瑞鄭 公州(현령공)파 묘역건립비문

by 昞國 posted Dec 2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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瑞鄭 公州派의 큰맥을 이루신 분!

縣監公 六世祖 諱而儉 頌德碑

公의 號는 운정(雲靜)이요 휘(諱) 이검(而儉)이며 문화현감(文化縣監)을 지낸 瑞山鄭氏 公州(縣令公)派의 큰맥(大脈)을 이룬 분이다.

公의 六代祖 원외랑공(員外郞公) 諱 신보(臣保)는 400여년간 中國 河南城, 山西城 一帶를 통치한 鄭나라 太祖 환공(桓公)의 69世孫으로 중국 宋나라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낸 當代의 有名한 성리학자(性理學者)이며 서산정씨(瑞山鄭氏) 원조(元祖)이다.

송조(宋朝)말 중국천하를 정복한 몽고(蒙古)가 세운 元나라에 참여를 强要하는 협박(脅迫)에 굴하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으로 高麗國 충남서산 간월도(看月島)로 망명, 高麗에 性理學을 최초로 전파(傳播) 많은 후학(後學)을 배출하셨으며 後日 인주수령(麟州首領)을 거쳐 正二品 벼슬인 증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贈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또한 휘 인경(仁卿) 시호(諡號) 양렬공(襄烈公)은 高麗의 大將軍. 上將軍 鷹揚軍 등 軍 要職을 두루 거쳐 正一品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올랐으며 外交官으로서도 對元 외교 활동에 큰 업적을 남겨 현 국무총리급(現國務總理及)인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중찬(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中贊) 벼슬을 하신 瑞山鄭氏 시조이다.

시조(始祖) 襄烈公의 五代 孫인 公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 父 계소(繼韶)와 정부인(貞夫人) 진주소씨(晉州蘇氏)의 4男으로 남다르게 총명(聰明)하고 어질었으며 향시(鄕試)에 급제(及第) 고을 員으로서 수범(垂範)을 보여 청백리(淸白吏) 縣監이라는 명성(名聲)을 얻었다.

公은 예조참판(禮曹參判) 봉연천군(封延川君) 諱 이보정(李輔丁)선생의 女인 淑人 延安李氏 사이에 생원공(生員公) 수(琇)를 두었으며 孫 세충(世沖)에게 높은 학문을 전수(傳授)하여 안악군수(安岳郡守)로 出仕시키는 등 家門의 명예를 높이고 후학(後學)을 키우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시대적 전환기(轉換期)를 겪으면서 公이 남긴 문헌(文獻)과 사료(史料)를 채 발굴하지 못해 유업(遺業)을 제대로 현양(顯揚)할 수 없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公의 墓는 配淑人延安李氏와 함께 경기도 광주(廣州) 묘소에 안장(安葬) 모셨으나 오랜 시간을 거치며 분묘(墳墓)가 실전(失傳)되어 1961년부터 충남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시조묘하(始祖墓下) 설단(設壇)에 모시어 전국의 종친들께서 수시로 찾아 배향(配享)하고 있음은 직계후손(直系後孫)으로서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公이 瑞山鄭氏 公州(縣令公)派의 오늘이 있도록 근간(根幹)을 이루신 높은 뜻을 기리고 추모(追慕)하기 위해 충남 공주시 유구읍 신영리 瑞鄭 公州(縣令公)派 묘역(墓域) 상단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公의 靈前에 바치니 公州(縣令公)派 後孫들은 잊지 아니하고 찾아 敬拜 할지어다.


己丑 2009年 5月 日 22世孫 昞國 謹撰 / 文學博士 李聖鎬 監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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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知宗根이면 如禽獸이니라!

大宗會初代會長 諱東九 功績碑


公의 號는 송은(松隱)이요 諱東九이며 시조 양렬공의 20代 孫이다 당년27세에 도일(渡日) 일찍이 선진문물을 익혀 사업가로 크게 성공하였으며 전국에 흩어져 있던 종친들을 규합 瑞山鄭氏全國花樹會(대종회)를 創立 全國會長으로 15년간 대종회를 이끌어 오신 분이다.

1950년대 대종회는 물론 지역단위 종친회마저 全無한 시기에 무지종근(無知宗根)이면 여금수(如禽獸)라는 의지로 元九, 昞烈, 鍾浩 諸氏와 大邱花樹會를 결성하고 전국 각처를 순회 산재한 후손들을 찾아 규합하는 등 선조들이 남긴 偉業과 遺蹟찾기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당시 交通과 通信施設이 크게 열악한 상황에서 전국 각처 종친들을 만나 동참을 설득하기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으나 公은 당신이 운영하는 釀造사업을 비롯한 당면한 업무를 뒤로 한 채 수개월 동안 全國 방방곳곳을 찾아다니며 종친들의 참여를 독려 재정확보를 위한 大宗契를 만들고 전국 15개소에 花樹會支部를 설치하였으며 瑞山鄭氏全國花樹會를 創立 宗員 滿場一致 지지로 總會長에 추대되었다.

1957년 瑞山을 빛낸 偉人들을 奉安한 松谷書院의 位牌 順位가 잘 못 되었음을 발견하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瑞山儒林과 松谷祠에 奉安된 五家本孫會議를 소집 位牌 순위를 바로잡기 위해 수차 협의를 했으나 一部 門中에서 불응함에 公의 先導로 昞熙, 昞殷, 煥玟, 宅永, 璣赫, 諸氏와 함께 왜곡 건립된 비석을 파기하고 위패봉안 순위를 1위 元祖 員外郞公, 2위에 始祖 襄烈公 순으로 재정립시킨 후 이를 증명하는 碑石을 세워 위패봉안 順位에 대한 더 이상의 異說이 없도록 하였다.

또한 公은 경기도 수원(水原)에 모신 2세조 諱信柔(右文館大提學)를 위시한 19위 선조묘가 失傳되었음을 哀痛해 하시고 瑞山 始祖墓域 하단에 設壇을 마련 후손들이 享祀를 모시도록 하였으며 허물어져 가는 望雲臺를 重修함과 동시 집념으로 발굴한 선조님들의 위대한 역사적 史料를 하나로 묶어 서산정씨세사(瑞山鄭氏世史)를 편찬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선조님들의 정신을 이어 받도록 하였다 그밖에 大宗會 운영에 필요한 제 규정을 制定하여 오늘의 대종회 운영에 기본 틀을 이루었다.

이렇게 公은 1971년 5월 유명(幽冥)을 달리하기까지 서산정씨대종회 초대회장으로서 종친들의 단합과 선조님들이 남긴 偉業을 발굴 顯揚하여 瑞山鄭氏 宗員으로서 큰 자긍심을 갖도록 하였다.

公은 사업에도 크게 성공하여 大邱市釀造協會 會長을 역임하고 大邱市政諮問委員으로 지역 발전에 기여 하셨으며 星山裵氏. 潘南朴氏와 사이에 6남 5녀를 두어 모두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동량으로 키우셨다.

이에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公이 瑞鄭의 오늘이 있도록 대종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신 업적을 널리 알려 후손들의 師表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瑞山鄭氏公州(縣令公)派 墓域造成을 빌어 功績을 기린다.


己丑 2009년 5월 일

瑞山鄭氏大宗會九代會長 鄭 弘 熙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