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와 정인홍-17 [조선왕조실록]-기축옥사 관련

by 杓先 posted Aug 2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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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05권 39년 (1606년) 11월 24일 (기축) 001 /
풍원 부원군과 전 참판 정인홍에게 세찬을 제급하게 하다
(*.세찬 제급; 임금이 국가의 원로에게 설음식을 보내어 감사의 뜻을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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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승지 박동열(朴東說)에게 전교하였다.
“도내(道內)의 풍원 부원군(豐原府院君)과 전 참판(參判) 정인홍(鄭仁弘)에게 세시(歲時)에 음식물을 제급(題給)할 것을 경상 감사에게 하서(下書)하라.”
(풍원부원군; 영의정 유성룡)



선조 211권 40년(1607년) 5월 15일 (정축) 002 /
기축옥 연루자에 관해 전 공조 참판 정인홍이 상소하다
( 기축옥사에 대한 발생 원인 진단과 그 대책에 대한 상소)

(*.기축옥사;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으로 일어난 옥사. 정여립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全州)·진안(鎭安) 등지를 내왕하면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 신분에 제한없이 선비·불평객들을 모아 무술훈련을 시켰다. 소문이 점차 퍼지자 거사를 모의하게 되었으며, 1589년 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과 재령군수(載寧郡守) 박충간(朴忠侃), 안악군수(安嶽郡守) 이축(李軸), 신천군수(信川郡守) 한응인(韓應寅) 등이 상고하여 정여립의 모반을 고변함으로써 이 사실이 알려졌다. 관련자들이 체포·처형되는 등의 토벌이 시작되어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鄭玉男) 등과 진안 죽도(竹島)로 달아났다가 정여립은 자살하고 정옥남은 잡혀왔다. 이 사건으로 이발(李潑)·백유양(白惟讓)·유몽정(柳夢井)·최영경(崔永慶) 등이 처형되었으며, 정언신(鄭彦信)·정언지(鄭彦智)·정개청(鄭介淸) 등이 유배되고, 노수신(盧守愼)은 파직되었다. 이로부터 동인(東人)이 몰락하고, 호남(湖南) 출신으로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었으며, 전라도를 한때 반역향(反逆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여립의 옥사는 그 뒤 3년에 걸쳐 처리되었는데,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거나 또는 동인이기 때문에 관련되어 처형된 사람이 무려 1000명에 이르는 큰 옥사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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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공조 참판 정인흥(鄭仁弘)이 상소하기를,

“삼가 말씀드립니다. 지난 12월, 본도의 순찰사 유영순(柳永詢)에게 유지(有旨)하여 신에게 세시(歲時)의 식물(食物)을 내리셨는데 신이 그 달 30일 절하고 공손히 받고는 감격스럽고 놀라워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묵은 병의 침범으로 인하여 즉시 글을 올리지 못한 지가 이미 순월(旬月)이 지났으니 오래도록 진사(陳謝)하지 못한 죄가 더욱 깊어 몹시 떨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쓸모없는 신을 잊지 않으시고 굶을까 염려하시어 죽지 않게 하려고까지 하셨으니, 이는 실로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어짊이십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두루 사방 팔로의 가난한 집에 사는 환과 고독으로 굶주리며 먹지 못하고 울부짖으며 떠돌아다니는 자들 가운데 유사(有司)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자가 몇 천 사람인지 모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염려하시는 어짊을 미루어 넓히시어 아무리 깊숙한 곳도 비추지 않는 곳이 없고, 아무리 먼 곳도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하여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혜택을 입게 하시면 이에서 베푸신 것이 더욱 빛이 나서 온 나라가 고루 구제될 것이니 신이 받는 은혜가 더욱 클 것입니다.
신은 성명(聖明)의 세상을 만나 지나치게 수용(收用)해 주는 은혜를 입었는데 거의 죽게 된 날에도 오히려 골육 같은 은혜를 내리셨습니다. 신은 노쇠함이 이미 극에 달해 전혀 나라에 보답할 가망이 없으나, 또한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임금을 향한 뜻을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구차히 영합(迎合)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유명(幽冥)의 세상을 보건대 귀신도 또한 신을 죽일 것입니다. 신은 정신이 혼미하고 문사(文辭)가 거치니 어찌 범연하게 다른 일을 들어서 성청(聖聽)을 시끄럽게 하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하찮은 신을 우휼(優恤)하신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백성을 보호하는 도리를 미루어 망령되이 시대에 도움을 주는 모책(謀策)으로 삼을까 합니다.
무릇 국가를 가진 이는 이웃의 적이 침범하는 것을 병통으로 삼고 무도한 백성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근심으로 삼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는 진실로 고금을 통하여 면치 못하는 바입니다. 지금 국가의 남북에 근심이 있고 적민(賊民)이 이따금 일어나 여러 번 성상의 마음을 괴롭히니, 이는 참으로 오늘날 마땅히 깊이 염려해야 할 바입니다. 세상에서 나라를 위해 꾀를 내는 자는 항상 험한 산골짜기와 굳은 성지(城池)를 두기에 힘을 쓰는데, 신은 백성을 기쁘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왕공(王公)의 설험(設險)으로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역(易)》에 말하기를 ‘백성들을 열복시키고서 어려운 적을 범하게 하면 백성들이 죽음을 잊는다.[說以犯難 民忘其死]’라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기뻐 복종하여 죽음을 잊는다면 칼날을 무릅쓰고 물불에도 뛰어들 것이니, 비록 사나운 적이 있더라도 끝내 우리를 능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험(天險)은 오를 수가 없다 하였으니, 백성들이 기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천험입니다. 숭산(崇山)이나 화산(華山)이 족히 높음이 되지 않고 하해(河海)가 족히 깊음이 되지 않습니다. 민심의 열복은 우리의 입장에서 말하면 두려워할 만한 암벽에 불과하지만 적의 입장에서 말하면 오를 수 없는 천험이 되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백성들의 호오(好惡)를 호오로 삼으시고 백성들의 우락(憂樂)을 우락으로 삼으시어, 보민(保民)의 마음을 다하시고 내치(內治)의 정사를 행하신다면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여 권면될 것이고 암벽이 변하여 험고가 되어 주야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사린을 지킨다면 나라를 지킬 수 있고 적을 두렵게 할 수가 있으니 바야흐로 천험의 시용(時用)이 이에 이르러 크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진(普)나라와 초(楚)나라는 강대함이 같았는데 진나라 임금은 백성을 쉬게 하고 은혜를 베풀어 행한 지 1년만에 세 번 출정(出征)하였으나 초나라가 더불어 다투지 못하였으니, 강한 적이란 없는 것입니다. 수(隋)나라와 초나라는 대적이 되지 않은 지가 오래였으나 수 후(隋侯)가 정사를 닦자 백성들이 화합되고 신(神)이 복을 내리어 초나라가 공격할 수가 없었으니, 작은 나라란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천리나 되는 나라에서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를 행하여 스스로 지키고 적을 두렵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보건대 지금은 백성을 보호하려는 정사는 가망이 없고 도리어 백성의 마음을 잃을 염려만 있습니다. 시험삼아 영남 한 지방을 들어 말하겠습니다. 적변이 있던 처음에 남쪽 수령 가운데는 호랑이보다 사나운 자가 많아서 태산(泰山)에서의 곡(哭) 소리가 고을마다 들렸었으나 백성들이 감히 제멋대로 행동하여 적에게 아첨하지 못한 것은 사대부 집이 많아 예의의 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 군사가 남쪽으로 내려올 때에도 죽지 않고 남아있던 백성들이 겨우 목숨만을 보존하고 있었으되 군량을 운반하는 노고를 하면서도 명령에 따르고 흩어지지 않은 것은 양민(良民)이 많아서 공상(供上)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진실로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정사를 행하여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였다면 나라의 근본을 북돋고 적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중국의 장수도 부러워한 바인데 지금 수령이 된 자들은 도리어 백성을 비루하게 여기고 잔적(殘賊)으로 여겨 조정(朝廷)의 명을 따르지 않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성상의 뜻을 본받지 않고서 백성을 어육(魚肉)으로 인식하고 원수처럼 보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감히 노하면서 말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입을 막는 것이 심할수록 원망과 비방이 더욱 깊어져서 장차 이 때문에 크게 무너지는 화란이 마침내 국가에 있게 될 것입니다. 한 도(道)가 이러하니 모든 도를 알 수 있는데, 또 어떻게 어려운 적을 범하여 죽음을 잊는 믿을 만한 백성이 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백성을 보호하는 은택이 끝까지 내려가지 않음이 이러하니 비록 지혜있는 자라고 하더라도 그 후의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삼가 보건대 조정에서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산보(山堡)를 증축(增築)하는데, 이 역시 그만둘 수 없는 설험(設險)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의지하여 견고하게 여기고서 다시 원대한 계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장강(長江)의 험고함을 노(虜)와 함께 하여 마침내는 흉노(匈奴)의 이익이 될까 염려됩니다. 아, 뿌리가 굳지 못하면 가지가 무성하지 못하고 근원(根源)이 깊지 못하면 멀리 흐르지 못하는 법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도 스스로 도모하시어 뿌리를 굳게 하시고 근원을 깊게 하시어 연한(燕閑)의 때와 만기(萬機)의 여가에 천리(天理)의 주인을 보존하고 인욕(人欲)의 도적을 막아서 백성이 아니면 임금이 없다는 뜻을 생각하시어, 백성에 대해 항상 어린아이를 보호하듯 하는 마음을 지니소서. 그리고, 기강(紀綱)을 떨치시어 염근(廉謹)한 사람을 나오게 하고 탐포(貪暴)한 자를 주벌하기를 뇌풍(雷風)처럼 행하소서. 그러면 마음은 수고롭되 큰 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이는 근본(根本)을 튼튼히 하는 바여서 다스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사신(使臣)이 바다를 건너간 거조가 있었습니다. 교활한 오랑캐의 정상은 신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며 심밀(深密)한 묘당(廟堂)의 계책은 신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비록 권의(權宜)의 이로움이 있다 하더라도 자못 적을 제압하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소문에 듣건대 적들이 묶어 보낸 자들이 능침(陵寢)을 파헤친 적이 아니라고 하니, 이는 오랑캐가 장이(張耳)를 참(斬)한 계책5764) 을 행하여 우리에게 설험(設險)을 바라는 것입니다. 왜노의 간교함으로 어찌 그것이 반드시 탄로되리라는 것을 헤아리지 못했겠습니다. 대개 우리를 속일 마음이 있어서 꺼리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데 갑자기 회답사를 보내 그들과 강화하면 저들은 반드시 헛된 소문을 가지고 실제의 계책을 행해 우리를 위협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에게 기만을 당해 그들의 계책에 빠져 왜노들의 명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남의 거조를 우러러보아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모욕하는 마음을 더하게 하여 원수를 갚지 못한 채 마침내 무궁한 부끄러움만 끼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어리석고 천한 소견으로 과려(過慮)하지 않을 수 없는 바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사신을 보내는 부끄러움을 잊지 말으시고 깊이 두려워하는 생각을 두시어 내정(內政)을 닦아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고 외이(外夷)를 엄히 물리쳐 왜노들에게 위엄을 보이소서. 그리고 강화(講和)하고 하지 않는 권한을 우리가 가져 저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게 하소서. 그러면 나라를 지키고 적을 위압하는 도리가 거의 제대로 될 것입니다.
신은 또 구구한 충심(忠心)에서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아뢰어 죽음의 죄를 범하고자 합니다. 신이 듣건대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형(刑)이란 형(侀)이고 형(侀)이란 이루는 것이다. 한 번 이루어지면 변할 수 없기 때문에 군자(君子)가 마음을 다한다.’ 하였고, 《역(易)》 서합괘(噬嗑卦)에 말하기를 ‘정교하고 위태로운 마음을 지니면 허물이 없다.[貞厲無咎]’고 하였는데, 공자(孔子)께서 타당함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보건대 지난번 호서(湖西)의 역적의 변에는 괴수만을 죽이고 그 무리는 죄주지 않았기 때문에 진신(縉紳)의 선비들이 한 사람도 연루된 자가 없었는데 호남(湖南)의 적에 이르러서는 그 괴수를 이미 죽였는데도 사대부로 신문을 받아 죽은 자가 그 숫자를 알 수 없도록 많습니다. 호남의 적은 역모를 행동에 옮기지 않은 자이고, 호서의 적은 군대를 일으켜 행진(行進)한 자인데, 군대를 일으킨 자는 괴수만을 죽이고 역모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자는 연좌되어 죽은 자가 많으니 어찌 전하께서 죽이지 않는 마음을 유독 호서에만 행하고 호남에는 행하지 않으십니까.
대개 역적을 토죄(討罪)하는 것은 극히 중대한 일이어서 한마디라도 관련되면 비록 성명(聖明)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으로도 용이하게 놓아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흉(姦兇)이 흔단을 요행으로 여겨 함정을 만들어 자기와 다른 자를 얽어 모함하기를 마음으로 달게 여겨 끝내 ‘삼봉(三峯)’이란 무함으로 멀리 산림(山林)에 있는 사람을 얽었던 것입니다. 아, 최영경(崔永慶)은 세상을 피해 사는 선비인데도 도리어 그물에 걸리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습니까. 비단 영경 뿐만 아니라 신도 거의 면하지 못할 뻔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흉인(凶人)에게 미움을 사서 신을 ‘딸을 역적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한다.’고 모함하여 나국(拿鞫)을 청하려 하였습니다. 신은 평생에 딸을 낳지 않았고 단지 아들 하나만 둔 것을 사람들이 함께 아는 바이기 때문에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말한 사람이 있었고, 그도 혹시 탄로날 것을 염려하여 그만두었던 것입니다. 신에게 만약 딸이 있었더라면 어찌 그때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신은 다행한 사람이었고 영경은 불행한 자였습니다. 이로써 미루어보건대 당시의 사대부 중에 형적도 없이 잡혀가고 정상이 가벼운데도 죽은 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괴(逆魁)가 당초에 부정하게 명망을 얻어서 이미 청로(淸路)에 올랐고 역적의 형상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대하고 항상 서로 문안하며 사귀었으므로 연루된 사람이 많았는데, 하물며 거기에다 얽어 무함함이 많았음이겠습니까. 그렇다면 호서의 역괴 역시 일을 맡아 군사를 거느린 관원에게서 일어났으니 어찌 서로 왕래하여 연류된 자가 없었겠습니까. 다만 엄히 묻는 것이 그 사람에게 미치지 않아서 만연되지 않았고 또 허위로 미친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역적을 토죄하는 법이 하나는 가볍고 하나는 중하여 혹 정려(貞厲)의 뜻을 잃었다면 밝히지 못하는 억울함이 있을 것입니다. 아, 역적의 악함은 고금이 마찬가지인데 역적을 토죄하는 뜻이 어찌 전후가 다를 수 있겠습니까. 후일의 옥사가 이미 마땅하다면 전일의 무함하고 법을 굽힌 것을 신원(伸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최영경은 성상의 밝으심을 입어 죽은 뒤에 추숭하는 전례(典禮)를 시행하였으나 그 나머지는 어두운 곳을 밝히는 거조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크나큰 천지에 유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당시 위임(委任) 받았던 중신(重臣)과 문사 낭관(問事郞官) 중 한두 사람은 충실한 사람이 있어 마음으로는 그들의 억울함을 알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전하께서 시험삼아 물으시어 그 정상을 자세히 조사하고 그 무함하고 법을 굽힌 것을 밝히시어 아울러 신리(伸理)하시면 뇌우(雷雨)의 은택이 지하에 있는 뼈에 추급(追及)될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국가에서 인심을 수습하고 하늘의 화기(和氣)를 불러서 국맥(國脈)을 늘리는 하나의 성대한 일입니다. 신이 지난해 경연에서 부연하여 아뢰려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습니다. 곧 죽게 될 몸이 끝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면 역시 성은(聖恩)을 저버리는 것이 되고 죽어서도 불충(不忠)한 귀신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에 두소서. 신은 지극히 격동되고 황공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였는데, 의금부에 계하하였다.

[왕조실록을 편찬한 史官의 평론]
사신은 논한다. 정인홍(鄭仁弘)은 타고난 천성(天性)이 효성스러웠고 몸가짐이 강직하고 단정하였다. 젊어서부터 남명 선생(南溟先生)5765) 에게 배웠는데 남명이 큰 그릇으로 여겨 말하기를 ‘덕원(德遠)5766) 이 있으니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인홍 역시 존신(尊信)하였다. 독실하게 학문에 전념하여 단정히 앉아 책을 읽었는데 밤낮을 계속하여 열심히 노력하였다. 모가나고 날카로워 사람들과 화합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의(義)를 숭상하고 사(邪)를 미워하는 마음이 시종 흔들리지 않았다. 사람을 대하여 논의할 즈음에는 칼로 끊은 듯이 하고, 남에게 의롭지 못한 행실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비록 고관 대작이라 하더라도 마치 노예처럼 비루하게 여기고 원수처럼 미워하였으며, 비록 평소 알고 지내던 명유 석사(名儒碩士)로 불리는 자라도 조금만 아부하고 구차스레 화합하려는 태도가 있으면 절대로 함께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꺼리고 병통으로 여겼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잠시 사헌부에 있었을 적에는 백료들이 숨을 죽이었고 여러 차례 주현(州縣)을 맡았을 때에는 고을 사람들이 경외하였다. 비록 물러나 있을 때에도 강개하게 나라를 걱정하여 난리가 나자 창의(倡義)하였으되 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니 절조(節操)와 풍재(風裁)가 남이 따르기 어려운 바가 있었다. 유성룡(柳成龍)과 크게 맞지 않아서 두 집 문인(門人)들이 배척하였으므로 남북(南北)의 당(黨)이 이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거기다가 인홍은 남명을 높이고 퇴계(退溪)를 더럽게 여겨 기롱하고 폄(貶)하는 말이 문자 가운데 나타났으므로 사류들의 나무람을 받았다.
【원전】 25 집 334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司法)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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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5764]장이(張耳)를 참(斬)한 계책 : 장이는 한 고조(漢高祖) 때 조 왕(趙王)에 봉해진 사람. 그는 처음에 진여(陳餘)와 함께 항우(項羽)를 섬겨 벼슬하였는데, 장이는 상산 왕(常山王)에 봉해지고 진여는 후(侯)에 봉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진여는 마침내 장이와 사이가 벌여저 장이는 한(漢)으로 도망하였다. 후에 한나라가 초(楚)를 치면서 원군을 청하자, 진여는 “장이를 죽이면 그 말을 따르겠다.”라고 하여 한나라에서는 장이와 비슷한 사람을 대신 죽여 원군을 얻는데 성공했다. 《한서(漢書)》 권32 장이 열전(張耳列傳). ☞

[註 5765]남명 선생(南溟先生) : 남명은 조식(曺植)의 호(號)임. ☞

[註 5766]덕원(德遠) : 정인홍의 자(字)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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