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재상양문(海東齋上梁文) (발췌) 天地가 다하고 萬古에 뻗쳐가도록 썩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충열(忠烈)이오. 산천을 지나 천추(千秋)를 열력(閱歷)하되 광채가 있는 것은 인현(仁賢)이라 이것이 백세의 빛남이며 실상 일방(一方)을 우러러 받듬이라. 엎드려 생각하건데 선조 원외랑공(員外郞公)은 송나라의 대벌(大閥)이오 절강(浙江)의 名門이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는 나라의 주춧돌이오 형부원외랑직(刑部員外郞職)은 임금을 모시는 자리라 어찌해서 사백년 내려온 중간에 갈렸으며 어찌 감히 사.오대 성군의 은혜를 잊으리오? 대운이 기울고 무너져 남궐(南闕)에서 직책을 다 하지 못하고 원업(元業)이 수통(垂統)하니 북정(北庭)의 신하가 되지 않고 뗏목으로 바다를 건너 서산 간월도에 와서 기초를 정하고 고향을 바라보며 회포를 풀곤 하였다. 공은 송나라 신하로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임금과 나라를 위해 정성을 다 하였고 몽고군이 요추(姚樞)를 시켜 자신들의 신하가 되 달라는 협박으로 회유를 했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절개를 괴롭게 지켰으며 성리학자 정명도, 이천(程明道, 伊川) 두 선생이 남긴 글을 제생(諸生)에게 가르쳤다.
엎드려 생각해 보건데 서산군 양렬공 선생의 영혼은 산악에 내리고 의리는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이른다 8-9세가 되어 산사(山寺)에 올라 두 수의 시를 지어서 선대의 산소와 조씨의 운이 돌아오기를 기대했고 나이 겨우 14세에 급제하여 보직으로 대정(隊正)이 되어 어사서(御使署) 나갔다. 어버이 상사(喪事)를 당하여 가정의 보살핌과 나라의 벼슬길에도 나가지 않고 향리에서 수년간 여묘(廬墓)를 살았다.
세자를 모시고 원나라 조정에 원나라 공주와 혼인을 청하여 결과를 얻었고 군대를 모집하여 몽고군을 물리치고 간사한 무리를 꺽어 왕권의 법통을 바로세우니 왕이 비로서 호를 瑞山君으로 봉하고 비답(批答)을 내렸으며 65세로 일기를 다 함에 왕이 공을 높이 사 공신록권을 내리고 양렬이라는 시호를 하사 받았으니 이를 후세에 알리고 기리기 위해 사당(祠堂)을 짓기로 하고 자손들이 차례로 헌성하여 묘소 가까이 터를 닦아 길일을 택해 정성으로 대들보를 올리니 일가 간에 정의(情意)를 돈목히 하여 범문정(范文正)의 집과 발을 균등히 하는 법을 따를 것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