과 政治的 役割


李相弼 (慶尙大 漢文學科)

Ⅰ. 머리말

來庵 鄭仁弘(1536-1623)은, 학문성향의 측면에서 南冥 曺植(1501-1572)의 여러 문인들 가운데 南冥을 가장 닮았다고 한다. 그리고 내암은 광해군 당시에 大北 정권을 주도, 山林政丞으로서 遙執朝權하다가 仁祖反正 때 賊臣으로 처형되었다. 그 이후 자신을 지지해 줄 수 있는 세력이 한번도 정계를 주도하지 못함으로 해서 변명의 기회조차 잃었다. 그러다가 1908년에 와서야 관작이 追復되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인 면에서는 내암의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과거 내암과 문제가 있었던 지역의 유생들이나 그 후학 가운데는 아직도 이를 부정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는 약 300년 동안 부정 일변도의 사고방식을 갑작스럽게 돌릴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근자에 남명학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내암에 관한 연구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남명학의 전개 과정을 연구함에 있어서 내암에 관한 연구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조반정 이후 줄곧 내암을 너무 나쁘게 인식해 온 것에 대한 반발 심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근자의 내암에 관한 연구 가운데는 그 방향이 찬양 일변도인 경우도 있었다.
명예 회복이 된 후에도 그 전과 같이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려고 하는 경우도 바람직하지 못 하지만, 찬양 일변도의 연구 방향은 오히려 자칫 참으로 내암을 잘못 인식케 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내암과 같은 경우는 연구자의 시각이 중립적이면서, 인용하는 자료가 객관적이어야 설득력이 있다. 예컨대 실록의 자료라 하더라도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을 동일한 시각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며, {광해군일기}에 있어서는 행간에 보이는 의미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내암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내암을 학자로 보기보다는 정치꾼처럼 보려는 시각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유학자는 일반적으로 그들의 학문이 가진 속성상 정계에 나아가 자신이 온축한 학문을 현실에 적용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세월이 흐를수록 각박해져서 유학자들이 꿈에도 그리던 왕도정치는 갈수록 실현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줄기차게 그것을 현실화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진지하게 살았던 사람이 학자라면, 정치꾼은 이를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인 바, 이 둘은 당연히 구분하여 보아야 한다. 설사 이를 확연히 구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구분의 기준마저 모호해진 상태에서 모두 한 덩어리로 보게 되면 논의가 겉돌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여기서는 내암을 학자로 보고, 그의 모든 정치적 활동도 모두 학자의 처지에서 한 행동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그의 학문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지금 남아 전하는 {내암집}에는 내암의 학문 내용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자료가 별로 없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상소문 계열의 글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바탕으로 그의 학문이 적어도 어떠한 성향을 띠고 있는가 하는 정도는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보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정치적 행동과 정치적 신념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Ⅱ. \'敬義\'에 입각한 현실주의적 학문성향

주지하다시피 내암은 남명의 문인이다. 그리고 남명의 여러 문인 가운데서도 남명의 학문을 가장 깊이 체득한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내암이 남명에게 수학하기 시작한 연대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20세를 전후한 시기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 때가 1555년을 전후한 시기인데, 이 때 이미 남명은 그 聲價가 전국에 알려져 여러 번 벼슬을 제수받았다. 특히 [乙卯辭職疏]로 알려진 丹城縣監 辭職疏가 바로 이 해에 올라간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1553년에 퇴계로부터 \'출사하지 않는 것은 군신간의 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요지의 편지를 받고, 撥雲散을 구해 달라는 답장을 보낸다. 이 이후로 퇴계는 남명에 대하여 正學을 하지 않는 것으로 비판하고, 남명은 퇴계가 실질적인 학문에 매진하지 않고 이론적인 데로 학문의 방향을 돌리고 있음에 대하여 충고한 적이 있다. 내암이 이 시기에 남명에게 급문하면서 남명학의 요체를 전수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명이 제자들에게 가장 크게 경계한 것이 출처 문제였다. 특히 내암에게 이를 강조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남명의 학문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 바로 \'敬義\'의 학문이다. 즉 敬으로 마음을 수양하고 義로써 현실 문제를 판단하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義에 의한 現實 問題 判斷\'이라는 측면을 \'敬에 의한 心身 修養\'이라는 측면과 그 가치를 동일시하는 것이 남명학의 특별한 면모인 바, 남명의 문인들은 대체로 \'義\'의 측면에 남다른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내암의 학문적 연원도 바로 여기에 닿아 있다. 그의 학문 내용은 대체로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文學에 힘쓰기 보다는 實踐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百姓이 나라의 근본이고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는 民本精神에 입각한 爲民政治를 力說하였다는 것이다. 셋째는 현실에서의 잘잘못에 대한 판단 기준이 \'義\'라는 점이다.
다음은 來庵이 文學에 힘쓰기보다는 義理의 實踐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심도 있게 설명하고 있는 글이다. 내암의 문자 가운데 이런 류의 글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좀 지루한 듯하지만 인용한다.

客 가운데 能文에 뜻을 둔 자가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고 나를 찾아왔다.
내가 물었다. \"그대는 과문 공부를 하여 쌓은 공이 많은데 어찌 갑자기 그만두고 과거 시험을 보지 않습니까?\"
객이 말하였다.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 했으니 이는 운명입니다. 이제 나이도 들었고 게다가 흥미도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에게는 노친이 계시니 노친께서 만약 그만두기를 바라지 않으면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늙으신 아버님께서도 내가 응시하고 싶어 하지 않음을 아시고는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말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부모는 그 아들의 재주가 과거에 합격하여 영예를 취할 능력이 없음을 생각지 않고 억지로 응시하게 하여, 그 아들로 하여금 급급하게 구하여 반드시 얻도록 함으로써 흰 머리에 이르도록 갇혀 지내게 합니다. 다른 사람이 이를 보게 되면 역시 불쌍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그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겠습니까? 미혹됨이 심합니다. 세속 사람이라면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지만, 가끔은 의리를 좀 안다는 사람조차도 그 아들로 하여금 스무 살 전부터 머리가 허옇게 될 때까지 망아지나 송아지를 몰듯이 과거시험장으로 몰아부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행히 합격하면 龍門에 오르는 것이고, 합격하지 못하면 깊은 우물 속에 빠진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 기뻐하고 슬퍼하는 모양은 특히 참아 보지 못하겠습니다. 어찌 名利가 사람을 迷惑시킴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名利의 길이 열림에 사람들이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그곳으로 달려가니 이를 어찌 이상하게 여기겠습니까?\"
\"예전에 楊朱라는 사람이 있어서 \'爲我\'의 학설을 제창하였고, 墨翟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兼愛\'의 학설을 제창하였는데, 사람들이 여기에 많이 미혹되었었습니다. 불교에서 마음을 깨끗이 하여 수련하는 것은 더욱 그럴 듯한 이치이므로, 선비 가운데 고명한 사람은 여기에 미혹되고 비하한 사람은 여기에 능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名利에의 誘惑은 智愚高下를 막론하고 서로들 달려들어, 득실을 헤아려 비교함에 못할 짓이 없으며, 심지어 파리떼나 개처럼 비루한 짓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지조와 기개를 잃고 마음을 허물어지게 하여 피해가 극심하니 어찌 異端의 해로움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아아, \'爲我\'와 \'兼愛\'도 종국에는 \'無父無君\'을 면하기 어렵거늘, 이익을 꾀하는 일과 얻지 못할까 걱정하는 것이 극도에 이르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부모된 사람들은 아들을 사랑하는 도리를 모르고, 子弟된 사람들은 어버이를 섬기는 의리를 생각지 않습니다. 모두들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건만 아무도 구할 수 없습니다. 만약 世道의 扶持를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서, 홍수를 억제하고 이단을 물리치듯이 엄하게 \'名利\'를 물리친다면, 아마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한 줌의 흙으로 孟津의 물줄기를 막으려는 것과 같을까 걱정됩니다.\"
\"前賢이 \'科擧가 사람을 나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스스로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科擧가 비록 \'名利의 길\'이라고는 하나 古人이 크게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전현의 말씀은 \'득실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비록 날마다 과거 시험에 응하더라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미 과거 시험에 응할 마음이 있다면 어찌 이득을 계산할 생각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과거 시험에 응하면서도 득실에 마음이 끌려가지 않는 것은, 인품이 고상하거나 학력이 뛰어난 사람이어야 가능한 일이고, 보통 사람이 바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젊은 시절에 바로 이 \'名利의 마당\'에 빠져 본 일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주자는 \'아직 출사하기 전에 마음이 이미 허물어진다면 출사한 뒤의 氣節은 알 만하다.\'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科擧가 사람의 마음을 이지러지게 한다는 이야기의 출처입니다.
나는 일찍이, 예전의 현군자들이 時尙의 是非와 學術의 邪正을 논한 것이 모두 엄정하고 절실하지만, 董仲舒만큼 峻截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동중서는 일찍이 \'크게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天地의 常經이요 古今의 通誼이니, 六藝의 과목과 관련이 없거나 孔子의 학술이 아니면 모두 그 道를 끊은 연후에야, 統紀가 하나로 될 수 있고 法度가 밝혀질 수 있어서 백성들이 따를 바를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의 이른바 \'科業\'이라는 것은, 바로 이른바 \'文學\'의 餘技이니, 혹 공자의 학술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인심에 해가 되는 것은, 바로 잡초가 곡식 논에 자라면서 곡식을 해치고 도적이 백성 가운데서 일어나 양민을 해치는 것과 같으니, 이는 바로 \'文學\' 가운데 하나의 異端인 것입니다.
게다가 예전에 \'문학\'이라 했던 것이, 어찌 지금의 \'句讀에 신경쓰고 韻律에 재주를 부려, 시대의 변화에 편승하여 爵祿이나 취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외면서도 그 말만 숭상하고 실천하기를 숭상하지 않으며, 華에만 힘쓰고 實에는 힘쓰지 않아서, 몸(身)과 책(書)이 나뉘어 둘이 되고 문(文)과 행(行)이 서로 관련이 없게 됨으로써,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그르치고 종국에는 나라를 그르칩니다.
그러므로 선비로서 학문에 뜻을 둔 자는 董仲舒의 \'一統\'의 설을 생각하여, 먼저 科擧의 폐습을 깨뜨려 벗어나고 名利의 유혹을 벗어나서, 생각을 專一하게 하고 있는 힘을 다한 연후에야, 숭상할 바를 알게 되며 造詣의 淺深을 논할 수 있습니다. 활을 당겨 鴻鵠을 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둑을 배우는 데에는 어찌 큰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보잘것 없는 이 사람의 생각에는 선비의 학문이 분열되고 인심이 이지러지며, 이욕이 하늘에 넘쳐 세도를 빠뜨리고 있는 것에 대해 항상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말이 생각나는 대로 나오게 되어, 나도 모르게 과격하였습니다.\"
곁에서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 선비들은 만약 科擧가 없다면 책을 읽거나 글을 지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학이 장차 이로 인해 몰락할 것이니, 科業 역시 없을 수는 없습니다.\"
\"儒學과 科業은 일은 같지만 결과는 다르니, 마치 天理와 人慾이 행하는 것은 같으면서도 實情은 서로 다른 것과 같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잘 살피지 못하여 擧業을 儒學이라고 인식하고, 글재주가 있어 과거에 잘 합격하는 사람을 人才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잘 합격하는 사람은 단지 文人이 될 수 있을 뿐이고 人才는 될 수 없습니다. 만약 科業은 歷代로 사람을 뽑는 잣대로서 그 유래가 오래 되었으므로 없애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면 그래도 가하거니와, 科業을 없애면 儒學이 이로 인해 몰락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과업이 실시되지 않았던 시대에 자연스레 성현이 있었으니, 어찌 과업을 없앤다고 유학이 몰락하겠습니까? (과거 공부하다가 죽는 경우도 있으니 이것이 과연 유학인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요즈음 사람들은 과업에 몸을 바치지 않으려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죽지 않는 것은 요행히 면한 것일 뿐입니다. 비록 죽지는 않더라도 병의 뿌리는 항상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거처하는 곳에 따라 자라서, \'내 모름지기 좋은 관직을 차지하리라\'라고 생각하니, 天位와 天爵을 개인의 물건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꼭 얻기를 기약하여 죽은 뒤에나 말 정도라면, 名利의 마당 속에 마땅히 나라의 기둥이 될 만한 강직한 신하는 없을 것이며 시대를 구제할 현명한 신하는 없을 것이니, 어찌 張儀가 魏나라의 忠臣이 되며 秦檜가 宋나라의 良相이 되는 줄 알 수 있겠습니까? 맹자께서 \'마음을 기르는 것은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 사람됨이 욕심이 많으면 비록 存心한 바가 있더라도 적을 것이며, 그 사람됨이 욕심이 적으면 存心하지 못한 바가 있더라도 적을 것이다.\' 하셨으며, 또 \'기술은 조심해서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기술을 조심해서 선택하지 않아 만약 화살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면 비록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더라도 되겠습니까? 무릇 선비된 사람은 마땅히 마음을 기르고 기술을 선택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드디어 기록하여 스스로 朱文公의 貢擧私議에 붙이려고 한다.

중요한 점만 간추려 보면, 첫째로 名利에의 誘惑은 異端보다 더 나쁘다. 그러므로 世道의 扶持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 둘째로 科業은 文學의 餘技이니, 유학이 아닌 것은 아니나 곡식 논 가운데의 잡초와 같은 것이므로, 文學 가운데의 異端이다. 셋째로 지금은 학문이 分裂되어 있고 이욕을 추구하는 마음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바 이는 몹시 분노할 만하다. 넷째로 과거에 잘 합격할 수 있는 사람은 문인이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인재라고는 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내암이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를 爲人之學의 범주에 넣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는 우선 명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데다가 문학에 너무 치우치기 때문에 더욱 문제라는 것이다. 내암은 여기서 \'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자신을 닦고 나아가 이상적인 현실세계를 이룩하기 위한 것인데, 이상적인 현실세계를 이룩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채택된 과거제도로 인하여 사람들이 名利의 場으로 이끌려 가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문장이 뛰어나야 하므로 문장을 잘 쓰는 일에 신경을 집중시키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일상생활 속에서 성찰하고 극기하는 일과 경서의 정신을 현실에 살리는 구체적인 방법을 연구하여 실천하려는 데는 소홀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내암은 이 글에서 결론적으로 국가를 경영하는 데는 인재가 필요한 것이지 문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내암이 현실문제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하여 우리는 그가 위기지학에 의한 修己治人을 추구하는 자세 및 현실을 보는 실질적인 자세를 감지할 수 있다.
다음으로 내암의 학문 성향이 백성의 현실적인 삶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는 점, 즉 민본정신에 입각한 위민정치를 역설하고 있음을 살펴본다.

臣은 \"聖人의 大寶는 王位인데 이 왕위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사람에게 달려 있다.\"라는 공자의 말씀이 있고, 또 {書經}([五子之歌])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라는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사람이 있고 난 뒤에 왕위를 지킬 수 있으며, 민심이 안정된 뒤에야 나라가 편안해 지나니, 백성과 나라가 용납되지 못하면 나뉘어져 둘로 됩니다. {주역}에서는 아랫사람의 것을 빼앗아 윗사람에게 더해 주는 것은 \'損\'이라 하고, 윗사람의 것을 덜어서 아랫사람에게 보태주는 것을 \'益\'이라 하였으니 그 뜻이 매우 분명하여 만세토록 바뀌지 아니할 것입니다.
맹자가 \'백성을 보호해서 그들에게 恒産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설을 제나라 위나라 등지에서 역설한 것은 진실로 현실을 구제하는 일이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맹자를 두고 時務도 모르는 迂闊한 선비라고 한다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백성 보호하는 일을 그만두고 무엇을 먼저하겠습니까?
신은 또 {서경}([大禹謨])에 \"두려워할 만한 것은 백성이 아니겠는가?\", ([召誥]에)\"民 을 돌아보고 두려워하소서.\" 라는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고인의 뜻을 미루어 밝혀 보건대, 국가는 백성으로 인해 존재하기도 하고 백성으로 인해 망하기도 합니다. 임금의 처지에서 말하면 백성이야말로 진실로 돌아보며 두려워해야할 하나의 암초입니다. 백성이 안정되고 국가가 튼튼하면 외적이 감히 넘볼 수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이웃한 적국의 처지에서 말하면 오를 수 없는 천험의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周易} [益卦] 九五爻에 \"지성으로 (백성을) 은혜롭게 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백성이) 지성으로 나의 덕을 은혜롭게 생각한다.\"는 말이 있으니, 임금이 지성으로 백성을 사랑하면 백성도 지성으로 임금을 사랑하여, 더불어 흰 칼날을 밟을 수도 있으며, 더불어 물과 불에 들어갈 수도 있으며, 끝내 시장에 가듯 마음이 편안하며 죽기를 각오하고 떠나가지 않습니다. 싸움을 하면 이기고 지킬 적에는 튼튼합니다. 그렇다면 인심이란 무엇보다 암험한 것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든든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로 보면 백성을 보호하는 것은 지극한 다스림을 위한 급선무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외적을 제압하는 중요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안으로 백성을 잘 다스리고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는 일이 애초에 두 가지 일이 아닙니다. 맹자가 이른바 \'정치를 하되 어진 마음을 펴면 몽둥이로도 秦楚의 堅甲利兵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역이 번중하여 백성들의 괴로움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듯하며, 방납의 폐해와 인정의 폐단이 갈수록 심해져서 백성들이 국가의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 인심이 어떻게 이 지졍에 이르렀습니까?
좌상: 그렇게 된 지 오래 되었사옵니다. 신이 무신(1608)년간에 호역자는 많고 토역자는 적은 것을 보았사온데, 이후로 인심이 나뉘어져 두 개의 당이 되었사옵니다. 서로 배격하는 것을 일삼기만 하고 국사는 생각지도 않으면서 유유히 세월만 보내고 있사옵니다. 위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아래로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 바로 임금이 꾀해야 할 일이옵니다. 만약 위로 하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아래로 백성을 구휼하지 않는다면,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겠사오며 하늘의 뜻을 어떻게 되돌리겠사옵니까? {周易}에 \"아랫사람을 후하게 대우함으로써 편안하게 거처한다\"([剝卦]), \"윗사람의 것을 덜어서 아랫사람에게 더해준다\"([益卦])는 말이 있사오며, {서경}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五子之歌])라는 말과 \"덕으로 위엄을 보이니 천하가 두려워하고 덕으로 밝히니 천하가 밝혀졌다.\"([呂刑])는 말이 있사오니, 이 두 책의 말은 실로 서로 表裏가 되는 표현이옵니다. 지금은 백성이 離散하되 마치 울타리가 없는 듯하니, 백성 보호하는 방법을 상감께서는 마땅히 힘써 강구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임금: 어떻게 하면 백성을 보호할 수 있습니까?
좌상: {주역}에 \"진실함이 있어 마치 단지를 채우듯이 한다면 길하리라.\"([比卦])는 말이 있사오니, 상감께서 정성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면 백성들은 마음을 다할 것이옵니다.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즐기고 백성들이 걱정하는 것을 걱정한다\'는 말이 바로 임금과 백성이 한 몸임을 밝혀주고 있사오니, 어찌 임금과 백성이 두 몸일 이치가 있겠사옵니까? 신이 높은 산 깊은 골짝에 있어서 백성의 일을 알지 못하오나, 길에서 보니 지나는 넓은 들판 가운데 눈 안에 들어오는 곳은 모두 一畝나 一束도 수확할 것이 없었사옵니다. 호남은 더욱 심하여 13 고을의 백성이 모두 산지사방 흩어져서 배를 타고 바다를 따라서 남쪽으로 경상도로 들어가 육지에 내려서 모인다고 하옵니다. 이런 백성들은 구원할 방법이 없사옵니다.

백성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정치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保民이니 愛民 爲民 生民 恤民 등의 용어를 내암의 疏箚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내암의 학문성향이 현실에 밀착해 있으며, 특권 계층이 아닌 일반 백성의 삶에 깊은 관심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保民\'은 {맹자}에 나오는 말로 왕도정치의 기본이다. 내암은 임금에게 이 보민과 함께 백성이 암험한 존재임도 아울러 역설함으로써, 현실에 대해 심각한 경계를 하고 있다. 백성이 암험한 존재라는 인식은 남명이 [민암부]에서 심각하게 제기하였던 내용임을 감안한다면, 내암의 이러한 언표는 남명의 현실인식에 깊이 동감한 데서 우러나온 것으로 이해된다. 남명의 [민암부]에서는 {서경}의 \"민암을 돌아보고 두려워하소서(用顧畏于民 )\"란 말을 援用하여 글을 전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인용한 내암의 글을 보면 마치 [민암부]에 주석을 붙인 것으로 착각이 될 정도로 그 의미를 부연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실인식에 대한 남명의 영향이 내암에게 어떻게 연계되느냐는 것을 비교적 분명하게 보여주는 자료라고 생각된다.
현실인식과 관련되는 것으로 현실에 대처하는 방식 즉 처세방식이 학자나 학풍에 따라 매우 특징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남명의 문인 또는 재전 문인들의 처세 방식을 보면 이들이 매우 깊이 서로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이 남명 학문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경의\'와 관련이 있으며, 남명 문인 가운데 남명의 학문에 가깝다고 하는 학자일수록 이 부분에 대한 깊은 공감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경의\'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실천의지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경\'은 위기지학을 하는 학자의 내적 수양을 위한 필수적인 것이며 \'의\'는 이를 현실세계에 구현하는 데 기준이 되는 것이다. 남명이 \'경\'과 함께 \'의\'를 중시하여 강조한 것은 온축한 학문을 현실세계에 구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남명이 동강에게는 \'경\'의 상징인 방울을 주고 내암에게는 \'의\'의 상징인 칼을 주었다고 하는 데서도 남명과 그 문인들의 경의에 관한 관심과 집념을 읽을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의\'에 의한 현실 판단과 그 실천을 \'경\'에 의한 내적 수양과 동일한 가치로 보는 것이 남명학의 특징적인 면모인데, 내암에게서 이러한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기축옥사와 연관되어 동문인 守愚堂 崔永慶(1529-1590)이 억울하게 죽은 것과 관련하여 牛溪 成渾(1535-1598)과 松江 鄭澈(1536-1593)을 심도 있게 비판한 것도, 단순히 미워하기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기 보다는 현실 판단의 기준을 \'의\'에 두고 그 실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임해군 및 영창대군 등이 관련된 역옥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기준도 역시 \'의\'였다고 생각된다. 이 문제들은 다음에 장을 달리 해서 상론할 것이다.
栗谷은 來庵을 두고 \"德遠은 剛直하지만 생각이 정밀하지 못하고 學識이 밝지 않다. 用兵에 비유하면 突擊將이 될 만하다.\" 한 적이 있다. 이는 내암이 沈義謙을 공격하면서 鄭澈까지 같은 무리로 보아 심하게 공격하였던 후에 붙어 있는 평가이다. 율곡이 정철은 심의겸과는 동질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내암이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므로, 율곡이 내린 평가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심의겸과 정철은 동일시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몰라준 데 대한 부분적인 평가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내암이 경연에서 {춘추}나 {주역}을 강의할 적에 제시한 의견을 보면 학문이 밝지 못하다는 율곡의 표현은 매우 상대적인 평가로 보인다. 宣祖 14(1581)年 4月 辛巳日의 朝講에서, 楚 令尹 子南의 아들 棄疾에 관한 논의가 있었는데 내암은 \"평시에 아버지에게 힘써 그 잘못을 간하지도 못하고, 아버지가 죽게 되는 험난한 일을 당하여 몰래 업고 도망가지도 못하면서, 임금의 명령을 누설하면 중형을 면치 못한다는 핑계를 대고 있으니, 이는 자식의 도리를 극진히 하지 못한 자입니다\"고 하였다.
내암의 학문이 겉으로 이름만 대단하고 실속은 없는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은 내암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말인 듯하다. 내암이 1602년 대사헌으로 소명을 받아 상경하자 孚飮亭으로 수백 명의 門徒가 찾아왔다는 기록도 있고, 陜川을 중심으로 해서 인근의 星州 高靈 居昌 咸陽 安陰 山陰 晋州 三嘉 草溪 등의 선비 가운데 이름난 이들은 모두 내암의 문인들인데, 학문적 역량이 부족하다면 이처럼 많은 門人이 集할 리가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Ⅲ. 己丑獄事와 來庵의 對處

기축옥사는 주지하다시피 1589년 10월에 鄭汝立이 叛逆을 꾀했다는 이유로, 그 뒤 약 3년간에 걸쳐서 천여 명의 동인계(東人系) 인물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내암은, 서인 측에서 동인이 주도하던 정국을 반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던 이 사건을, 외면적으로 주도했던 인물은 松江 鄭澈(1536-1593)이지만, 내면적으로는 牛溪 成渾(1535-1598)의 의지가 상당히 많이 담긴 것으로 파악했다. 이는 다음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대사헌 정인홍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경성에 들어오는 날로 쇠병 때문에 벼슬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전하의 귀를 더렵혔사옵니다. 신은 거의 죽게 된 나이에다가 온갖 병증이 교대로 찾아들고 있사옵니다. 신의 병이 이와 같은 것이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첫째 이유이옵니다. 벼슬을 그만두어야 할 나이를 도리어 벼슬하기 시작하는 나이처럼 여긴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두번째 이유이옵니다. 신이 이귀가 올린 상소문을 보니 신이 비록 스스로 몰랐다 하더라도 실로 남에게 죄를 얻은 것이 이와 같은데도, 뻔뻔하게 자리를 차지하고서 국가의 관직을 더럽히고 자신의 죄를 더욱 무겁게 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것이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세번째 이유이옵니다. 신이 聖敎를 보니 신이 남쪽 지방에서 성혼이 최영경을 모함하여 죽인 문제를 힘써 말하였기 때문에 이런 상소가 올라오게 되었다고 하셨사온데, 이것은 전하께서 천리 밖의 일을 훤히 잘 보신 것이옵니다. 신은 애초부터 혼의 죄를 모르지 않았사옵니다. 다만 혼이 이미 그 죄를 받아 관작을 삭탈당했는데 또 다시 소급하여 논의한다면 金絮가 신을 배척했기 때문이라는 혐의가 있을 뿐 아니라,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것과 비슷하여 자못 마음에 편안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은근히 참고 말하지 않은 지 오래였사옵니다. 지금 성교가 이와 같으니 신이 감히 그 대강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신이 20년 전에 이미 이 사헌부에 있으면서 \'권세를 탐내고 사당(私黨)을 심으며 거상 중의 인물을 불러 내어 벼슬 시키려고 은근히 꾀했다\'는 죄목으로 심의겸을 탄핵하면서 정철에 대해서까지 언급하였사옵니다. 신은 혼이 의겸이나 철과 가까이 사귀는 것을 보고 속으로 매우 비루하게 여겼사옵니다. 왜냐하면 철의 악이 그 때 비록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의겸이 외척으로서 흉악한 짓을 한 것이 명약관화한데도 그가 오히려 의겸의 악함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옵니다. 또 \'사당을 심는다\'는 말을 보고 또한 자못 자신을 몰아부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문득 언어와 기색으로 남에게 그 감정을 드러내었으니 그 사람됨을 진실로 알 수 있었사옵니다. 계축년간에 비록 그의 심보가 과연 드러났사옵니다만, 시종일관 철과 함께 참혹한 독을 흘려 무고한 선비들에게까지 미치게 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사옵니까? 혼이 영경을 지척하여 삼봉이라 한 것은 실로 김종유(金宗儒)의 말에서 나왔고 산을 뚫어 길을 낸다는 것과 같은 엉터리없는 말 또한 혼이 직접 한 것을 귀로 들은 자가 있으니, 혼이 죽인 것이 아니고 그 누구이겠사옵니까? 철이 혼에게 의지함이 중하여 혼의 말이면 반드시 들었으므로 만일 그 때 한 마디만 꾸짖고 말렸다면 결코 죽이기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그래서 \'철의 악은 작고 혼의 악은 크며, 철의 죄는 가볍고 혼의 죄는 무겁다\'고 하였사옵니다. 신이 이전에 남쪽 지방의 士友들과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마음이 아파 과격한 것도 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기를 \'간악한 철을 몰래 부추겨 고명한 선비를 죽임으로써 국맥을 해치고 사림을 피로 더럽힌 자는 成渾이며, 行長과 淸正을 시켜 우리의 종묘사직을 능욕하고 우리의 강토를 유린한 자는 秀吉이니, 그 사업이 거의 같다\'고 하였사옵니다. 김휘가 신을 지척하여 \'혼과 틈이 있던 자\'라고 한 것은 대체로 이런 일을 가리킨 것이옵니다. 이귀가 신의 죄를 낱낱이 들면서도 혼을 위하여 한을 풀어 주려는 것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본심이 아닙니다. 어찌 사헌부 관리로서 남에게 비방과 지척을 받고도 뻔뻔히 스스로 변명이나 하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있겠사옵니까? 이것이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네번째 이유이옵니다. 신은 \'士類는 국가의 元氣이고 公道는 士類의 命脈\'이라고 들어 알고 있사옵니다. 오늘의 사대부가 나뉘어 둘로 되면서 편당을 짓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것을 보고 늘 스스로 비웃고 탄식하였는데, 지금 또 나뉘어 너댓이 되어 각자 무리를 지어 명리를 다투고 서로 공격하면서 국사에는 여념도 없사옵니다. 하물며 신은 일찍이 성혼 정철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또 유성룡에게는 불쾌한 감정이 있었사옵니다. 지금 그 무리들의 분한 마음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기색도 좋지 않아서 조금만 탄핵해도 금방 의심하여 지난날과 같은 소요가 있게 될 것이옵니다. 신이 비록 사류를 부식하고 공도를 넓히려고 해도 결코 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이렇게 보면 신은 애초에 행할 만한 도리가 없어 결국 봉급만 축낸다는 기롱을 면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이러고도 있을 곳이 아닌 곳에 그대로 앉아 있는다면 비록 견책이 없다 하더라도 속으로 부끄럽지 않겠사옵니까? \"
(왕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사람은 나이 들수록 노성해지나니 나이 많은 것이 어찌 문제가 되겠소? 질병에 대해서는 응당 스스로 조리하면서 일을 보아야지 어찌 사임할 수 있겠소? 다만 경이 남쪽 지방에서 의논했던 것에 대해서는 내가 그 곡절을 전혀 몰랐었소. 오직 지난날 김휘라고 하는 자가 -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 상소문에서 경의 이름을 지척하여 모해하려는 조짐이 있었고, 또 이귀의 상소문을 보건대 경에게 \'不測\'의 이름을 뚜렷이 덮어씌우기에, 간사한 사람이 아닌가 의심하였더니, 이제 차자의 내용을 보고 과연 다른 사람들의 말이 있게 된 연유를 알게 되었소. 자고로 충현이 남의 입에 많이 오르는 것이 어찌 한정이 있었겠소? 따질 것도 없고 마음에 끼고 있을 것도 없소. 경은 사임치 말고 더욱더 마음을 다하여 나를 보필해 주시오.

내암이 기축옥사로 낙향해 있을 동안 때로 격해지면 牛溪와 松江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기축옥사 당시의 委官은 松江이었음에도 불구하고 來庵은 牛溪를 송강보다 더 나쁜 인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우계가 송강을 사주하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송강은 守愚堂 崔永慶(1529-1590)과 일면식도 없지만 우계는 수우당과 젊은 시절 서로를 깊이 인정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던 사이이므로, 송강과 친분이 두터운 우계가 수우당을 나쁘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수우당이 옥사에 관련될 수도 없었고 죽을 수도 없었다고 내암은 판단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내암 쪽의 견해를 수용하면 우계가 그야말로 \'음흉\'한 사람이고, 우계 쪽의 견해를 수용하면 내암이야말로 편협한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되고 만다.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이 두 쪽의 견해에 대해서 시비를 밝히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수우당의 죽음이 원통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양쪽의 의견이 같다. 내암이 同門 \'道義之友\'의 원통한 죽음에 대하여 그 억울함을 하소연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암이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상경할 적에 부음정으로 모인 벗들과 문인들이 수백명이었다고 하였는데, 이들 내암의 추종자들을 단순히 벼슬을 바라는 무리들로만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계의 수많은 문인들을 그렇게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즉 내암이나 우계는 각기 그 상대편에서 보듯이 형편 없는 인물이 아니고, 엄청난 중망을 입고 있던 선비였다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논의는 계속 겉돌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우계가 의도적으로 사주하여 수우당 같은 이를 죽게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우계도 이 사건의 피해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암이 우계를 송강보다 더 나쁘다고 몰아부친 이유는, 첫째로 말릴 수 있는 우계가 말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수우당이 죽은 뒤 그 죽음이 원통하다는 것을 우계가 즉시 드러내어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계가 비록 내암의 비판처럼 음흉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내암이 수우당을 위해 변명한 것을 두고 공격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몰아부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듯하다.
왜냐하면 내암이 알고 실천하려고 했던 \'의\'가 바로 이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즉 서인측이 기축옥사 관련자를 확대하여 동인측의 강경론자들을 그 속에 포함하여 수우당 같은 인물들이 억울하게 죽도록 한 것은 분명하고, 서인 측의 이와 같은 행위가 부당함을 논하면서 수우당의 원통함을 풀어주는 것은 바로 내암이 실천하려던 \'의\' 바로 그것이라는 뜻이다.
혹자는 내암이 이 사건을 계기로 정권을 잡으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내암이 올린 수십 차례의 사임 상소문이 단지 인사치레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이해해야 가능한데,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까?
1602년, 임진왜란 동안 경상우도 지역의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내암이 앞으로 정계의 실세로 등장할 가능성이 보이자, 默齋 李貴(1557-1633)가 상소로 내암을 극력 비난하였다. 위 인용문에서 내암이 지적한 것이 바로 이것인데, 默齋는 1601년 10월에 體察使 漢陰 李德馨의 召募官으로 居昌을 지나가면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내암의 죄목을 조목조목 열거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내암은 범연히 논박하고 말았지만, 來庵의 門人 宜寧 儒生 洛厓 吳汝牀(1561-1633)은 1602년 9월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묵재 상소문의 내용을 조목조목 변명하였다.
이 뒤로 묵재는 크게 영달하지 못하였고, 광해조 때에는 지방 수령을 역임하는 데서 그쳤다. 그 뒤 1623년 默齋가 北渚 金 (1571-1648)와 이른바 反正을 일으킨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광해조를 내암과 이이첨이 정권을 농단한 것으로 보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 자신의 스승인 牛溪는 伸寃될 날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자신을 포함한 그 문인들의 정계 진출 또한 어렵기 마련이라는 위기의식에서 나왔다고 판단된다. 인조반정 후에 내암이 처형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Ⅳ. 殺弟廢母와 來庵의 態度

광해군이 세자로 있을 때 왕위계승에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인물은 임해군과 영창대군이었다. 이 가운데 임해군은 선조 만년과 광해군 즉위 초에 광해군에게 여러 가지로 심각한 위험으로 다가왔고, 결국 임해군이 역모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임해군에게 토역의 법을 적용하여야 한다는 討逆論과 은혜를 베풀어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全恩論이 엇갈리게 되었다. 내암은 토역론을 주도하였고 임해군은 결국 유배도중 1609년에 처형당했다. 임해군의 경우에는 반역을 전적으로 부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영창대군의 경우는 실제 반역 행위를 한 것으로 덮어씌우기에는 문제가 있었으므로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위리안치를 시킨 상태에서 은밀히 폐모의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때 강화부사 鄭沆이 영창을 죽였으므로 桐溪 鄭蘊(1569-1641)이 \'정항을 목베고 영창대군의 위호를 추복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내암의 문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즉 桐溪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 및 이이첨의 뜻에 따르는 사람으로 나뉜 것인데, 일반적으로 전자를 中北 후자를 大北이라 한다. 중북에 속하는 인물은 내암 문인 가운데 대체로 重鎭에 속하고, 대북에 속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新進이며 출세지향적인 인물들이다.
대북에 속하는 내암의 소장 문인들이 중북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두고 역적을 옹호하고 스승을 배반했다는 명목으로 몰아부쳐서 세력을 꺾는데, 이 때 내암의 태도가 분명치 못했다. 동계는 영창대군을 죽게 한 鄭沆을 斬刑에 처하고 죽은 永昌大君의 位號를 追復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가, 護逆의 죄명으로 죽기 직전에 감형되어 제주도 大靜에 위리안치 되었다. 동계의 논리에 동조한 대표적인 내암 문인은 雪壑 李大期(1551-1628)와 陽 文景虎(1556-1619)이다. 동계를 포함한 이들 중북은 내암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내암에 대한 존경의 정도가 내암이 처형당한 뒤에도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는 다음의 자료에서 확인된다.

(1) 들으니 대간이 지난 13일에 \'산림을 가탁하여 멀리서 폐비의 의논을 주도하고 간흉을 길렀다\'는 이유로 정인홍을 논죄하고 잡아와서 정죄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2) 이 날 來相이 正刑에 처해졌다고 한다. 因城과 함께 이야기하기를, \"이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비록 스스로 취한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본래의 뜻은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죄가 같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의 무리가 誤導한 죄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3) 아아 4년 동안 몹쓸 곳에 버려져 있다가 하루 아침에 살아서 돌아왔건만, 서로 만나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니 어찌 말로 다 드러낼 수 있겠는가?

위의 자료 (1)에서 폐비의 의논을 주도했다는 것으로 정인홍을 논죄하였다고 했는데 사실 살제폐모는 덮어씌운 죄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료 (2)와 (3)은 내암이 동계를 포함한 중북 세력에 지지를 보내 주지 않았던 섭섭함 및 회재 퇴계에 대한 비판과 우계 송강 및 서애 등에 대한 비판으로 재앙을 자초했다는 점 등은 어느 정도 인정하되, 반정후 내암을 정형에 처한 것은 지나치다는 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다음은 내암이 정형을 당하면서 진술한 공초의 일부분이다.

嶺外와 朝廷은 멀리 떨어져 있어 이몸은 일찍이 폐모의 논의가 누구에게서부터 일어났는지를 알지 못하였소. 師友로부터 학문을 받아 君臣 父子간의 大義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소. 아, 내가 물러나 시골에서 지낸 지 이제 이십 년, 세상의 시끄러운 일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았는데, 아흔 살 모진 목숨 아직도 죽지 못해 끝내 廢母의 凶名을 얻었도다!

내암이 \'군신 부자간의 대의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다\'고 한 표현은 살제폐모의 흉명을 자기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야말로 유자로서의 치욕이라는 의미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이 내암을 가장 믿었고, 引見 때 이조판서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내암이 이이첨을 추천하였으며, 광해군이 믿었던 이이첨에 의해 반정의 빌미가 제공되었으므로, 이이첨을 훌륭한 인물로 적극 추천했던 책임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암 문인 가운데 중북에 속한 사람들은 대체로 한강과 일정한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란 점에서 이들에 관한 이해는 남명학파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되지만, 여기서는 논의를 생략하기로 한다.


Ⅴ. 晦退辨斥과 來庵의 意圖

내암은 1604년 {南冥集}을 간행하면서, 그 말미에 퇴계가 남명을 두고 비평한 말들을 辨斥하는 글을 싣고, 南冥이 龜巖 李楨(1512-1571)과 절교한 뒤 退溪가 龜巖에게 보낸 편지를 문집 뒤에 실음으로써, 퇴계에 대한 공격을 공개적으로 시도하였다.
내암은 그 뒤 1611년 3월 26일 贊成 직함을 사직하면서 올린 차자에서, 1610년 9월에 이미 문묘에 종사된 五賢 가운데 晦齋와 退溪는 문묘에 종사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였다.

鄭仁弘이 차자를 올려 文元公 李彦迪과 文純公 李滉을 文廟에 從祀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비방하였는데, 왕이 그 차자를 보류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여러 번 인홍을 불렀으나 인홍이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왕이 특히 內醫와 禮曹의 관리를 보내 문병하게 하고 병을 참고 올라 오도록 유시하였다. 인홍이 드디어 차자를 올려서 지니고 있던 찬성 벼슬을 사임한다는 핑계로 언적과 황을 지극히 헐뜯어 문묘에 종사함이 부당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실록에서는 내암이 찬성의 직함을 사임하면서 공연히 회재와 퇴계를 비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내암을 실없는 사람처럼 보려는 의도에서 기록한 것이고 실록에 실린 내암의 차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사임 이유가 있다.

신의 구구한 견해가 대체로 이와 같으므로 일찍이 식과 운이 무함당한 것을 변명한 적이 있었사옵니다. 그리고 또 이런 문제를 언급하여 앞으로의 의혹을 풀려고 하였는데, 도리어 당시 사람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여러 사람이 모여 비방하고 배척하였으며 그것이 온 나라에 미치게 되어 결국 신으로 하여금 나라 안에서 용납될 수 없게 하였사옵니다. 신은 바로 노자와 장자를 따르는 사람이옵니다. 지금 온세상 사람들이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정해졌고 조정에서 좋아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결정되었으니 전하께서 좋아하는 것도 알 수 있사옵니다. 그런데 신이 어떻게 감히 뻔뻔스럽게 나가서 스스로 색다른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을 수 있겠사옵니까?

내암이 일찍이 남명에 대해 변병을 한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보아, 자신이 나라 안에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 있기 때문에 이런 상태로서는 벼슬을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주장이 나라 안에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비방을 심하게 받고 있는 상태이므로 벼슬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그 주장이 일리 있음을 한번 더 주장한 것이다.

신이 일찍이 故贊成 李滉이 조식을 헐뜯은 것을 보니, 한번은 \"남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업신여긴다\"고 하였으며, 한번은 \"高亢한 선비이므로 中庸의 도를 요구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며, 한번은 \"노자와 장자가 빌미가 된다\"고 하였사옵니다. 그리고 成運을 淸隱이라 지목하여 협소하고 작은 한 가지 지조만 가진 사람으로 인식하였사옵니다. 식과 운은 같은 시대에 나서 뜻도 같고 도도 같았사옵니다. 泰山喬嶽 같은 기상과 精金美玉 같은 자질로 학문에 독실한 공을 쌓아서 작게는 서로 사귀면서 주고받는 사이에, 크게는 벼슬길에 나가거나 물러나 지내는 즈음에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바가 없었사옵니다. 반듯한 법도는 모두가 모범으로 삼을 만하였으니, \'聖人의 뜻을 고상하게 실천한 사람\' 또는 \'盛世의 逸民\'이라고 해야 할 것이옵니다. 이황은 과거 출신으로 온전히 나아가지도 않았고 온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어물어물 세상을 비방하면서 스스로 그것을 중용의 도라고 생각하였사옵니다. 식과 운은 일찍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시골에 숨어살면서 도를 지킴이 확고하였으며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사온데, 황은 이를 두고 \'괴이한 행동\' 또는 \'노장의 도\'라고 인식하였사옵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황의 이른바 \'중용\'이란 것이 성인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사옵니다. 이언적과 이황이 지난 가정 을사년(1545)과 정미년(1547)간에 혹은 높은 벼슬을 하기도 하고 혹은 청요직에 있기도 하였는데, 그들의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생각한 것이겠사옵니까? 대체로 고상한 것을 두고 중용의 도에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예전에는 없던 일이오며 이황에게서 비롯된 것이옵니다.

즉, 남명과 대곡의 학문과 행실은 중용의 도에 합당한 것인데 퇴계가 도리어 이를 비난한 것은 잘못이며, 을사사화와 정미사화 때 회재와 퇴계가 벼슬하고 있었던 것은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생각하여 벼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내용이다. 사실 퇴계는 당시 이른바 \'崇正學\'의 기치를 내걸고 있던 때이므로 남명의 학문 가운데 노장의 기미가 있는 것이 문제라는 식으로 이야기함으로써 후학이 노장 쪽으로 가는 것을 경계한 것이었지, 의도적으로 남명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퇴계는 문묘에 종사되고 남명은 종사되지 못하게 되자, 내암은 퇴계가 남명에 대해서 노장 사상가인 것처럼 말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고 보고, 남명을 변명하기 위해 퇴계를 비난했던 것이다.

사신은 이른다. 인홍의 이 차자는 오로지 언적과 황을 공격한 것이다. 아, 언적과 황을 어찌 쉬이 공격하겠는가? 학문이 끊어진 뒤 분기하여, 대업에 잠심하여 오의를 천명하며 어리석은 이를 깨우쳐 유림에 본보기가 된 지 이미 사오십 년이 되었다. 재주 있거나 어리석거나 똑똑하거나 못났거나 간에 온 세상 사람이 다 이들을 大儒로 알고 있으니, 이 어찌 하루 아침의 언론으로 갑자기 공격하여 깨뜨릴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인홍이 이렇게 논의한 것은 대체로 황이 일찍이 그 스승 조식을 평론한 것에 대하여 분개했기 때문이다. 선배의 장점과 단점을 후학이 쉽게 논할 수는 없으나, 두 사람의 글이 남아 있으니 그 논저를 보면 황과 식의 醇疵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내암의 공격은 당시에 오히려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성균관 유생은 靑襟錄에서 來庵의 이름을 삭제하고 다른 대부분의 신하들도 성균관 유생의 행동을 심정적으로 이해하는 방향에서 논의가 전개되었다. 다만 내암의 문인 가운데 사헌부 지평으로 있던 感樹齋 朴汝樑(1554-1611)이 내암의 차자에 대한 변명을 하고 사퇴를 청하였으며, 朴乾甲 李宗郁 成 등도 차례로 내암을 변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요컨대 이 사건은 내암 및 내암 문인 가운데 좌파에 해당하는 몇몇 사람과 전국의 유생 및 대부분의 조정 대신들과의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여준 비판의 태도는 오히려 공정한 면이 있는 듯하다. 온세상 사람들이 대유로 알고 있는 회재와 퇴계를 비난하는 사람이야말로 오히려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평가인 것으로 이해된다. 실로 내암은 남명을 높이려는 순수한 생각에서 출발하여 퇴계를 비난하는 쪽으로 그 방향이 굴절됨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세인의 비난을 받고 역사의 엄중한 평가에 수백 년 동안 남명학파 전체가 위축되게 하였다. 남명의 학문과 퇴계의 학문을 비교하면서 내암의 차자를 냉정하게 비판하고 있는 사신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후세의 학자들이 남명과 내암을 판단하는 기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식의 학문은 의리를 강론하는 것을 크게 꺼리었으니 이는 주자가 육씨를 공격한 이유였다. 경을 논하되 마음과 숨이 서로 의지하는 것으로 요점을 삼으니 이는 도가의 수련법에 나오는 것이고 우리 유가에는 일찍이 이러한 공정이 없었다. 기타 시골에 거처하면서 폐해를 끼친 것이라든지 임금에게 불손하게 고한 것은 다 악을 미워함과 높고 곧음이 지니친 데서 나온 것이며 전혀 유자로서의 기상이 없다. 황의 학문은 한결같이 주자를 표준으로 삼아 논변과 저술 방면에 크게 드러낸 점이 있다. 그리고 그 기상이 화평하고 신밀하여 자연히 도에 가까왔다. 젊어서 아직 학문이 지극하지 않았을 적에 벼슬길에 올랐는데, 비록 이것이 조그마한 허물이 되지 않을 수 없으나 失身하는 데에 이르지 않고 이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언적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 출처의 시종이 비록 황에게는 미치지 못하여 위사에 관한 한 가지 일은 역시 지극히 훌륭했다고 할 수 없을 듯하나, 그 마음이 깨끗하여 조금도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 두 유자에게 비록 이런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젊은 시절의 일에 불과하다. 허물이 있는 중에서도 허물 없는 것을 찾는 것이 군자의 마음 씀씀이 이다. 인홍이 이상한 의논을 제창하여 방자하고 기탄없이 만세의 학자를 속였으니 세상을 의혹하게 하고 백성을 속인 죄가 양주나 묵적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세상에서 두 유자를 존경해 온 지 오래 되었고, 문묘에 종사하자고 요청한 지도 수십 년이 되었다. 지난날에는 어찌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제사 어찌 그런 말들을 하는가? 그 정상을 헤아려 보면 임금에게 요구했다는 비방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체로 인홍의 사람됨은 속이 좁고 사나우며 식견이 분명치 않다. 생각과 행동을 방자하게 하여 전혀 돌아보거나 꺼려하지 않아서, 세상의 현인 군자라는 사람 치고 그의 비방을 입지 않은 이가 없다. 일찍이 그의 무리를 사주하여 상소로 성혼을 헐뜯었고 또 이이를 지극히 비방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또 두 유자를 이처럼 힘써 공격하니, 인홍 같은 자를 두고 사문의 가라지요 사류의 좀도적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특히 인용문 뒷부분의 \'임금에게 요구했다는 비방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표현은 광해군의 자신에게로 기울어진 마음을 이용하려는 내암의 속마음을 지적한 것으로, 인조반정 이후 西南人系 史臣의 내암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의 대표적인 단면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광해군이 당대 인물 가운데 가장 존숭하는 인물이 내암이었으므로, 내암을 공격하는 모든 상소에 대해서 광해군은 내암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비답을 내렸다. 즉,

\"사람은 저마다 소견이 있는 법이니, 굳이 몰아 세워 억지로 자기에게 부화뇌동하게 할 것은 아니다.\"
\"다만 鄭贊成은 시골에서 독서하는 선비로 평생동안 道를 지키면서 흔들림이 없이 살아왔다. 箚子 속에서 진달한 바는, 그 스승이 알아줌을 받지 못한 실상을 따져 밝히려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사람은 저마다 소견이 있는 법이고 스승을 존숭하는 마음은 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은 것이다. 정찬성은 그 스승이 남에게 인정 받지 못한 일을 밝히고자 한 것이고 그 뜻이 특별히 다른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깊이 공박할 필요는 없다.\"

라는 등등의 말로 내암을 옹호하고 있다. 물론 광해군의 이러한 언표가 회재와 퇴계에 대해여 광해군이 내암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다만 광해군은 평소 존숭하던 내암을 이해하려는 차원에서 인용문과 같은 비답을 내린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좌의정으로 있던 白沙 李恒福(1556-1618)이 올린 箚子 가운데, \"바라건대, 聖明께서는 공평한 심정으로 自省해 보소서. \'이언적과 이황은 도덕이 어떤 사람인가? 정인홍이 그들을 공격하였으니 그 뜻이 공정한 것인가? 관학에서 그들을 존숭하였으니 그 뜻이 私意에서 나온 것인가? 이 일로 금고를 할 경우 위에서의 처치가 어떤 것인가? 史筆에 나오게 되면 후세에 그것을 보는 자가 어떻게 여기겠는가?\'라고 말입니다.\"라는 표현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표현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 일로 해서 내암은 자신의 문인들을 제외한 전국의 당대 선비들에게 비판을 받았고, 후세의 선비들에게도 지속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실상 광해군의 비답처럼 내암은 단지 스승인 남명을 위해 변명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반대편의 처지에서도 수긍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형편이므로, 필연적으로 논쟁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여기서 내암은 남명과 함께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은 내암이 인조반정 이후에 묵재를 포함한 그 주동 세력에 의해 역신으로 처형당함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정하는 세력이 없게 하였으며, 그 이후 조선조 내내 신원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게 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Ⅵ. 맺음말

내암에 관하여 漢陰 李德馨(1561-1613)은

\"신이 鄭某를 모릅니다만 지난 번 남쪽으로 내려가서 처음으로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람 됨이 어떤 일이 옳은 줄 알면 옳다고 생각해서 시종일관 고치지 아니하고, 어떤 일이 그르다고 들으면 시종일관 그르다고 여겨 또한 고치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는데, 내암의 성격을 그런 대로 객관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암의 이러한 성격은 남명 학문의 요체로 알려진 \'敬義\'를 체득하여 \'修己\'와 \'治人\'에 적용하려 하였던 데서 형성된 것으로 이해된다. 우계 성혼과 송강 정철에 대한 비판 및 우계의 문인 묵재 이귀에 대한 비판도 수우당 최영경의 원통한 죽음과 관련된 것으로,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그의 학문의 근저인 \'義\'의 사회적 체현 과정의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다음은 1607년(선조 40년) 5월에 올린 상소문에 대한 사신의 평가이다.

전공조참판 정인홍이 상소하였다. \"지난 12월에 본도 순찰사 유영순에게 명하여 신에게 세시 음식을 하사였사온데, 신이 그 달 30일에 엎드려 받았사옵니다. 감격스럽고 경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다만 묵은 병이 너무 깊어 이미 한 달 넘어 붓을 잡을 수 없었사옵니다. \"
사신이 이른다. \"인홍은 孝性이 出天하고 操履가 剛方하다. 어려서부터 남명선생을 좇아 배웠다. 남명이 인정하여 \'덕원이 있으면 나는 죽지 않은 셈이 된다\'고 하였는데, 인홍 또한 돈독히 존신하고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였다. 꿇어 앉아 독서하되 밤으로써 낮을 이었다. 성질이 청렴하고 날카로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나 의로운 것을 숭상하고 사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은 시종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을 상대하여 논의할 때에는 칼로 끊듯이 분명하였다. 의리 없는 행위를 하면 비록 아무리 높은 관리라 하더라도 노복처럼 비루하게 여기고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비록 이름난 유자나 큰 선비로서 평소 서로 아는 사람일지라도, 빌붙거나 잘 보이려는 태도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절교하고 서로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꺼려하고 병통으로 여겼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잠시 사헌부에 있었는데 온갖 관료들이 두려워서 숨을 죽였다. 여러 차례 고을을 다스렸는데 고을 사람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비록 시골에서 살았지만 강개한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였으며, 난리 때는 창의하고도 공을 내세우지 않았으니, 그 절조와 풍모는 남들이 미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유성룡과 크게 맞지 않아 양쪽 문인들이 서로 배척하였다. 남인과 북인 사이의 알력이 이로 인해 이로 인해 더욱 깊어졌다. 게다가 인홍이 남명을 높이고 퇴계를 깎아내리려는 의도에서 나온 비난과 폄하의 표현을 문자로 드러내었으므로, 사류의 비난을 받았다.

내암에 대한 비교적 공정한 비평으로 보인다. 강인한 성격과 함께 퇴계를 비판하는 점이, 이미 자신의 입지가 강하던 시절에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 글은 매우 의미 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