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林政丞 鄭仁弘

by posted Jan 1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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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님께서 작성하신 글입니다.

:국제신문 시리즈 기획물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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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林정승 정인홍 <1> 해인사와 부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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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서 88고속도로를 달리다 합천군 가야면 쪽으로 방향을 잡고 30여분을 가면 우리나라 3대사찰 가운데 법보 사찰인 해인사에 도착한다.
: 내암에게 있어서 해인사는 어릴 적 공부하기 위해 자주 찾았던 곳이고 장성해서는 사명당 등 당대를 주름잡던 숱한 명사들과 교류를 나누던 곳이기도 한 인연 깊은 사찰이다.
: [사진설명-합천군 삼가면 야천리 부음정에는 내암이 지은 유부음정(遊孚飮亭-부음정에서 놀며)이라는 시구가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다.]
: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일반 사찰의 대웅전 격인 ‘대적광전’ 마당에 신라시대 3층석탑이 천년의 세월을 떠안은 채 우뚝 서 있다.
: 이 삼층석탑은 해인사에서 학문을 연마하던 어린 내암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유명한 일화를 담고 있다.
: 당시 판결사 양희(梁喜)라는 벼슬아치가 해인사에 들렀는데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한치 흐트러짐 없이 학문에 정진하는 내암의 모습에 매료돼 운자(韻字)를 띄워 글을 짓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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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남짓한 한그루 소나무가 탑 서쪽에 있네
: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 서로 가지런하지 않구나
: 지금 소나무가 탑보다 낮음을 말하지 마소
: 훗날 소나무가 자라난 뒤 탑이 되려 낮아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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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겉 모습으로 평가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긴 이 시구를 보고 깜짝 놀란 양희는 내암을 욕심 내 훗날 사위로 삼게 된다.
: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한민족의 자랑거리인 팔만대장경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데에는 내암의 힘도 적지않았다고 전해져 온다.
: 조선시대 왜(倭)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팔만대장경의 필사본이라도 얻으려고 수 차례 우리 조정에 요구해 올 정도로 탐을 냈다. 임란 당시 내암이 의병장으로 합천 지역을 철통같이 막는 바람에 세계적 국보가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해인사에서 왔던 길을 따라 3㎞정도 내려가면 가야면 소재지에 도달한다. 이곳에는 내암이 초야에 묻혀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고 제자들을 길러냈던 부음정(孚飮亭)이 있다.
: 원래 부음정은 내암이 45세 때이던 선조 13년(1580년)에 이곳보다 아래의 장소에 건립했으나 내암의 후손들이 현재의 장소로 옮겨 지었다.
: 부음정은 내암이 벼슬살이를 했던 5년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머물렀던 유서 깊은 곳이다.
: 내암은 이곳에서 남명 문하생인 김면(金沔) 정구(鄭逑)와 교류했으며, 지금의 감사원 격인 사헌부의 장령으로 출사해 조정에 서릿발 같은 기강을 세운 뒤 46세 때 낙향하자 부음정에는 문경호(文景虎) 박여량(朴汝樑) 등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배움을 청했다고 한다.
: [사진설명-내암 후손들은 매년 음력 3월15일이면 내암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부음정에서 내암선생 춘향제를 지낸다.
: 계곡옆에 자리잡은 지금의 부음정은 건물규모도 작고 퇴락했지만 이곳이야말로 내암이 산림정승으로 국정개혁을 위해 상소문을 올렸던 ‘개혁정치’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 부음정에서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가야면 사촌리 매화산 자락 아래 내암의 생가 터가 있다. 100여평 규모의 생가 터는 지금은 돌보는 사람 없이 밭으로 변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 / 박동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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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홍선생 가계
: 내암의 가계 뿌리는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절강성(浙江省) 출신으로 송나라 말기 형부원외랑 벼슬을 하던 정신보(鄭臣保)가 남송(南宋)이 망하고 원나라가 들어서자 고려의 충청도 부성현 간월도(지금의 충남 서산군)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비로소 우리나라에서 가계가 시작된다.
: 그의 아들 정인경(鄭仁卿)이 고려 충렬왕을 도와 원종 폐위 사건을 해결하고 무신정권을 종식시키며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하는 데 이에 의해 공신이 되고 최고 벼슬을 거쳐 서산군(瑞山君)으로 봉해진 뒤 서산 정씨라는 관향을 받게 된다.
: 이후 서산 정씨는 고려말~조선초 격변기에 충남 금산군으로 내려온 뒤 다시 합천 야로현에 정착하게 된다.
: 당시 합천은 산과 시내가 잘 어우러져 난리를 피할 수 있는 피신지로 적격이어서 선비들이 흠모하던 땅이었다. 합천에 정착한 서산 정씨는 경상우도 지역을 중심으로 세를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학자였던 정윤(鄭倫)이 3형제를 낳으니(중종31년•1531년) 첫째 아들이 바로 내암이다.
: 지금도 합천지역에는 내암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말해주는 설화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 내암이 태어날 즈음 뒷산의 풀과 나무가 잎을 피우지 않았고, 내암이 자라면서 내암의 눈은 별처럼 빛나고 사람을 압도하는 기세가 있어 누구도 감히 마주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그의 천재성은 5세(중종 35년•1540년)때 다시 확인할 수 있다.
: 내암은 참새 새끼를 가지고 놀다가 죽자 글을 지어 조상하기를 “새가 죽었는데 사람이 곡(哭)하는 것은 의(義)에 어긋나나 네가 나 때문에 죽었기에 나는 너를 곡하노라”고 읊었다.
: 그 유명한 제조문(祭鳥文)에 나오는 대목으로 어린나이에도 불구, 미물에까지 미치는 내암의 정성과 마음씀씀이를 엿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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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필 기자
: [2001-07-11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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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林정승 정인홍 <2> 학문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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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암은 남명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로 남명이 꿈꾸었던 이상세계를 현실에서 구현하려 한 인물이죠.”
: 국내 ‘남명학 박사 1호’(철학박사)인 대진대 권인호 교수는 당시 시대상황으로 볼 때 내암의 개혁정치가 실험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다고 강조한다.
: 그는 “당시는 사림의 정치가 시작되던 시기였지만 그 이전 당파가 이미 형성돼 서로 정권을 잡기 위한 붕당이 생기고 이들간 정치투쟁은 필연적이었다”고 말했다.
: [사진설명-내암 정인홍의 영정. 지난 98년 내암의 후손인 서산 정씨 문중에서 제작한 것으로 최근 개관한 합천 임란창의 기념관에 모셔져 있다.]
: 또한 당시 사림정치가 혼탁상을 보인 것은 왕실을 둘러싼 외척과 훈구 공신들이 주축이 된 훈척파가 완전 척결되지 못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율곡을 비롯, 가사문학의 대가인 정철(鄭澈), 서인의 영수인 성혼(成渾) 등 사림을 자처하는 서인계의 태두들이 당시 왕실과 가깝거나 먼 인척관계 신분이어서 이른바 새로운 개혁정치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아 이들과 사림 중 급진적이었던 북인들 사이에 다툼이 많았다는 것.
: 여기다 광해조 때 내암의 대북세력이 정권을 잡았지만 소수 세력이었고 권력으로 멀어진 다수당인 서인과 남인의 불만이 커져 급기야 반정으로 연결됐다는 논리이다.
: [사진설명-1908년 (순종 2년) 내암의 추복(追復 :빼앗은 위호를 사후에 회복시켜 주는 일)을 알리는 대한제국 황제의 칙령.- 내암은 이 칙명에 따라 죄를 씻고 영의정으로 복작됐다.]
: 특히 그는 광해군 때 국정을 농단했던 인물로 꼽히고 있는 이이첨(李爾瞻)에 대해서도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오늘날 내암이 총애했던 이이첨은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광해 악정의 주범으로 꼽히고 있으나 장원급제에 대제학까지 했던 청렴 결백하고 개혁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 권 교수는 남명과 정인홍을 연구했다는 죄목(?) 때문에 한동안 서울지역 대학에서 교수직 임용이 좌절되는 등 학계에서도 핍박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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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계평가 `선생은 이상세계를 실현하려 한 인물`
: “내암의 경절(經節)은 비록 백번 꺾으려 해도 꺾지 못할 것이다(선조임금).”
: “내암은 벽립천인(壁立千짵•천길 낭떠러지 앞에 선 절벽)의 기질이 있다(광해군).”
: 선조임금과 광해군은 산림 처사였던 내암을 국정개혁의 동반자로 보고 각종 벼슬을 하사하며 평생 자신들의 곁에 두고자 했다.
: 당시 정국은 왕실의 인척과 사림의 기나긴 정권쟁탈전이 막을 내리고 사림이 조정에 대거 진출하던 시기였다.
: 그러나 사림들은 출신지역과 스승을 중심으로 붕당(朋堂)을 짓고 상대편을 중상모략 해 반대파를 떼 죽음 시키는 옥사를 일으키는 등 국정혼란이 사림진출이전에 비해 나아지기보다는 더욱 깊어졌다.
: 결국 이들 군왕은 한결같이 내암 이야말로 국정에 새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적임자로 보았던 것이다.
: 내암이 ‘경의(敬義)사상’을 설파했던 스승 남명의 고제(高弟•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라는 점도 군왕들이 그에게 큰 기대를 걸게 했던 대목이다.
: 선조 11년(1578년) 내암은 남명의 문인자격으로 동문 최영경(崔永慶), 퇴계문인 조목(趙穆) 등과 함께 오현사(五賢士)로 발탁돼 황간 현감을 역임하는 등 출사의 길에 들어선다.
: 내암은 고을 수령으로서 선정을 베푸는 등 평판이 좋아 훗날 선조임금이 “산천 초목과 조수가 내암 이름을 안다”고 할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 이어 광해군 시대에도 내암은 영의정 벼슬까지 하사 받는 등 중용되지만 끝내 산림처사를 자임하며 벼슬을 사양하게 된다.
: 대신 내암은 상소문으로 광해군의 국방 정치 경제 등 국정개혁에 일조를 하며 저 유명한 산림정승 시대를 활짝 열게 된다.
: 스승 남명이 경의사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면 제자 내암은 이를 국정개혁에 적용하려 한 실천가였다.
: 내암은 제자들에게 정좌묵상(靜坐默想•고요하게 앉아 묵묵히 마음속으로 생각함)하는 자세로 수신에 힘을 쏟는 한편 지행합일(知行合一•아는 것과 행동이 일치함)에 힘쓰라고 강조했다.
: 그는 주자의 성리학 뿐 만 아니라 노장사상, 선(禪), 양명학(陽明學)에도 두루 통달해 모르는 분야가 없을 만큼 학문의 세계가 깊고 넓었다고 전한다.
: 이처럼 강직한 성품과 시세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처신 때문에 내암은 현실대응 문제에 있어서 다소 과격하다는 평을 감수해야 했다.
: 당시 조정 대신이었던 이덕형(李德馨)은 “산야에 오래있어 세사에 어둡고 소홀한 점이 많아 좋고 그름을 가리는 잣대가 한편으로 치우치고 그 과격함 때문에 여러 사람과 화합할 수 없다”고 공박했다.
: 서인 등 당시 반대파에 놓였던 조정 대신들이 내암을 어떻게 평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이론중심의 성리학에 치우쳐 있던 당시 학풍으로 볼 때 관리는 무릇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들어야 하고, 선비는 출처(出處•벼슬에 나아갈 바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것)가 분명해야 한다는 내암의 공직 관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 조선왕조를 떠받치고 있던 이데올로기가 성리학이라고 볼 때 군왕이 아닌 백성을 먼저 걱정하는 정치의식(민본주의)은 ‘이단’적인 것으로 비쳐질 수 있었으리라.
: 이에 대해 대진대 권인호 교수는 “성리학의 전통이 당과 송대를 거치면서 공맹유학과 함께 노장사상과 불교의 색채도 흡수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며 “그러나 조선조 성리학은 왕조유지를 위한 이념으로 도입된 뒤 타 학문분야를 인정하지 않는 등 경직화돼 갔다”고 말했다.
: 내암은 선조 13년(46세) 지금의 감사원 격인 사헌부 장령벼슬로 출사한 뒤 당파에 관계없이 탐관오리를 벌주는 등 엄정한 기강을 세워 공직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으며 당시 벼슬아치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전한다.
: 강직한 성품의 내암이 나라의 기강을 잡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때부터 그를 시기하는 반대파들이 늘어나게 된다. 여기다 그가 77세 되던 해 문묘 종사가 확정되었던 퇴계(退溪) 이황과 회재(晦齋) 이언적의 출처관 등을 문제 삼는 상소를 올려 학계에 큰 회오리를 일으킨다.
: 당시 퇴계 등이 문묘에 종사되는데 반해 스승 남명이 빠진 것은 퇴계가 생시에 스승을 “정통 성리학이 아닌 노장에 빠져 있다”고 말한데 따른 것으로 결론짓고 분한 마음에 이들을 싸잡아 비난했던 것이다.
: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성균관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는 등 내암을 탄핵하는 상소문이 잇따라 퇴계를 추종하는 경상좌도 남인과 남명을 따르는 우도의 북인간 반목이 심화되는 등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 이후 광해군 실각 후 지어진 선조수정실록이나 광해군일기 등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정권하에서 편찬돼 내암에 대해 폄하일색이어서 씁쓸함을 감출 수 없게 한다.
: 실천유학자의 선봉장이었던 내암의 개혁은 올곧은 평가나 계승없이 그렇게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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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필기자
: [2001-07-11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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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林정승 정인홍 <3> 민본정치 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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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암에게 있어 필생의 화두는 민본정치의 구현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평소 민(民)이 있는 연후에야 군주(君主)가 있고 민심(民心)이 견고한 후에야 나라가 편안하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사진설명-경남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의 정인홍 묘소. 인조반정후 역신으로 몰려 88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진 내암의 시신은 제자 정온(鄭蘊)이 수습,지금보다 북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묻었다. 사후 242년이 지난 1864년 후손들이 이장하기 위해 널뚜껑을 열어보니 의관이 썩지않고 핏자국이 선명해 내암의 원통함이 그때까지 삭지 않았음을 보여줬다고 전해진다.]
: 이는 스승 남명이 생전 주창해왔던 사상과 연원이 닿아 있다.
: 남명은 민암부(民巖賦)란 시에서 왕을 배(舟), 백성을 물(水)에 비유했다.
: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엎을 수도 있으며 백성은 군왕을 추대하기도 하고, 정권을 뒤엎기도 할 수 있다 고 설파했던 남명의 백성관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 전제 군주시대에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감히 꺼내기 힘든 말이기 때문.
: 16세기 조선사회는 지배층의 과도한 수탈로 농촌경제는 피폐해져 갔다. 당시 집권 세력들은 주자학적인 관념론에만 빠져 백성들의 삶과는 유리될 수밖에 없었다.
: 이 같은 실상은 임진왜란(선조 25년)을 전후해 더욱 심화돼 갔다.
: [사진설명-1618년 광해 10년 ‘국사는 더욱 어렵고 재상의 자리가 비어있어 경을 영상에 삼으니 급히 올라와 어려운 시국을 구하고 나를 도와주기 바란다’ 라는 내용의 영의정 부임 재촉 유지.]
: 내암은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일들이 고을 원이나 수령 등의 탐학이나 비리 때문에 일어난다며 ‘사의장봉사(辭義將封事)’ 등 각종 상소를 통해 이들 목민관에 의한 학정을 고발하며 줄기차게 개혁을 요구했다.
: 58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실상을 눈으로 확인한 뒤로는 그 같은 생각이 더욱 깊어졌으며 이들을 의관지도(依冠之盜•의관을 입은 도적)라고 까지 몰아세웠다.
: 내암은 백성을 여민(餘民)이라고 표현하며 이들 여민이 유리 방황하는 원인은 첫째 나라의 과도한 세금징수, 둘째 수령의 탐학과 부정이 횡행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 이를 위한 개혁으로 막대한 군량미를 명군(明軍)에 공급한 까닭으로 백성이 버텨낼 재간이 없게 됐다며 명군을 철병시키고 군대를 모집해 훈련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 전란이 끝났는데도 나라에 바치는 공물징수(貢賦)는 연산군때의 잘못을 따르는 것이니 이를 혁파해야 한다는 훈계도 잊지 않았다.
: 공토지(公土地)를 일정 비율로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농사를 짓게 해야 한다는 정책도 이때 내놓았다.
: 이 같은 주장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이다.
: 신분제도가 철저했던 당시 내암의 위민사상의 폭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 또한 명나라 군인을 철병시켜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 집권세력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사기에 충분했지만 훗날 광해군이 집권한 뒤 추진한 명, 청 사이의 효율적인 국방정책(등거리 외교)으로 이어진다. 광해군대의 치세로 꼽히던 자주국방정책이 이때부터 싹을 틔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인들의 군량미 확보를 위해 과도하게 식량을 염출하는 바람에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다. 여기다 명나라 군사들의 개인적인 노략질도 왜적 못지않았다. 임란사 ‘고대일록(孤臺日錄)’의 저자인 함양출신 정경운(鄭慶雲)은 자신의 일기에서 “1599년 1월14일. 영천길로 접어들었다. 길에서 중국인을 만났는데 작도(斫刀•풀이나 꼴을 써는데 쓰는 것) 등을 빼앗아 갔다. 모욕을 당한 것이 적지않으니 탄식할만하다”고 적고 있다.
: 여기다 내암은 이용후생(利用厚生•백성들이 사용하는 기구를 편리하게 하고 의식을 풍부하게 함)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백성구제를 위해서는 농업뿐 아니라 상공업 발전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 [사진설명-지난 95년 경북대에서 열린 내암 정인홍 재조명 학술대회.]
: 병사 수를 줄여 나머지는 농사를 짓도록 하고, 군현을 병합하는 한편 은광(銀鑛)을 개발하게 하며 전국에 시장을 열어 화물을 유통케 하라는 게 그것이다.
: 당시 은 광산은 국가 보호하에 있었고 명이 은을 과다하게 공물로 요구해 조정은 은이 채굴되지 않는다며 공물을 특산물로 올려 보냈던 것.광산채굴, 운송수단 개발, 상업장려, 시장확대 등은 16세기 시대상황으로 비춰 볼 때 경제정책의 대전환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 실제로 광해군(1609년)이 등극한 뒤 대동법(大同法•현물로 바치던 공물을 미곡으로 대신하게 한 정책)이 시행되고 암행어사를 수시로 파견, 관리들의 부정과 탐학을 근절시키는 한편 민간의 은광 개발을 허용했다.
: 내암이 꿈꾸던 개혁작업이 평소 그의 개혁관을 흠모해왔던 광해군시대가 활짝 열리면서 현실화되었던 것이다.
: 그러나 이 같은 민생 정책들은 성리학적 세계에 젖어있던 관료들의 몰이해와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에 떠밀려 끝내 좌절되고 만다.
: / 박동필기자
: / 도움말 = 정기철(합천 향토사학자)씨 / 대진대 권인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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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 선생의 `3걸론`
: 단재(丹齋) 신채호(1880~1936)는 언론인•독립운동가•민족사학자로서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 1880년 12월8일 충남 대덕군 산내면에서 고령 신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08년 을지문덕전과 이순신전 등을 집필, 계몽활동을 통해 전 국민의 항일운동에 불을 붙였다.
: 중국 상해 임시정부로 옮겨 항일투쟁을 계속하던 그는 1930년 4월 일경에 붙잡혀 10년형을 언도받고 만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기까지 조선상고사 등을 일간지에 연재할 정도로 학자로서 높은 풍모를 지켰다.
: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면회온 한 일간지 기자에게 “5천년 우리 민족사상 대표적 인물로 을지문덕, 이순신, 정인홍이 있다”며 “이 중 을지문덕과 이순신으로 부터는 행동과 정신을, 정인홍으로 부터는 그릇돼가는 현실에서 혁명적 정신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단재의 저 유명한 3걸(傑)론이다.
: 역적으로만 알려졌던 내암을 당시 대표적인 민족학자가 을지문덕 등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적인 영웅으로 꼽은 것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 또한 단재는 건강이 악화된 이후 ‘임꺽정’의 저자 벽초(碧初) 홍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가야천국고(大伽倻遷國考)와 정인홍공약전(鄭仁弘公略傳)의 원고가 자신의 죽음과 함께 영영 묻힐 것을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 “지금 구상중인 두개의 원고는 대가야천국고와 정인홍공약전이 있는데 이것이 지중(地中)의 물(物)이 되고 말지도 몰라 애석할 따름입니다.”
: 당시 단재는 옥중에서 6가야사와 함께 내암의 활동과 희생을 중심으로 한 조선 당쟁사를 집필하기 위해 사실상 구상작업이 끝난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 단재는 1936년(57세) 2월18일 뇌일혈로 쓰러져 끝내 숨졌으며 따라서 정인홍에 대한 재조명작업도 그만큼 늦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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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필 기자
: [2001-07-1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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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林정승 정인홍 <4> 임진왜란 의병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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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의병)가 서로 연결되지 못해 단편적이기는 했지만 아군(왜군)을 교란시켜 대병력을 전방에 집결시키지 못하게 만든 것은 주로 이 무리(의병)들의 봉기 때문이었다(1924년 발행 ‘일본전사•조선역본기부기’).”
: [사진설명-임란 당시 내암이 동문 제자들과 함께 창의했던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 소학당.- 박예손이 사위인 조선중기 대학자 김광필을 위해 지은 서재다. 김종직 문하인 김광필 정여창과 후일의 내암이 학문을 연마했던 유서 깊은 곳으로 현재 문화재자료 제137호로 지정돼 있다.]
: “아군의 팔도경략을 실패로 돌아가게 한 것은 안으로는 민중의 봉기(의병)이며 밖으로는 명군의 원병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전 나고야대 나카무라 에이코 교수(작고) 저서 ‘문록 경장의 역(임진왜란)’).”
: 일제 강점기 일본제국 참모본부와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맞서 항쟁했던 ‘의병’에 대해 내린 평가들이다.
: 임란 당시 의병의 활약상은 국내에서조차 명군(明軍)의 지원, 수군(水軍)에 비해 그 공적면에서 상대적으로 폄하 돼 왔고 관련 연구도 미진한 게 현실이다.
: 이에 반해 가해국 후손들이(일본) 조선정벌 실패의 원인을 의병의 활약상에 무게를 두고 있는 점은 주목할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 88고속도로를 타고 해인사를 향해 10여분을 달리면 내암이 후진양성에 몰두했던 합천군 가야면 부음정에 이른다.
: 다시 이곳에서 남쪽으로 틀면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 조선중기 거유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의 처가였고 학문을 닦았던 소학당(小學堂)에 당도하게 되는데 소나무 숲에 가려진 소박한 건물에서 기세가 느껴진다.
: 내암이 어린시절 글공부를 했던 이 곳은 임진왜란이 발발(선조 25년 1592년)하자 내암이 합천지역 동문, 문하생들과 함께 창의를 했던 역사적인 장소(당시 숭산동)로 더 유명하다.
: 이후 내암의 부대는 본진을 합천 야로의 주학정(住鶴亭)에 두었는데 군세가 3천여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한양에서 벼슬을 사임하고 후진양성에 매진하던 시기로 선생의 나이 57세 때의 일이다.
: 더불어 동문이던 고령의 김면(金沔), 전치원(全致遠) 등도 각각 창의해 합천 거창 고령 성산 등 경상우도 지역 의병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했다.
: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당시 전체 의병 2만2천9백 여명 가운데 경상우도의 병력이 절반에 가까운 1만 여명에 달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이 지역 의병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 사가들은 경상우도가 ‘남명학파’의 본산지로 연대가 잘된 것이 성공적 의병창의의 기틀이 됐다고 분석한다.
: 또한 우도가 좌도에 비해 땅이 비옥해 군량미 확보에도 용이한 점도 작용했다.
: [사진설명-임진왜란당시 정인홍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왜군을 크게 무찌른 낙동 강변 무계전투 현장. 내암의 후손인 정기철씨가 현장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 의병장 가운데서도 내암은 남명의 수제자라는 위치때문에 수많은 제자들이 의병으로 합류해 의병장 가운데서 눈부신 활약을 할 수 있었다.
: 창의하자 마자 합천 초계 삼가 성주 고령 등 5개 지역 의병대장에 제수됐던 내암은 임란전 산천초목도 떨게 했던 언관(사헌부 장령) 벼슬을 한 점 때문에 지방 수령과의 관계도 매끄러웠다.
: 합천 땅에서 벗어나 88고속도로를 타고 대구방면으로 가다 고령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빠져 나오면 얼마 안가 낙동강가에 닿는다.
: 경북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 이다. 이 곳은 내암이 의병을 일으킨 뒤 첫번째로 왜군을 격파한 전승지로 유명하다.
: 강 건너에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이 보이고 이따금 여름 철새 떼가 수면위로 미끄러지듯 나는 풍경속에서 400년 전 피비린내 나는 혈투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가 않았다.
: 고령 무계리 쪽 강변에는 현재 갈대가 무성한데 이 곳에 당시 왜군이 본토에서 각종 군 장비 등 보급품을 실어와 하역한 뒤 일선 부대에 전달하는 병참기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될 뿐이었다.
: “당시 낙동강은 현재보다 폭이 넓고 수량도 풍부해 나룻배가 운항됐죠. 이 때문에 임란 때 왜군은 이 강을 군사물자를 실어 나르는 주된 보급로로 활용했습니다.”
: 동행 취재에 나선 향토사학자 정기철(71• 내암 13대 후손)씨는“당시 고령까지는 웬만한 큰 배가 다녔기 때문에 일본이 쉽게 북진 할 수 있었다”고 당시 정황을 들려줬다.
: 왜군으로서는 이 곳을 사수하지 못하면 최일선 보급로가 끊겨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 조선을 침략한 제7군단인 모리데리모토(毛利輝元)군 산하 부대에 맡겨 병참기지를 수호케 했던 것이다.
: 당시 모리데리모토군은 3만 명의 대부대로 구성됐으며 경상도 땅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 당시 내암은 5월 중순부터 본진이 있던 야로를 출발해 6월 4~6일 무장 손인갑(孫仁甲)을 앞세워 이곳을 공격, 큰 전과를 올리게 된다.
: 내암은 이곳에서 관군의 지원을 받아 매복조와 공격조로 나눠 적진을 향해 돌진, 적장에게 중상을 입히고 왜적 140명을 살상하고 기지를 불태우는데 성공한다.
: 이 전투는 체계적 훈련이 안된 의병들이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이 아니라 보병으로 직접 왜병기지를 공격, 궤멸시킨 ‘공세적’전투였다는 점에서 인근 의병 부대들에도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 전쟁 초기 조선 관군의 궤멸로 의병에 대한 방비책이 전무했던 왜군으로서는 허를 찔린 전투였으며 이 전투 후 왜군들은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기세가 꺾여 주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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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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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총 위력에 관군 속수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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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 초기 왜군이 관군과의 교전에서 손쉬운 승리를 거두고 질풍노도처럼 북상할 수 있었던 것은 ‘조총(鳥銃•일명 철포)’이라는 신무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 조총이라는 이름은 ‘나으는 새도 맞힐 정도로 명중률이 뛰어나다’는 뜻에서 붙여졌는데 일본은 1543년 일본 최남단 섬인 타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한 포르투갈인에 의해 조총을 최초로 입수하게 된다.
: 당시 도주(島主)가 금화로 조총을 사들인 뒤 1년 만에 600정이 만들어졌으며 그 탁월한 성능때문에 전국시대 때 화살 대신 인마 살상용으로 보급이 크게 늘었다.
: [사진설명-지난 5월 문을 연 경남 합천 임란창의 기념관에 보관돼 있는 임란 당시 조총]
: 임란 때 왜군은 조총 3만 정을 가지고 조선을 침략했는데 위력은 최대 사거리가 500보, 유효사거리가 100~200보에 달했으며 총기 길이도 다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우리나라는 임란이 일어나기 몇 해 전인 1589년 3월 대마도주가 여러 자루를 선물로 바쳤으나 당시 조정에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 당쟁에 휩싸여 권력쟁탈에 혈안이 돼있던 조정 대신들이 국방에 관심을 가졌을 리 없었고 이는 곧 전국토를 전쟁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됐다.
: 선조때 재상을 지낸 유성룡(柳成龍)은 자신의 저서 징비록(徵毖錄)에서 그 막강한 화력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 “유효사거리나 명중률이 궁시(弓矢•화살)의 배가 된다. 궁시의 사거리는 100보 이나 조총은 수 백보다.”
: 조총이라는 신무기에 호되게 당한 조선군도 임진왜란이 끝난 뒤 뒤늦게 조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 왜군이 버리고 떠난 조총을 입수해 성능 등을 분석, 보다 나은 조총이 개발되는 등 조총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 북벌을 추진했던 효종(孝宗)임금 때 조총에 대한 개발이 괄목할 정도였는데 나선정벌에 나선 조선포수의 이름이 청나라까지 떨쳐질 정도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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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필 기자 dppark@kookje.co.kr
: [2001-07-18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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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林정승 정인홍 <5> 임란 안언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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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경남 합천군 대병면 성리 합천호 입구에 세워진 임란창의기념관 전경]
: 의주까지 피신했던 선조 임금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길 정도였다.
: “정암나루(곽재우)에서 군사를 날리매 도망하는 적이 넋이 빠졌고 무계전투(정인홍)에서 칼을 휘두르매 흐르는 송장이 강에 찼구나. 의사(의병)는 어찌도 그리 이기는고(난중잡록).”
: 선조가 경상우도 의병장들을 치하하기 위해 내린 교서의 한 대목으로 의병에 대한 애정이 절절이 묻어난다.
: 왜군은 무계전투(1592년 6월4~6일)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한번 내암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의해 치명타를 입게 된다. ‘임진왜란 의병사’에 길이 빛나는 ‘안언(安彦)전투(7월9~10일)’가 바로 그것.
: 낙동강에서 15리 정도 떨어진 경북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
: 비닐하우스가 하얗게 뒤덮은 이 들판은 평범한 시골마을이지만 400년 전에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 뱀처럼 꿈틀대는 야산 자락이 10여리나 이어져 일명 ‘사원동(蛇院洞)’이라 불리는 이곳은 보급품을 운반하는 왜군들이 자주 출몰했다.
: 적이 나타났다는 첩보를 입수한 내암은 2천8백 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잠복 중이었다.
: 무계전투 소식을 듣고 용기 백배한 합천•성주•고령•초계지역 의병들이 대거 합세했음은 물론이다.
: “400여명의 적이 무계에서 성주로 이동해 가는데 많은 짐을 싣고 깃발을 날리며 지나갔다. 때 마침 사수가 활을 쏴 적장을 맞혀 죽였다. 놀란 적은 대오가 무너져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난중잡록 임진 7월9일).”
: 전사(戰史)는 ‘죽은 시체가 서로 잇대고 흐르는 피가 들판에 가득했다’며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 이날 전투로 내암 휘하 의병들은 400여명의 적을 섬멸하는 대전과를 올리게 된다. 이후 왜병은 창녕 일대 육로와 낙동강 수로를 잃는 등 안전한 보급로를 잃고 전력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 당시 일본측 사료에 따르면 의병의 존재에 놀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파병 된 군사들에게 “조선에서의 강적은 관군이 아니고 의병이다. 그들을 가벼이 보지말라”는 경고를 하달했다고 하니 이 전투의 성과를 가늠할 수 있다.
: 내암부대는 거창의 김면(金沔)부대와 합세해 왜병이 주둔하고 있는 성주성(星州城)을 공격하는 한편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의 명령에 따라 포위된 진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정예부대를 파견할 정도로 사기가 충천했다.
: 이 과정에서 내암부대는 10월9일 단계(현 산청군)에 도착해 적병에 둘러싸인 전라도 의병 최경회(崔慶會) 부대를 도와 포위망을 뚫어주게 된다.
: [사진설명-임란 당시 의병이 사용하던 활과 칼 , 창모형 . 임란창의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 적의 진주성 공략이 심화되자 내암은 호남 의병장들에게 수 차례 격문을 보내 ‘무영남(無嶺南) 즉무호남(則無湖南)(영남이 없으면 호남도 없다)’고 역설하며 파병을 간곡히 호소한다.
: 내암의 호소에 힘 입어 전라도 의병 최경회와 임계영(任啓英)이 모두 3천 여명을 이끌고 거창과 합천으로 와 최초의 경상우도와 전라도 의병간 협공작전이 펼쳐지는 등 의병전투가 조직화 양상을 띠게 된다.
: 용기 백배한 내암군은 전라도 의병과 함께 성주성을 총공격, 적을 거의 섬멸했으나 전투에 참가한 관군 장수들의 비협조로 입성에 실패한다.
: 내암은 전투실패 책임을 물어 성주목사 제수(諸洙)와 고령현감 곽천성(郭天成) 등에게 곤장을 치게 한다. 의병장이 관군장수를 처벌한 대목에서 당시 내암의 위상이 엿보인다.
: 결국 왜병은 성을 버리고 퇴각, 내암부대는 반년간의 끈질긴 싸움 끝에 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 당시 왜군을 따라 내한했던 포르투갈 신부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왜군은 교두보인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데 300명, 서울에서 평양까지 500명 이상이 집단으로 가지 않으면 위험하다”며 의병을 경계하고 있다.
: 이후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서생포•웅천포•부산포•거제도•기장 등 남해안 8개 지역에 왜성을 축조하는 등 한반도를 영구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 그러나 왜군은 끈질긴 의병부대의 후방교란과 이에 지원군으로 온 명군, 조선 수군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은 뒤 1598년(선조31년) 11월26일 총퇴각하면서 7년간에 걸친 침략전쟁은 마침내 그들의 완패로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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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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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일록(孤臺日錄)은 내암 제자 정경운의 임란 종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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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전사 기록으로는 유명한 난중일기(亂中日記)와 함께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 용사일록(龍蛇日錄), 난중잡록(亂中雜錄) 정만록(征蠻錄) 등이 있다.
: 이중 난중일기와 경상순영록은 관군의 병영기록이며 용사일록, 난중잡록 등은 의병출신들이 관찰사 등 관군의 참모 자격으로 종사하며 적은 기록이다.
: [사진설명-내암 의병부대가 활동하던 당시의 지도 . 내암은 북으로는 경북 선산긿성주 , 남으로는 진주까지를 활동무대로 하며 왜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 최근에 발견된 ‘고대일록(孤臺日錄)’은 함양출신 선비인 고대 정경운이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의 참모자격으로 종군하다 임란 발발 당시부터 15년간 쓴 기록이어서 당시 함양•합천지역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정경운은 내암의 제자로 내암에 대한 지극한 숭모의 정이 잘 표현돼 있어 고대일록은 남명학파 의병활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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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일록에는 임란 당시 피난생활과 난에 대처하지 못한 정부에 대한 원망 등 전란의 참상이 고스란히 표현돼 당시 긴박했던 순간들이 400년이라는 시공을 넘어 그대로 전해져 온다.
: “흉적이 하도에 가득하다고 한다. 평소에는 군량을 모으면서 백성을 학대하더니 어지러운 지경이 되자 달아나면서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다’고 핑계를 댄다. 통탄할 일이다 (8월9일).”
: “왜적이 함양에 들어와 사방으로 흩어져서 분탕질을 하였다. 급히 보국암으로 들어갔다. 삼경쯤에 박승보 등이 쫓겨 절에 도착했다.”
: 또한 그는 이 과정에서 왜적에게 끝까지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딸을 조상하게 되는데 딸에 대해 애통해 하는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 “조카가 산에 이르러 정아(貞兒)의 시신을 찾았다. 아, 내딸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내가 처음 왜적 소식을 듣고 차고 있던 칼을 주면서 ‘만약 불행한 일을 당하면 적의 뜻에 따르지 마라’고 했는데, 흉적을 만나 당당하게 생을 버리고 절개를 온전히 하였구나. 곧 도다, 내 딸이여! 마땅히 전(傳)을 지어 기록해 두겠지만 의복을 다 잃어 몸을 염습할 도구조차 없어 통곡, 통곡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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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필 기자 dppark@kookje.co.kr
: [2001-07-25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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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林정승 정인홍 <6> 戊申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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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북파의 영수였던 내암은 끝내 인조반정으로 역적누명을 쓴 채 처형된다.
: [사진설명-경남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 기슭에 있는 조성좌의 묘 . 무신란 실패로 참형 된 뒤 후손이 수습해 묻었으나 200 방치됐다가 지난 99년 5월 무신란 봉기를 기념하는 묘비 제막식과 함께 묘역이 새롭게 단장됐다]
: ‘경’과 ‘의’를 신봉하며 세상을 변화 시키려 했던 그의 개혁작업도 그렇게 해서 물거품이 되고 만다.
: 내암에게 덧씌워진 죄명은 폐모살제(廢母殺第).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내몰고 인목대비를 폐비(서궁에 유폐)시켰다는 것이었다.
: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로는 내암은 인목대비 유폐에 간여한 바가 없으며 역적모의 혐의를 쓴 영창대군에 대해서는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까지 올리는 등 영창대군의 구제에 노력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반정세력이 내암을 죽인 것은 남명의 기개를 빼닮은 내암을 제거해 후환을 없애고 나아가 서인정권을 구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풀이되고 있다.
: 내암이 쓰러진 후 남명학파 문인들은 탄압과 좌절 속에 초야에 묻히거나 일부는 퇴계 문하로 흡수되기도 한다.
: 그나마 가냘프게 이어지던 남명학파의 명맥이 끊어진 것은 영조 4년 무신년(戊申年•1728년)에 터진 무신란 때문이다.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도 불리는 무신란에 남명학파 후예들이 적극 가담하는 바람에 치명타를 입게 된다.
: 송태산 자락에 위치한 경남 합천읍 서산리 보림마을. 푹푹 찌는 무더위 속에 녹색 물결의 벼논이 앞을 가로막는다.
: 이곳이 바로 무신란때 조성좌(曺聖佐)가 4천명의 부대를 이끌고 관군과 팽팽하게 대치하던 곳이다.
: 만석꾼이던 조성좌는 이해 3월21일 고향 묘산에서 정좌(鼎佐) 덕좌(德佐) 형제들과 거병, 마령재를 넘어와 합천군 관아를 점령하기 위해 주둔 중이었다.
: 병사 중에는 과중한 세금 등 학정에 시달리다 못해 참여한 양민 노비도 포함됐다.
: 때마침 충청에서 최초로 난을 일으켜 함께 한양으로 진격키로 했던 이인좌의 부대가 관군에 의해 진압됐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 이인좌는 청주성까지 함락하며 승승장구 했으나 관군에게 대패한 뒤 사로잡혔고 이는 전체 무신란 참여부대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 대세가 기울었음을 눈치 챈 일부 무장들에 의해 4월 1일 조성좌 형제가 붙잡혀 참형 당함으로써 합천 무신란은 좌절되고 만다.
: [사진설명-내암 정인홍이 영창대군의 신원을 호소하는 상소에 대해 광해군이 내린 유지 . –
: 경이 먼 곳에 있으므로 듣는 것이 보는 것만 못하니 올라와서 일에 따라 바로잡아 주도록 힘쓰라 . 차자 궁중에 두고 수시로 보겠다 는 내용으로 내암을 곁에 두고 싶어했던 광해군의 마음이 묻어난다 .]
: 조성좌가 거병하기 하루전인 3월 20일에는 이 곳에서 60여㎞ 떨어진 안음 고현(현 거창군 마리면 대정리)에서 정희량(鄭希亮)이 거병해 안음현을 함락한 뒤 죄수들을 풀어주고 양곡을 나눠주며 자신의 군대를 의병(義兵)이라 칭하게 된다.
: 정희량은 안음 현감에 신수헌(愼守憲)을, 함양군수에 최존서(崔存瑞)를 각각 임명하며 위세를 떨치게 된다.
: 이후 그는 고군분투했지만 4월3일 끝내 관군에 붙잡혀 참수되면서 17일간의 무신란은 막을 내린다.
: 무신란은 전국적으로 20만여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는 대목에서 거사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무신란이 발생한 표면적 이유는 노론계층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소외계층의 확대였다. 특히 노비 양민들이 대거 참여한 것은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항거하는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 당시 기록에는 전라도 변산반도의 노비 층이 9천 여명, 영남의 토적(도적떼)이 2만 여명이나 참가하고 있다고 적혀있어 이를 말해준다.
: 합천 하동 등 경상우도에서만 7만 여명이 참여했다는 기록에서 이 지역에 대한 홀대와 차별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 무신난 주모자와 가담자중에는 내암의 제자와 후손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
: 정희량은 내암의 수제자였으며 내암이 참형되자 시신을 수습했던 동계(桐溪) 정온의 고손자이고, 조성좌는 남명의 제자이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도촌(陶村) 조응인의 5대손이다. 이밖에 합천 삼가현에서 거병한 허련(許璉) 윤종영(尹宗英) 임한성(林漢成)등도 내암의 제자나 문인의 후손이었다.
: 난 진압 후 수천 명이 죽음을 당했으며 주모자의 식솔들은 처형되거나 노비로 전락하고 재산은 몰수됐다. 난 진압에 공을 세운 공신이 노론을 중심으로 9천명에 달할 정도였다.
: 이후 50년간 경상우도 출신은 과거를 볼 자격도 주어지지 않는 정거(停擧)에 처해지게 된다.
: 집권노론 세력들은 1780년(정조 4년) 대구에 영남지역 난 진압을 기념하는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우고 경상우도 지역을 이른바 역적의 고을, 반역향(反逆鄕)으로 격하시켰다.
: 영조실록을 통해 경상우도에 대한 탄압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 “안음 합천은 낙동강 오른쪽의 궁벽한 고을로서 정인홍의 악취를 남긴 곳이기에 정희량 조성좌 같은 흉역의 무리들이 출생했다(영조 9년).”
: “이황의 경상좌도는 단란한 기풍이 남아있으나 경상우도는 조식이 살았기 때문에 기개와 절조를 숭상해 나쁜 풍습이 되었으며 그 폐단으로 조식의 제자에 정인홍이 있었다(영조 13년).”
: 이인좌 조성좌 정희량 등에 의한 무신란은 소론과 노론의 권력다툼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학계 연구다. 1721년 경종때 일어난 신임사화로 피해를 당한 소론일파가 노론을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정변이라는 것이다.
: 합천 이씨문중의 이우열씨(60•합천 향토사학회원)씨는 “조성좌가 거병하자 당시 합천 군수 이정필이 진주로 달려가 군사를 청하는 한편 이태경 함만중 김개 등 53명의 창의장들이 300여명의 민중을 독려해 조성좌 일파를 물리쳤다”고 밝혔다. 이씨는 또 “무신란 평정후 조정에서 이태경 등 3인에게 양무공신 1등의 품계를 내렸다”고 덧붙였다.
: 무신란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가들의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무신란이 남명학파에게 결정적 타격이 된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난은 비록 평정됐지만 평안도 농민전쟁, 진주 거창 단성 임술 농민항쟁, 동학혁명 등 조선후기 농민운동으로 줄기차게 이어진다. 무신란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향후 사회개혁운동과 민중봉기의 깃발이 힘차게 나부낄 수 있도록 하는 밑거름이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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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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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찬용씨 `무신사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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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긴 자의 역사만 정사(正史)로 남고 패한 자는 난(亂)으로 폄하될 수 밖에 없지만 무신란은 당시 사회적 모순에 대한 불만이 일시에 분출된 대규모 민중봉기라는 차원에서 새롭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조선 영조때 발생한 무신란에 가담했던 조성좌의 6세손인 조찬용(46•경남도의회 전문위원•사진)씨는 합천 거창지역 무신란에 대한 ‘진실찾기’에 대해 옛날의 기억을 되새긴다.
: 어린 시절 운수업을 하던 부친(73년 작고)은 조씨에게 ‘무신란’과 ‘역적 집안’에 대한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다. 그리고 이야기 끝 무렵에는 항상 ‘누명을 썼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 귓전을 맴돌던 무신란에 대한 기억이 조씨의 ‘역사 바로세우기’ 노력으로 이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지난 96년 도의회 전문위원이 된 조씨는 부친의 살아생전 이야기가 ‘사명’처럼 떠올라 소실된 ‘역사 잇기’에 나서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 역적에 대한 기록이나 유품은 상당부분 폄하되거나 소멸돼 고증에 어려움이 컸지만 틈 나는대로 후손들로부터 증언을 듣거나 부족한 자료를 수집하는 방법으로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 “비전문가로서 5년 여 작업 끝에 지난 2월 ‘1728년 무신사태 고찰’이라는 책 1천8백부를 펴내고 초판을 받아 쥐었을 땐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 조씨가 개인 호주머니를 털고 주류업을 하는 형의 도움으로 펴낸 책은 학계로부터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조씨가 책을 펴내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역적’ 낙인이 찍힌 사람은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면 기록조차 없다는 점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각고의 노력으로 거창•합천지역 봉기 의병의 상당수 가계도를 밝혀내는데 성공했다.
: 조사과정에서 후손들로부터 “왜 쓸데없는 일을 하느냐”며 오해 아닌 오해도 샀으나 개의치 않았다.
: 그는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무신란은 조선후기 정치체계와 권력구조의 모순에 의해 일어난 의리명분 논쟁의 한 양상이면서 동시에 대규모적인 권력투쟁의 표출이기도 했다’고 정의하며 무신란 재조명이 시작되고 있어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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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필기자
: dppark@kookje.co.kr
: [2001-08-01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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