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재위 15년(1623년) 인홍의 나이 87세, 그는 인목대비의 폐모사건이후 대북의 정권과 연을 끊고 광해군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합천의 가야산아래 은둔한지 5년, 일체의 차자나 상소문을 하지 않은 채 지내고 있었다.
광해군 일기에 따르면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날, 3월12일 운명의 날 밤에 광해군은 어수당에서 연회를 하고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한다. 그때 광해군의 조카뻘로서 반정군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된 능양군은 연서역 마을에 주둔하였다. 반군 대장인 전 강계부사 김류, 부장 전 평산부사 이귀등은 전 병조좌랑 최명길, 김자점, 심기원등과 홍제원터에 모여 있었고, 북병사 이괄등이 1000여 명의 반군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밤 3경에 창의문으로 들이닥치니 놀란 광해군은 담을 넘어 안국신의 집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세자는 광해군을 뒤쫓다가 찾지 못하고 장의동 민가에 숨어 들었다.
이후후 광해군에 의해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가 왕을 폐위시키고 光海君으로 삼고 능양군을 즉위시킨다는 교지를 내렸다. 인목대비의 교지에는 광해군의 패륜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해 광해군에 대한 저주로 일관하는데 명나라의 천자의 고명을 받은 자신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부모를 죽였으며 품속의 어린 자식까지 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죄없이 죽이고 큰 옥사와 궁궐을 짓기 위해 토목공사 그리고 부역과 수탈로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보다도 광해군을 폐위시킨 가장 큰 명분은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에 조선을 도운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인 후금과 화친을 했다는 것이다.
크게 요약된 광해군의 폐위 요지는, 두 가지, 인목대비를 폐하고 형제를 죽인 패륜아이고 명나라를 배신한 것이 요약된 인조반정의 명분이었다.
과연 이 두 비난의 명분은 정당한 것이었는가?
첫째의 명분은 인목대비의 가족을 죽이고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사에서는 많은 왕들이 정적을 제거하는 데는 누구나 가차없이 철저했다. 이것은 어느 정권이나 마찬가지이다. 정권의 전복을 꾀하려는 조짐이 보이면 어느 왕이나 철저하게 정권 전복세력을 제거했다. 특히, 정권의 초기,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王朝에서는.....
그리고, 광해군은 전란중에 세자로 책봉되어 위기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선조는 선위론으로 늘 광해군을 괴롭혔고, 선조는 왕위를 영창대군에게 물려 주려했으며 이로 인해 북인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갈라져 대립하였다. 그리고 선조가 죽기 전까지는, 대북파가 귀양가는 등, 광해군의 위치는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고, 선조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게되었다.
이는 광해군이 즉위후에도 그 소북파 세력은 존재하게됐고 서자인 광해군이 적자인 영창대군에 의해 권력의 불안정을 가져왔던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광해군이 즉위후, 즉시, 철저하게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거했다면 인조반정은 일으나지 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목대비의 폐모론은 잘못 판단한 것이다. 조선은 유교의 국가이었다. 비록 국왕이고 계모의 관계일지라도 국가의 권력의 차원에서가 아닌 일반의 윤리차원에서 문제였던 것이다. 평생의 당파와 관계없이 살아온 이항복과 온건파 이원익이 끝까지 廢母를 반대하다 귀양가는 것은 얼마나 폐모론이 무리였는가 보여주는 것이었다.
권력의 강화와 안정도모 차원이었더라면, 차라리 廢母論 보다 철저하게 정치적 통제 강화와 정치적 안정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廢母論은 잘못된 명분이었다. 그리고, 광해군은 분명 비난받을 만한 패륜아가 아니었다.
차라리 인조 반정의 쿠테타가 없었다면 조선왕조사에 賢君으로 길이 남았을 것이고, 청나라와의 관계를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서 조선의 역사는 지금보다 훨씬 진보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리라 확신한다. 또한, 역사의 큰 물줄기는 지금과 아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두 번째,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명분이다. 이것은 더욱 잘못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명나라는 망했고, 후금이 세운 청나라는 결국 중국을 장악했다. 그리고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에 의해 인조의 쿠테타 세력은, 조선이 후금에 무릎을 끓는 국가적 치욕을 당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광해군시대를 통해 숭명사대주의니, 오랑캐니 등의 사대주의에서 실리 외교적인 방향으로 역사의 흐름은 크게 변했으리라 짐작한다. 또한 국방을 강화하고 군사력과 국가 재건을 통해 또 다른 大朝鮮의 새歷史가, 東方의 强國으로 시작할 뻔한 좋은 기회를 놓쳐버린 듯 안타까운 마음이다.
과연 인조 반정후, 조선은 얼마나 치욕적인 일을 당했는가? 그것도 여진족의 후금에게 임금이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그것은 숭명사대주의 사상의 어리석음의 극치였다.
인정 반정후 조선 민중의 평화는 밑바닥에서부터 깨어지고 말았다.
당시의 인조반정은 백성들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반정 명분인 폐모니 패륜이니 숭명이니 하는것들은 백성들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높고 먼 세계의 일이었다. 백성들은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치세에 만족하고 있었고 인조 반정은 백성들의 싸늘한 시선을 받는 불필요한 쿠테타일 뿐이었다.
백성들은 광해군이, 연산군과 같은 자신의 향략을 위해 백성을 희생시킨 왕이 아니라 대동법과 같은 개혁을 실시하여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했던 군주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광해군과 대북정권에 대해, 일부 사람들, 즉,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나 정권에서 소외된 서인들에게는 광해군의 치세의 모든 것이 부정의 대상일지 모르나, 그외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국가적인 일이 아니라, 일부 정치세력을 위한 쿠테타 일뿐이었다.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죽임은 권력기반의 안정과 정권강화에 危害되는 세력을 제거하는 것으로 역대 어느 왕조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고 왕가에서는 다반사였을 것이다. 이것은 정치권력의 역사가 있는 한, 필연적인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정권이 들어서자 평화는 깨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평화마저 지키지 못했다. 이것은 인조반정의 명분이 얼마나 약했는가에 대한 반증이다.
仁祖反正 1년 후 반정공신의 한 사람이었던 이괄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로 인조는 서울을 버리고 공주로 도망가는 등 한동안 나라가 시끄러웠다. 인조정권은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정권이었다. 이 이괄의 난은 후금의 侵攻口實을 주었다. 진압된 이괄의 잔당이 후금으로 도망쳐 후금에게 인조반정의 부당성을 호소하자 조선내부의 분열을 눈치챈 후금은 1627년 1월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 왔다.
이것이 丁卯胡亂이다. 인조는 서울을 버리고 공주로 도망간지 3년만에 다시 강화도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후금은 조선과 장기전을 벌일 상황이 아니어서 후금을 형으로 모시며 세폐를 바치는 정묘조약을 맺는 것으로 휴전에 동의하고 후금은 물러갔다.
이후 인조와 서인정권은 후금을 대비해 국방력을 강화해 후금과 차후 일전을 대비하든지 아니면 후금과의 화친정책을 취하든지 둘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도 인조와 서인정권은 국방력 강화도, 후금친화외교도 아닌 親明排靑만을 목소리 높게 외치기만 하였다.
그후 후금은 조선과의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바꿀 것과 더 많은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며, 親明 主戰論을 주장하는 대신들과 왕자들을 볼모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 동안 국방력 강화도 아니고 후금친화정책도 아닌 허울 좋은 친명배청만 주장하던 인조와 서인정권은 결국 자기 모순에 빠져 향명대의를 위해 후금과 화를 끊는다는 단교의 선전교서를 전국에 내리게 되는데 아무런 대안도 없이 큰소리 치는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드디어 청태종은 그해 12월 여진족 7만, 몽고족 3만, 등 총 12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침공한지 보름도 안돼, 개성을 점령한 청태종은 서울로 진격했다. 미처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농성 40일만에 주화파 최명길은 인조의 명을 받아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께 말씀을 올리나이다. 小邦(소방)이 大國(대국)을 거역하여 스스로 兵禍(병화)를 채촉했고 孤城(고성)에 몸을 두게 되어 危難(위난)이 朝夕(조석)에 닥쳤습니다.” 로 시작하는 국가로써는 치욕적인 항복문서를 작성 전달하고 인조는 삼전도에 나아가 세 번 무릎을 끓고 아홉번을 머리를 조아리는 三?九伏(삼궤구복)의,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알현의 예를 행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삼학사를 비롯해 수많은 왕자와 대신들을 볼모로 심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왕자와 서인대신들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그렇게 되었다 치더라도 이 과정에서 백성이 받은 고통과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두 번의 전란을 통해 조선은 국가 재건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을 엉뚱한 데 소모하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이 인조 반정이란 쿠테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역사의 엄청난 퇴보였다.
이 영향은 결국, 조선의 역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시작한 길림 길이었다.
인조와 서인정권은 태어나서는 안될 정권이었다.
인목대비의 폐비사건이후 5년여를, 일체, 외부와 교통을 끊고, 합천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인홍은 인조반정직후 광해군의 亂政責任(?)을 물어 서울로 압송된지 3일만에 사형에 처해졌던 것이었다.
이때 그를 逆賊(역적)으로 몰고 간 仁祖(인조)와 西人政權(서인정권)이 인홍의 罪籍(죄적)에 대해 論(논)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사림출신으로 횡포를 부린 品官(품관)이었다는 것.
둘째,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면서 무단을 위세를 부렸다는 것.
셋째, 괴귀한 학문을 퍼뜨렸다는 것
넷째, 이언적. 이황을 배척하고 그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했다는 것
다섯째, 폐비를 반대한 동료요 후배인 鄭蘊(정온), 李大期(이대기)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것.
이에 대해 실록이나 여러 가지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첫째, 실록에도 인홍의 관직생활이 청렴 결백하고,특히 황간현감 시절엔 지방수령으로 고을을 가장 잘 다스린 지방관으로 이름이 더 높았고, 또한 사헌부 장령 시절 개혁정치로써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이율곡과 함께 언관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죄적에서 처럼 품관으로 횡포를 부렸다는 것은 개혁 정치의 대상이 되었던 당시의 훈구척신의 입장에서 보면 사림출신으로 횡포를 부렸다고 억지를 부릴 수는 있으나, 전혀 논리에 맞지 않는다. 무리한 정치적 보복이다.
그리고 인홍은 임금의 수십차례 관직을 제수했으나 거의 대부분 사양하고 사임을 했다. 이것은 인홍이 品官등 벼슬에 그렇게 미련이 없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인홍의 래암집에 나타나듯이 수많은 인홍의 글 중에는 사직상소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국왕이 수도 없이 벼슬을 내리며 그를 불렀으나 그는 거의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국가와 백성을 위한 올바른 정책과 개혁에 대해 많은 부분을 국왕에게 상소했다.
또한, 광해군 시절, 국왕이 우의정에 제수했으나 인홍은 사직상소를 15차례나 국왕에게 올렸다. 과연, 인홍이 사림출신으로 횡포를 부린 品官이었을까?
둘째, 임진왜란 당시 관직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바쳐 국가를 위기에서 구할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일부 훌륭한 인물들이 나와 국가를 보위하는 데 힘써 노력했지만, 인홍의 사의장봉사에서 잘 나타나듯이 지방수령, 관료들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왜 임진난이 일으났는지에 대해 그 당시 고위 관료의 책임을 면할길 없다. 임진왜란중 의병장의 대부분은 북인출신 인물들이었다. 서인은 전쟁 당시 그렇게 한일이 없었다.
단지 임금을 따라 피난다닌 것이 대부분이었다. 인홍은 56세의 나이로 영남지역의 ‘산림장령 래암선생’ 이란 학문적 존경과 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다. 의병대장으로서 임진란을 끝난 후의 인홍의 행적을 보자, 과연 인홍은 무엇을 했었는가?. 높은 벼슬을 탐했던가?, 무단으로 위세를 부렸던가?. 국왕이 의병대장을 임명하였으나 사임하고, 상주목사, 영해부사, 동부승지, 사헌부 대사헌, 공조참판등 수많은 벼슬을 제수했으나 그는 사양했다.
그리고, 광해조에서도 한성판윤, 의정부 좌의정, 우의정등 고위 벼슬을 제수해도 그는 사양했다. 그가 벼슬에 욕심이 있었겠는가?. 무단으로 위세를 부렸다?. 그는 이미 영남지역의 조식의 고제로 존경받는 대학자 ‘래암선생’이었다. 그는 무단으로 위세를 부릴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할 이유도 없다.
인홍이 무단으로 위세를 부렸다는 것은 인조반정의 정권이 억지 주장인 것이었다.
셋째, 인홍은 남명 조식선생의 도가적 분위기에 충실하였고 利用厚生(이용후생)의 學(학)을 두고 말하는 것인데, 이는 당시 대부분 선비들이 성리학의 이론과 명리에 빠져 오직 자신의 영달을 위해 공부해서, 벼슬길에 나아가 立身揚名(입신양명)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남명 조식선생은 실천적 학문으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제자들을 가르쳤고 인홍도 이에 많은 영향을 받아 벼슬에는 별 뜻을 두지 않았다.
임진왜란중, 남명학파출신에서 의병장이 가장 많이 나온 것도 성리학 이론에만 치우치지 않는 선비의 실천사상에서 인 것이다. 임진왜란이후 성리학이 더 이상 유교국가의 이념으로 자리 잡기엔 많은 모순을 드러냈다. 인홍의 학문과 실천적 삶이 전통유가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傀奇之學에 해당될지 모르나, 결국에는 우리 나라의 조선후기 실학사상이 생기기 시작한 시초가 바로 인홍의 학문과 실천적 삶에서부터 그 뿌리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이 논리는 선비로써, 학자로서의, 출처불명에 대한 자기 방어적 논리였을 뿐이었다.
넷째, 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을 반대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그의 스승인 남명 조식선생을 문묘종사케 하려고 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이전에 퇴계학파에서 남명학파의 도가적분위기를 문제삼아 조식선생을 비판한 사실과 인홍이 이언적. 이황의 학문을 하는 선비로써 정치적 출처불명한 학자적 행동을 비판한 것이나, 이는 문묘종사를 두고 학파간의 갈등으로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인정권은 학문적 갈등을 정치적 보복으로 인홍에게 되돌리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논리이다.
다섯째. 폐비를 반대한 동료를 구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논리다. 그 당시 서인들은 무엇을 했기에 그들을 구해 주지 못하고 인홍에게 구해 주지 못했다는 것인가.
인홍은 실록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결코 인목대비의 폐모론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인목대비 폐위후, 인홍은 일체의 출입을 삼가고 광해군의 간절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그후 5년여를 인조반정후 처형될 때까지 합천에서 은거해 버렸다.
한편, 정온, 이대기등의 행적을 보면, 그들은 남인의 입장에서 정치적 반대를 했던 것이다.
당략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이용하려 했던 것이고, 결국, 인목대비 폐위가 아닌 정치적 대립으로 대북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서인들의 억지 논리임에 틀림없다.
물론, 이 당시 상황에서 대북파의 영수로서 추앙을 받고 있던 인홍은 80세의 고령이고 중앙 의정부에서 질의나 정책대안의 비답을 주었던 것은 사실인데 가끔 합천에서 멀리 떨어진 중안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고 인홍의 명성을 정권유지에 악용하려는 대북의 일부 무리가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앞에서 論據(논거)한 처럼, 인홍의 罪籍(죄적)으로는 逆賊(역적)이 될 수 없고 仁祖(인조) 反正(반정)의 정당성을 조작하기 위해, 서인정권의 정치적 폄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홍이 처형된 후, 우리의 역사는 많은 정치적 퇴보를 가져오게 되고 국가적으로는 후금에 의한 국가적 삼전도 치욕, 숭명배청사상에 허구에 빠져, 결국 국가재건의 기회를 상실하고, 민중과 백성의 피폐, 학문적으로는 남명학의 단절, 실학사상의 발호가 짓밟힌 점, 인홍의 88세, 오랜 세월 동안 집필했던 정치, 철학 저서등이 후세에 제대로 전해져 오지 못한 점, 임진왜란에 외아들 마저 잃고, 많은 서적과 유물, 유적 등이 소멸된 점이 더 더욱 안타깝게 한다.
<연구자 : 정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