廢母사건 발생(仁弘, 人倫에 어긋나므로 廢母論 반대), 인목대비 서궁유폐됨
이 사건이후 仁弘은 領議政을 사직하는 箚子를 올리고 광해군의 간곡한 부탁 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일체의 외부와 연락을 끊고 합천에 은둔.
이런 그를, 사람들은 山林政丞이라 불렀다.
- 이항복, 죽음.
1623년(87세)
仁祖反正(3월13일) 일어남
인홍, 합천에서 서울로 압송된 지, 5일 만인 4월3일 처형.
명나라를 배신한 죄와 폐모살제의 죄명으로 逆賊의 죄명씀.
1908년
286년後, 첫눈이 소리 없이 펑펑 내리던 날 , 仁弘은 逆賊 罪名이 사해지고
議政府 領議政 官爵復位된다.
우리에게 역사 발전의 기회는 있다. 이러한 기회를 놓쳤을 때의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돌아서 가야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친다. 조선중기, 한 시대의 선진 진보적 지식인이 시대의 모순을 겪으면서 거기에 과감히 맞서다가 끝내 보수 세력의 쿠테타에 의해 좌절한 역사 경험을 얻기 위함이다
또한, 역사의 기록이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폄하되고 잘못 전해져 와전되어버린 역사의 사실들을 그 시대적 상황에서 재평가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리고 인물 평가는 올바른 역사 인식 속에서 재정립되어야 한다. 아직도 많은 책과 백과사전등에는 와전된 사실이 역사적 정설인양 기록되어 있다. 역사는 진실이다.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이다.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결코,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국가재건과 새로운 역사발전의 기회를 쿠테타에 의해 좌절된 정권이다. 역사의 재평가가 반드시 이루어져, 이를 통패 새로운 역사적 교훈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