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보 시조 묘비 수정안

by admin posted Sep 0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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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보 선생 묘비문 초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판 예빈사 행 고려인주수 송 상서형부원외랑 정선생 신보 지묘 or (정공 휘 신보 지묘)
배 고창군 대부인 오씨 지묘 합조(合兆,合窆,合祔) or 배 정부인 고창 오씨지묘 합조
선생은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판 예빈사 (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平章事 判禮賓事)요, 관직이 고려인주수(高麗麟州守) 송 상서형부 원외랑 (宋 尙書刑部 員外郞)을 지낸 서산정씨 원조이시다 정신보 선생은 ?~1271년(원종12)본래 중국 남송(南宋) 성리학자로 절강성 포강현 에서 몽고가 강성하여 중원의 대부분을 점령할 때 상서형부 원외랑으로 게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로 북정에 신하가 될 수 없다 하고 회유와 겁박에 고려 땅에 망명하니 1237년(고종24)지금의 서산 看月島에 정착하시다. 이보다 앞서 남송 이종가희 원년(南宋理宗 嘉熙元年)몽고의 침입으로 襄陽, 淮蜀이 함락되고 王旻, 李伯英 등이 성곽과 창고에 불을 지르고 항복하자 몽고에서는 楊惟中을 시켜 학문 높은 선비를 구하고자함에 德安이 함락될 때 趙復이라는 선비를 얻고 몽고 태조가 대단히 기뻐했다.
조복은 그 지역에서 강한 선생이라 불렀다. 이때 원외랑 정신보(鄭臣保)선생의 뛰어난 학문과 인품을 듣고 요추(姚樞;원에 정주학 터전마련)로 하여금 모셔 오도록 하여 여러 번 찾아와 백단으로 회유와 위협을 하니 신변에 위협을 느껴 소,항에서 배를 타고와 運州(당시 서산이 홍성에 복속됨) 看月島에 살면서 앞서 망명 해온 위위 승동정 오영노(吳永老)의 따님과 결혼하니 현정 오세재(吳世才)선생 증손녀이다.

망명 5년만인 1241년(고종28) 8월에 아들을 낳으니 충렬왕시대(1274~1308) 벽상 삼한 삼중대광, 추성정책 안사 공신, 도첨의 중찬을 역임한 襄烈공 鄭仁卿으로 瑞山君에 봉해진 瑞山鄭氏 始祖요 차자 준경(俊卿)은 지론낭장이다 장손으로 信王柔는 증 도첨의 찬성사 우문관 대제학 행 통직랑 상서요 차손 信英은 典醫令이다. 신화 신수도 정삼품의 현관을 지냈다. 선생은 벼슬을 여러번 사양하다가 麟州 守(의주의 옛이름)로 있을때 부원배 崔坦,李延齡 등에 여러번 죽임을 당할 뻔 했으나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했으며 1269년(원종10)교정별감 임연 (林衍)등이 원종을 페위(1269년 6월~11)하는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들인경과 협력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5개월 만에 원종을 복위 시키며 세자 심(諶후에 충렬왕)을 무사히 귀국 시켜 고려 왕권정통성 보존에 큰 공을 세웠으며 100여 년간(1170~1270)이어온 무신 독재 정권을 종식시키는데 크게 기여 했다. 선생은 아들 인경과 후학도에 성리학을 가르치니 고려학자들이 최초로 兩程의 글 접하게 돼 크게 기뻐하였다. 이때가 高麗에 최초로 性理學이 전래되었다. 앞 東山에 望雲臺를 세워 조석으로 오르내리면서 고향을 그리며 白雲의 뜻을 기렸다.
채상국 (蔡謀)묘갈명에 이르기를 편주창해 (片舟滄海) 오도여동 (吾道輿東) 기자지촉 (箕子之躅) 노연지풍 (魯連之風) 가혜후학 (嘉惠後學) 백세사표 (百世師表) “조각배로 푸른바다를 건너와 유학을 동방에 전하니 기자의 어진 발자취요 노중련의 아름다운 풍속이 로다 후학을 가르치고 지도 하였으니 백세에 빛나는 스승이요 선비의 표범이 로다” 그 말씀을 외우고 그 풍모를 상상하니 또한 반드시 주렴계 (周濂溪) 정명도 (程明道) 정이천 (程伊川)에 사숙한 분이 틀림이 없는 것 같으나 그 유문이 전하지 못하고 전수가 들림이 없구나 : 四水 목만중(睦萬中;가선대부 원임 한성우윤 오위도총부 부총관) 찬하다
아들 인경은 틈틈이 무술를 연마하니 후일 외교는 물론 무인으로 국란을 수습하는 막중한 역할을 했으니 이미 9세에 글을 지어 바위에 새겨 그 재주가 범상치가 않았다.
鄭臣保 선생의 거듭된 충절과 국가에 바친 호국의공을 나라에서는 父子에 정려(旌閭)를 내려 정문을 세워주니 이 고장 민관이 300 여년을 기렸다고 한다. 조선조에 신속 삼강행실도에 대표적인 충신으로 등재되니 더욱 영광되게 하였다.
선생의 선조는 周나라 34대 여(厲)왕의 子요 35대 宣왕의 弟 휘 友로 鄭나라 초대 왕이요, 14대 23 군이 431년간 다스려 왔다 곧 鄭씨 太始祖 鄭桓公의 69세손이다. 선생의 5대조인 淮공이 睦 州 에서 절강 성 포강 현으로 옮겨 강남 제일가의 시천 1세이니 환공으로부터 64세 가된다. 2001년 하남 성 滎陽市에서 세계 정씨 연의회 중심 (聯誼會中心)을 찾아 논의하고 2002년 절강 성 (浙江省) 포강현 (浦江縣) 의문정씨 종사 (義門鄭氏宗嗣)를 찾아 심의 합족 귀족 경전식 (合族 歸族慶典式)을 거행 귀원금희서(歸源金禧書)에 서명 하니 764년 만에 선조를 찾게 되었다 .
선생의 曾祖이신 판 장작감 호 충응(冲應)공 휘 온(縕)이 시천 3세요 동거 공식1세이니 66세가 되고 孝風 義行이 강남 사방에 널리 이름을 떨치어 明太祖 朱元璋으로부터 江南第一家, 孝儀家로 사액을 받는 등 여러 왕조로부터 많은 사액과 정려를 받아 명성을 얻도록 기초를 닦으신 분으로 15대 360여년을 3000여명이 한울타리 안에서 같이 먹고 살아왔다. 강남 제일가는 지금은 儒敎 가족제도의 전형으로 國家級 중점 문물 보호단위로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 신청 중이다. 祖는 송 조인으로 은청광록대부 상서 좌복사 행 유림낭 검교군기감 儀공이요 父는 상서호부 원외랑 행 예빈사 동정 秀琚 공이요, 서산정씨의 元祖로 모시는 鄭臣保 선생의 위패가 중국 강남 제일가 사우에 선대와 함께 배향 되어 陰 2월. 8일에 제향을 올리고, 한국 송곡사에 배향되어 음 2.월 8월末丁에 제향을 올리며, 소실된 운계서원에 배향된 봐도있다 서산 오현각(五賢閣)에 각자 되어 있다. 묘는 성연면 오사리 산641-2 아들 인경묘 계상에 있다.


200011년 8월

서산정씨 문사연구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