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서자인 반면, 영창대군이 적자라는 점과 급변하는 외교상황(명의 쇠퇴, 후금의 확대, 위협), 광해군 반대세력의 잔존 등, 즉위 초기, 권력 기반의 불안정에 위기의식을 느낀 대북 정권은, 더욱 정권을 강화하고, 권력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영창대군을 노리게 되는 데, 1613년(광해군5년) 4월, 조령(鳥嶺)에서 일어난 서얼들의 강도 사건인 ‘칠서의 옥’이 영창대군을 목표로 삼는 그 구실을 제공하게 된다. 이 사건은 은상인(銀商人)을 죽인, 강도 사건의 범인을 잡고 보니 의외로 대갓집의 서자 일곱 명이 관련되어 있었다.
박응서·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 7명은 모두 조정 고관의 서얼들로서 출세의 길이 막힌 데 불만을 품고 온갖 악행을 자행하다가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대북파의 이이첨은 이들을 문초할 때, 박응서와 이들이, 김제남(國舅(국구): 임금의 장인: 인목대비의 아버지)과 손잡고,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도모하였다고 허위 자백케 하여 김제남을 죽였고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하였는데, 다음해 2월에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으로 하여금 그를 소사(燒死)하게 하였다. 이 사건이 계축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축화옥이라고 한다.
이때, 의정부에 피력한, 78세의 國老(국노)인 인홍의 입장은 ‘영창대군은 어려서 역모에 가담할 수 없으므로 죄를 주지 말라’ 는 全恩(전은)을 주장했고 ‘1608년 임해군獄事(옥사)에서 全恩(전은)을 내세우던 자가 이때에 割恩(할은)을 내세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권력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영창대군을 부득이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1618년 (광해군 10년)에 인목대비의 서궁유폐가 이루어지고 이어 폐모 논의가 일어났다. 이때, 영의정 직함을 가지고 합천 은거해 있던 정인홍은 한성의 의정부에 글을 보내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며 폐모는 불가함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또한 여러번의 도당으로부터 질의를 받고 그는 이렇게 답하였다.
인홍은 원래부터 이름난 효자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당에 밝힌 그의 강력한 의사는 ‘母子의 名義는 不可易이므로 廢母 할 수는 없다‘는 것과 또한 예전 중국에서 무도한 행실을 한 王妃들의 행동이 인목대비에게는 있지도 않았음을 밝혀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폐위되었고 인홍은 그해 3월 영의정을 사직하는 마지막 차자를 올리고 광해군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는 죽을 때까지 도성의 출입은 물론 일체의 상소나 차자를 올리지도 않았다. 이런 그를 산림 정승으로 불렀는데 이는 조선왕조 500년에 걸쳐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는 한번도 권력을 탐하거나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나 국왕이 수십 차례 벼슬을 제수하고 벼슬길에 나와 달라고 할 때마다 그는 번번이 사양하고 오직 철저하게 處士적인 삶을 누리려 했다. 그렇다고 그는 국가와 백성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가 배웠던 남명학의 실천적 행동과 도가적인 생활로 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바지 해 왔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국가와 백성이 어려워 할 때마다 행동으로 나서고 왕과 정책을 비판하고 새로은 대안을 제시하면서 올바르게 사림정치의 실현을 구현하려 했던 것이었다.
<연구자 : 정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