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의 위기와 정인홍

by 杓先 posted Jul 1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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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의 소실과 보존

세 가지 재앙이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는 해인사는,
그러나 내부에서 대규모의 화마(火魔) 재앙을 맞곤 했다.

조선시대에 7번이나 대화재가 나서 그때마다 해인사 건물들 대부분이 소실되어 힘들여 중창해야 했다. 하지만 이 대장경판전만은 조선 초기 태조대에 지어진 뒤, 조선 성종 19년(1488) 인수대비와 인혜대비가 정희왕후 윤씨의 뜻을 받들어 30간을 증개축한 일이 있을 뿐, 대화재 속에서도 조금도 다치지 아니하고 기둥 한 군데 기울어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판가(板架)의 진영장치뿐 아니라 주변 환경과 공기의 흐름을 정확히 이용하는 통풍방식, 방습을 위한 배부 구성, 인경작업할 때의 편의성 등이 완벽히 조정되어 있어서 가히 전통과학의 보고라 할 만하다.

팔만대장경이 위기를 맞은 것은 대화재 때만이 아니었다.
선조 연간 임진년(1592)에 왜군들이 대규모로 침입, 부산포에 상륙하여 이후 전국을 병화로 몰아 넣었을 때 팔만대장경은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빠졌다.
임진년 4월 13일에 침공한 왜군은 14일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15일에는 동래, 17일에는 양산 ․ 울산, 19일에는 밀양 들로 파죽지세 진군하여 21일 창원 ․ 창녕으로 휩쓸고 들어와 거창을 점령하고 지례를 지나 27일에는 해인사 코앞인 성주를 점령해 들어 왔다. 불과 보름 만에 경상도 전역의 주요 읍성이 왜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것이다.
왜군이 거창이나 성주에서 한발 옆인 합천 해인사로 들어와 팔만대장경을 약탈하는 것은 이제 죽먹기보다 쉬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조선 초기부터 우리 팔만대장경본은 물론 그 경판 까지도 줄곧 눈독들이고 요구해 오고 있었던 터였고, 조선의 우수한 문화재와 장인들을 우선적으로 약탈하거나 파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거의 절망적인 지경에서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것은 합천의 정인홍(鄭仁弘)장군이 이끄는 경상도 의병과 소암(昭岩)대사가 이끄는 해인사 승병에 의해 합천 해인사가 적극적으로 지켜겼던 것이었다.
정인홍 의병군이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낙동강 지류로 움직이는 왜군의 유통로를 초반에 막고, 주요 읍성을 점령한 왜군의 준동을 갸야산에 의지하여 막아냈다. 그리고 곧 거창에서는 의병장 김면이, 고령에서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을 경계로 일본군을 유격전으로 공격하였다. 내암 정인홍과 김면, 곽재우는 모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특히 내암 정인홍은 중앙 벼슬자리를 사퇴하고 고향에서 후진을 가르치고 있다가 임진왜란을 맞았다.
해인사 소암대사는 휴정(休靜) 서산(西山)대사의 제자로서 임진왜란을 맞자 승병을 모아 해인사를 수호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성주를 점령한 왜군들 일부가 해인사로 접근하자, 합천의 정인홍 의병군과 소암대사가 이끄는 해인사 승병들은 해인사 절로 들어오는 앞의 큰 산고개를 막아 감히 넘보지 못하게 했다(지금도 그 산고개를 왜구치 倭寇峙라 부른다.)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힘을 합쳐 5,000의 의병으로 낙동강 동쪽 현풍, 창녕, 영산 등지의 왜군 제9군 11,500명과 대결, 이들을 영산성으로 몰아붙이고는 다시 성주성으로 몰아냈고, 김면 의병군과 정인홍 의병군은 합동으로 손금보듯 잘 아는 고향 땅 지세를 방패삼아 성주성에 몰린 2만 왜군의 발목을 묶었다.
성주성을 둘러싼 8월과 9월, 12월의 대규모 정인홍의 의병 연합군 공격에 몰린 왜군은 이듬해 1월에 개령, 선산 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낙동강 서쪽 지역이 모두 수복됨에 따라 가야산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도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합천 가야산을 의지한 경상도 합천 의병과 이 일대 의병들이 펼친 전대미문의 유격전쟁과, 해인사를 목숨 걸고 지키려는 승려들과 합천 출신 대학자이자 의병대장이던 내암 정인홍의 헌신적 노력 덕분이었다.

치욕적인 일제시대를 지낸 뒤, 팔만대장경이 또 한 번 중대한 소실 위기를 맞게 된 것은 민족 상잔의 비극이 전개되었던 6.25 전쟁 때였다.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내려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다, 인천상륙작전을 기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3개월 만에 북쪽으로 퇴각하게 되었는데, 그때 낙오된 인민군 약 900명이 가야산에 숨어 가야산 줄기와 계곡의 요처인 해인사를 중심으로 주변 숲을 진지화해서 소탕작전을 펴는 국군과 맞섰다.
운명의 기로는 1951년 9월 18일에 일어났다. 토벌을 진행하던 육군이 공중지원을 요청하여 해인사 주변의 공비를 폭격해달라는 주문을 낸 것이다. 당시 김영환 대령을 편대장으로 한 4대의 전폭기는 각각500파운드 폭탄 2발씩과 5인치 로켓탄 6발씩을 장착하고 있었고 특히 편대장 김영환 대령의 1번기는 폭탄대신 750파운드짜리 네이팜탄을 적재하고 있어서, 투하했다 하면 해인사 전체가 불바다가 될 판이었다.
인민군의 소재지를 파악한 정찰기가 백색 연막탄을 투하해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을 폭격지점으로 가리키자, 즉각 미군사고문단에서 폭격 명령이 시달되었다.
그런데 1번기를 기수로 해서 4대의 전폭기가 해인사로 꽂혀가던 그 순간, 갑자기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급상승 선회하면서 편대기들에게 폭격 중지를 명령했다. 김 대령은 편대장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 것, 그리고 기관총만으로 해인사 밖 능선에 숨은 인민군 진지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인민군의 지상포화가 교차하는 속에 기총소사로 공격하던 비행편대에 다시 정찰기로부터 폭격 재촉 명령이 떨어졌다.
해인사를 네이팜탄과 폭탄으로 공격하라. 편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명령을 들은 기장들은 인민군들이 공격을 피해 해인사로 몰려가고 있으니 빨리 폭격을 하자고 편대장에게 재촉했다.
그러나 편대장 김영환 대령은 날카롭게 명령을 뒤집었다.
각 기는 일체 공격을 중지하고 내 뒤를 따르라.
그러고는 기수를 돌려 몇 바퀴 선회하다가, 몇 개 능선 뒤의 성주쪽 인민군을 폭격하고 기지로 돌아갔다.
그 날 바로 미군사고문단이 윌슨 장군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명령불복종을 항의하자, 이 대통령은 크게 분노하여 김 대령을 총살이 아닌 포살(砲殺)에 처해야 할 것이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때 배석하고 있던 당시 공군참모총장 김정렬은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이 명령불복종 행위를 겨우 무마할 수 있었다. 그는 미군사고문단의 해인사 폭격에 맞섰던 김영환 대령의 형이기도 했다.
그 날 저녁, 미군사고문단 책임자가 국군전대본부를 방문하여, 김영환 대령이 이끄는 편대원 전원과 작전참모 장지량 중장 등과 한자리에 모여 군인으로서 가장 큰 죄인 명령불복종의 경위를 추궁했다. 이에 대하여 죽기를 각오한 김영환 대령의 대답은 이러했다 한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교토가 일본 문화의 총본산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뿐만 아니라 영국이 인도를 영유하고 있을 때, 영국인들은 차라리 인도를 잃을지언정 세익스피어와는 바꾸지 않겠다고 하지 않아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에게도 인도하고도 바꿀 수 없는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판이 있습니다. 이를 어찌 유동적인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햐였다.
투철한 군인으로서 죽기를 각오하고 민족의 유산 팔만대장경을 지키려 했던 김영환 대령은 그 뒤 1955년 강릉 지구에서 순직했다. 민족적 자긍심과 참된 기개를 가진 김 대령이 거기 없었던들, 팔만대장경은 일순간에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팔만대장경은 완성된 뒤 현대에 이르기까지 750여 년이라는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전란고 화재를 맞았음에도, 그 대규모의 전질 모두가 마치 어제 만든 것처럼 깨끗하게 보안되어 있으니 실로 신비롭고 감동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