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4년, 정인경이 14세되던 해, 고려 고종은 강화도에서 무신정권의 권신인 최항과 개경환도 문제를 두고 대립하고 있었고, 이 시기 양렬공은 부친을 따라 서산의 대사동(지금의 석림동 남원마을)으로 移居했다.
移居후 정인경은 학문에 정성를 쏟으며 공부하고 틈틈히 무술을 익혀 장부로써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지금 서산시 석림동 남원마을에는 마을 앞에 큰 은행나무와 유래비가 세워져 있는데, 정인경 장군이 무예를 연마하던 자리로 알려져 있고 그 뒤에는 조그마한 동산이 있는데 그 곳이 정인경이 쌓은 토성으로 망운대이다.예전엔 원래 남원마을 앞은 넓은 들판이었고 많은 학들이 날아와 살던 아름다운 마을이다. 고려 시대에는 남원마을 넓은 들 앞 가까이 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으로 추정되며 뒷산 망운대에 올라서면 멀리 서해가 보였다고는 하나 지금은 바다가 사라지고 그기에 넓은 들판이 마주하고 있다.
정인경은 그후 부여로가서 문수사에서 공부하고 門下侍郞(문하시랑)을 지낸 한자희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1258년, 정인경이 18세가 되던 해부터, 몽고 차라대에 의한 7차의 고려 침공이 시작되고 이로 인해 고려의 전 국토가 전란에 다시 휩싸이게 된다. 몽고는 고려 조정의 출륙환도(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를 주장하고 고려인 20 만 이상을 살육한다. 이에 고려군과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항거했다.
1259년 여름, 몽고군의 주력부대가 稷山(직산: 지금의 안성시 직산면)에 주둔하게 되는 데, 당시 19세의 정인경은 千下軍의 馬別抄에 들어가, 7월17일, 직산(稷山)과 신창(新昌)에 주둔한 몽고군을 야간에 급습하고 게릴라전을 펼쳐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로 인하여 그해 8월에 무관의 초급 지휘관인 隊正(대정)이 되었다.
그리고 몽고군과의 전투를 통해 전과를 올리면서 1259년, 19세에, 興威衛(흥위위) 소속의 隊正(대정)으로 수도 외곽 방위군 지휘관으로 근무하고, 1260년, 校尉(교위)을 지내게 되며 神號衛(신호위)에서 수도 경비군 지휘관으로 근무한다. 이때 그의 나이 20세였다.1260년(정인경이 20세가 되던 해) 이 시기 고려는, 고려 고종이 사망하고 3월에 고려 원종이 즉위하게 된다. 그 해, 몽고의 세조 쿠빌라이가 국호를 元으로 고치고 중국의 대부분 지역을 평정하게 된다.
1261년, 정인경이 21세 되던 해, 모친이 돌아가시게 되어 벼슬을 버리고 서산으로 낙향하여 분상 3년의 시묘를 한다. 그리고, 1266년 정인경은 부친의 뜻을 받들어 남원마을 뒤에 토성을 쌓아 망운대를 축조하고 앞쪽에 연못을 판다. 그리고 가끔 대사동의 망운대에 올라 고향을 그리는 마음으로 서해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인경은 무신 말기의 혼란한 정치 속에서 낙향하여 고향 서산 대사동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때때로 도비산아래 부석사와 문수사에 들러 고승 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 증진에 힘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시기 승려 일연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승려 일연은 大禪師(대선사)로 1261년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 선월사 주지기 되었다가 그 뒤, 경북 영일에 있는 오어사, 달성에 있는 인홍사(인흥사) 등, 충남북 일대의 절을 다니며 설볍과 강론을 폈었다. 이런 인연으로 훗날, 인경의 아들 중 하나가 조계사 승려가 된다.
1268년, 그가 28세가 되던 해, 고려 조정은 최씨 무신정권의 마지막인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김인준의 무신정권 말기였으며 김인준과 원종은 정치적 견해가 달라 서로 대립하게 되고 이에 그해 12월, 원종의 지시를 받은 임연이 김인준을 죽이게 되어 임연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권신 임연과 왕권을 강화하려는 원종의 개경 환도 문제로 정치적 대립을 하고 있었다. 이는 실제적으로 개경 환도를 둘러싼 권력의 투쟁이었다. <연구자 : 정표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