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의 간월암은 현재 조계종단의 작은 암자이다.
지금은 관광 사찰에 가까울 정도로 적지 않는 관광객들이
바다위의 연꽃과 같은 아담한 간월암을 둘러보고 간다.
우리 가족이 어느날 간월암을 찾았다.
스님이 말 하기를 "간월암은 서산 정씨의 시조이신 양렬공께서 태어나신 출생지"라고 했다.
몇해 전에도 시제 때 두어번 둘러 본적이 있었지만 또 다른 감회가 들었다.
간월암은 서산정씨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곳으로 생각 된다.
나라를 잃은 원조 할아버지께서 험난한 망망대해를 건너 희망으로 찾아온 땅, 말도 통하지 않고, 생활 습성이 다른 이국 땅, 모든게 낯 설기만 했던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그러한 곳, 몸을 받아줄 사람도 없었던, 의지 할 데 없는 섬
그 첫 발이 닿고 일정 기간동안 생활의 터전이 되었을 수도 있었던 간월암 자리는 분명 우리 후손들에게 무언가 남 다른 곳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사찰 간월암이 있어 사유화는 어렵겠으나, 간월암과의 특별한 관계가 맺어져야 하지 않을 런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점심 공양을 마친 후 시조님과 후손들을 위하여 법당에, 나와 아들의 이름으로 인등을 밝히고 쌀 1포를 올렸다.
지금은 관광 사찰에 가까울 정도로 적지 않는 관광객들이
바다위의 연꽃과 같은 아담한 간월암을 둘러보고 간다.
우리 가족이 어느날 간월암을 찾았다.
스님이 말 하기를 "간월암은 서산 정씨의 시조이신 양렬공께서 태어나신 출생지"라고 했다.
몇해 전에도 시제 때 두어번 둘러 본적이 있었지만 또 다른 감회가 들었다.
간월암은 서산정씨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곳으로 생각 된다.
나라를 잃은 원조 할아버지께서 험난한 망망대해를 건너 희망으로 찾아온 땅, 말도 통하지 않고, 생활 습성이 다른 이국 땅, 모든게 낯 설기만 했던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그러한 곳, 몸을 받아줄 사람도 없었던, 의지 할 데 없는 섬
그 첫 발이 닿고 일정 기간동안 생활의 터전이 되었을 수도 있었던 간월암 자리는 분명 우리 후손들에게 무언가 남 다른 곳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사찰 간월암이 있어 사유화는 어렵겠으나, 간월암과의 특별한 관계가 맺어져야 하지 않을 런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점심 공양을 마친 후 시조님과 후손들을 위하여 법당에, 나와 아들의 이름으로 인등을 밝히고 쌀 1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