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과 퇴계-3

by 남명학 posted Jul 1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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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지 않는 사상의 꽃 ‘퇴계와 남명’
조선조 관통한 학문적 라이벌 탄신 5백주년… 仁義 - 敬義 지향점 달라도 ‘영원한 師表’


생전에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어

퇴계와 남명도 학자요 지성인이기 전에 하나의 인간이었다. 이들에게도 상대를 의식하는 경쟁심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두 사람은 동도동경의 인연과 양대 학파의 종사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생전에 단 한 번도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1569년 서울 장의동(壯義洞)에서 열린 박태수(朴台壽)의 회갑연에 두 사람 모두 공식 초청돼 수연첩(壽宴帖)에 이름이 올라 있으므로 이때 혹시 상면했는지 알 수 없다.


두 사람의 경쟁심은 각기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종사로서 이미지가 강화되던 16세기 중반 이후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양인은 평소 서로를 북두성에 비기며 예우와 존경의 마음을 다하였고, 편지를 통해 ‘천리신교’(千里神交)의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학문태도와 삶의 방식이 달랐다. 이것이 두 사람의 자존심 또는 라이벌 의식과 접합되면서 서로에 대한 비난과 풍자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남명의 일생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특립독행’(特立獨行·혼자 자립하여 고고히 실천함)일 것이다. 퇴계는 바로 타협을 단호히 거부하고 세상을 외면하는 남명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했고, 학문적으로도 찬성하지 않는 점이 많았다. 이에 그는 남명을 두고,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老莊)에 물든 병통이 있다”는 말로써 그의 삶의 자세와 학문을 은근히 비판했다. 이 말을 들은 남명 역시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며 허명(虛名)을 훔친다”는 말로써 퇴계를 비꼬았다.


이런 와중에 두 사람의 불화를 부추긴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이정(李楨)이라는 사람이었다. 사천 사람인 이정은 남명의 지우였으나 이른바 ‘음부사건’(淫婦事件)을 통해 남명과 결별하고 퇴계 문하로 들어간 사람이다. 음부사건이란 진주의 진사 하종악(河宗岳)의 후처가 음행을 저지른 사건으로서 윤리와 강상을 중시했던 남명에게는 결코 묵인될 수 없는 ‘강상(綱常)의 변(變)’이었다. 남명은 이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정에게 여러 차례 자문했다. 그러나 이정의 태도가 불분명할 뿐더러 여러 번 입장을 번복하자 남명은 특유의 강단이 발동하여 절교를 선언했다. 당황한 이정은 퇴계 문하에 나아가 문인을 자처하고, 퇴계 역시 이정을 두둔해 퇴계와 남명 사이의 불화는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퇴계가 이언적(李彦迪)의 행장을 지으면서 그를 매우 추앙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앙금을 만들게 됐다. 남명은 평소 벼슬에 연연하는 이언적의 처신을 보고 그를 진정한 선비로 대하지 않았는데, 이와는 정반대로 퇴계는 그의 행장에서 선생으로 칭하면서 극도로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퇴계와 남명 사이에는 때로는 가시적이고 때로는 내재적인 불만이 잔존하고 있었지만, 심각한 상황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서로에 대한 불만을 가지면서도 자잘한 비난을 삼가며 거유(巨儒)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상당수의 인사들이 퇴계-남명 문하에 동시에 출입하게 된 것도 두 사람이 가지는 학문적 포용성과 유연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1570년 퇴계의 부음을 접한 남명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면서 “이 사람이 세상을 버렸다 하니, 나 또한 세상에 살아 있을 날이 오래지 않았구나!” 하는 말로써 자신의 말년을 예언하기까지 했다. 이런 예언은 어긋나지 않아 남명은 1년이 지난 1571년 만년의 강학처인 산천재에서 고종명함으로써 16세기의 사상계를 풍미했던 두 석학이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게 됐다.


퇴계와 남명은 같은 해에 태어나 한 해 차이를 두고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졌지만 이들의 죽음이 학파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의 사후에 문인-제자들을 중심으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형성돼 스승의 학문을 계승-발전시키면서 이 시기의 사상계를 주도하게 됐다. 인조반정으로 남명학파가 분열되면서 영남학파는 퇴계학파를 중심으로 재편됐지만, 원래 역사적 용어로서의 영남학파는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통칭하는 말이었고, 그 종사는 바로 퇴계와 남명이었다.


퇴계와 남명의 문인들은 한동안 정치적인 행보를 같이하여 1585년 동서분당시에는 같은 동인으로 활동했다. 유성룡 김성일 우성전은 퇴계 문하를 대표하는 관료들이었고, 정인홍 김우옹 정탁 오건 등은 남명 문하를 대표하는 관료들이었다.


그러나 선조 때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인사들 중에는 퇴계 문인들이 가장 많았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은 남명 문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퇴계 문하의 학술적 분위기가 고급 관료의 양산으로 나타나고, 남명 문하의 실천적 성향이 의병활동의 적극성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동서분당 이래 동인으로 활동하던 두 문인들은 1591년 기축옥사를 계기로 남북으로 갈라서게 됐다. 정쟁의 와중에서 남인-북인으로 갈라진 문인들은 각기 유성룡과 정인홍을 중심으로 치열한 대립을 벌이면서, 스승들의 문집(文集) 간행과 서원 건립을 통해 퇴계와 남명의 현양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