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과 퇴계-2

by 남명학 posted Jul 1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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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지 않는 사상의 꽃 ‘퇴계와 남명’
조선조 관통한 학문적 라이벌 탄신 5백주년… 仁義 - 敬義 지향점 달라도 ‘영원한 師表’


영남출신, 동갑 뗄 수 없는 인연

그리고 학문 본연에 있어서도 퇴계가 주자학의 이론적 심화에 일생을 바친 반면, 남명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후에는 저술이 불필요하다”는 신념으로 이론적 탐구보다는 유학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열중했고, 윤리와 강상(綱常·삼강과 오상,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그리고 명분을 목숨처럼 중시했다.


여기서 남명의 명분주의를 말해 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남명에게는 애첩(愛妾)이 하나 있었는데 평소에는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그러나 남명의 임종시 그 애첩이 마지막 작별인사를 간청했으나 남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남자는 여자의 손에서 죽지 않고, 여자는 남자의 손에서 죽지 않는다”는 유교 경전 ‘예기’(禮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여기에 비해 퇴계는 아무리 어리석은 질문일지라도 중도에 남의 말을 끊는 법이 없었고, 비록 신분이 하찮은 가문의 자제일지라도 배움을 청하면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은 지극히 순후하면서도 논리가 정연했고, 행검(行檢)에 독실하여 스승으로서의 위엄이 충만했다. 이러한 포용력을 바탕으로 도산 문하에는 유수한 인재들이 운집하게 됐다. 제자들은 그를 두고 “선생의 학문은 평이명백(平易明白)하고, 선생의 도(道)는 광명정대(光明正大)”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퇴계와 남명은 16세기 조선의 사상계를 대표하는 석학이며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이었다. 퇴계가 도산에 삼간 초당을 짓자 도산서당에는 배움을 청하는 선비들의 발길이 그칠 새가 없었다. 이 점에서 도산서당은 퇴계학의 본산이며 퇴계학파 형성의 근원이 됐다.


남명은 1560년에 수십년 간 독서하고 가르치던 김해의 산해정(山海亭)을 떠나 지리산 아래 덕산의 산천재(山天齋)에 거처를 정했다. 이를 계기로 진주 일대의 학문적 분위기는 매우 고조됐다. 산해정에서 산천재로 이어지는 남명의 행보는 남명학파 중심지의 이동인 동시에 학파의 거대한 확장 과정이었다.


성주(星州)를 기준으로 하는 상도(上道)의 준재들은 퇴계 문하로 흡수되어 갔고, 하도(下道)의 영재들은 남명 문하로 규합되어 갔다. 물론 정구(鄭逑) 정탁(鄭琢) 김우옹(金宇 ) 등과 같이 두 문하를 동시에 출입한 문인들도 있었지만,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형성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