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암 정인홍선생의 간찰 (簡札)

by 杓先 posted Jul 11,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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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보물 1334-3호
명 칭:정인홍의 간찰(편지)
분 류:간찰 (簡札)
수 량: 1점
지정일:2002.01.02
소재지:경기 안양시
시 대: 조선 선조
소유자:우국일
관리자:우국일
지정문화재 : 화원우배선의병진군공책및관련자료중 (보물 1334)


※ 註 ;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유배가고, 내암 정인홍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후, 많은 가문에서 영남의 대학자이던 내암 정인홍선생의 간찰, 의병 지령문, 의병 독려문, 기타 시문. 등 많은 사료를 보관하고 있으면서도 그 이름 조차도 거론하기 어려운 역사적 폄하로 인해 그 사료들이 아직 발견되지 못하고 있은 것이 사실이다. 언젠가 내암 선생에 대한 완전한 재조명이 되고 난 뒤에는 앞 다투어 그 사료들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 낼 것으로 생각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이 사료는 의병군공책을 비롯하여 첩(帖), 소지(所志), 전령(傳令) 등 12종 20건의 문서가 수록되었는데, 임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며 그 중에 특히 의병군공책은 우배선이 거느리던 의병부대의 편성과 구성원 88명의 직책, 전투시기, 전투장소, 전투형태 및 전공이 비교적 상술되어 있는 유일한 자료로 평가받는 것이며, 그 외 우배선의 사령교지 10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증교지 각1점, 정인홍의 간찰, 당시 고관요직의 서울 주소록인 각택기 등도 우배선의 이력은 물론, 당시 고관의 거주, 관직을 살피는 중요한 자료이다.

정인홍의 간찰.등 정인홍과 관련된 자료를 보관하고 있던 우배선(1569∼1620)은 성주 화원현 월촌리에서 출생, 조선 중기의 의병장·문신으로서 1592년 왜적의 침입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켜 쌍산역, 달성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당시 24세란 젊은 서생으로, 56세의 합천 大學者이던 내암 정인홍의 의병 창기에 영향을 받아, 한미한 가세에서 창의, 1백 명 안팎의 소규모 의병진을 갖추고 성주와 대구, 현풍과 칠곡 사이의 화원현에서 낙동강과 금호강, 비슬산과 최정산을 무대로 왜적을 기습, 야작, 추격 등 참급(斬級) 63명, 사살(射殺) 604명, 작살(斫殺) 110명에 이르는 혁혁한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의병활동과 그 의병진이 성취한 군공을 미루어 보아 임진왜란 때 24세의 젊은 나이로, 일대 내암 정이홍의 의병대장 지휘아래에서 대구·화원 지방을 대표한 의병장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