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인경(仁卿)인데 청주 부성현의 사람이다. 공의 아버지는 표황(彪皇)으로 벼슬이 형부원외랑에 이르렀는데 공의 귀함으로 인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추증하였다 어머니 오씨는 승동정 오영노(吳永老)의 따님인데 공의 귀함으로 누차 관작이 봉해져 고창군부인에 이르렀다.
공의 고향은 본디 현령이었는데 공이 세운 공로로 인해 지관으로 승격되어 서주(瑞州)로 개칭되었다 공이 태어나면서부터 웅대한 역량이 있어 산서(山西)에 이름을 떨치었다. 병진년(1256년)에 원나라의 군사가 우리 강토를 침략 했을 때 공이 19세 나이로 자원입대 종군하여 적을 물리친 공(功)으로 孝溫下隊正(군장교)이 되었고 원나라의 언어를 익혀 1269년 세자(충렬왕)가 원나라에 조회시 외교통역관 자격으로 수행 귀국하던 중 반역자 임연이 임금을 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원나라 왕을 설득 조력을 얻어 반역도를 평정함으로서 왕권을 확립하도록 하였는바 이는 만세의 공로이다.
1270년에 산원겸견어용행수(散員兼牽御龍行首)에 임명되었다 1271년에 낭장겸세자부우지유(郎將兼世子府右指유)에 임명되었고 이해에 주상께서 사대부들의 맏아들을 데리고 볼모로 들어가면서 공을 데리고 가고자 원왕에게 간청하였으나 평소 公이 다른 마음 없이 직책을 수행한 것을 사랑하여 잠시라도 곁을 떠나게 하지 않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항상 임금 곁을 드나들며 총애를 더욱 도텁게 받았다. 이에 1272년에 특별히 어명을 내려 장군겸 입내시에 임명하였고 1274년에 원왕이승하 하자 현 주상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보위를 이어받았을 때 의심을 받아 4년 동아 한직에 있었다 그러나 주상의 마음이 영원히 버리지 않고 장차 크게 등용하려 하였다.
1278년 15년에 다시 장군겸 전법총랑에임명 되었고 1282년에 대장군으로 정해년에 옹양군상장군겸군부판서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특별 어명을 내려 공을 一等 功臣으로 삼고 단권(丹券)과 록권(祿卷)을 하사하였는데 엣날의 공을 포함한 것이다.
1289년에 삼사사(三司使)에 임명되었다가 바로 밀직사부사겸전법판서(密直司副使兼典法判書)로 옮기었는데 형부의 좌집법은 반드시 사람을 간택하여 임명하기 때문에 세 번이나 이 직책을 겸한 것이다. 그 후 누차 전직되어 지사사(知司事)에 이르렀고 얼마 되지 않아 우상시(右常侍)로 옮겼으나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에 질투를 느낀 관료가 감정을 품고 주상에게 참소를 제기 모략함으로 벼슬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이에 많은 선비들이 애석한 마음으로 탄식을 했다.
그러나 1299년 왕이 엣날의 공로를 인정하여 판삼사에 임명함에 다시 국사에 참여 당해 년 7월에 지도첨의사사에 임명되고 9월에 참리에 임명되었으며 12월에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는 등 몇 개월 되지 않아 네 번씩이나 포상을 받으니 왕으로부터의 총애가 가히 하늘을 찌르듯 하였다.
그해에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들어가 도당의 의논을 자세히 듣고 주상에게 아뢰었다가 다시 모사(謀事)하는 신하로 인해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공의 타고난 성품이 공정하여 국가에 이로운 일이면 숨김없이 곧 바로 개진하였음 에 사람들이 많이 시기하고 이로 인해 재차 벼슬에서 물러나는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공손히 분수를 지켜 구차하게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조금도 부당하다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근신함으로 1305년 9월에 왕께서 그 전의 공로를 소급해 기록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추성정책안사공신광정대부도첨의중찬(壁上三韓三重大匡推誠定策安社功臣匡靖大夫都僉議中贊)” 즉 이조때 영의정 현재는 국무총리 급으로 품계를 올려 영광되게 하였다 공은 이해 9월에 득병하여 동 12월 17일에 자택에서 향년69세로 서거하였다 는 소식을 접한 왕이 매우 슬퍼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장례를 치르게 하였는데 충렬왕 10년 1306년 12월 19일에 장사지내고 양렬(襄烈)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