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杏派 (杏村公派와 杏亭公派) 소개

by 杓先 posted Jun 09, 200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二杏派 (杏村公派와 杏亭公派) 소개
(경북 김천시 대덕면 추량리, 중산리 소재)
정 표 선 옮김
★ 議政府舍人公 斯信
(高麗末 王后派 富城府院君의 막내(5남))

文科議政府舍人 ? 墓知禮釣龍大城子座贈資憲大夫吏曹判書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성립된 후 많은 고려말 기록이 사라져, 실제적인 生卒日은 알 수 없으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고려말 과 조선초기 태조, 정종, 태종의 시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말 富城府院君이었던 윤홍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써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성립되자 府院君이었던 (府院君은 왕후의 아버지 또는 왕족의 친척에게 주는 爵位) 윤홍이 김천시봉산면 예지리의 봉곡으로 이거한 뒤, 舍人公 斯信은 지금의 김천시 대덕면 중산리으로 移居하였다. 윤홍의 다섯째 아들 斯信은 그후 조선이 왕조를 세워 정착되어 가자, 과거시험에 文科로 장원급제하고 議政府 舍人(정5품)으로 벼슬을 한 뒤, 나중에 資憲大夫(정2품관작) 및 吏曹判書(정2품)로 追封된 것으로 보아 , 국가에 큰공을 세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舍人 贈吏曹判書 鄭斯信公 신도비를 통한 기록

의정부 사인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인 鄭公 사신은 대개 고려말 조선 초의 인물이다. 그분의 산소가 금릉군 대덕면 조룡리 대성자좌에 자리잡은 지 육백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다.
사신의 부친은 고려말 부성 부원군 윤홍이고 그 윤홍은 고려말 왕후의 부친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사실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서산정씨 대동보에는 윤홍의 둘째 따님의 기록이 삭제되어 있는 데, 이분이 고려의 왕후, 또는 후궁이 아니었나 짐작할 뿐이다.) 이 분이 고려가 멸망함에 따라 경북 김천의 봉계(김천시 봉산면 인지리, 예지리)로 숨어 移居 하였는데 서산 정씨가 최초로 영남지방으로 이거 하여 살게 된 것이 이 때 부터이다.
부성 부원군 윤홍이 고려말 강양 이판서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낳았는데 그 중, 다섯째 아드님이 斯信이다.
斯信은 성장 후 朝鮮 本朝에서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이 의정부 사인을 지내고, 또한 증직이 정2품 資憲大夫의 관작과 吏曹判書를 제수 받았다는 것을 보면 국가에 큰공을 이루었음에 틀림이 없으나. 실제 조선초기의 기록에 자세히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높은 품계의 贈職을 제수 받은 것으로 추정하여 그의 업적을 추정할 뿐이다.
公의 부인은 성산 이씨이고, 四男一女을 낳으니 맏이 효성은 護軍이고 둘째 효문은 대경이고, 셋째 효경은 조산대부이고 넷째는 효정인데 그 중에서 맏이 둘째 넷째는 후손이 없다.
딸은 시집가 조벽의 아내가 되었다. 손자 종하는 執議이고 유하는 副尉이고, 유하 등이 모두 조산대부의 아들이다. 증손에 희장, 縣監인 희호와 서자양, 김희철등에게 출가한 딸은 執儀 종하의 소생이고 副司直인 희영은 副尉 유하의 소생이다.
다만, 縣監 희호의 손자인 敎官 처우의 호는 杏村인데 學文에 重望이 있었고 司直 희영의 손자인 檢丘 사용의 호는 杏亭인데 정한강 선생에게 공부해 道義가 일세에 추앙을 받았다. 또 더군다나, 오늘날 二杏(杏村, 杏亭)의 후손들이 더욱 더 번창해 자손의 수가 몹시 많은데 모두가 조상을 위함에 돈독한 정성이 있어 마침내 오늘에 이 같은 일을 이룩하니 이점에서도 斯信公의 여험과 유택이 5세가 지나도록 끊기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