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혁신의 창에 게재된 내암 선조님 개혁, 혁신 사상

by 정순영 posted Jul 11, 200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혁신의 창 56호(행정자치부 정부혁신본부 발행;06,6.27)

❍역사속의 혁신
소제목: 인식과 지식의 책임을 실천한 소론의 혁신사상(1)
- 글; 정부혁신본부 제도혁신팀 박재목 사무관


*다양성과 포용성의 자주적 휴머니스트
여러 번의 사화(士禍)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성장을 계속해온 사림(士林)은 선조 즉위를 전후하여 분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것을 간파한 여러 의식 있는 학자와 관료들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과 사사로운 붕당(朋黨)을 혁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우려한대로 선조 8년에 김효원, 심의겸 사건을 계기로 정계는 동서로 분리되고 만다. 이후 율곡은 시비조제와 인사참용에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한다. 이후 기축옥사를 계기로 사림간의 첨예한 대립이 있었고, 또 광해군의 즉위 문제를 쟁점으로 하여 이와 관련된 일단의 사건들로 인해서 정쟁은 본격화된다.
17세기 후반기 조선사회의 사상계는 주자성리학의 원칙에 충실한 노론이 사상계를 주도해가면서 존주대의론과 북벌론이 대세를 이루는 한편, 재야의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비판의식과 함께 원시유학 및 노장사상에 대한 재관심이 시도되고, 소론의 일부 학자는 양명학 등 새로운 학문조류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기였다.

학파로서의 노론과 소론 분립에 대해서는 노론을 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파악하고, 성혼의 학문적 인맥들을 포섭하면서 이를 앞세우는 학파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을 소론의 입장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성혼계통의 학풍은 탈주자성리학적인 경학풍을 보이며 절충주의적 경향이 강하였다. 소론 학자들 중에서 탈주자성리학의 입장을 가장 강하게 견지했던 학자는 박세당(朴世堂)이다.
박세당은 윤휴와 함께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릴 만큼 당시의 사상계에서는 급진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박세당의 이러한 사상 형성에는 노장사상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박세당의 사상적 입장이 소론 전반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론 학자들 내부에서는 노론과 비교해 볼 때, 주자성리학을 절대시하지 않는 분위기가 크게 형성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시비명변론(是非明辯論)의 입장이 강했던 노론세력이 철저히 자파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해가려 했던 것과는 달리, 소론은 남인세력을 수합하고 노론의 일부 세력도 포섭하려는 입장이 강하였다. 이러한 정치관에는 이들의 학문적·사상적 입장이 그 배경이 된다.
혁신의 창 56호(행정자치부 정부혁신본부 발행;06,6.27)

❍역사속의 혁신
소제목: 인식과 지식의 책임을 실천한 소론의 혁신사상(1)
- 글; 정부혁신본부 제도혁신팀 박재목 사무관


*다양성과 포용성의 자주적 휴머니스트
여러 번의 사화(士禍)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성장을 계속해온 사림(士林)은 선조 즉위를 전후하여 분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것을 간파한 여러 의식 있는 학자와 관료들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과 사사로운 붕당(朋黨)을 혁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우려한대로 선조 8년에 김효원, 심의겸 사건을 계기로 정계는 동서로 분리되고 만다. 이후 율곡은 시비조제와 인사참용에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한다. 이후 기축옥사를 계기로 사림간의 첨예한 대립이 있었고, 또 광해군의 즉위 문제를 쟁점으로 하여 이와 관련된 일단의 사건들로 인해서 정쟁은 본격화된다.
17세기 후반기 조선사회의 사상계는 주자성리학의 원칙에 충실한 노론이 사상계를 주도해가면서 존주대의론과 북벌론이 대세를 이루는 한편, 재야의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비판의식과 함께 원시유학 및 노장사상에 대한 재관심이 시도되고, 소론의 일부 학자는 양명학 등 새로운 학문조류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기였다.


소론의 영수 윤증의 영정


학파로서의 노론과 소론 분립에 대해서는 노론을 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파악하고, 성혼의 학문적 인맥들을 포섭하면서 이를 앞세우는 학파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을 소론의 입장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성혼계통의 학풍은 탈주자성리학적인 경학풍을 보이며 절충주의적 경향이 강하였다. 소론 학자들 중에서 탈주자성리학의 입장을 가장 강하게 견지했던 학자는 박세당(朴世堂)이다.
박세당은 윤휴와 함께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릴 만큼 당시의 사상계에서는 급진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박세당의 이러한 사상 형성에는 노장사상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박세당의 사상적 입장이 소론 전반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론 학자들 내부에서는 노론과 비교해 볼 때, 주자성리학을 절대시하지 않는 분위기가 크게 형성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시비명변론(是非明辯論)의 입장이 강했던 노론세력이 철저히 자파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해가려 했던 것과는 달리, 소론은 남인세력을 수합하고 노론의 일부 세력도 포섭하려는 입장이 강하였다. 이러한 정치관에는 이들의 학문적·사상적 입장이 그 배경이 된다.

소론은 철저히 실리 중시, 적극적 북방 개척을 주장하였다. 인조반정에는 관망적 입장을 보였으며, 명분없이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의 서인 노론 세력들을 비판했다. 노론은 조선 후기를 폐쇄적·계급적인 사회, 예법만을 중시하는 사회로 몰고 가 급기야는 나라를 망치는 주범노릇을 하고 만다.
일제가 76명의 한인에게 ‘합방공로작위\'를 주었는데 그중 4분의 3이 집권 노론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반증하고 있는가. 이들은 나라를 잃었어도 기득권을 잃지 않았기에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반면 독립운동에 나선 양반들은 야당이었던 소론과 재야 남인들이었다. 민초가 민족을 구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모든 소론이 사회적 정의를 일관했다는 말은 아니다. 일부 소론은 지방토호와 연계하여 일제하에서도 오히려 재산을 증식한 사례도 많았다. 그러나 초기 그들의 정신만은 사회 일선 중심의 가치혁신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그 시대 지배층의 역사적 정통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660년 김유신의 동생 흠춘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에게 수세에 몰리자 아들 반굴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장수 품일도 자신의 아들 관창에게 같은 행위를 요구했다. 그러나 김유신의 아들 원술은 나당전쟁 때 석문전투에서 패전한 뒤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김유신은 누구도 불가능하게 여겼던 평양 식량수송 작전을 자청했던 서기 671년 겨울 이미 67살이었다. 그리고 김춘추는 목숨을 담보하고 고구려·왜국·당나라를 돌아다니며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반면 백제는 의자왕의 사치와 호족들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소일했고,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아들들과 동생 사이의 권력투쟁 끝에 망국의 운명을 자초했다.
노론 중심의 이러한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정신 실종은 해방 후 친일파의 재등장을 가능케 했고, 병역과 조세기피, 물질만능주의, 원정출산 등의 기행(?)을 가능케 한 사회문화를 주도해 오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어떤 사람일까? 수많은 리더십 중에서 포용과 소통이 중요성을 더해 가는 한국 사회는 대중의 박수를 받는 리더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의 가시밭길을 걷는 슬프고 고독한 리더십을 더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혁신해야 되는가? 우리는 사랑과 삶의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서 혁신을 해야 한다. 사회의 가치를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 공동체의 삶에 좋은 영향(가치)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혁신해야 하는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생을 다음과 같이 비유했다. \"줄을 타는 곡예사는 외롭다. 아슬아슬한 위험에 처해 있지만 수많은 관객 중에서 아무도 대신 타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혁신의 선구자로서 사회의 가치를 이끄는 진정한 리더는 외롭다 못해 위험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대신 타주기는커녕 줄에서 끌어내리려고 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학문의 이념, 사회 가치, 인간의 정의와 따뜻함, 그리고 실사구시의 국가 발전을 위해 고행의 가시밭길을 마다하지하지 않고 묵묵히 역경의 길을 걸어간 정치와 학문적 집단이 있었다. 바로 조선 후기의 소론 집단이다.
그들은 변화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스스로 고민했으며, 지식의 아이디어를 자극하여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갖추면서, 사회와 정치의 혁신 활동을 격려하고 이끌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소론의 길은 항상 외롭고 슬픈 형극의 길이였고, 그 길은 외로웠지만 한결같이 그들은 그 방향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노론 벽파의 조선 멸망을 울분으로 바라보면서 시대의 아픔을 등에 질 수 밖에 없었으며 그들의 정신은 동학농민혁명과 항일의병, 독립운동, 민주화 정신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실사구시\'는 형식과 제도의 틀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켜 그 변혁적 의지창출이 사회적 부가가치와 연계되는 것을 지칭한다. 이것이 바로 실학의 진정한 이념이며 바람직한 방향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15세기 계유정난을 계기로 분열을 거듭하게 된다. 즉 훈구파(勳舊派), 절의파(節義派), 청담파(淸談派), 사림파(士林派)의 4대 학파가 그것이다. 이들 학파의 대립은 훈구-사림, 신진-기성, 경학-사장의 학풍에서 촉발되었다.
이들은 세조~성종 대의 대립기를 거쳐 연산군~명종 대의 사화(충돌)기를 지나 선조 이후의 당쟁기에 돌입한다. 바로 혁신파들의 분열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붕당정치의 당쟁은 이론적, 가치적 추구에 따른 자기 입지의 확대였지만, 숙종 같은 임금은 ‘환국\'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왕권 강화의 명분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당연히 일제는 이러한 당쟁을 가치왜곡으로 일관하여 단순히 개인적 영달과 자리다툼, 복제 및 비빈 간택 등 당쟁 소재를 쓸모없는 소모성 투쟁으로 비하했고 우리의 역사 주류파도 이러한 매몰적 함정에 동조하는 오류를 저지르기도 했다.
성리학 문화의 변화에 따른 문제는 16세기 사림 등장에 따른 내적 변화를 거치면서 사림 정치의 문약(文弱)으로 인한 비현실적인 명분론에 치중하게 된다. 당연히 사회 기반 강화와 부국강병은 등한시되었다.
이에 따라 나타나는 사림 문화의 한계로는 성리학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화이론(華夷論)적인 입장을 고집하고 소중화(小中華)의 오만에 빠져 사회폐단을 시정하려는 노력이 미약하게 된 것을 꼽을 수 있다. 당연히 생활혁신을 등한시하면서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새로운 움직임을 거부하고 말았다.
따라서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혁신세력들은 이러한 사회적 모순의 심화를 사회개혁론으로 극복하면서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위하여 정신문화와 물질문화의 균형 발전과 분열된 사회 통합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와 문화를 혁신하려는 움직임은 16세기 말 북인(北人), 남인(南人), 소론(小論)계열에서 나타났다. 이들은 대외관계의 융통성과 내정개혁에 치중하였으나, 결국 보수적 노론들의 반발과 탄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자 혁신세력 중에서 이러한 보수반동에 반발하여 사회개혁에 직접적 방법으로 앞장 선 인물도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정여립과 정인홍이었고 그 뒤를 이어 허균도 그 방법을 선택했다.
최근까지 조선중기 사상가 정여립(1546∼1589)은 주변의 세력을 모아 ‘대동계\'라는 조직을 규합한 후 모반을 꾀하다 적발되어 비참하게 자살함으로써 동인선비 1,000여명이 몰살된 ‘기축옥사\'의 원인을 제공한 불순인물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당시 동인세력 대부분이 몰살하고 전라도를 반역의 지역이라고 해서 호남인들의 등용을 제한하는 등의 역사적 파장을 불러온 ‘정여립 모반사건\'의 중심인 정여립은 지금 재조명 작업이 진행되면서 무옥(조작설)과 모역(모반설) 양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직접적인 증거 부족, 대동계, 1587년 왜구 격퇴 등의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만 봐도 정여립의 대동계가 은밀히 활동하던 역모조직이 아니라는 것이 무옥설의 핵심이다.
율곡 이이는 「율곡집」에서 “정여립은 학문하는 선비들 중에 단연 으뜸이다”고 평했고, 단재 신채호 선생 또한 “정여립은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을 타파하려한 동양의 위인이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또한 정인홍(1535~1623)은 이언적ㆍ이황을 비판하면서 성균관 유생들로부터 유적에서 삭제되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므로 이름조차 입에 올리는 것이 금지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차례 벼슬을 내렸어도 스승 조식처럼 사양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으며, 남명의 수제자로 보수 세력의 고착된 성리학을 비판하며 실학적 사회참여의 이념으로 대개혁을 추구했던 지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