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가 망해 원나라 태조가 천하를 통일함에 원외랑은 해외 만리 망명길을 떠나 고려국 서주 지금의 서산땅 간월도에 기착하였으며 원외랑공의 장인은 고창현 분으로 위위승동정 吳永老이다. 원외랑이 간월도에 기착한지 5년 신축년 팔월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양렬공이다 섬에 살면서도 어릴적부터 낚시나 고기 잡는 일은 즐겨하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더니 열 살 때에 정원사에 올라 공부에 전념하였다.
하루는 뒷산 만당에 올라 두 어수 싯귀를 읊고 바위에 새기었으니 [시름으로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구름은 북으로 나는 구나 문득 先考의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봄비 따라 흐른다 오랑케 풍진은 우주에 뻗쳤으니 이국 만리에 떨어진 외로운 이 신하로다 어느 날 건곤이 정하여 송나라 조씨의 봄이 다시 올꼬]라고 한탄하였다. 신해년 8월에 아버지와 함께 대사동으로 이거하였으며 이 때에 지금의 부여땅 문수사에서 글을 읽고 문하시랑 韓自喜 댁에 왕래하면서 수학에 전념하였다 부인 陳씨는 당나라 복주 출신으로 衛尉尹致仕 陳琇님의 딸로서 이들 역시 송나라에서 망명한 분이다
공의 나이 14세 갑인년 가을 <中第三人> 급제하고 16세에 <隊正借敎上將軍> 19세에 己未 윤시월에 御史臺司錄을 지냈으며 신유년에 喪을 당하여 연달아 여묘(廬墓)를 하면서 한번도 집에 오지 않고 병인년 봄 아버님 백운의 뜻을 받들어 前峰에 望雲臺를 축조하고 둘레에 못을 파 항시 살펴보면서 늘 눈물을 보이곤 하였다. 공의 나이 20세 때 <판교위> 벼슬을 하고 29세에 통역외교관으로 국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파사부에 이르렀을 때 권신 임연이 모반을 하여 왕실을 소란케 하니 일행이 놀라서 의논이 분분한바 양렬공이 “나라 일을 맡아 하는 사람은 사사로운 이해에 개의치 않아야 한다”며 주위 동요를 정리하여 국왕을 수호하기 위해 원나라 왕에게 조력을 구하고 세자와 원나라 공주와 혼인을 청하니 원 임금이 이를 허락하여 모반을 평정하니 그 빛나는 업적이 만세에 빛나게 되었다.
그 이듬해 경진년에 왕이 공에게 군부판서춘궁익위판전 직위를 내리고 노비 200명과 논밭 2백 두락을 하사하며 본관을 서산으로 제수하였다 지난날 서산군수가 백성들이 궁핍함이 아전들이 사악함에 기인함을 알고 아전들을 엄히 다스리자 아전들이 반심을 품고 무리를 지어 군수를 몰아내고 죽임에 조정이 이에 대한 조치로 서산군을 폐하고 현재의 홍성 등으로 분활 관리하게 하였다.
양렬공이 본관을 서산으로 하사 받은 후 분리관리 되고 있는 서산을 군으로 복원하기 위해 공신노비 5십구를 헌납하는 등 노력으로 다시 서산군으로 복원시키고 기거하였다. 당시 선고 원외랑공의 묘와 어머니 오씨, 부인 진씨 묘가 군북 3십리쯤 사장동에 있음에 공이 관대를 군청에 모셔두고 춘추에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모셨으며 그 후 공이 수원으로 이거하였다
48세에 <세자원빈>을 배하였고 5십세에 벼슬이 <광정대부판삼사상장군>을 지냈으며 동년 12월에 <도첨의찬성사> 벼슬에 이르렀으며 61세 때에는 벼슬을 사양하셨으나 62세에 왕명으로 <삼한삼중대광추성정책안사공신판전리사사>라는 정1품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65세 을사년에 별세하니 왕이 애석하게 생각하여 襄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