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는 도올 6회, 부패 4인방과 권력 무상

by 정순영 posted Mar 2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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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나는 도올 6회, 부패 4인방과 권력 무상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한 시진핑은,

부패호랑이로 불리는 4인방을 포함하여 고위직 99명을 척결한다.

0 부패 4인방은

1) 전 중경시 서기 뿨시라이 (박희래, 薄熙來) bó xī lái

2) 전 당 중앙판공청 주임인 권력의 실세 링지후아 (령계획 令計劃) líng jì huá

3) 전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 쉬차이허우 徐才厚 xú cái hòu

4) 전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저우용캉 周永康 zhōu yǒng kāng

1. \'호랑이 사냥\' 의 기폭제가 된 사건이 있으니 바로

<페라리(차량) 전복 사건> = ferrari는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2012년 3월 18일 새벽 4시 10분

북경 북쪽의 중관촌 부근 보복사교 근처에서

달리던 페라리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9억짜리 차를 몰았던 남자는 젊은 북경대 대학원생이 었는데

두명의 아리따운 여대생과 동승했다.

사건당시 남자는 하의 탈의, 여성들은 전신나체상태로 젊은 남자는

즉사하고, 여성들은 큰 부상을 입는다.

\'페라리 차량 전복 사건\' ( ferrari 이탈리아 스포츠카 브랜드)의 주인공은 링꾸(令谷, 사고 당시 24세), 링꾸의 아버지는 링지후아(=링지화)

링지후아는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2007~2012)이다.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 중앙위원회 총서기의 비서, 경호, 정보관리의 기관으로 우리의 청와대 비서실+경호실+국정원에 해당한다.

이 당시 (2007~2012) 주석은 후진타오 (胡錦濤 | hú jǐn tāo )였지만

중국의 실세 NO.1은 링지후아 판공청 주임 이다.

중앙판공청은 당내 모든 정보의 집합소로 중국공산당 내 모든 정보를

통제하며,\'특수부대 8341\'을 지휘 한다.

- 8341부대 : 청와대 경호실 격인 부대로 중국 공산당 요인 경호를 담당.

링지후아는 후진타오 전 주석이 발탁한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출신의 핵심인물이다.

그는 \'페라리사건\' 의 피해자들을 보상금 3,000만위앤 (한화 55억원)으로 입막음하고

기사 삭제, 검색어 차단으로 은폐하려 했지만 스마트폰 + SNS 로 사건은 세상에 알려진다.


\'페라리 사건\' 은 2012. 3. 15 \'뿨시라이 중경시 당서기 해임 스캔들\' 사흘 뒤인 3월 18일에 발생하는데

연이어 터진 이 사건이 오늘의 시진핑을 만들었다!?;

- 부패척결을 제1로 삼게 된 계기

부패호랑이 신4인방

중경시 당서기 뿨시라이 가 실각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뿨시라이가 중경시 당서기에 있을 때

홍선전화 紅線電話 홍시앤띠앤후아 를 도청했다는 것이다.

뿨시라이가 국가주석의 통화를 도청했다는 것으로, 뿨시라이 실각의

결정타. 도청사건!!​(이게 왕리쥔의 증언으로 밝혀짐)


- 홍선전화​ : 국가주석, 총리, 고위간부들이 사용하는 기밀전화,
전자신호를 막아 도청을 통제한다 ;국가 주석의 핫라인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중앙판공청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데,

중앙판공청 주임 링지후아와 뿨시라이​가 연결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구체화되고 있을 때 \'페** 사건\' 발생​

링지후아는 후진타오가 발탁한 공청단 (공산주의청년단)의 핵심인물이었지만,

후진타오의 임기가 곧 끝나니까 새로운 권력 연줄을 찾는다.

그리고 뿨시라이에게 붙어 후진타오 전화 도청을 돕는다.

이는 명백한 반역.

그런데 왜 도청했을까?

청홍타흑 정책 즉, 공산주의를 예찬하고 범죄와 부패를 척결하자는 뿨시라이의 핵심정책으로 인민의 엄청난 인기(영웅)를 얻는데

뿨시라이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도청뒤에 숨겨진 음모는?

2010년 12월 당시 중국 국가부수석 시진핑은 중경시로 시찰을 가서

당서기 뿨시라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중경의 청홍타흑은 위대한 운동, 전국으로 확산해야 한다!\"

2. 꾸쥔산 谷俊山 은 전 중국 인민 해방군 총후근부(人民解放军总后勤部) 부부장으로 부패의 인물이다

- 그의 별장에서 순금 모택동 흉상, 군 상부에 수많은 미녀들 상납,

마오타이주 1만병(18억원), 금괴 박스 무더기 등 압수

- 당시 뇌물 실태 ; 군대 입대시 뇌물 6만 위앤(우리돈 천만원 ;군에 뜻이 있어도 돈 없으면 입대 불가), 하급 간부 승진시 50만 위앤(9천만원,군에서 능력 있어도 뇌물 마련을 못 하면 진급 불가), 장군 승진시 3천만 위앤(53억원) 등 어마 어마한 부패가, 뇌물이 보편화

* 도올이 중국서 1달 강의료가 5천위앤(90만원, 정교수급 봉급,주 20시간 강의)

- 인민해방군 소위~ 준장 월급이 3천위앤(50만원)~ 9천위앤(150만원)

- 총후근부 : 군수지원과 국방건설 업무을 책임지는 부서, 군수 납품 등 자금줄, 돈 덩어리 노른자리

3. 당시 제7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후진타오 (胡錦濤 호금도| hú jǐn tāo:재임 2004.9월~2012.11월)이지만,


그러나 중앙군사위원회(군부의) 실권자는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쉬차이허우 徐才厚

0 이러한 군 부패의 최정점에 있던 인물은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쉬차이허우 徐才厚

- 쉬차이허우​의 주택을 압수 수색한 결과 천문학적 규모의 부정 축재.

보물을 옮기는데 군용트럭 10대가 동원됐고,

지하실에 있는 위앤화, 달러, 유로 등 현금만 1톤이었다.​

부패의 몸통 쉬차이허우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앉힌 사람은 바로,

지앙쩌민 (강택민 江澤民 jiāng zé mín ) 주석이었다.


쉬차이허우의 고향은 랴오닝 성(遼寧省) 항구도시 따리엔​(大連 대련)

뿨시라이는 1992년~2000년 따리엔시 시장으로 재임하면서 ​

쉬차이허우와 각별한 인연을 맺는다.

이둘의 연결고리는 지앙쩌민 (강택민)의 신임, 부패, 중국판 상납 피라미드였다.​

신 4인방을 비롯 부패관료들의 최정점에 있던, 25년간의 무한권력을

누린 지앙쩌민(강택민)

지앙쩌민의 권력은 어마어마한 상납을 통해 유지되고 있었다​

제6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지앙쩌민 (江澤民 jiāng zé mín 강택민:재임1989.11월~2004.9월)이

제7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후진타오 (胡錦濤 호금도| hú jǐn tāo:재임 2004.9월~2012.11월)에게 자리를 넘겨주지만(8년간 실권을 행사하지 못함)

실권은 측근에게 인계하여,

군실권을 장악한 지앙쩌민 (강택민)의 섭정​인 것이다.​

0 중국서 은퇴를 퇴휴 退休 ( 투이씨우, tuìxiū )라 하는데 강택민은

\'물러나도 은퇴가 없다\'라는 뜻의 退而不休 tuì ér bùxiū 상태에 있었다

4. 저우용캉(周永康)​은 정치국 상무위원, 국무원 공안부장, 중앙정법위 서기로 실세 중 실세다.

- 강소성 무석 촌구석에서 돼지 기르며 살았던 저우용캉은 북경석유대학 지구 물리 탐사과를 전공하여

1970년대 대경유전 지질대 기술자로 활약​하여 큰 부를 모은다 (중국판 만수르...)

황제와 같은 권력을 ​누렸던 저우용캉은 14억 인구 중 서열 9위.

부와 권력을 모두 지니게 된다.

​그 또한 지앙쩌민파(강택민)​

후진타오가 직접 선발한 링후지아<페**사건> 마저...​ 지앙쩌민 라인으로 들어간 것이다.​

​0 후진타오는 지앙쩌민파들로 둘려싸여,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조용히 임기를 지낸다.


0 230만 군대를 지휘하는 쉬차이허우 徐才厚 ; 서재후

200만 무장경찰을 지휘하는 저우용캉 周永康 ; 주영강

중앙판공청 링지후아 令計劃 ; 령계획

인민의 폭발적 지지를 얻은 뿨시라이 薄熙來 ; 박희래

이 네명은 모여서 뭘하려고 했을까?

중국의 \'정변\' \'쿠테타\'​를 기획한다.

바로 시진핑, 리커치앙의 체제를 전복하려한다.​​

2012년 3월 19일 신4인방은

무장경찰을 동원해 종난하이에서 정변을 시도한다.​

- 종난하이 中南海 Zhōngnánhǎi ; 베이징(北京) 시청취(西城区)의
호수와 그 주변 지역으로, 중화 인민 공화국 성립 후 중국 공산당 중앙과 국무원 소재지


​부패, 뇌물, 국가정변 급박했던 정국에서 출범한 시진핑 체제는

​\"나는 호랑이든 파리든 다 때려잡을 겁니다\" 라는 취지하에

​뿨시라이 - 중국 최대 정치스캔들: 무기징역​

저우용캉 - 국가기밀누설: 무기징역​

링후지아 - 배신 배반: 당적, 공직박탈, 의법처리중

쉬차이허우- 군 부패의 몸통: 구금수사중 병사​​

천추의 한을 느낀 주석 후진타오는

2012년 중국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

시진핑에게 당 총서기 + 당 군사위원회 주석 을 한꺼번에 정권 이양한다.

권력자가 이렇게 중차대하고 큰 자리를 인계하면 보통은 몇번은 사양하기 마련인데, 시진핑은 단번에

\"당 역사의 획기적 사건, 지도부의 숭고한 인품과 절조를 나타내는 것이다. 감사히 받겠다\"...고 한다

​2013년 후진타오 국가 주석직 퇴임으로 시진핑 체제는 시작된다.

후진타오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명예직 뿐이었던 인내의 세월 10년 후 모든 상왕정치는 여기서 끝내야한다며

지앙쩌민(강택민)을 껴안고 논개처럼 희생하여

시진핑의 시대를 열어준 것이다.​

0 또한, 후진타오는 퇴임전(정권 이양 이전)에 무소불위의 상왕정치를 하는 강택민의 다음 대표적 비리에 대해 폐쇄조치를 함

1) 강택민은 심한 매연을 피해 아름다운 북경에서 북동쪽으로 약 67km 떨어진 회유구(怀柔区 화이러우취 huái róu qū ) 옌치후(雁栖湖,안서호 ; yàn qī hú ; 풍광이 아름다워 APEC 정상회담의 장소로 알려진 곳)

에 인공호수를 만들어 뱃놀이 하던 어마어마한 강택민의 별장을 폐쇄조치

2) 종난하이 빠이따러우 八一大樓 집무실을 폐쇄조치

강택민 전 주석은 2004년 군사위 주석에서 물러났지만 주석 재임 당시와 거의 같은 크기의 집무실을 ‘중국의 펜타곤’으로 불리는 군사위 청사 ‘팔일대루(八一大樓)’에 남겨둬 군에 대한 변함없는 영향력을 과시, 유지했으며 여러 명의 비서도 배속됐다

​이렇게 질주하던 시진핑 체제에 닥친

친인척 부패 스캔들, 매형의 해외 재산은닉 의혹.

시진핑 본인의 함정이 될 수 있는 친인척의 비리까지 스스로 척결해야만 할 것이다.​​

0 도울은 부패에 대해 말한다.

- 부패는 인간이 쉽게 빠져드는 재미니라

자신의 진짜 재미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부패가 들어갈 틈이 없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부패가 침투할 수 없는

자기 인생의 진짜 재미를 발견해라!​​


이번 6강에서 중국의 부패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도올이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부패는 중국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부조리와 부패는 인류의 보편적인 과제이기에

우리를 항상 반성하면서

젊은이들이 이 땅의 역사를 어떻게 만들어 갈까 고민해야 하며

민주주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민주주의를 만들어서 성숙시켜야 하는 것이다.

민주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바로 선거

선거를 빼고 민주를 논하지 말라.

우리 삶에서 배제돼 버린 정치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

정치인을 향한 \'카더라\' 통신

그게 본인의 책임인 줄은 모르고 착각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국민에 의한 지배를 뜻한다.

다스림의 주체는 민중.

일반 대중의 여러 가치관이 같이 성숙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올은 젊은이들에게 외친다.

\"헬조선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어.

정치인들이 노인이 많은 곳에서 유세하는 이유는

젊은이들을 위한 정치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

젊은이들은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고,

정치에 배제 되어 떨어져 있으면 마치 자기가 깨끗하고 잘하고 있는것

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래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할수 없다

낮은 투표율의 젊은 세대,

헬조선을 가슴 아프게 외쳐야지.

난 헬조선에서 20년이면 끝나지만

젊은이들은 70~80년을 살아야 해.

누가 책임이 있냐?

헬조선은 오히려 당신들이 만들고 있는거야!

정치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정치적 이슈에 참여하고 자기것으로 만들고

역사의 진로를 당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란 말이야\"

​* 위 글은 \'생각하는 부엉이\' 블로그의 <생각대로>님 글을 모셔와서 제가 약간 보완한 내용입니다


< 다음 내용은 2015. 8. 5 \'문고리 권력의 두얼굴\"(경향신문) 기사를 편집한 내용>

2011년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중국은 연중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 전국정치협상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후진타오 주석에게 일본 지진 발생 1보를 전한 사람은 링지화(令計劃)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이었다. 후진타오 주석은 보고를 받고는 옆 자리에 앉아있던 원자바오 총리와 얘기를 건넨 뒤 옆에 서 있던 링지화 주임에게 후속 대응 조치를 지시했다. 최고 지도자의 손과 발 노릇을 하는 게 중앙판공청 주임의 역할임을 당시 양회를 취재하던 전세계 언론에 공개한 셈이다.

 링지화 전 중앙판공청 주임은 한때 최고 권력까지 넘볼 정도로 막강한 문고리 권력이었다. 하지만 2012년 3월18일 새벽 일어난 외아들 교통사고로 모든 것이 끝났다. 외아들 링구(令谷, 사고 당시 24세)는 고급 스포츠카 페라리에 여성 2명을 태우고 베이징 도심을 질주하다 가드레일을 들이받으면서 현장에서 숨졌다. 그해 가을 지도부 개편에서 정치국 위원이나 아니면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까지 넘보고 있던 링지화로서는 서둘러 불미스러운 사고를 숨겨야 했다.

그러면서 당시 경찰을 지휘하던 저우융캉 중앙정법위 서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아들 자동차 사고를 덮어주는 대가로 저우융캉과 일종의 밀약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서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서 교환하고 유사시 거사를 도모하자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경찰의 초동 수사에서는 민원 덕분에 아들의 이름과 나이, 신원을 숨길 수 있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가면서 모든 것이 드러나고 말았다. 교통 사고를 숨기기에는 베이징 도심에서 일어난 사고여서 목격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링지화는 아들 교통사고 은폐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12년 9월1일, 중앙판공청 주임에서 물러나 한직인 중앙통전부 부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해 가을 지도부 개편에서 국가 지도자인 전국정협 부주석을 새로 맡으면서 외견상으로는 승진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상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2014년 6월19일, 그의 둘째형이며 산시성에서 간부로 오래 지냈던 링정처(令政策) 당시 산시성 정협 부주석이 기율위반과 위법 혐의로 당의 조사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도 그에 대한 재판은 시작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후 링지화 고향인 산시성 출신 성장, 부장(장관)급 고위 간부들이 9명 잇따라 비리혐의로 낙마했다. 곁가지에 대한 조사가 모두 마무리 된 뒤 2014년 12월22일, 중앙기율검사위가 불법 기율위반 혐의로 링지화를 전격 체포하면서 그의 정치적 생명은 끝이 났다.

 지난 7개월 동안 강도높은 조사 결과, 링지화는 모두 6가지 죄목이 확인된 상태로 쌍개 처분(출당 처분, 공직 박탈)을 받고 2015년 7월20일 사법기관으로 신병이 넘어갔다. 그에 대한 첫번째 죄목은 당의 정치기율, 정치규칙, 조직기율, 비밀 유지기율 위반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독자적인 정보망을 구축했다. 고위 지도부 주변 인사들을 매수하고 도감청을 통해 후진타오 주석을 비롯한 고위층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보시라이 전 충칭직할시 서기가 왕리쥔 공안국장을 통해 충칭을 찾은 당 지도부 인사들의 전화 도청을 했던 것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그가 우리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인 중앙판공청에 들어간 것은 1995년. 당시 중앙판공청 조사연구실 3팀에 처음 배치를 받았다. 이곳에서 정보수집 일을 맡았다. 이를 계기로 자기 나름의 정보망을 구축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두번째 죄목은 직무상 편의를 봐주고 본인이나 가족을 통해 어마어마한 뇌물을 챙겼다는 점이다. 그동안 알려진 바로는 천문학적인 규모인 15조원의 뇌물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정확한 수치는 재판을 통해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세번째 죄목은 불법으로 당과 국가의 핵심기밀을 대량으로 빼돌렸다는 것이다. 그는 2012년 8월 중앙판공청을 떠나면서 120건이 넘는 자신과 가족들과 관련한 비리와 부정을 고발한 문건 원본을 없애버렸다. 그는 업무인계 과정에서 야근을 한다면서 사무실에 남아 화공약품을 이용해 관련 문건을 없앴다. 하지만 그의 근무복에 화공약품이 묻어있었고, 이를 세탁하던 관리인들이 상부에 보고하면서 이런 일탈 행동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이밖에 그는 70건이 넘는 기밀 문건을 빼돌리고 20건이 넘는 문건을 외부로 유출하면서 근무일지를 조작한 혐의도 받고 있다.

특히 그는 2014년 가을 미국으로 도망친 막내 동생 링완청에게 2700건의 기밀 문건을 넘겨준 혐의도 받고 있다. 링완청은 신화사 통신 기자를 지내다 2000년부터 기업가로 변신해 자동차, 통신, 골프장에 손을 댔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시에라네바다 산맥 기슭의 호화 주택에서 국영 CCTV 앵커 출신인 아내와 생활하고 있다. 미국에서 골프장도 2개를 인수했다. 그가 매입한 호화주택은 총면적 2.5에이커, 건축면적 725제곱미터로 250만달러(약 30억원)을 주고 미국 프로농구선수 베노 우드리히로부터 사들였다. 중국 당국은 링완청의 귀국을 위해 미국 정부와 접촉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갖고 있는 기밀 문건의 중요성으로 볼 때 미국이 서둘러 그를 중국으로 보낼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일각에서는 링완청이 형인 링정처 체포 이후 한때 당국에 출두해 조사를 받다가 돌연 출국할 수 있었던 것은 내부의 도움. 이를테면 국가안전부, 공안, 중앙기율검사위, 중앙판공청, 중앙선전부, 무장경찰과 같은 관련 부처에 남아있는 링지화나 저우융캉 측근들의 도움이 없이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링지화의 네번째 죄목은 청렴자율규정을 어기고 본인이나 아내가 재물을 챙긴 것이다. 이것은 두번째 죄목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그의 아내인 구리핑(谷麗萍, 58)이 경영 활동을 하면서 부당한 이익을 챙긴 것을 들 수 있다. 구리핑은 남편이 중앙판공청 주임을 떠난 뒤인 2013년1월, 중국 청소년궁(청소년궁은 청소년센터로 보면 됨)협회 부회장을 물러났다. 그리고 잉(瀛) 공익기금회 상무부회장, 중국청년창업국제계획(YBC) 총간사(사무총장)도 물러났다. 구리핑은 IT기업을 운영하거나 이런 기구를 운영하면서 링지화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기업인들이나 간부들의 뇌물을 챙겼다.

 눈에 띄는 죄목은 다섯번째 다수 여성과의 간통이다. 홍콩 언론 보도에 따르면 링지화는 1999년 10월 중앙판공청 조사연구실 주임으로 발령을 받은 뒤 오랫동안 중앙 각부처를 시찰하거나 순시한다는 명목으로 고급 클럽이나 대외적으로 공개를 하지 않는 호텔에서 미모의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이들 여성은 대부분 CCTV 앵커나 기자들이었다. 링지화가 체포되면서 CCTV 펑줘(馮卓) 정치부(중국식 표현으로는 시정신문부) 차장, CCTV 유명 앵커 어우양즈웨이(歐陽智薇)와 내연 관계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는 중난하이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면서 평균 1주일에 2번, 새벽 3시쯤 외출을 하고 오전 7시에 다시 사무실로 출근했다.

그는 2007년 11월 중앙판공청 주임겸 중앙서기처 서기로 승진한 다음에는 일이 너무 많아 외출하기가 쉽지 않자 아예 정부情婦를 중난하이 안에 있는 초대소(호텔과 같은 숙소)로 불러 밀회를 즐겼다. 초대소 숙박부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지도자 가족>이라고 거짓으로 기재하고 말이다. 링지화의 정부는 모두 27명이라고 한다. 이중 7명과는 정기적으로 동거를 하고 있었다. 이들 사이에 5명의 혼외 자녀를 두었다. 이런 내용은 중앙기율검사위가 압수수색으로 찾아낸 링지화 일기에 따른 것이다. 링지화는 정부들과 관계를 끊을 때는 합의금을 두둑히 주었다.

2003년 7월부터 2012년 2월까지 7명의 정부에게 적게는 6백만 위안(11억2천만원)에서 많게는 1천2백만 위안(22억6천만원)까지 헤어지는 대가로 돈을 주었다. 모두 4200만 위안(약 80억원)이 넘었다. 아내인 구리핑도 가만히 있을리 만무했다. 그는 모두 4명의 情夫가 있었다. 이중에는 그보다 20년 연하인 CCTV 유명 앵커 루이청강(芮成鋼)이 있었다. 루이청강 앵커는 구리핑과의 관계를 이용해 링지화의 정보망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정치, 경제 정보를 얻었고 이것을 외국 정보기관에 넘겨주었다. 현재 루이청강 앵커는 간첩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앞두고 있다. 민성은행 은행장을 지낸 마오샤오펑(毛曉峰)도 구리핑의 정부이다. 마오샤오펑 당시 민성은행 행장은 구리핑을 민성은행 산하 자회사에 일자리를 주고 3년 동안 월급을 주었다.

 링지화 구리핑 부부는 서로 소통이 안된다면서 그동안 2차례 이혼을 중앙조직부에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리위안차오 중앙조직부장은 결정하기 어렵다면서 중앙서기처로 넘겼고 시진핑 상무서기도 선뜻 결정을 하지 못하고 다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로 넘겼다.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래도 이혼을 승인하지 않았다. 결국 부부는 맞바람을 피우면서 파국의 길로 걸어갔다.

 링지화는 1956년 북부 산시(山西)성 윈청(運城)시 핑루(平陸)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링구예(令孤野)는 한약방을 하다가 나중에 의술을

배워 공산당에 투신해 산시(陝西)성 옌안에서 군의관으로 일했다.

산시성 간부요양원 부원장을 지낸 처장급 중간 간부였다. 링구는 북방 소수민족의 성씨로 쓰기가 불편해 나중에 아이들의 성은 링으로 통일했다. 자녀 4남1녀 이름을 당시 신문에 자주 나오던 단어를 사용해 순서대로 지었다. 방침(方針), 정책(政策), 노선(路線), 계획(計劃), 완성(完成)이다.

맏아들 링팡전(방침)은 1950년생으로 1970년대 우연한 추락사고로 숨졌다. 둘째아들 링정처(정책)는 1952년생으로 고향인 산시성에서 줄곧 공무원으로 일했다. 산시성 발전개혁위원회 주임을 지낸 뒤 산시성정치협상회의 부주석으로 있다가 비리 혐의로 지금 당의 조사를 받고 있다. 셋째이며 유일한 딸인 링구루셴(노선)은 1954년생으로 산시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이다. 고향인 산시성 윈청시의 중심의원 간부로 있다. 유일하게 가족중에서 화를 피한 경우다. (예외적으로 원래 성인 링구를 쓰고 있다). 링구루셴 남편 왕젠캉(王健康)은 산시성 윈청시 부시장으로 있다가 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링지화는 넷째 아들이다. 그는 후난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핑루현에서 공청단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1979년 베이징의 공청단 중앙위원회 선전부 판공실로 가면서 인생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가 베이징으로 간 것은 아버지의 상관이었던 보이보(박일파) 전 부총리가 끌어준 덕분이라는 후문이 있다. 보이보 전 부총리는 보시라이 전 충칭직할시 서기 아버지이다. 공청단 중앙위원회에서 깔끔한 일솜씨를 인정받아 1995년 중앙판공청으로 스카웃되면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본인과 아내, 처남과 처제가 구금돼 사법처리를 기다리고 있는 신세로 전락했다. 링지화 전 주임은 사건이 불거지기 전 멘토였던 후진타오 전 주석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나쁜 짓을 할래도 할 시간이 없었다고 외쳤지만 결국 이런 신세로 전락했다. 링지화에 적용한 죄목에서 정치규칙 위반, 국가기밀 누설은 저우융캉이나 보시라이 사건 때 보지 못했던 대목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이 받았던 무기징역보다 더 무거운 사형까지도 각오를 해야 할 판이다.

 다섯째이며 막내인 링완청은 1960년생으로 명문대학인 지린대학 경제과를 졸업하고 신화사가 운영하는 요망 잡지사 기자로 일했다. 그는 지금 미국에서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 상태로 알려져 있다. 한때 산시성은 물론 중국에서 가장 잘 나갔던 링지화 가문이 하루아침에 멸문의 위기를 맞고 있다. 어머니는 2015년 3월20일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9일 뒤 10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곁에는 병원 의사인 딸이 지켰을 뿐이다. 문고리 권력 링지화 가문의 몰락은 중국에서나 볼 수 있는 또 한편의 막장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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