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와 정인홍-16 [조선왕조실록]-퇴계와 남명

by 杓先 posted Aug 2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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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76권 37년(1604년) 7월 11일 (경신) 003 /
윤돈•구의강•정인홍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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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돈(尹暾)을 병조 참판으로, 구의강(具義剛)을【전에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올바르지 못한 일이 있었다.】 승지로, 정인홍(鄭仁弘)을 공조 참판으로, 이기빈(李箕賓)을 함경남도 병사(咸鏡南道兵使)로, 배흥립(裵興立)을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이정험(李廷馦)을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이덕형(李德泂)을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정인함(鄭仁涵)을 호조 정랑으로, 채형(蔡衡)을 성균관 직강으로, 김광엽(金光燁)•송석조(宋碩祚)를 이조 좌랑으로, 홍명원(洪命元)을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로, 김태국(金泰國)을 고부 군수(古阜郡守)로, 황구(黃鷗)를 임피 현령(臨陂縣令)으로, 정우열(鄭友說)을 포천 현감(抱川縣監)으로, 윤공(尹鞏)을 당진 현감(唐津縣監)으로, 안몽윤(安夢尹)을 옥구 현감(沃溝縣監)으로 삼았다.



선조 189권 38년 7월 24일 (병신) 006 /
정호성 등이 여러 향교와 서원에 서찰을 보내 정인홍이 지은 《발남명집설》을 비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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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유생(儒生) 정호성(丁好誠)•허실(許實)•유희량(柳希亮)•최성원(崔誠元) 등이 팔도 열읍(列邑)의 향교(鄕校)와 모든 서원(書院)에 서찰을 보내어 정인홍(鄭仁弘)이 지은 《발남명집설(跋南溟集說)》5580) 을 추악하게 비방하였다.

[왕조실록을 편찬한 史官의 評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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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臣(사신)은 논한다. 영남(嶺南)은 인재의 부고(府庫)이고 사론(士論)의 근본이 되는 곳이다. 신라로부터 고려 그리고 고려로부터 성조(聖朝)에 이르기까지 명유(名儒) 석사(碩士)가 많이 배출되어 국가의 원기를 부지한 것을 뚜렷이 상고할 수 있다. 지난 선조(先朝) 때 퇴계(退溪)와 남명 두 분 선생이 같은 도에서 함께 탄생하시어 도학(道學)을 창명(倡明)하고 의리(義理)를 밝혀 인심을 맑게 하고 세교(世敎)를 부지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훈도(薰陶)되어 점점 감화하고, 보고 감동하여 흥기(興起)한 자가 부지기수였다. 비록 난세를 당했어도 사람들이 자식으로서 효(孝)에 죽고 신하로서 충(忠)에 죽어 인륜(人倫)이 밝혀져 금수(禽獸)가 되지 않고 중국(中國)이 이적(夷狄)이 되지 않은 것은 두 분 선생의 공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분들의 출처(出處)가 같지 아니하여 혹은 도(道)를 행하여 시국을 구제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혹은 초야에 살면서 자기의 뜻을 구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으나, 결국은 모두 도의 군자(道義君子)에 어긋나지 않았다. 어찌 반드시 같아야만 되겠는가. 그런데 양가(兩家)의 문도(門徒)들이 두 분의 학문 깊이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행적만 가지고 서로 헐뜯고 비방하여 수세(數世)가 지나면서 더욱 심화되니, 뜻있는 선비들이 개탄한 지 오래이다. 이번에 명색이 관학 유생인 자들 몇명이【생원(生員) 정호성•허실이 성세영(成世寧)의 외손 한언(韓琂)과 양홍주(梁弘澍)의 사위 권집(權潗) 등과 더불어 그 일을 주장하여 유생들을 위협하여 거느리고 지방에 통문(通文)하였는데, 조금이라도 사리를 아는 사람은 모두 따르지 않았다.】 남명의 문도에게 감정을 품고서 정인홍의 《발남명집설》을 빌미로 각도에 글을 보내어 선사(先師)을 얕잡아 보고 조롱하기를 못하는 짓이 없이 하였다. 그들이 인홍을 배척하여 은근히 남명을 공격하고, 퇴계를 추존하여 드러내놓고 남명을 배척한 것을 살펴보면 지나친 질투로 억누르고 찬양하기를 너무 심히 하였으니 속 좁은 짓임을 알겠다. 남명은 은일지사(隱逸之士)로 학문을 독실히 하고 실행에 힘썼으며, 도를 닦고 덕을 쌓았으니, 정통한 학식과 해박한 견문은 더불어 비교할 사람이 적다. 전현(前賢)과 짝하고 후학(後學)에 종사(宗師)가 될 만하니, 그렇다면 어찌 퇴계만 못하겠는가. 인홍은 남명과 가장 오랫동안 종유(從遊)하여 의발(衣鉢)을 전수받은 자로 퇴계가 귀암(龜巖)5581) 을 지나치게 허여한 것을 보고 의심을 하자, 남명의 문하인들이 지나친 말을 만들어 그를 도와 공박한 것이다. 그의 생각에는 ‘저 귀암은 몹시 부정한 자이다. 남명이 악한 사람 미워하기를 원수처럼 하였으니, 절교한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혹자는 잘못하여 남명을 너무 심했다고 여기니, 내가 스승의 뜻을 발명하지 않으면 천 년 후에 누가 참으로 시비(是非)를 알겠는가.’라고 여겨 집설에 간략히 그 일을 변명한 것이니, 주제 넘고 망령되다는 비방은 면할 수 없으나 그 정상은 애처롭다. 아, 학술이 밝지 못하고 시비가 분명치 않아서 남명같이 도학이 높은 분으로 오히려 곡사(曲士)들의 비난을 면치 못하였으니 다른 사람이야 어찌 논할 것이 있겠는가. 다만 백세 후에 아는 자가 나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원전】 25 집 93 면
【분류】 *사상-유학(儒學)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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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5580]《발남명집설(跋南溟集說)》 : 남명선생여이구암절교사(南冥先生與李龜巖絶交事)를 말함. ☞




선조 205권 39년 11월 24일 (기축) 001 /
풍원 부원군과 전 참판 정인홍에게 세찬을 제급하게 하다
(*.세찬; 설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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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승지 박동열(朴東說)에게 전교하였다.

“도내(道內)의 풍원 부원군(豐原府院君)과 전 참판(參判) 정인홍(鄭仁弘)에게 세시(歲時)에 음식물을 제급(題給)할 것을 경상 감사에게 하서(下書)하라.”


[註 5581]귀암(龜巖) : 이정(李楨)의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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