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와 정인홍-14 [조선왕조실록]-정인홍의 인품

by 杓先 posted Aug 2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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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54권 35년 9월 25일 (갑신) 003 /
의령 진사 오여온이 상소로 정인홍의 인품을 찬양하고 이시익을 논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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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의령(宜寧)의 진사 오여온(吳汝穩)이 상소하였다.
“남의 허물을 찾는 데 뛰어난 사람은 단혈(丹穴)에 있는 봉(鳳)의 털을 불어 흠집을 찾고, 하자를 구하는 데 교묘한 사람은 곤륜산(崐崙山)에서 나는 옥의 광채를 가리고서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는 허물이 있다. 그는 하자가 있다.’라고 합니다. 그러한 말을 듣고 그대로 믿는 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록 믿지 않는 자라 하더라도 없는 사실을 날조한 실정을 분별하지 못하게 되면 봉과 옥의 진실을 안다고 할 수 없으니,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 《춘추(春秋)》에 쓰인 곽공(郭公)의 경우처럼 우유부단하지 않으면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정인홍(鄭仁弘)을 보니 사람 가운데 봉이며 옥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귀(李貴)란 자는 없는 허물을 찾고 없는 하자를 구하여 소장(疏章)에 드러내 놓고 위로 성상의 총명을 속이니 이러한 일을 차마 한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아, 인홍은 조용히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은 채 출입을 삼가고 스스로를 지키고 있었으니 평생의 심사(心事)는 일월 성신처럼 밝았습니다. 혹시라도 이귀가 상소한 내용중의 사실들이 있었다면 비단 온 도내 사람이 알 뿐만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 역시 알 것인데, 어찌 일개 간괴(奸怪)인 이귀만이 홀로 알겠습니까. 저번에 인홍을 특별히 탁용하시어 헌장(憲章)의 자리에 두셨으니 전하께서는 참으로 인홍의 진면목을 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귀의 상소에 대해서는 오히려 무함(誣陷)에 대한 형전(刑典)을 거행하지 않으셨으니, 이것이 비록 천지가 만물을 포용하는 도량이라고는 하지만 질투하고 모함하는 무리들이 장차 이로부터 더욱 방자해질까 두렵습니다. 신은 인홍의 행위를 대강 말하여 전하께서 아시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하고 그런 뒤에 이귀의 간사한 실상에 대하여 언급하겠습니다.
인홍은 학문이 깊고 실천이 독실하여 신과 같은 말학(末學)으로서는 측량할 수도 없는 바입니다만, 본성이 충의롭고 지조가 굳세어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제자로 삼아 세상과 인연을 끊으려는 생각을 가진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임진년 변란에 관방(關防)4999) 이 한번 무너지자 병한(屛翰)5000) 이 의지할 곳을 잃었는데, 제일 먼저 향병(鄕兵)을 주창하여 의병을 불러 모으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전하여 적을 토벌할 것을 하늘에 맹세함으로써 강우(江右)5001) 수백 리의 땅이 여기에 힘입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의기가 우뚝하여 파도치는 물결 속의 지주(砥柱)와 같았으므로 영남의 인기(人紀)가 실추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오랑캐의 고장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인홍은 은연중에 맹수를 구축하고 이적(夷狄)을 물리친 공이 있습니다. 이귀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죄를 얽어 이렇게까지 드러내 놓고 배척한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버려 두고 불문에 부쳐 마치 함께 거두어 용납하듯 하시니 시시비비를 과연 이렇게 가리는 것이며, 어진이를 어진이답게 대우하고 악한 이를 미워하는 것이 과연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신은 지난해 10월, 이귀가 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의 소모관(召募官)으로 거창(居昌)을 지나면서 합천(陜川)에 공문을 보내 인홍의 죄목을 열거한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도내 선비들을 정거(停擧)시키고 수령을 출척하며 옥송(獄訟)에서 도류(徒流)•장살(杖殺)하는 처결이 모두 인홍의 손에서 나오고, 또 군사를 데리고 있던 7년 동안 제멋대로 사리(私利)를 경영하였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본군 군수 이빈(李馪)으로 하여금 추문하여 이첩(移牒) 보고하게 했으니, 흔단을 일으켜 산림을 일망타진하려는 그의 계책에 혈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통분해 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역시 망령된 사람이니 따질 인물도 못 됩니다. 인홍이 명을 받들고 대궐에 나아가자 12일도 못 되어 이귀가 또 상소하여 감히 전일의 말 그대로 더욱 음흉한 짓을 부렸으니, 그가 논척(論斥)하는 일은 시골의 명예 좋아하는 사람도 감히 하지 않는 일입니다. 인홍처럼 훌륭한 자가 그 중에 한두 가지라도 그런 사실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변란 초기에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토벌한 것은 실로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계사년 가을, 적이 해변으로 물러가 여러 진을 중첩해서 설치하자, 수하의 수륙군은 각기 돌려보내 방수하게 하고 잡색 군정(雜色軍丁)도 각각 배속시켰습니다. 당시의 방어사 김응서(金應瑞)가 남은 군기를 모두 여러 장수들에게 주자, 전야(田野)에 물러가 늙고 병든 몸을 지켰습니다. 정유년 가을, 흉적이 다시 침노하여 강우(江右) 일대가 와해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 체찰사 이원익이 또 인홍을 향병장(鄕兵將)으로 정하니, 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의리상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힘껏 종사하여 원근에 우거하고 있던 병졸들을 모집하여 살륙과 약탈을 자행하던 적들을 소탕했습니다.
얼마 후 모(茅)•노(盧) 두 중국 장수가 성주(星州)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당장 먹을 군량이 없어 철수하려고까지 하자 동지들과 함께 의연곡(義捐穀)을 모아 군량을 이어 주었으므로 중국 장수가 이자(移咨)하여 표리(表裏)를 하사받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지금의 만호(萬戶) 조계명(曺繼明)을 별장(別將)으로 삼아 모든 군사들을 거기에 소속시키고 모 유격(茅遊擊)의 향도(嚮導)로 삼았는데 이것이 오래도록 병권을 장악하여 우마처럼 사사로 부렸다는 것입니까. 더구나 소위 관노(官奴)에 대해서는 처음에 용맹하여 응모했다가 나중에 적군의 목을 베면 면역(免役)을 시켜 적군이 오면 군대에 편입시키고 적이 물러가면 마음대로 가게 했는데, 이것이 자기 집에 그대로 두고 사사로 부렸다는 것입니까.
아, 나라를 위한 충성과 적을 토벌한 인홍의 의리는 정성스럽고 정정당당하여 국내외에 소문이 나서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귀는 군사를 끼고 사리(私利)를 경영했다는 말을 가하니, 이는 누구를 속인 것입니까. 바로 하늘을 속인 것입니다. 그 나머지 날조한 거짓말은 분별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말이 여기에 미치니 갑자기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대체로 출척의 권한은 방백에게 달려있고 옥송의 결단은 추관에게 달려 있으니, 산림의 일개 필부가 어찌 그 사이에서 조종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귀는 또 위복(威福)을 제멋대로 부리고 사신을 위협했다고 했는데, 협박을 당한 사신이 누구이며, 수령으로서 출척을 당한 자가 또 누구입니까. 하혼(河渾)의 반노(叛奴)에 대한 송사는 처음 한준겸(韓浚謙)이 결단하고 마지막에 김신원(金信元)이 사실을 조사했는데 여러 번 치계하여 반역자의 괴수를 장살(杖殺)했으니, 이것이 어찌하여 인홍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며, 하혼이 인홍의 문하에 출입했다고 해서 인홍의 허물이 되는 것입니까. 하물며 이귀가 말한 장살당한 자라고 하는 손천일(孫千一)은 지금 우수영(右水營)의 무과 합격자의 방문에 들어 있는데 산 사람을 죽었다고 지목하니 그 또한 흉악합니다.
도류(徒流)시켰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말이 안됩니다. 성주(星州)의 교생(校生) 이인국(李仁局)이 향교 노비의 송사로 인하여 선성(先聖)에게까지 모욕이 미치고 말이 지극히 무례하자, 지방 사람들이 공격하고 방백이 죄를 준 것입니다. 이또한 인홍은 관여하여 알지 못한 사실인데도 이귀는 화심(禍心)을 품고 다른 사실을 주워 모아 모두 인홍에게로 허물을 돌렸으니, 참으로 흉악한 사람은 못하는 짓이 없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역참(驛站)에 나와 지대(支待)했다.’는 말 역시 매우 근거가 없습니다. 이귀는 바로 성혼(成渾)의 당으로 혼을 배척하는 상소로 인하여 영남 유생들을 매우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인홍이 선비들의 영수(嶺袖)이니 먼저 인홍을 꺾으면 사론(士論)은 저절로 저지될 것이라고 생각해 틈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인홍이 금산(金山)•안음(安陰) 등지의 선영(先塋)에 성묘를 하게 되었는데, 거창 현감(居昌縣監) 윤흥지(尹興智)는 전부터 인홍과 잘 아는 사이이므로 인홍이 경내를 지난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만나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때 마침 이귀의 행차가 거창에 도착했는데 미처 영접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귀는 이것을 흔단을 일으킬 기회로 삼아 이러한 말을 지어 내어 묵은 감정을 풀려고 하였습니다. 아, 흥지가 아는 사람을 나가서 본 것은 실로 인정상 그럴 수 있는 일이며, 합천(陜川)에서 성주를 지나고 금산을 경유하여 안음에 이르기까지 연로가 수백 리나 되는데 그 사이의 4∼5개 고을에서 모두 역전(驛傳)을 했습니까? 도로의 이목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시익(李時益)은 일개 불량한 자로 행실이 패려하고 심술이 괴상하여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유감을 쌓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귀가 거창을 지나면서 자기의 족질(族姪)5002) 과 같은 곳에서 유숙할 때 이시익은 음험하게 근거 없는 말을 지어 내어 분을 풀 자료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귀가 인홍을 얽어서 배척한 것들은 모두 시익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창 온 고을의 선비들이 향벌(鄕罰)을 가하려고까지 했는데, 이 또한 그 고을 사람들이 장자(長者)를 위하여 스스로 분발한 행위이지 어찌 인홍과 관계가 있을 것이며, ‘문도(門徒)들을 시켜 통문하여 상대하지 못하도록 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매우 거짓된 말입니다. 또 이귀가 지나며 유숙한 여사(廬舍)는 도처에 그대로 남아 있어 완연히 옛날과 같은데 이귀는 ‘모두 불태워버리게 했다.’라고 했으니, 이른바 불태우게 했다는 자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명천지 밝은 하늘 아래서 감히 이러한 거짓말을 하다니 그 흉악하고 참혹함이 그야말로 심합니다.
또 포로되었던 여인을 위협하여 중국의 도망병에게 시집보냈다는 말은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신은 들으니 인홍의 선조인 정신보(鄭臣保)는 절강성(浙江省) 포강(浦江) 사람으로 송(宋)나라에 벼슬하여 형부 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가 송 나라가 망한 후 원(元)을 섬기지 않자 원은 우리 나라 해서 지방으로 유배를 보냈고, 그 아들 정인경(鄭仁卿)이 고려를 섬겨 드디어 서산(瑞山) 사람이 되었다고 하니, 그 근본을 찾으면 실로 절강의 이름난 성씨입니다. 그러므로 지난번 중국 군사로 온 진강(陳剛)•모국기(茅國器)는 인홍을 향장(鄕長)5003) 으로 인정했고 정식(鄭軾)•정노(鄭輅)는 같은 성씨라고 자칭했으며, 인홍은 절강 사람을 모두 동향인의 의리로 대우하였습니다. 이번의 시문용(施文用)이란 자도 포강으로 부터 왔다가 뒤떨어져 돌아가지 못하고 때때로 왕래하였는데 이 또한 향정(鄕井)5004) 의 의리로 바로 거절하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그가 아내를 맞이한 일은 여인의 모친이 생존해 있고 아비의 일가붙이도 있으니 위협하여 시집보냈다는 말 또한 시익이 제 스스로 지어낸 것입니다.
양희(梁喜)5005) 의 관(棺)이 연경(燕京)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 아들 양홍주(梁弘澍) 역시 하나의 괴물이라 태연하게 집상(執喪)도 하지 않고 상례(喪禮)를 묻는다는 핑계로 성혼의 문하에 물러가 있었습니다. 당시 그 상사를 감독하여 영남으로 호송한 것은 모두 인홍의 힘이었는데 6일이 되도록 가서 곡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것이 과연 인정이겠습니까. 김면(金沔)은 인홍과 동시에 의병을 일으킨 자로 함께 정성을 다하여 왜적을 토벌하면서 조금도 틈이 생길 단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면이 죽었을 때는 적군과 대치하여 무장을 풀 시간이 없었으므로 즉시 가서 곡하지 못했는데 형편이 그렇게 되어서이지 이것이 과연 친구를 박하게 대접해서였겠습니까. ‘이숙(李潚)이 그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 감사와 대좌(對坐)하여 죄를 하나하나 따졌다.’고 하였는데, 또 감사란 누구를 지목한 것입니까. 한준겸(韓浚謙)이 3년 동안 관찰사로 있었으나 인홍은 한번도 그를 만난 일이 없고, 김신원(金信元)의 경우는 해인사(海印寺)를 지나다가 우연히 상면하게 되었으나 이 또한 초면인데 어떻게 수령의 잘못을 초면인 도백(道伯)에게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로 이러한 이치는 없습니다.
또 인홍에게 무슨 허물이 있다고 유영순(柳永詢)이 말했으며, 인홍에게 무슨 야박한 행동이 있었다고 허잠(許潛)이 참소했겠습니까. 영순이 이미 말을 하지 않았고 허잠이 또 헐뜯지 않았으니, 이른바 그의 문도(門徒)로부터 미움을 받았고 쌀을 훔쳤다는 비방을 들었다는 말은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허엽(許曄)이 감사가 되어 문객(門客)을 가두고 다스렸다.’는 말은 또 누구를 지목한 것입니까. 인홍의 문객으로 허엽에게 죄를 얻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보아도 더욱 흉악한 이귀가 만들어 낸 유언비어의 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고을 백성들은 지주(地主)와 분별이 매우 엄격하고 선비와 왕인(王人)5006) 과의 접촉에는 서로 한계가 있는데 이른바 성주(星州) 사람들이 목사 이시발(李時發)로 하여금 매사를 인홍에게 묻도록 하였다 하고, 합천(陜川)의 선비들은 종사관(從事官) 이유홍(李惟弘)으로 하여금 반드시 인홍을 가서 보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두 신이 듣지 못한 바이니 모르겠습니다마는 시발이 발설한 것입니까, 유홍이 발설한 것입니까?
그리고 정거(停擧)는 과장(科場)에 나가는 거자(擧子)들의 일이고 제명(除名)은 제배(儕輩)들 사이에서 서로 책망하는 벌인데, 이 같이 미미한 일들이 어찌 인홍이 참여하여 알 일이겠습니까. 하물며 ‘귀머거리 체찰사’와 ‘벙어리 순찰사’란 말 역시 어디로부터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속인 허다한 낭설이 모두 인홍에게 화를 전가시키려는 것이니, 그가 죄를 얽어 만든 정상이 또한 교묘하지 않습니까. 아전을 매질했다는 일에 대해서는 또한 할 말이 있습니다. 유향소(留鄕所)의 향정(鄕正)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풍속을 바로잡는 것이 국가의 법이니 간사한 아전을 다스려 지방의 풍속을 규정하는 것은 간혹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는 일개 향소(鄕所)의 사건에 불과하니 이것이 어찌 인홍과 관계가 있으며, 또 어찌 수령과 관계되는 일이겠습니까. 만약 수령과 관계되었다면 군수 이빈(李馪)은 강직하게 법을 지키는 사람인데 어찌 1품관을 너그럽게 보아 용서할 리가 있겠습니까.
아, 이귀는 인재를 금고(禁錮)하고 남의 옥사(獄事)를 결단하며, 남의 죄를 결정하고 임금이 막지 않은 것을 막으며, 임금이 내치지 않은 사람을 내쫓았다는 등의 말을 백방으로 꾸며 성상의 총명을 미혹시켰으니, 흉인(兇人)이 없는 말을 만들어 올바른 사람을 모함함이 참혹합니다.
대체로 적이 물러간 뒤에 의병을 혁파하여 관군에 소속시킨 일은 김응서(金應瑞)가 알고 있고, 손천일(孫千一)의 생사 여부는 주사(舟師)의 무과 방문(武科榜文)에 있으며, 여사(廬舍)를 태웠는지 태우지 않았는지는 숙박한 주인이 있습니다. 기타 허다한 이야기는 이원익(李元翼)•김신원(金信元)•유영순(柳永詢)•허잠(許潛)•이시발(李時發)•이유홍(李惟弘)•윤흥지(尹興智) 등 여러 사람들이 아직 조정에 있으므로 전하께서 한번 하문하시면 사실 여부를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니, 진위는 당장 분별되고 간사한 정상은 저절로 폭로될 것입니다. 무릇 허무한 말은 자기와 대등한 관계이더라도 속일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군부(君父)의 앞이겠습니까. 속일 수 없는 데서 속이고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면 그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바를 실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아, 간사한 무리들이 올바른 사람을 모함하기 위해 반드시 불측(不測)한 이름을 첨가하는 것은 곧 일반적인 형태입니다. 사마광(司馬光)의 충성스럽고 어짊에 대해 장돈(章惇)은 간사하다고 지목했으며, 주희(朱熹)의 정도(正道)에 대해 호굉(胡紘)은 위학(僞學)이라고 배척했으니 예로부터 소인이 올바른 사람은 공함(攻陷)하는 데는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이귀와 같이 은밀히 독기를 부리는 정신병자는 또 어떻겠습니까. 본성이 거짓되고 종적이 무상하여 계미년 이후 이이(李珥)가 당국(當國)할 때는 이이에게 의탁하고, 성혼(成渾)•정철(鄭澈)이 조정을 독점할 때는 성혼과 정철에게 의탁하여 냄새를 찾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평생의 사업이 오직 남을 공격하는 일에만 전력하였는데 전후에 올린 황탄(荒誕)한 상소도 모두 남의 손을 빌린 것으로 출세하고 벼슬을 매개하는 자료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사람들은 상소하는 악마로, 사류들은 도깨비로 지목하여 성명을 눈으로 보기만 해도 구토를 하려고 하였으니 실로 다시는 입에 거론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지나친 염려로는, 어지러이 늘어놓은 이귀의 말을 성명(聖明) 아래서 그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이귀가 출몰하는 것으로 세태의 변천을 볼 수 있습니다. 너그러이 용납하여 덮어 주다가 그것이 효시(嚆矢)가 되어 혹 군부에게 시험을 하거나 올바른 사람에게 시험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귀의 몸이야 출몰하다가 말더라도 이귀의 말이 뒷날 뜻을 펼 날이 있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신은 사슴을 말이라고 한 진(秦)의 조고(趙高) 같은 간신이 또 그 사이에서 틈을 엿볼까 두렵습니다.
아, 인홍의 방정(方正)하고 고준(高峻)한 성품은 세속과 크게 다르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은 구차하게 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니, 군자가 소인의 참소를 받는 것은 실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충의로운 본 마음과 염퇴(恬退)하려는 절조는 옛사람에게서 찾더라도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인홍을 깊이 아시고 돈독하게 신임하시며, 돌보심 또한 극진하신데 진신(搢紳)들 사이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은 적고 미워하는 이는 많습니다. 비록 성상께서 돌보심이 융성하시므로 감히 드러내놓고 헐뜯고 배척하지는 못하나 일개 이귀에게 편승하여 한없이 배척합니다. 사헌부의 같은 좌석에 있으면서도 속마음은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처럼 동떨어져서 겨우 담장을 사이하여 비웃는 소리가 떠들썩합니다. 심한 자는 성상의 비답 중 몇 마디 말을 뽑아 내어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조수와 초목까지 그대 이름 아는 터
이번의 서울 걸음 창생의 복이어라
도성에 들어온 지 3일 만에 삼사 텅비니
창생의 복이 아닌 죽은 자의 복이로세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모두 인홍을 조롱한 것이라고 하나 신은 전하를 조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귀가 인홍을 모함한 것은 광망해서일뿐이고 경박해서일 뿐인데, 시기하는 무리들이 하나 둘에 그치지 않고 분분한 알력이 끝이 없습니다. 옛사란의 말에 ‘한 사람의 설거주(薛居州)가 송왕(宋王)을 어떻게 보좌할 것인가’5007) 라고 하였는데, 신은 거기에 이어 ‘전하 한 분이 인홍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하겠습니다.
아, 임금의 문은 구중(九重)이고 당(堂) 아래가 천리(千里)이므로 참소하는 말이 문장을 이루고 뭇사람의 입이 쇠를 녹일 수 있다고 했으니, 수레축을 부러뜨리고 배를 침몰시킬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신은 삼가 기축 옥사 때 최영경(崔永慶)을 엉뚱하게 길삼봉(吉三峯)으로 조작했던 것과 같은 수단이 어쩌면 이로부터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살피소서. 신은 인홍에게서 수학한 분의(分義)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집안끼리 내왕하는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며, 단지 고향을 이웃하여 살고 있으면서 인홍이 무고(誣告)를 당하는 것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먼 시골에 떨어져 있어 바로잡을 길이 없었는데 요행히 발해(發解)5008) 에 참여하여 궐하에 왔다가 감히 품고 있는 생각을 모두 드러내어 성상의 처분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광망(狂妄)하고 참람하여 죽을 죄를 졌으므로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아룁니다.”
사신은 논한다. 정인홍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고제(高弟)이다. 어려서부터 임하(林下)에서 독서하여 기절(氣節)이 있다고 자부해 왔는데 영남의 선비들이 많이들 추존하여 내암 선생(來庵先生)이라고 불렀다. 그가 세상에서 흔하지 않은 소명을 받고 초야에서 몸을 일으켜 나오자 임금은 자리를 비우고 기다렸고 조야(朝野)는 눈을 닦고 바라보았다. 이때 인홍은 마땅히 먼저 임금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고 이어 화급한 시무를 진달하며, 훌륭한 몇몇 사류들과 협심하여 가부를 논의해 조정 의논의 시비와 인물을 취하고 버리는 데 따른 잘잘못을 차례로 바로잡아 서로 단합하고 화평하도록 노력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청류(淸流)들은 존중하여 의지하고 여망은 실로 흡족하게 여겨 조정에서 기대한 본의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여 한갓 악을 미워하는 마음만을 품고 시세의 마땅함을 살피지 않으며 선입관을 위주로 자기의 견해를 혼자 고집하였다. 조정에 들어온 지 오래지 않아 탄핵하는 글이 분분하여 시끄러운 양상이 나타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기고 뭇 비방이 뒤따라 일어났다. 게다가 뜻을 잃은 부박하고 잡된 무리들이 인홍의 세력에 의지하여 출세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연이어 그의 집으로 모여들어 친객(親客)이 되니, 모든 유세(遊說)가 인홍의 마음을 격동시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영남으로부터 홀로 도성에 처음 들어왔으니 세정(世情)의 호오(好惡)와 시의(時議)의 편부를 어떻게 사실대로 분명히 알아서 의심하지 않겠는가. 이에 의심은 더욱 깊어지고 분한(憤恨)은 계속 생겨나 당대의 사류들과 점점 대립을 이루어 큰 유감을 품고 돌아갔다. 대체로 그를 그르친 자는 그릇된 그의 문객들이며, 그 문객들이 그른 줄 모르고 그들을 믿은 것은 바로 인홍이 편협하고 밝지 못한 소치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특별히 초야에서 필부를 등용하여 풍헌(風憲)의 장관(長官)에 앉힌 것은 바로 임금의 성대한 기절(氣節)이며 세상에 드문 아름다운 일이었다. 인재를 쓰려거든 먼저 곽외(郭隗)부터 쓰라고 곽외가 연 소왕(燕昭王)에게 자신을 천거한 말도 있는데, 조정에서는 어찌 성상께서 어진 이를 높이는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관대하게 대우하지 못하였는가. 아, 인홍이 한번 패하고 돌아간 뒤로는 산림의 고고(孤高)한 선비들은 모두 인홍을 경계로 삼아 오직 더 깊은 산골짜기 더 우거진 산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할까만을 생각하니, 한탄스러울 뿐이다.
【원전】 24 집 413 면
【분류】 *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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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999]관방(關防) : 국경의 요새. ☞

[註 5000]병한(屛翰) : 한 지방을 지키는 장관(長官). ☞

[註 5001]강우(江右) : 경상 우도. ☞

[註 5002]족질(族姪) : 이시익을 말함. ☞

[註 5003]향장(鄕長) : 그 고장의 장로(長老). ☞

[註 5004]향정(鄕井) : 고향. ☞

[註 5005]양희(梁喜) : 정인홍의 장인. ☞

[註 5006]왕인(王人) : 사명(使命)을 띤 관원. ☞

[註 5007]‘한 사람의 설거주(薛居州)가 송왕(宋王)을 어떻게 보좌할 것인가’ :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많은 소인들 속에서는 그 공효를 바랄 수 없다는 것임.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하. ☞

[註 5008]발해(發解) :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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