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경과 원나라의 고려복속정책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한직으로 밀려나 있던, 1274년 충열왕 즉위부터 1278년까지, 4년동안, 고려는 정치,경제,외교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즉, 1274년 10월부터 시작된 여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이 여러 번 실패가 거듭되자 고려의 백성들은 전쟁준비와 이로 의해 생활이 매우 피폐해졌다. 또한 고려 조정은 몽고의 계속되는 ‘일본 정벌을 위한 전함 300척 요구’ 등, 무리한 요구로 국고가 탕진되고 조정은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또한 원나라의 무리한 공물, 공녀 요구 등으로 정치적, 외교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고려조정은 정치적으로 혼란하여, 1278년 2월, 僉議中贊(직제개편전의 문하시중)김방경이 大將軍 위득유, 中郞將 노진의.등으로부터 모반혐의를 받아 친원세력의 중심이던 管領歸附高麗軍民摠管(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 홍다구가 김방경을 체포 고문을 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김방경은 대청도에 유배된다. 이런 정치.외교적 어려움을 겪던 충렬왕은 1278년, 38세의 정인경을 다시 고려 조정으로 복귀시켜 정치 외교적 어려움을 해결토록 요청하며 2월에 朝散大夫(조산대부)의 文散階(문산계) 官爵(관작)을 제수하고 左右衛(좌우위) 精勇將軍(정용장군)으로 재기용된다.
이에 정인경은 본격적으로 중앙 정치 일선에 나서게 하고, 또한, 1279년, 원나라에 가서 홍다구가 고려 조정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요청하고 홍다구를 원나라로 소환토록 조치하였다. 1279년 12월, 39세 때, 典法摠郞(전법총랑)에 임명되어 고려 조정의 법제 행정을 정비하고 여러 가지의 元나라와의 불리한 외교 조약들을 조정하게 된다. 이어 1280년 7월, 40세에 版圖摠郞(판도총랑)에 제수된다. 1281년 3월, 고려군의 도원수 김방경과 여몽연합군은 2차 일본 정벌에 나서는데, 5월 합포(마산) 출발, 6월 대마도 정벌, 7월 일본 하까다를 치고 대승을 거두었으나 8월에 태풍과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철군하였다.
그해 3월, 41세의 정인경은 龍虎將軍(용호장군)에 승진하여 일본정벌시 경주에 후방 지휘부를 만들어 머물던 충렬왕을 보위하게된다. 이때 경주에 와서 충렬왕에게 법문과 강론을 하던 승려 일연을 다시 재회하게 된다. 이로인해 정인경은 충열왕과 대선사 ‘일연’의 대면속에서 고려 국권회복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리고 며칠 지난 3월에, 龍虎軍(용호군) 將軍(장군)에서 左右衛(좌우위) 精勇將軍으로 재 보직을 옮기고, 다시 鷹揚軍(응양군) 將軍으로 전직을 하게되며 또한, 1282년 12월, 42세에, 監門衛(감문위) 攝大將軍(섭대장군)이 되고, 거듭해서 朝奉大夫(조산대부)로 官爵(관작)을 높여 제수 받는다. ① 전법총랑 : 조선시대의 형조참판과 유사한 벼슬로 지금의 법무부 차관급의 직무 ② 조선조의 工曹와 비슷한 업무를 수행하고 지금의 商工部 次官補과 비슷한 직책. ③ 국왕의 경호, 경비를 담당하는 龍虎軍 군대의 장군 ④ 국왕의 친위대로 고려의 최정예군이고, 응양군의 상장군이 각군의 합참기구인 중방을 구성하여 합참의장이 된다.
군사요직을 두루 거치며 빠르게 군권장악함 정인경은 이러한 군사요직을 두루 거침으로 인하여, 빠르게 군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충렬왕이 정인경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배려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이으로 1283년 12월, 그가 43세되던 해, 知典法司事(지전법사사)를 제수받고 그날 千牛衛(천우위) 大護軍(대호군)이 된다. 이러한 빠른 승진의 배경에는 충렬왕과 함께 고려국의 정치 외교적 어려움과 고려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였는데, 이때 왕의 핵심 최측근 신하로, 충렬왕을 설득해, 고려로부터 元의 몽고 관리들과 元軍의 철수, 또한, 대몽 전쟁 중 포로 및 인질로 끌려간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게 된다. 정인경은 이를 위해 원나라와의 외교 교섭을 통해 그들을 설득하였는데, 1282년과, 1283년에 정인경이 직접 원나라의 연경을 방문해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다. 그의 성실하고, 정직하며 온화한 성품과 좋은 인간관계를 통해 원나라 황제를 설득시키고, 직접 랴오(遼東;요동), 선양(瀋陽;심양), 랴오양(遼陽;요양), 베이징(北京)에 가서 많은 고려인을 귀국시켰다. 이에 많은 고려인들은 정인경을 마음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또한, 정인경은 고려인의 자주성을 일깨우기 위해, 충렬왕을 설득하여, 1281년 승려 일연으로 하여금 삼국유사를 저술케 하여 1285년에 이를 고려 조정에서 편찬하고 1287년에는 정인경과 사돈관계에 있던 이승휴의 帝王韻紀(제왕운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는 고려의 국가 정통성과 자주성을 일깨우기 위해 여러 歷史書를 저술하게 한 것이다. 제왕운기 등. 당시 원나라의 정치적·문화적 지배체제를 극복하고자 저술된 이 책은, 중국과 한국의 지리적·문화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중국과 다른 민족문화적 주체성을 표명하였다. 또한 난세극복의 의지를 표명함에 있어 역사에 그 가치기준을 두고 저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학사적측면에서 볼 때 단군기원의 역사의식 환기와, 몽고 간섭하에서 싹튼 민족의식과 함께 상고사를 한국사에 편입시켜 다루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세계의 인쇄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당시 고려 조정의 관직은, 오랜 무신정권의 영향으로 文官이 武官의 벼슬을 겸임하고 있었는데 이는 고려왕의 왕권의 강화 목적으로 軍權 장악의 방편으로 측근 신하에게 무관의 벼슬을 中庸해서 제수하는 관습으로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⑤ 감문위는 궁성의 수비대이다. ⑥ 지금의 法務部 長官署理에 해당되는 직책이다. ⑦ 국왕의 儀典, 의장을 담당하는 군대 ⑧ 승려 일 : (1206~1289) 속명은 김견명이며 1227년 승과에 급제, 1237년 삼중대사, 1259년에 대선사가됨. 1283년에 국존으로 추대. 그해, 부모을 봉양을 위해 낙향, 1289년 입적. ⑨ 정인경의 아들 信綏(신수)와 同壻(동서)되는 이임종의 부친이 이승휴이고, 신수의 장인이 유자우(茂松庾氏,무송유씨)이다.
정인경은 거듭 승진하여, 1284년 2월, 44세에, 司巡衛(사순위) 大護軍(대호군)에 임명되고, 1286년 2월, 46세에 左右衛(좌우위) 大護軍, 12월에 監門衛(감문위) 攝上將軍(섭상장군), 같은 날, 正獻大夫(정헌대부)의 官爵(관작)을 제수받는다. 그후, 1287년 6월, 47세에, 司巡衛(사순위) 上將軍(상장군), 8월7일에 興威衛(흥위위) 上將軍, 8월15일에 神龍衛 上將軍(상장군). 12월에 鷹揚軍(응양군) 上將軍, 같은 날에 軍簿判書(군부판서)겸 春宮翊衛(춘궁익위), 같은 날, 判典牧使(판전목사)에 임명되었다. 정인경의 나이 47세에 고려 군사의 모든 요직을 두루 거쳐, 고려 군권의 실질적 총수인 鷹揚軍(응양군) 上將軍(상장군)겸 軍簿判書(군부판서)에 임명되어 실질적으로 고려군의 軍權을 총괄 지휘하게 되고 고려 최고의 실권자가 된다. 그해 1287년, 47세의 정인경이 고려 최고 실권자이던 시기, 사돈관계에 있던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저술되어 충열왕에게 올려지고 고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으며 1287년, 1等 功臣으로 錄券(녹권)을 받아 노비 200명, 전답 200 두락을 하사 받고, 본관을 서산으로 제수 받았으며 軍簿判書春宮翊衛判典 瑞山君(군부판서춘궁익위판전 서산군)의 封爵(봉작)을 받게 된다.
지금의 서산이란 지명을 있게 한 공로자! 이는 충렬왕이 옛 공로를 모두 소급하여 功臣으로 제수한 것이다. 이로써 서산정씨의 본관이 서산이 된 것이고 당시 운주(지금의 홍성) 등으로 복속 관리되었던 옛 부성현이 서산으로 격상되어 지금의 서산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당시, 정인경은 원의 고려복속정책에 반대하다 한직으로 밀려난 이래, 1278년 충렬왕의 재기용에 의해 攝將軍(섭장군)에서 1287년 鷹揚軍(응양군) 上將軍(상장군)겸 軍簿判書(군부판서)로서 9년의 짧은 기간 내에 고려의 군사 관계 주요한 요직을 모두 거쳐 실질적인 고려의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이시기 고려의 군사 편제는 中央軍과 地方軍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중앙군은 2군 6위로 편제되었다. 그리고 지방군은 각 도, 주, 군, 현으로 편제되고 지방의 수령이 군수권을 가지고 소수의 무관을 두었으며 군졸은 평시에 생업에 종사하고 비상시에 군병으로 징병되는 일종의 예비군 성격의 군대였다. 다만, 국경 지역의 주요 군사 요충지는 정규군으로 편제되고 상장군이 관할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중앙군의 군대 편제는 2軍 6衛로, 각 군의 최고 지휘관은 上將軍이었다. 2군은, 鷹揚軍(응양군;국왕의 친위대 : 1천명으로 구성), 龍虎軍(용호군;국왕의 경비대로 2천명으로 구성)으로 되어 있고 특히, 응양군의 상장군이 2군6위의 총괄기구인 중방을 구성, 국왕을 보좌하여 총괄 지휘했다. ① 고려의 중앙군인 2군 6위중, 왕의 친위대인 응양군의 사령관으로 2군6위를 총괄 지휘하는 중방의 의장으로 실직적인 고려군의 군사총수이다. ② 지금의 국방부 장관 직무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장 겸 육군 참모총장 겸 합참의장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 응양군 상장군이 실질적인 고려군의 軍權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6衛는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 로 되어 있었는데 左右衛(좌우위)는 1만3천명의 군사로 수도방위와 戰時에는 변방방위를 담당했고, 神號衛(신호위)는 7천명으로 수도의 외곽 경비를 담당, 興威衛(흥위위)는 1만2천명으로 수도방위와 변방방위, 金吾衛(금오위)는 7천명으로 경찰업무, 千牛衛(천우위)는 2천명으로 국왕의 의전, 의장업무, 監門衛(감문위)는 1천명으로 궁성의 수비를 담당했다.
1288년, 48세가 되던 해, 세자 왕장 (충선왕)을 따라 元(원)나라의 연경을 다녀왔다. 정인경이 원나라에 간 목적은 동녕부를 되돌려 받기 위한 외교 문제 때문이었다. 이 시기 정인경은 동녕부를 고려에 되돌려 받기 위해 많은 외교적 노력을 하게 되고 수 차례 원나라의 연경을 방문하게 된다. 이 東寧府(동녕부)는 고려 서경에 설치된 원나라의 통치기관인데 이는 고려에 대한 정치 간섭을 위한 목적이었다. 동녕부가 설치된 연유는 1269년 서북면병마사 최탄 등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세운 林衍을 친다는 구실로 亂을 일으킨 뒤, 서경을 비롯한 북계의 54성과 자비령 이북의 6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를 계기로 원 세조는 이듬해 자비령 이북지방을 모두 원나라 소유로 한 뒤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최탄으로 하여금 동녕부 총관을 삼았었다.
정인경은 이 동녕부를 고려에 재 복귀시키고 자비령 이북지역을 고려에 되돌려 주기를 원나라에 요청하는 외교 노력을 시작하여 다음해, 1289년, 충렬왕과 왕후를 호종하여 고려 최고 실권자로써 원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데, 이때 충렬왕에게 청하여 안향으로 하여금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게해 원나라의 주자전서를 필사해서 돌아 오게해 주자학을 연구하게 하였다. 또한 많은 원나라 유학자들과 왕래하며 교류를 하게하고 고려에 유학을 크게 부흥시키도록 노력했다. 이러한 정인경의 외교 노력과 학문 교류를 통하여 원나라의 많은 신하들과의 인간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원나라 세조를 설득하고, 결국, 1290년, 서경에 설치된 동녕부를 요동으로 옮기게 하고 서경을 고려에 복귀시켰다. 또한 서북면 지역의 땅도 회복하게 된다. 이 功으로 정인경은 副知密職司使(부지밀직)이 되고 또한 자비령 이북 지역을 관할하는 西北面都指揮使(서북면도지휘사)가 되었다.
뛰어난 외교력으로 빼앗긴 땅과 피납 된 백성들을 되찾아! 이러한 과정에서, 정인경은 1289년 6월, 49세에, 奉翊大夫(봉익대부) 三司使(삼사사) 上將軍에 제수되고, 곧이어 1290년 3월, 50세에, 副知密職司使(부지밀직사사)겸 典法判書 (전법판서)에 임명된다. ③ 고려의 문신 (1243 ~ 1306년), 1260년 문과급제, 감찰어사가 되었고 주자전서를 원나라 연경에서 필사해와 주자학을 연구하고 진흥시켰다. ④ 삼사사 : 三司의 정2품 벼슬, 三司는 국가의 전곡출납, 조세등을 담당하는 관청 그러나, 1290년, 내안의 합단군이 고려에 침입하여 원주와 충주를 함락하고 개경을 위협하게 되어, 충렬왕이 강화도로 被兵(피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는 임시로 수도를 강화로 옮기게 되는데, 이런 와중에서도 53세의 정인경은 서경을 지키면서 합단군과 일대의 처절한 전투를 치루며 싸우다가 1291년, 1 년 반만에 이들을 섬멸한다. 그리고 정인경은 강화도로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 피병간 왕을 알현하고 이때 강화도로 유입된 백성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 백성들에 의해 지금 강화도에 정인경 장군의 이름을 따서 인경리가 생겼다. 인경리는 지금의 강화도 불은면 삼동암리이다.
1291년 8월, 그가 51세에, 世子元賓(세자원빈)을 겸직하게 되고, 합단군을 몰아낸 功으로 인하여 1292년 윤6월에, 정인경은 知密直司事(지밀직사사)에 제수 받게 된다. 이어 7월에, 右常侍(우상시)로 승진되고, 다음날, 中軍使(중군사)를 겸하게 된다. 1292년 충렬왕은 정인경의 高麗軍(고려군)이 合丹軍(합단군)을 격퇴하고 나라가 안정되자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며 이어 元(원)나라의 세조가 사망하는 혼란기을 틈타, 정인경은 원나라와 외교 교섭을 벌여 원나라가 통치하던 탐라(제주도)에서 원나라 군사를 철수시키고, 또한, 고려군에 의해 장악케 함으로써 탐라를 제주로 개명을 한 후 고려 조정에서 牧使(목사)를 파견하여 고려가 직접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서 제주도에 탐라총관부가 폐지되고 고려에 재 복귀된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원나라는 여러 차례 금혼령을 내리고 고려의 부녀자를 공녀로 요구하며 고려의 행정 관제의 격하를 요구하는 여러 가지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는데 정인경이 원의 복속정책에 강력히 반대하자 원나라의 압력에 의해 충렬왕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정인경을 남해의 섬으로 유배보낸다.
정인경이 57세 되는, 1297년까지, 6년간, 남해의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 시기 고려는 또 한번의 정치 외교적 위기를 겪게 된다. 원나라는, 1293년, 원 세조의 사망 이후 더욱 고려에 정치적 압력을 가하게 되고, 1295년 고려의 행정 편제를 격하시켜 중서문하성과 성서성을 합쳐 僉議府(첨의부)로, 樞密院(추밀원)을 密直司(밀직사)로, 御史臺(어사대)를 監察司로, 6부는 통합되어 典理司, 軍簿司, 版圖司, 典法司로 개칭하게 된다. 그리고 충렬왕과 원나라 조정과의 대립이 계속되는데, 그 원인은 충렬왕의 왕비인 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고 친원파 권신들과 함께 고려 조정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국대장공주가 원나라의 힘을 등에 업고 충렬왕의 전 왕비인 정화궁주를 감금하고 그의 세력인 반원파를 축출하는 등, 왕권을 능멸하자 충렬왕은 국사를 등한시하고 잦은 사냥과 폐행을 하게된다. 그리고 1296년 11월, 친원파의 주선으로 세자가 원나라의 연경으로 가서 원의 진왕, 감마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와 결혼하여 원의 부마가 된다.
1297년 5월, 충렬왕의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하게 된다. 이에 별궁에 유폐된 정화궁주가 풀려나고 정화궁주의 정치적 입지가 잠시 강화되지만, 이해 7월, 원나라에 가 있던 세자와 세자비인 계국대장공주가 귀국하자, 다시 원의 힘을 등에 업은 친원파 권신들에 의해 정화궁주와 반원파 권신들 40여명이 축출되었다.
고려 조정은 친원파에 의해 다시 장악되고 이들은 세자를 지지하며 반원파를 지지하는 충렬왕에게 많은 압력을 가했다. 그리고 충렬왕은 고려 조정에서의 정치적 입지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결국, 충렬왕은 친원파의 압력에 의해 왕위를 선위하겠다는 선위서신을 元에 보내게 된다. 그리고 1298년 1월, 충렬왕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태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자가 즉위하게 되는데 이가 충선왕이다. 충선왕이 즉위 후, 원나라에 머물던 계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왔다. 이로써 고려 조정은 친원파로 완전히 장악되고 이들은 충선왕의 母后인 죽은 제국대장공주를 인명태후로 추존한다. 그러나 새로 즉위한 충선왕은 세자 시절과는 달리, 즉위 후, 왕권을 강화하면서 고려의 제도를 복원하는 등, 고려의 자주적 기틀을 마련하고, 반원파 학자들을 등용하는 등, 반원파 신하들과 가까워지고, 또한, 조인규의 딸 조비와 금실이 너무 좋자, 고려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친원파 권신들은 이를 구실로 계국대장공주를 앞세워 원나라에 충선왕을 무고하고 원나라의 군사 무력 시위와 고려 조정의 친원파의 압력에 의해 충선왕은 즉위 7개월만에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해 8월, 충선왕은 원나라로 압송되어 가고, 그후 10년을 원의 연경에 머물게 된다. ⑤ 국왕의 왕명출납, 군사의 기무, 숙위를 담당하는 관청의 부책임자 관리, 密直司는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와 국가정보원의 합작된 유사한 업무의 관청. ⑥ 전법판서 : 조선시대의 형조판서와 같은 벼슬, 지금의 법무부 장관과 같음. ⑦ 세자를 교육하는 최고의 관리, 이시기 고려세자는 원나라의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정인경이 세자의 스승의 자격으로 실질적 외교를 조정했으리라 짐작한다. ⑧ 동지밀직사사: 왕명의 출납, 군사의 기무, 숙위를 담당하는 관청인 밀직사의 우두머리.지금의 대통령 비서실과 국가정보원, 보안사령부 등의 합작 업무의 관청의 관리. ⑨ 우상시 : 고려 삼성(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정3품 문관벼슬. 지급의 차관급 관리. ⑩ 첨의부 : 고려 조정의 최고 권력 통치기관으로 조선시대의 의정부와 같은 기관 첨의부의 수령은 中贊으로 조선시대의 영의정과 같음 ⑪ 추밀원 : 밀직사의 옛 이름. 지금의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정보원, 보안사령부의 합작 업무. ⑫ 어사대 : 관리의 탄핵과 감찰 사정기관. 지금의 검찰청, 감사원과 유사한 기관. <연구자 : 정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