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은 태자첨사 최수랑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송나라 년호 가희년부터 몽고가 득세 강대해지자 양양, 회촉이 차례로 함락되고 왕민, 이백영 등이 성곽과 창고를 불질러 태우고 이르러 항복을 한다 몽고는 요추, 양유중을 시켜 문자를 통달한 선비를 널리 구하였고 덕안골이 이미 함락되어 조복이란 선비를 얻고 보니 그는 儒學의 비중이 크다 함을 알게 되고 그 무리들이 강한선생이라 부르던 터였다.
원태조는 이를 아주 좋아했다 또 원외랑공의 고명을 듣고 요추로 하여금 백단으로 설득하고 위협하여 조복과 함께 수레에 싣고 함께 가기를 원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옛말에 열녀는 두 남편을 받들지 않으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니라 하였거늘 차라리 죽을 지언정 북쪽(元) 조정에서 신하되기는 싫도다”하셨다.
요추가 그 뜻을 태조에게 고하자 태조는 그 절개를 오히려 가상히 여기였다. 이에 공께서는 원태조의 회유를 피해 소항으로부터 태마루에 몸을 싣고 바다 건너 마한(고려) 서주땅 간월도에 기착하였으니 이때가 1237년 고려고종 24년이다.
당시 고려 풍속은 불교를 숭상할 때이고 공이 성리지학(性理之學)으로 유생들을 가르치게 됨으로서 동방사람이 정명도, 정이천 兩程 선생의 글을 접하게 된 시초이기도 하다. 신해년 2월 대사동으로 이거 망운대를 쌓고 망향의 思念을 달래었다 그 후 공은 군북 3십리 사장동 밝은 뜰에 안장되었다.
공은 위위승 동정 오영노의 딸을 처로 맞이하여 두 아들을 낳으시니 장남 仁卿은 관직이 <군부판서> 였고 차남 俊卿은 관직이 <중랑장>이며 다시 인경이 4남2녀를 낳으니 장남 信柔 의 관직은 <우문관대제학>이고 2남 信英은 <전의령> 3남 信和의 관직 <중랑장>이며 4남 信綏의 관직은 <전객령>이었다. 그리고 장녀는 蔡宗瑞에 출가하니 벼슬은 <사직부사>요 2녀는 정기(鄭?)에 출가하니 벼슬은 <광릉군>이다 한편 준경은 1남을 두니 이름이 芬으로 관직은 <군기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