富城府院君 顯彰事 經過報告 및 墓碑文

by 관리자 posted May 1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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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성부원군 묘소 이장및 현창사업 경과보고

아!시절은 신록이 우거진 5월 종친님의 가정마다 두루 건강 하옵시고 행운이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뢰올 말씀은 그동안 10여년 넘게 논의 해오던 부성부원군 할아버님 묘소를 이장하는 일을 2005년 묘사시 25명의 참배자 전원일치로 합의하였으나 2006년도 추진 과정에 재원활용 계획의 차질로 지연 되다가 2007년 묘사시 이장을 재확인하고 이장지로는 큰자부 묘 위로 정했으며 저명한 지관을 찾아 묘지로 써 타당성 여부를 살펴보았습니다

소나무를 옮겨 심는등 주변정화 작업을해왔고 2008년3월31일 김천 남덕재에서 모여 이사업을 부원군 할아버님의 차종손 정삼봉씨를 추진위원장 으로 추대 하엿으며 비문을 논의하여 정후영,
정성천 종친에 일임 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산일에차츰 준비를 갖추어 지난 4월4일 청명일에 이장하고 600여년의 긴세월동안 피벽지의 임시묘소로 궁벽하고 옹색한데다 진입로와 제전의 반복된수보로 경제와 통행의 어려움을 해결할 필요성을 공감 해왔으나 장구한 세월을 이어온 큰어르신의 묘를 함부로 옮길 수 없다는 논리에 앞도되어 오다 오랜논의 끝에 결론을 냈고 성심을 다해 이장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주변정화와 석물을 갖추고 자축연을 성대히 열어 후송상호간에 친목을 돈독히 함과 혈연의 정을 나누고자 안내드립니다 때마침 좋은 일기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탁트이고 시원한 조망 에 병풍을 두룬듯 아늑하니 지세에 문외한 입장에서도 범상치 않은 대명터가 될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앞(西)에는 황악산(1,111m)이 감싸주고 右측으로는 덕대산이 우둑하게 문필봉으로 학문가를 기대하게 되고 황악산 左측으로는 고성산이 한단계 낮게 읍조하고 더좌측(北)에는 비봉산이 장군처럼 웅장하게 버티고 있어 북서 한파를 막아주니 그 제5봉이 공묘의 주봉이된다

공의 묘좌측에는 청용이 겹겹이 더해졌으니 흥성한 자손을 말해주고 우백호 역시 옹가종기 옹립하며 화기를 모으고 위엄을 갖춘다 드넓은 삼락벌의 풍요와 직지천물이 어우러져 도량넓은 마음과 평온함이 깃들고 발아래는 봉황이 산다는 봉계천과 봉계들은 이상향을 모아 조합한듯 자연 조화가 오묘하고 비길데없다 마냥기뿐 미음이 솟구친다 움추렸던 가슴을 활짝펴고 웅지를 가지고 충절의 위업을 기리는 자손이되기를 기원한다.

경과보고자 정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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富城府院君 墓碑文

富城府院君 瑞山鄭公 諱允弘 之墓
配 府夫人 江陽 李氏 合兆 甲坐

公의 諱는 允弘이시니 麗末에 不事二君의 忠節을 지키신 분이다
五代祖 諱 臣保는宋朝 刑部 員外郞 이시니 不事二君의 뜻으로 避元 亡命하시어 瑞山 看月島에 定着한 性理學者 였다 후일 高麗 麟州太守를 歷任하고 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 平章事에 이르니 瑞山鄭氏의 元祖이시다 其 先祖는 中國 지금의 浙江省 浦江縣義門鄭氏이다

高祖 諱 仁卿은 壁上三韓三重大匡 推誠定策安社功臣 匡靖大夫 都僉議中贊 上將軍 判典理司事 封 瑞山君 諡號 襄烈이시니 곧 瑞山鄭氏의 始祖이시다 曾祖 諱 信王柔는 匡靖大夫 都僉議贊成事 右文館 大提學이요 祖 諱 世忠은 知製敎 尙書요 考 諱 璹은 判將作監事 尙書요 비郡夫人 固城 李氏는 吏部 尙書 嶠의 女이시다 公은 四男中 次男으로 어려서부터 聰明하고 學問이 뛰어나 麗朝의 여러 관직을 거쳐 軍器副正에 오르고 富城 府院君에 에 封해졌다

그러나 高麗末 국운이 衰하여 內憂外患이 잦은 狀況에서 軍閥集 團의 威化島 回軍後 名將 崔瑩등을 除去하고 重臣들를 威脅하고 國王을 겁박하며 國政을 농단하니 王權은 名目뿐 高麗國의 存亡 이 누란의 危機에 처했다 公께서는 쓰러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 渾身의 노력을 다했으나 이미 무너진 國運을 어찌 하랴!

부득이 避地를 찾지 않을 수 없어 어린 從孫 湄(七世宗孫)를 데리고 潛行하여 淸州에 머물게 하고 長子 斯仁은 居昌에 次子斯義는 報恩에 五子 斯信은 知禮에 三子,四子는 공과함께 金山 鳳溪에 分散 隱居하며 隱忍自重 하시다

水原白公 貴璇, 海風金公 孝信과 함게 金山에 隱居하니 後孫들이 先祖의 忠節을 되새기며 親睦과 友誼를 다지는 三門中契를 이어오고 있다 당시 七隱으로 呼稱되니 杜門洞의 충절이요 伯夷叔齋의 절의라 後世의 師表가 되고 귀감이라 詳載 金陵 人物誌하다

配 府夫人 江陽李氏는 判書 禽의 女이시니 閨中의 예절을 익히고 性稟이 어질고 智慧 로우니 生五男 三女 하시다 후일 社會가 安定되어 長子 斯仁은 文科 通訓大夫 行 禮安縣監이요 次子斯義는 敎授요 三子 斯禮는 郡守요 四子는 斯智요 五子 斯信은 文科 贈 資憲大夫 吏曹判書 行 議政府 舍人이요 長女는 000,次女는 司正 郭萬康,三女는 參議 曺深으로 昌寧人이다

斯仁男 成溫은 建功將軍 副司直이요 成良은 文科 直講 舍人 寶城郡守요 成恭은 縣監이요 成儉은 文科 贈 吏曹參判 行 務安縣監이요 斯義男 孝元은 進士 孝童은 將仕郞 孝良,孝順은 參奉 斯禮男 孝溫은 生員 孝明은 護軍 孝愼,孝恭은 護軍 斯智男 石崗은 上將軍 石崇은 大卿 斯信男 孝性은 護軍 孝文은 大卿 孝敬은 朝散大夫이다

公께서는 國家에는 忠節로 學問의 正道를 실천하고 私事로이는 後學을 育成하고 자손들 訓育에 心血을 기우려 家業을 中興 시키니 嶺南派의 中始祖로 높이 崇仰 받고 있으며 麗 鮮 易姓革命期와 所謂 仁祖反正의 試鍊期를 거치며 제대로 된 文獻 史料를 남기지 못해 公이 세운 높고 偉大한 業績을 다 記述하지 못함은 참으로 아쉽고 哀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史歷을 제대로 찾지 못 하고 간단히 記錄하니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훗날 학문 깊은 이
를 苦待 할뿐이다

墓는 金泉市 鳳山面 仁義洞 山 十番地 分土洞이 당시 不安한 政情과 隱遁地의 臨時的 墓所로 궁벽하고 옹색함은 물론 祭田과 進入路의 반복된 修築으로 후손들의 宿願 사업이 되었다 永久 安宅地 선정은 오랜 論議 끝에 이곳 仁義洞 山 四十番地 長 子婦 墓 階上에 府夫人 江陽 李氏와 함께 모시다 이에 간단히 顚末을 적고 因하여 銘하니 銘曰

于嗟吾祖 麗末忠臣 不事二君 孤節終身 避地南下 擇處里仁
舊墓頹落 移此維新 在天英靈 陟降有辰 來者百世 子孫振振


西紀 2008(戊子)年 4月 4日 十七代孫 聖天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