來庵(래암)선생은 정말 逆賊(역적)인가?
아니면, 반만년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세가(經世家)인가? 1982년 여름 TV에서 방영된 여인열전 시리즈 [서궁마마]중에 등장한 래암 정인홍선생은 드라마 극중에서 궁궐내에 머물면서 김상궁과 폐모살제 (인목대비를 폐모시키는 등 음모한 사건)를 음모하고 이이첨등에게 사주하는 것으로 되어, 나중에 仁祖反正 後 逆賊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는 逆賊으로, 奸臣으로 좋지 않는 兇名을 남긴다. 실제 역사기록에는 래암선생은 궁궐에 머물지도 않았고, 이이첨 등에게 인목대비를 폐모시키는 음모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래암선생은 나이 82세의 국가의 大老로 추앙받고 있었으며, 경남 합천의 가야산 아래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물론 그 당시의 정세는 大北의 權力 장악으로 大北의 領袖로서 國政에 자문은 했을 것이지만, 결코 廢母陰謀와 같은, 그러한 일을 모의하지도 않았었다. 도리어, 래암은 알려진 효자로, 廢母論은 人倫에 어긋난다고, 극명하게 반대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인조 반정이후, 쿠테타에 성공한 서인정권의 조작이었고 반정의 정당성을 조작하여 光海政權과 仁弘의 大北政權에 대한 폄하를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당시 정권의 주도권은 大北派의 남명학파에 있었고 그 반대측에는 퇴계학파가 있었다. 인조반정이후, 남명학파는 몰락하고, 서인 주도의 퇴계학파 문인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이후 한번도 남명학파에 의해 정권의 복귀가 없었다. 역사는 일방적 기록으로 되었고, 잘못된 사실들이 후세에 전해졌던 것이다.
물론, [서궁마마]의 극중 드라마에 대해, TV 방영자 측의 무식함도 있겠지만, 그 간의 일제식민 사학자들에 의해 길들여진 일부 사학자들의 역사의 정론이 아닌, 野史적인 학문적 접근 태도에 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우리 나라 역사학의 開祖이고, 일제시대 조선일보에 우리 나라 上古史를 장기간 기고한, 丹齊 신채호선생은 "우리나라 인물3걸을 말하라고 하면, 이순신, 을지문덕, 그리고 래암 정인홍을 꼽겠다"고 했다.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릇된 현실을 혁명적 정신으로 개혁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실천적 삶을 살다간 위대한 경륜을 가진 경세가로 [래암 정인홍선생]이 으뜸이라고 밝혔다. 그의 獄中腹稿(옥중복고)로 [鄭仁弘公傳]을 끝내 발표하지 못한 것을 그의 恨事로 여겼다.
그리고 朝鮮學에 정통한,선비 袋山 홍기문(洪起文)은 이러한 사실을 들어, 신채호의 鄭仁弘公傳을 後世에 남기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이는 그의 개인의 恨事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안타까움으로 그 恨을 토로했다. 그리고 일제시대 역사인식의 혼돈과 맹신을 탓하고 경종을 울렸다. 그러나 다행히, 요즈음, 우리의 젊은 史學者들이 올바른 歷史觀으로 새로이 역사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반긴다. 이는 우리 역사학의 개조인 단재 신채호나 걸산 홍기문의 恨事를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나는 이제부터 왜곡되고, 잃어버린 역사의 한 귀퉁이와 한 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위해 짧은 지식으로나마 하나씩 풀어나가고자 한다.
물론, 나는 史學者도 아니고, 역사에 대해 아는 바도 없는 문외한이다. 단지 역사학에 관심이 있어 조금의 책을 보다가, 문득 조선시대 임진왜란, 선조, 광해군, 인조반정 등의 역사적 회오리 수레바퀴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 그러나 반정이후 역사의 전면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던 [래암 정인홍 선생]에게 무한한 애정을 갖게 되었고 그에 관련된 책들을 수집, 읽고 자료를 정리하면서 시간 나는 대로 이 글을 계속 써 고자 한다. 나의 불민한 글재주와 짧은 역사지식을 탓하며 끙끙대며 쓸 것이다. 이해 바란다. <연구자 : 정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