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 정치 세력
조선중기에서는 공직생활 즉,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왕의 勳戚(훈척; 공신이나, 권력층의 주변 인척) 이나, 과거 시험에 합격해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정치의 중심 세력은 항시, 그들의 소수 가문과 학파의 이익과 공명을 위해, 소수집단 세력화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학은 학문을 통해 출세의 벼슬길을 가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그 학도들이 모여 정치적 파당을 이루기도 했다. 실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많은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고, 이들이 대중적인 공론에 의한 정치란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특이하게, 지방 시골, 재야의 인물이 공직에 발탁되어 벼슬길에 나아가, 다수의 사림에 의한 공론의 정치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朝鮮王朝 政治史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 나라에서 지금, 서기 2000년이 되어서야 공직사회의 문호개방, 재야 전문가, 학자의 공직사회 발탁 등 야단법석이다. 실제, 이는 500년전 조선 중기에 역사의 물줄기가 개혁적 신호탄은 올랐건만, 아무도 모른 채 역사는 흘러가고 만 것이다. 鄭仁弘은 1573년 탁행지사로 래암을 포함, 다섯 명이 천거되었는데, 李之?(이지함), 崔永慶(최영경), 鄭仁弘, 趙穆(조목), 金千鎰(김천일). 처음 제수 받은 벼슬은 6품직으로 보통 유일로 천거될 때, 9품직을 주는 것이 관례인데 이들에게는 특별히 예우를 했던 것이었다. 이때 래암은 황간현감에 제수되었으며, 그곳에 재직하면서 지방관료의 문제점 , 지방행정과 아전들의 공물 상납 등의 부정부패등을 지적하였다. 이시기를 통해 래암은 관료의 부정부패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그후, 조정에서는 1578년(선조11년)에 영천군수, 1586년(선조19년)에 익산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래암선생은 이를 모두 사양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비록 일시 현감을 지냈으나 뜻이 산림에서 학문에 증진하는데 있어 지방 목민직이 내려졌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이전에 그가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놓고 일대 명성을 얻는 계기가 있었다. 1580년 (선조13년) 12월, 사헌부 大司憲(정2품)에 鄭琢(정탁), 大司諫(대사간)(정3품)에 이이(율곡), 掌令(정4품)에 鄭仁弘(정인홍), 成渾(성혼)에 임명되는 획기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곧, 山林出身의 道學者(도학자)들로 言官(언관)의 책임을 맡긴 것이었다. 이들은 당시 在野 山林에서 명망이 높은 선비들이었다. 이를 두고 조선 왕조 실록에 기록하기를, 조선 역사상, 가장 자질이 높고 이상적인 言官(언관)의 형태라고 칭송했다. 이때가 래암선생의 나이 45세의 장년의 나이로, 이이(율곡), 성혼, 이지함, 정탁등 과의 교분을 다졌고 또한 소신껏 자신의 言事를 펼쳤던 시기이다.
그러나 司憲府의 言官은 勳戚功臣이나 기득권을 가진 고위 벼슬에 있던 사람들의 질시와 시비에 말려들기 쉬운 벼슬이기도 했다. (편집자주: 司憲府(사헌부)는 지금의 감사원, 검찰청과 유사한 관청으로, 고위 공직자의 비리를 탄핵하고, 직접 왕에게 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개혁 정책의 입안을 촉구하는 관청이고, 掌令(장령), 持平(지평)은 그 실무의 책임을 맡고 있는 직책임.) 비록, 사헌부 掌令. 持平은 그 직급이 당하관이나, 그 업무는 一國의 공직자 기강과 부정 부패를 탄핵하는 사법기능을 갖는 직책이라, 여간 이름 있는 선비가 아니고서는 임용되지 않는 자리였다. 이는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래암의 학문과 청렴한 인품이 얼마나 재야에 알려져 있었는지를 나타난다.
이 時期, 朝鮮 王朝 實錄(宣祖 實錄)의 래암선생에 대한 평가에 의하면, ‘정인홍은 산림에 그 모습을 감추고, 학문에 뛰어남이 절륜하면서도 그 인물됨이 청렴, 겸손하여 늘, 산골에 뭍혀 있고, 효자로써 그를 칭송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라고 적고 있고, 그리고, ‘이율곡이 대사헌에 제수되고 정인홍이 掌令(장령)에 임명되자 朝野(조야)는 기뻐하며 왕의 善治(선치)에 모두가 감복했다.
또한, 정인홍이 상경하자 평소 그의 이름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려고 모여들었다’ 라고 적고 있고, 그리고 ‘정인홍이 벼슬에 나아가자 朝野(조야)의 모두가 기대했던 대로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고, 군현을 善治하여 그의 이름은 더욱 높아지고, 선조는 ‘과연, 인홍의 절륜한 학문과 일에 대한 공명정대함은 草木과 鳥獸까지도 정인홍의 이름을 안다’ 라고 했다.
朝鮮王朝 實錄에 따르면, ‘정인홍은 잘못을 탄핵할 때는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나라의 법령을 엄히 지켜, 그가 사헌부에 있을 때만은 나라의 기강이 자못 숙연했다.’ 또한, “ 정인홍은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한 까닭은 공물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모리배와 고을 수령과 아전들이 탐학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엄금하도록 戶曹(호조)에 개혁하기를 촉구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정인홍이 사헌부에 있음에 국정을 정돈하고 모든 공직자에게 진숙케 하였으므로 심지어는 시중 상인들까지도 감히 나라에서 금하는 물건을 불법적으로 사고 팔아 큰 이득을 취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시골에서 올라온 한 사람이 말하기를 ‘정인홍이 어떤 분이기에 그 위엄과 이름이 널리 외방에 까지 퍼져서 지방 수령방백은 물론, 병수사들까지도 두려워하고 스스로 삼가니 정말 그 분은 대단한 분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이에 李珥(栗谷)는 이 말을 듣고 “德遠은(來庵 先生의 字. 래암 선생과 율곡 선생은 같이 사헌부에 근무하며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훗날, 서로 학문과 정치적 개혁의 이견차이로 다른 길을 갔지만.) 憲官이 됨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스스로 삼가고 두려워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공명정대하니 그는 과연 진정한 대장부다‘ 라고 했다. 사헌부에서 이이(율곡)과 함께 일할 때, 래암은, 이이(율곡)이 개혁대상에 대해 그의 정치적 처신이 너무 온건하고 유약함을 걱정하여, 그에게 ‘叔獻(율곡의 字)은 학문과 인품은 뛰어나나, 정치 개혁에 대한 일에 과감하지 못하다’ 라고 하자, 그는 ‘ 내가 德源(덕원: 仁弘의 字)의 韋(화살)가 되고 덕원이 나의 弦(활의 시위)이 되어 덕원과 내가 하나로 합하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 라 하였다. 과연, 율곡이 대사헌으로 있고, 래암이 장령으로 있을 시기에는 강직과 유함이 조화를 이루어 선조 시대 정치개혁의 황금시기를 이루었다.
王朝實錄의 史官도 實錄에서 評하기를 “ 정인홍은 남명조식의 高弟다. 어려서부터 山林에 뭍혀 글을 읽어, 그의 학문과 인품이 뛰어났고, 영남선비들이 많이 그를 추앙하며 칭하기를, 嶺南士林의 來庵 先生(래암 선생)이라 하였다. 그는 不世의 사명을 입어 草野에서 일어남에 君王은 자리를 비우고 일어나 그를 기다렸고, 朝野는 눈을 씻고 그의 풍채를 바라보았다. 그는 먼저, 군왕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이에 현실적 국가문제를 진달하여 여러 선비들과 마음을 합하고 뜻을 같이하면서 可否를 논의하고 정책적 문제의 시비와 국익을 살펴 점차 바르게 하고 宗社와 백성을 위함에 모든 노력을 하였다. 래암은 朝野의 바램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사헌부라는 곳과, 그리고 그 직무를 책임맡은 사람은 고관대작과 모든 관원의 비행을 탄핵하고 시비를 가려 시정하는 직무다 보니 자연히, 많은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얻기 보다 싫어하고 꺼리게 되었다. 세상사람들의 마음이란 자기의 잘잘못은 가리지 않고 자기에게 죄를 주고 벌을 가하면, 심하면, 원수같이 대하기 일수다. 이 시기에 松江(송강) 鄭澈(정철)은 선조 11년, 承政院(승정원) 承旨(승지)로 있을 때, 진도 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간접, 연루되어, 래암의 是非論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귀향을 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송강 정철은 귀향을 가면서도 “ 덕원은 (래암의 字:) 강직하고, 정말 공정한 사람이다. 비록, 나를 벌주어 멀리 귀향 보내게 탄핵한 사람이지만, 길에서 다시 만나면 나는 그와 같이 예전처럼 함께 술을 마시고 싶다.” 하고 했다.
이와같이 래암은 벼슬길에 나가있는 동안, 모든 일에 공명 정대하고, 새로운 정치 개혁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지극히 명료하면 무리가 모이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처럼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며 원수같이 대하는 勳舊戚臣(훈구척신)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척신들과 기존 기득권 세력들의 지속적 宣祖에 대한 정치적 압박에 의해 宣祖마저도 정래암과 이율곡등이 추진하려던 개혁에 관심이 지지부진해지자, 이를 계기로 래암과 율곡은 그들의 거취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하게 되었는데, 다시 君主(宣祖)의 마음을 바꾸기 어렵다는 점에서 공감하면서 벼슬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하는지 여부에 논의를 했다, 그러나 來庵과 栗谷의 정치 개혁에 대한 의견 차는 달랐다.
결국, 래암은, ‘조정에 남아 훈구척신과 함께 참여속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자’는 이이(율곡)의 제안을 거부하고, 선조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가야산 해인사아래 합천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그는 물러나면서 이이(율곡)과 함께 현재 상태로 일을 추진한다면 조그마한 변화는 이룰지 몰라도, 벼슬이나 가지고 평범한 재상자리에 머물 수 있을 뿐, 국가적 개혁은 이루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현실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개혁에 勳戚臣인 아닌 士林의 집약된 힘이 발휘되지 못하게 된 것에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선조 시대에 싹 피우려던, 공론에 의한 士林政治는 왕조의 勳舊 戚臣政治 잔재청산에 완고한 태도를 보였던 宣祖의 분발을 촉구하는 가운데 야기된 정래암과 이율곡의 출처관의 차이로 新進 士類내부(새로운 개혁정치의 중심에 있던 선비들)의 입장차이를 확인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했다.
예전, 명종 말년에서 선조 즉위 초에 발탁된 사림출신 선비들은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과 적당히 화합해서 점진적 개혁을 추진하려는 입장인 반면, 그들의 천거에 의해 새로 등용된 新進 士類(새로이 등용된 선비들)들은 훈구 척신 정치를 개혁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며, 명실상부한, 公論에 의한 士林政治 (大衆 政治)의 실현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보면, 왕의 인척, 일부 공신과 그 인척 몇 사람 勳舊戚臣들에 의해 좌우되든 권력의 정치형태가, 많은 사람들의 정치참여에 의한, 공론에 의해 이루어지는 士林政治(大衆 政治라고도 할 수 있음)라는 새로운 개혁적인 정치로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이것은 朝鮮 王朝史에서 일대 크나큰 변혁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정치형태의 변혁은, 인조 반정과 함께, 일부 가문이나 학파중심의 소수 정치 집단화 형태로 변질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근대의 일제 식민 사학자들이, 일제 식민 정치로 조선 통치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朝鮮 政治史의 후진성, 정체성을 정당화시키고, 조선중기의 士林政治를 날조해 당파싸움의 붕당정치, 그것에서 오직, 黨派性論만을 오려내, 강조하고, 부정일변도로 폄하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통해 잘못 학습된 일부 식민 사학자들이 조선이 망한 이유를 당파싸움 때문인 것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당파싸움의 시초를, 조선중기의 임진왜란과 함께 성장하기 시작한 사림정치와 일제가 싫어한 인물, 의병장 정래암 등에 대한 나쁜 인식을 각인시켜 버렸다. 하지만, 역사학자 신채호선생 등과 같은 분은 조선일보에 상고사를 기고하면서도 정인홍 공전을 쓸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었다.
참고: 勳戚臣 : 이는 왕족의 친척, 공신과 그의 인척등. (참조자료: 조선왕조실록, 기타 사료 및 연구 논문 참조함.) <연구자 : 정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