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와 정인홍-10 [조선왕조실록]-벼슬 사직 상소

by 杓先 posted Aug 27, 200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선조 151권 35년 6월 17일 (정미) 001 /
동지중추부사 정인홍이 차자로서 체차를 요청하다
(*.체차; 벼슬을 그만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동지중추부사 정인홍(鄭仁弘)이 상차하기를,

“신이 삼가 성상의 비답(批答)을 보니, 마음 깊이 감격하여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건대, 신은 불행하게도 병이 많아 여러 번 천청(天聽)을 더럽히고 매번 성상의 비답을 번거롭게 하였으되 한결같이 이렇게 하시니,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변변찮은 신이 어찌하여 군부(君父)로부터 이러한 은혜를 받게 되었는지 감격하여 눈물이 흐르는 한편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신이 무슨 마음으로 다시 입을 열어 물러가기를 청하겠습니까. 다만 염려되는 것은 병이 전일에 진달한 바와 같아 본직 제수의 명을 받은 이래 지금까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으되 아직 사은(謝恩)도 하지 못한 채 그 직임을 지니고 있으니, 작록(爵祿)이 애당초 병을 조리하는 밑천이 아닌데 직명(職名)이 어찌 헛되이 쓰는 물건이겠습니까. 병으로 칩거하고 있는 중에 더욱 편안하지 못하니, 신이 체직을 청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성상의 비답에 ‘다만 지금은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는 때인데, 이에 대해서는 경도 애통하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같은 때에는 실로 제갈양(諸葛亮)이나 방통(龐統) 같은 재능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갖은 계책을 다 마련하도록 하여도 위급한 형세를 갑자기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기필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신은 어리석어 세상일에 서툰데다 쇠약하고 병까지 들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버리기를 아까와하시니, 이것이 신이 두렵고 위축되어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다만 신의 병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비록 체직하라는 명을 받든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길을 떠날 수 없을 듯합니다. 만약 해직되어 마음이 조금 놓이게 될 경우 청량(淸涼)한 방 하나를 빌어 편한 대로 조섭(調攝)한다면 죽음은 면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불쌍히 여기소서.
성상의 비답에 ‘군자들은 믿을 곳이 있게 되고 소인들은 함부로 방자한 행동을 못하게 된다.’고 하신 것에 대하여 신은 더욱 위축됨을 금할 수 없으며 의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신은 들으니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한 이가 없다.’고 하였으니, 누가 군자이며 누가 소인인지는 성상의 밝은 감식(鑑識) 아래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믿을 곳이 있다.’고 하신 데 대해 말하자면, 신은 본성이 거칠고 치우쳐서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외람되게 대부(臺府)에 있으면서 전후하여 논핵(論劾)한 것이 시류(時流)에 크게 어긋나서 세상에 죄를 얻었습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좌우에게 물어보시거나 온 나라 사람들에게 물어보신다면 누군들 신을 불가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면 전하께서 비록 신을 버리지 않으려고 하시더라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다시 군자들의 의지하는 바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속이고 배반하는 무리들은 사정(私情)을 따르고 공의(公義)를 저버려서 번개처럼 밝고 우뢰와 같은 위엄을 갖추신 천안(天顔)이 지척에 계신데도 오히려 심중의 계책을 거리낌없이 마구 행하니, 용렬하고 외로운 신이 있다고 해서 감히 방자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급암(汲黯)이나 사추(史鰌)처럼 강직한 사람4923) 이 있다고 하더라도 세도(世道)의 만회에는 털끝만한 도움도 없을 터인데, 더구나 미력하고 쇠약한 몸으로 병들어 물러나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신이 군자들에게는 의지가 되고, 소인들을 방자하게 굴지 못하도록 하는 힘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도성 안에서만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멀리 떨어진 천리 밖 지방에서야 성상께서 하신 비답의 내용과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점이 바로 신이 더욱 위축되어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의 병세를 하나하나 진달할 수가 없어 우선 성상의 비답에 따라 대략 진달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민망하고 절박한 실정을 살피시어 속히 체직을 명하소서. 그리하여 쇠잔하고 병든 몸을 쉬도록 하여 죽게 된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소서.
신이 일찍이 송(宋)나라의 위요옹(魏了翁)이나 강만리(江萬里) 등 여러 사람들의 예를 보니, 파직을 청하여 물러가거나 혹은 사직을 청하여 물러갈 때 머물기를 권유받고도 읍배(泣拜)하고 떠나간 이도 있고, 고사(古事)를 인용하여 소를 올리고 물러간 이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원(元)나라 군사가 자주 침입하여 편안한 해라고는 도무지 없었는데, 이들은 모두 재기(器才)를 지닌 이로서 자신들의 거취가 국가의 안위(安危)와 관계가 있는데도 극력 자청하여 떠나가 다시는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는 진퇴(進退)의 의리에 실로 부득이한 점이 있었던 것으로, 반드시 국가가 태평해진 뒤에 물러가자면 끝내 물러갈 날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국가 형세는 나아가 싸울 수도 없고 물러나 지킬 수도 없으며 강화(講和)도 불가합니다. 이는 옛일을 거울삼아 지금의 일을 징험(徵驗)할 수 있겠으나, 어리석은 백성들의 반란이 연이어 일어나니, 전하께서 위급존망의 시기라고 걱정하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쪽이나 북쪽에는 아직 국경을 압박하는 도적이 없고 역적을 모의하던 무리들도 곧바로 소멸되었습니다. 늙고 병들어 무용지물인 신은 애당초 시세(時勢)의 경중과는 관계가 없으니 신의 오늘날의 의리로 보아도 결코 물러나지 않아서는 안 되며, 헛되이 본직을 지니고 있어 명분이 의리를 범하는 데 관계되니 이 역시 체직하지 않을 수 없는 듯합니다.
대체로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벼슬살이할 만한데도 벼슬하지 않고 끝내 군신의 의리를 저버리는 것은 실로 의리가 없는 짓이며, 당연히 물러가야 하는데도 물러가지 않고서 임금의 총애를 탐하는 것은 더욱 의리가 없는 짓입니다. 전하께서 늙어 폐인이 된 몸을 버리지 않으시고 잘못 거두어 쓰시는 것이 어찌 신으로 하여금 끝내는 의리 없는 지경에 빠트리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전후하여 체직을 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되 오래도록 체직의 명을 받들지 못하게 되니 낭패하고 답답하여 스스로 말씀이 외람(畏濫)하게 되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재량하여 살펴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차자를 살펴보니 오래도록 만나지 못하던 경과 대면하여 이야기하는 듯하다. 물러가려고 하는 경의 뜻이 전혀 변함이 없으니 이는 모두 내가 경을 저버린 데서 연유한 것으로 경에게 부끄럽기 그지없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감히 억지로 경의 뜻을 속박하듯이 거슬려 도리어 일의 체모를 상하게 하지는 아니하였다. 다만 당초 산림에서 징소(徵召)한 것은 본디 경을 등용하여 조정의 기강을 진작시키고 인심을 크게 변혁시키려 기대했던 때문이었고 경 또한 선뜻 일어났는데, 조정에 나온 지 겨우 1개월 만에 마침 형편이 여의치 못하여 품고 있는 뜻을 펴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불행한 일이 아닌가. 지금 만약 호연(浩然)하게 돌아간다면 경의 진퇴에 있어서는 진실로 여유가 작작하겠으나 나의 실망은 어찌할 것인가? 그러니 우선 기다리도록 하라. 내가 반드시 조처할 것이다.”
하였다.
【원전】 24 집 389 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註 4923]급암(汲黯)이나 사추(史鰌)처럼 강직한 사람 : 급암과 사추는 모두 중국 역사상 간신(諫臣)으로 이름난 이들이다. 급암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간신으로 “천자가 보필하는 신하를 두는 것은 어찌 아첨하여 뜻을 순순히 따라 임금을 불의한 곳에 빠뜨리라고 한 것이겠는가.” 하며 언제나 직언을 하였다. 《한서(漢書)》 권50 급암 열전(汲黯列傳). 사추는 춘추 시대의 대부로 위영공(衛靈公)이 현인 거백옥(籧伯玉)을 쓰지 않고 미자하(彌子瑕)를 등용하자 여러 번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사추는 임종시에 아들에게 “나는 살아서 임금을 바로 잡지 못하였으니 죽어서도 예(禮)를 다 차릴 수가 없다. 시체를 창문 아래 놓아 두어라.” 하였다. 영공이 조문을 왔다가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듣고 깜짝 놀라 반성하고 미자하를 물리치고 거백옥을 등용하였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 ☞


Articles

1 2 3 4 5 6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