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렬공 정인경 傳記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

by 杓先 posted Jun 14, 200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양렬공 정인경傳記에 나오는 역사 인물
정표선 (2006년 6월)

김광식(金光軾)(문정공파/의랑공) (?∼1298년)
정인경의 사위
고려 후기의 문신,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의 첫째 아들. 어머니는 개성군대부인 왕씨(開城郡大夫人王氏)로 증호부상서(贈戶部尙書) 정조(丁朝)의 딸이다.
1294년(충렬왕 2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총부의랑(摠部議郞)이었다.
묘(墓)는 실전되어 광주시 광산구 비아 풍영정에 설단하다. (見高麗史)
配는 서산정씨 / 父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양열공(襄烈公) 정인경(鄭仁卿), 祖 증평장사(贈平章事) 표(彪)(一云臣保) (依鄭仁卿誌文)


유자우(庾自禹) (1260년(원종 1)∼1313년(충선왕 5)
정인경의 사돈 (정인경의 아들 신수가 유자우의 사위)
검교첨의평리 행상주목사 겸 상락성산도전민계점사(檢校僉議評理行尙州牧使兼上落星山道田民計點使)
고려 충렬왕•충선왕 때의 관인. 본관은 무송(茂松). 초명은 서(瑞).
삼한공신 금필(黔弼)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승선(左承宣)을 지낸 해(垓)이다. 조충(趙충)의 손자로서 충렬왕 때 지밀직사사를 지낸 조변(趙변)의 딸과 혼인하여 3남 5녀를 두었다.
사위 가운데는 이승휴(李承休)의 아들인 임종(林宗)과 찬성사 정인경(鄭仁卿)의 아들인 신수(信綏) 등이 있다.
1276년(충렬왕 2) 서재장판관(西材場判官)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1280년 권도평의녹사(權都評議錄事)가 되었다. 이후 9년 동안 7•8품에 머물다가 1288년 장인인 조변이 병으로 면관(免官)하게 되자, 그를 위로하는 뜻에서 신호위보승낭장(神虎衛保勝郎將)에 초수(超授)되었으며, 다음해에는 감찰어사를 겸하였다.
1290년 인물추고구급염세별감사(人物推考救急鹽稅別監使)가 되어 충청도에 파견되었고, 다음해에는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임명되었다.
1297년 감찰시사(監察侍史)를 거쳐 동계교주도안렴사(東界交州道按廉使)가 되었는데, 이때 삼척현에 은거하고 있던 이승휴를 방문하여 충선왕의 명에 따라 초치하였다.
1301년 권신의 미움을 받아 강화군부사(江華郡副使)로 좌천되었다가 곧 군부좌랑(軍簿佐郎)에 올랐으며, 계속해서 예빈령(禮賓令)•삼사총랑(三司摠郎)•충주목부사(忠州牧副使)•삼사우윤 지통례문사(三司右尹知通禮門事) 등을 역임한 뒤, 1307년 판통례문사 선운별감사(判通禮門事選運別監使)가 되었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에는 검교첨의평리 행상주목사 겸 상락성산도전민계점사(檢校僉議評理行尙州牧使兼上落星山道田民計點使)에 제수되고, 다음해 다시 복주목사(福州牧使)로 옮겼다.
1310년에 다시 해주목사가 되었다가, 다음해 병을 얻어 면관하였다.


한자희
정인경의 스승
문하시랑 역임, 정인경의 스승, 청주한씨(淸州韓氏)9세손, 면천한씨의 시조(始祖)
[면천한씨의 유래]
시조 한란(태위공)은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려고 그의 집앞을 지날 때 칼을 차고 나가 종군하여 삼한통합의 공을 세우고 삼중대광 문하태위가 되고 개국벽상공신에 서훈 되었다.
\'한씨세보\'에 의하면 한란은 기자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며 한씨는 기자의 31세손 준왕(고조선의 마지막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내려와 금마(현 익산)에 마한을 세우고 스스로 한왕이라 하고 위만에게 억류된 왕자 및 친족이 성을 한이라고 한것으로 보아 준왕 이전에 한씨로 하였다고 한다.
마한 말기의 원왕에게 세형제가 있었는데 마한이 망하자 우평은 고구려에서 태원 선우씨, 우성은 백제에서 행주 기씨, 우경은 신라에서 청주 한씨가 되었다고 한다.
시조 한란은 우경의 31세손인 한지원에게 한만, 한간, 한란, 한영 네 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셋째 아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청주 한씨에서 5세손 한후저는 평산 한씨, 6세 한원서는 한양 한씨, 8세손 한란경은 양주 한씨, 9세손 한연은 안변 한씨, 9세손 한자희는 면천 한씨, 9세손 희유는 가주 한씨, 10세손 한공서는 당진 한씨, 10세손 한이는 부안 한씨, 11세손 한유충은 대흥 한씨, 14세손 한진은 보안 한씨, 15세손 한돈은 금산 한씨로 되었으며,
9세손 한악의 후손인 한승정은 서원 한씨, 9세손 세영의 후손 중 한규지는 장단 한씨, 한익지는 함흥 한씨, 한혁지는 교하 한씨, 시조인 한란의 후손 한총례는 단주 한씨로 각각 분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한란의 아버지 우경의 후손으로 전하나 확실한 계대를 알 수없는 한우신(신평 한씨), 한세찬(탐진 한씨), 한종희(대구 한씨), 한예(곡산 한씨), 한세침(보령 한씨) 등을 1세 조상으로 하는 계통이 있으나 같은 조상의 자손이라며 대부분 합본했다고 한다.


이승휴 (李承休 1224∼1300(고종 11∼충렬왕 26)
유자우의 사돈/ 정인경의 아들 신수와 유자우의 아들과 동서지간
고려 후기 문신•학자. 자는 휴휴(休休),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 1252년(고종 39) 문과에 급제했다. 이듬해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삼척(三陟)에 내려간 사이 몽골과의 전쟁이 치열해져 길이 막히자, 그곳 두타산(頭陀山) 구동(龜洞)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64년(원종 5)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의 천거를 받아 경흥부서기(慶興府書記)가 되었다. 73년 식목녹사(式目錄事)로 있으면서 공이 없는 사람들이 관직에 초배(超拜)되는 것이 불가하다는 상소문을 작성하다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중국 원(元)나라에 다녀온 뒤 잡직령(雜職令) 겸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에 올랐다. 충렬왕 때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감찰어사•우정언을 지냈고, 이어 우사간을 거쳐 충청도안렴사로 있을 때 장리(贓吏)를 탄핵하여 원한을 사서 동주부사(東州副使)로 좌천되었다. 80년(충렬왕 6) 구동으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제왕운기(帝王韻紀)》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했다. 《제왕운기》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엮은 서사시로 당시의 역사의식을 보여준다. 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특별히 기용되어 사림시독학사(詞林侍讀學士)•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사관수찬관•지제고(知制誥) 등을 지냈다. 밀직부사•감찰대부•사림승지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문집에 《동안거사집》이 있다.


鄭頎(정기): (충렬왕~충선왕) -
양렬공 정인경의 사위 (三女)
內給事 草溪鄭氏 九世. 三重大匡(正一品) 廣陵君 密直司(中樞院-樞密院-密直司)

광릉군 왕감(王鑑) ( ?∼1310년(충선왕 2 )
고려의 왕족. 자는 의충(宜忠). 본관은 개성왕씨(開城王氏).
광릉군은 충선왕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의비(懿妃:也遠眞)이고 충숙왕의 형이다. 일찍이 광릉군(廣陵君)이 되었다가 뒤에 세자로 봉해졌다.
1310년(충선왕 2) 5월 충선왕이 원에 있을 때 연경에서 세자 왕감과 그의 측근 김중의(金重義) 등을 죽이고 같은 해 9월에 성의 남쪽에 반장(返葬)하니 백관이 소복하고 이를 장송하였다고 하는데, 사서에는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대체로 왕위 계승과 관련되어 당시 충선왕이 너무 오랫동안 원나라에 머무는 바람에 중신들 중에 왕감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듯하다. 아마 이 사건으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후 연경에서 죽음을 당한 시신은 고려로 옮겨져 개경 남쪽에 뭍혔다.


곽여필 (郭汝弼, ? ~ ?)
고려 원종시대의 문신.고려시대의 문신. 원종(元宗) 때 좌정언(左正言) •비서감(秘書監) •중서사인(中書舍人) •전중감(殿中監)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역임하면서 전후 7차례에 걸쳐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충렬왕 초기에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하고, 1279년(충렬왕 5) 전라도 계점사(計點使)로 나갔다가 내고(內庫)의 전호(佃戶)를 부역시키지 말라는 왕명을 어겨 이듬해 경상도 계점사 주열(朱悅)과 함께 파직되었다.

채모(蔡謨) ( ?∼1302(충렬왕 28)
정인경의 사돈관계
고려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인간관계가 매우 사교적인 인물로 반원파와 친원파사이에서 많은 정치적 조정역할을 했다. 다만 왕에게 너무 잘 보이기를 좋아하여 <고려사 열전>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1281년(충렬왕 7) 충렬왕이 일본원정 때문에 합포(合浦)에 행차하였을 때, 당시 경상도가 전쟁과 기근으로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벌을 위한 군사비용을 위해, 왕의 명에 의해, 왕지별감(王旨別監)의 지책으로 백성들로부터 지나치게 많이 세금을 거두어들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 경상도 권농사(勸農使)가 되었을 때는 세마포(細麻布)를 많이 거두어들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그러나 이는 고려조정의 일본 원정으로 군비 조달때문이었다.
이런 군비조달 역할로 인하여 누천(累遷)하여 좌승지를 거쳐 1286년 3월에 지신사(知申事)가 되고, 8월에는 삼사사(三司使)가 되었으며, 1287년에 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가 곧 전라도안무사로 나갔다.
1302년 첨의시랑 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다.


김방경 (金方慶 )
고려 원종. 충렬왕시대의 문신
자(字)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 신라 경순왕의 후손, 한림학사 효인(孝印)의 아들. 고종때 음보로 16세에 산원(散員)이 되어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하고, 감찰어사를 거쳐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이르렀다.
이때 몽고병이 침입하여 주민들과 함께 위도(葦島)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쌓는 등 농토를 개간, 농사를 짓게 했다.
1263년(원종 3)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승진하였고, 뒤에 상장군으로서 남경 유수로 좌천되었으나 전에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서북 여러 성에서 진정이 있어 다시 서북면 병마사가 되었다.
형부상서, 추밀원 부사를 거쳐 1269년(원종 10)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을 때,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猖)을 세우자 원나라 황제 세조가 보낸 맹격도의 2천군사와 함께 임연을 치려고 동경에 이르렀으나, 왕이 복위된 것을 알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갔다.
1270년에 장군 배중손(裵仲孫)등이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삼별초(三別抄)를 이끌어 난을 일으켜 진도로 들어가 연안을 침범하자 이듬해 몽고의 장군 흔도(炘都)와 홍다구(洪茶丘)등과 함께 진도를 함락시키고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적장 김통정(金通精)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탐라에 들어가서 성곽을 쌓고 항거하자, 1273년(원종 14)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원나라 장군 흔도,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삼별초를 쳐서 이를 완전히 평정했다.
그 후 시중(侍中)이 되고 원나라에 들어가 세조로부터 금안등을 하사받고, 돌아와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작위를 더 받았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서 합포(合浦:馬山)에 정동행성을 두고, 일본을 정벌할 때 중군장으로 출정, 2만 5천명의 여원 연합군 과 함께 쓰시마섬(對馬島)를 친 다음 본토로 향하는 도중 풍랑으로 패하고 돌아왔다.
1278년에는 앞의 일본 정벌중에 좌군수 김신이 익사할 때 이를 구하지 않았던 부사 위득유(韋得濡)를 파면하고, 진도의 삼별초를 공략할 때 전투를 소흘히 하고 재산을 약탈한 낭장 노진의(盧進義)의 가산을 몰수케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들로부터 \'국왕과 원나라 공주 및 다루가치를 제거하고 강도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를 받았다.
이에 흔도, 홍다구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고 나서 청도로 귀양갔다가 충렬왕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1281년(충렬왕 7) 원나라가 다시 일본 정벌을 할 때 고려군 도원수로서 종군, 일본 이끼조를 거쳐 하까다에 이르러 승리를 거두었으나 태풍과 적의 기습을 당하여 참패하고 돌아왔다.
그 후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에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치사(致仕)하고. 상락군 개국공이 되었다.(上洛郡開國公-\'郡\'은 고려 五等爵의 하나. 종2품으로 국공(國公)의 아래. 식읍(食邑) 이천호(二千戶)를 봉하는데, 公은 식읍(食邑) 일천호(一千戶), 실봉(實封) 삼백호(三百戶)를 받음).
충선왕때 공은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正一品)으로 추증됐으며, 89세에 훙(薨)하고 안동(安東)에 묘(墓)가 있다.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公을 안동김씨(安東金氏)에서는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세수(世數)를 정(定)한다.


안향 (安珦1243∼1306(고종30∼충렬왕32)
고려시대 문신•학자. 자는 사온, 호는 회헌. 본관은 순흥. 초명은 유였으나 뒤에 향으로 고쳤다. 1260년 문과에 급제, 교서랑이 되었고, 70년 삼별초의 항쟁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감찰어사가 되었다.
고려시대 문신•학자.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 교서랑(校書郎)이 되었고, 70년 삼별초(三別抄)의 항쟁 때 강화(江華)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감찰어사가 되었다. 89년(충렬왕 15)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어 왕과 왕후를 호종, 원(元)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필사해서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하여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한편 문교(文敎)의 진흥을 위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원나라를 왕래하여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주자학의 국내보급을 위해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유학을 크게 부흥시켰다. 당시 고려 후기의 시대상황은 무신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골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었다. 이러한 때에 민족의식과 춘추대의에 의한 명분주의의 정신, 불교보다 한층 주지적인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이 한국 최초의 주자학자로 지칭되는 그의 이상이었고, 이러한 이상을 학교재건과 인재양성을 통하여 이룩하려 하였다. 순흥의 소수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

일연 (一然) 1206∼1289(희종 2 ∼ 충렬왕 15)
고려 후기 승려. 초자는 회연, 호는 무극•목암. 속성은 김씨, 이름은 견명. 장산 출신. 1214년 해양 무량사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19년 출가하여 설악산 진전사의 고승 대웅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다.
고려 후기 승려. 초자는 회연(晦然),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 속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견명(見明). 장산(章山;지금의 경상북도 慶山) 출신. 1214년(고종 1) 해양(지금의 光州)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19년 출가하여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의 고승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여러 선문(禪門)을 방문•수행하였고, 27년 승과에 급제한 뒤 현풍(玄風)의 보당암(寶幢庵) 주지로 있으면서 참선에 몰두하였다. 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46년 다시 선사(禪師)를 더하였고, 49년 정안(鄭晏)의 청을 받고 남해의 정림사(定林社)로 옮겨와 이 절을 주재하며 대장경을 주조하던 중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의 작업에 참여하였다. 56년 윤산(輪山)의 길상암(吉祥庵)에 머무르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를 지었고, 59년 대선사에 올랐다. 61년(원종 2)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江華島)로 가서 선월사(禪月社) 주지가 되어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그 뒤 경상북도 영일(迎日)에 있는 오어사(吾魚社), 달성(達城) 인홍사(仁弘社;뒤에 仁興寺) 등을 다니며 설법과 강론을 폈고, 77년(충렬왕 3)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81년 몽고군의 일본원정 때, 왕을 따라 경주(慶州)에 머무르며 왕에게 법설을 강론하였고, 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았다. 그해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귀향하였다가 이듬해 경상북도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하고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하였으며, 89년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인각사에 탑과 비석이 남아 있고,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한편 한국의 고대신화와 민간설화를 수집•정리하고 향가를 비롯하여 불교관계 기사를 수록한 《삼국유사(三國遺事, 5권)》를 지었는데,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한국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밖의 저서로는 《화록(話錄)》 《게송잡저(偈頌雜著)》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조정사원(祖庭事苑)》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등이 있다. 시호는 보각(普覺), 탑호는 정조(靜照).


정가신(鄭可臣) ( ?∼1298(충렬왕 24)
고려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초명은 흥(興). 자는 헌지(獻之). 향공진사(鄕貢進士) 송수(松壽)의 아들이다.
어려서 승려 천기(天琪)를 따라 서울(개경)에 왔으나 의지할 곳이 없다가 태부소경(太府少卿) 안홍우(安弘祐)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요직을 여러번 거친 뒤 1277년(충렬왕 3)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에 임명되었다.
1280년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이 퇴직하기를 청하자 승지로서 왕명을 받아 이를 물리쳤다.
1290년 세자가 원나라에 갈 때 그 스승으로 민지(閔漬)와 함께 수행하였다.
1291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하였으며, 첨의찬성사 세자이사(僉議贊成事世子貳師)에 임명되었다.
1294년에는 원나라의 성종(成宗)이 한림학사 살자만(撒刺蠻)으로 하여금 고려가 귀부한 연월(年月)을 물어오자 글로 답하였다.
1295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를 취하고, 강훤(姜萱) 등 27명을 급제시켰다.
1296년에 왕이 상화연(賞花宴)을 향각(香閣)에서 베풀자 축하하는 시를 올렸는데, 왕은 도첨의낭사(都僉議郎舍)와 금내6관(禁內六官) 및 학관(學官)에게 명하여 상화내연시(賞花內宴詩)를 써서 화답하게 하였다.
1297년에 첨의중찬 판전리사사(僉議中贊判典理司事)•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었다.
1298년에 왕에게 글을 올려 첨의중찬으로 퇴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5일 만에 한번씩 조회에 참석하도록 하였으며, 곧 벽상삼한삼중대광 수사공(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空)을 더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죽었다.
성품이 정직하고 엄정하여 일을 처리하는 데 법도(法度)가 있어 국인(國人)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서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이 있다.
거소에 편액(扁額)하기를 설재(雪齋)라 하고 매일 현사(賢士)•대부(大夫)로 고금(古今)을 의논하니, 벼슬이 대관(大官)에 올랐어도 행동은 서생(書生)과 같았다.
고려 호경대왕(虎景大王:고려 태조의 조상)으로부터 원종까지의 일을 기록한 역사서인 《금경록 金鏡錄》을 찬집하였고, 그밖에 많은 사령(辭令)을 지었다. 충선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홍다구 洪茶丘 1244∼1291(고종 31∼충렬왕 17)
고려 말기 부원(附元) 분자. 본명은 준기(俊奇), 몽고명은 찰구이(察球爾). 본관은 남양(南陽). 몽고의 고려 침략을 도왔던 홍복원(洪福源)의 아들로 몽고에서 태어났으며 1261년(원종 2)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아 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管領歸附高麗軍民摠管)에 임명되었다. 69년 원종이 임연(林衍)을 제거하기 위해 원(元)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을 때 고려에 들어와 부원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삼별초 진압을 지휘하고 일본정벌에도 참여하였다. 77년(충렬왕 3) 위득유(韋得儒) 등에 의한 김방경(金方慶) 무고사건 때 김방경을 고문하여 사건을 확대시켰으나 원나라 황제의 소환을 받고 돌아갔다. 81년 정동행성우승으로 제2차 일본 정벌에 참여하였으나 태풍으로 실패하여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