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중 왜군이 북상할 때 조정은 그 대책을 논의했는데 끝까지 맞서 싸우자는 주전론이 우세한 가운데 다른 계책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서울을 버리고 도망가자는 파천이었고 다른 하나는 만주의 요동으로 망명하자는 요동내부책이었다.
그런데 두 계책의 입안자와 결정자가 모두 국왕인 선조이었던 것이었다. 선조는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행선지도 정하지 않은 채, 서울을 버리고 파천을 단행했다. 판천은 죽음을 무릎쓰고 싸워 나라와 백성을 구할 책임을 저버리고 자신의 안전만을 도모한 소인배의 행위로서 국왕이 휘할 행동은 아니었다. 이는 6.25사변 때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방송해 놓고 자신은 대전으로 도망간 이승만의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국민의 배신행위였다.
국왕이 도망가자 분노한 서울 백성들은 궁궐에 난입하여 그 중에는 천민들이 자신들의 호적을 관리하는 장예원에 불을 질렀다. 백성들의 분노에 놀란 선조는 파천의 주청자로 영의정 이산해를 둔갑시키고 좌의정 유성룡을 파천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고 파면시켰다.
또한 선조는 멀리 평산까지 도망가 만주 요동으로 망명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나 선조는 계속 요동 망명을 고집하였다. 결국, 요동 망명은 실현되지 못했는데 이는 선조가 철회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가 선조의 요동 망명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선조는 제 한 몸이 건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국왕의 책무에서 벗으나기 위해 전란중 책봉된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선위론을 밝히기도 했다. 당초의 선위론은 요동 망명의 걸림돌이었던 국왕의 직무를 세자에게 양위하고 전쟁터를 벗어나 안전지대인 요동으로 도망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선위론은 명나라의 원군이 도착하고 이순신등과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일으나면서 전황이 조선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파천과 요동 망명론으로 실추된 국왕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의도적인 정치행위로 뒤바뀌었다.
선조가 임진왜란 7년동안 선위를 밝힌 횟수는 실록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20회가 넘는다.
명나라의 원군이 도착하고 난뒤 선조의 선위론은 항상 ‘임시’ 또는 ‘섭정’이란 단서를 붙히기도 했다. 때로는 선조는 이 선위론을 명나라의 문책을 피하는 방도로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신하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한 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실제로 선조가 선위론을 밝힐 때마다 신하들은 업무를 중단한 채 정청을 열고 끓어 앉아 선위의 부당함을 목청높게 외치는 것으로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 주어야 했다.
이때마다, 세자인 광해군도 신하들과 함께 엎드려 선위를 거두어 달라고 빌었다. 이 시기 선조는 목숨을 걸고 전쟁을 치룬 영웅들과 극명하게 대비되어 늘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강행했다. 선조는 환도 이후에도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할 생각은 않고 강제로 군수용이란 명목으로 재산을 빼앗았다. 백성들은 분노했고 선조는 이때마다 군사를 보내 강력하게 백성들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처형했다. 이의 대표적 희생자가 담양, 순창, 남원일대의 의병대장 김덕령이었다.
이에 반해, 광해군은 세자로써 조정을 둘로 나누는 分朝(분조)를 이끌고 각 지역을 돌며 동원군을 모집하고 군사를 독려하며 실질적으로 움직였다. 광해군에게는 이 임진왜란을 통하여 동아시아 사회가 근본적 변화 과정에 있음과 조선 또한 이 변화에 맞게 환골탈태해야 함을 보여준 개국이래 초유의 국난이었음을 알았고, 임진왜란은 더 이상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일부 勳舊戚臣이나 양반사대부들이 이 조선 사회를 이끌고 갈 수 없음을 보여 준 사건이었으며, 성리학은 더 이상 사회의 지도 이념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남명학과 같은, 이론이나 관념에만 치우치지 않은 실천학문으로써, 조선후기의 실학의 태동이 된 남명학이 필요한 시기였다. 광해군은 이런 사회 변화에 적응할 줄 아는 賢君이었다.
임진란이 끝나고 선조(宣祖) 말년에 임진왜란이 발생한 시기에 집권당이던 동인이 쫒겨나고 잠시 서인이 집권했다가, 종국에는 일본에 대한 강경론을 주장하고, 실제 임진란중 많은 의병대장을 배출한 북인들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조말년 북인들은 선조의 후사문제를 두고 소북과 대북으로 갈라졌는데, 이때 선조는 그의 후사로, 마음속으로 세자인 광해군보다 어린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소북의 유영경등은 선조의 뜻에 따라 영창대군을 옹위할려는 생각을 가졌었고, 대북의 정래암등은 임진왜란당시 직접 분조를 이끌고 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 세자로서 직분을 다한 광해군을 선조 후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는 소북(小北)정권(政權)이 이루어져 柳永慶(유영경)이 영의정(領議政)으로 있었다. 1607년(선조40년) 선조는 병석에 누워 임시 방편의 명분에 못 이겨, 마음에도 없이 광해군(光海君)에게 전위(傳位)하라고 명했으나 유영경은 그 비망기(備忘記)를 감추고 이를 거두게 하였다. 선조의 묵인하에서 영의정이던, 유영경은 영창대군을 옹립하여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정래암은 1608년 정월 유영경을 斬刑(참형)에 처하라는 봉사(封事)를 올렸다.
國君有故 則貳君之監國處守 古今之通規也 臣不取知永慶之乃謂 群情之外者 何爲也 台練不得聞 則非國政也 其事也 政院史館同爲私秘 則知有私黨 而不知有王事也
그리고 소북파의 台練, 承政院, 春秋館의 언관(言官)들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宣祖의 마음속에는 실제 영창대군이 있었으므로 래암은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영변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유배 도중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이이첨등과 함께 유배 조치가 해제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
광해군이 즉위하자, 그에게 곧바로 漢城(한성)判尹(판윤), 大司憲(대사헌), 右贊成의 벼슬이 내려 졌으나, 그는 계속 辭職疎를 올려 벼슬을 사양하면서, 합천 가야산아래 머물며 정책을 건의하고, 시정을 논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래암은, 이런, 벼슬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사양하면서, 계속 국가를 위한 올바른 정책비판과 대안제시는 개인의 영예와 출세보다도, 국가의 전후 재건과 국가의 발전을 진심으로 바랬던 것이었다.
요즘의 시대에 비유하면 대중 언론의 기능을 하였다고 보면 비슷하게 생각될 지 모른다. 무관의 제왕, 지금의 언론의 중요성에 비유한 것이리라. 이런 것에 의해 근대 역사학의 개조인 신채호 선생은 우리 나라의 인물중, 정치에는 정래암이라 첫째라 하지 않았던가 !, 이런 속에서 1610년 (광해군 2년) 9월, 5현의 文廟從祀가 있었다. 곧 종래 최치원 등 기존 선현이외, 새로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 문묘종사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이전, 문묘종사(옛 선현들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공식 지정하여 모시는 것)에 대해 퇴계학파의 이언적, 남명학파의 조식선생이 끊임없이 문묘종사에 요구되어 왔는데, 퇴계학파의 요구만이 관철되어, 이언적, 이황이 문묘종사 되었다.
그 당시, 예전에, 퇴계학파의 이황이 남명학파의 조식. 성운을 나쁘게 평한 말을, 퇴계학파의 丁好誠(정호성)이 통문을 돌려 비난할 적에도 정래암은 아무말없이 참아왔던 것이었는데, 마침내, 퇴계학파의 이언적, 이황이 문묘 종사하게 되는 시기에, 광해군이 정래암의 문병을 위해 내의(內醫)와 예관(禮官)을 보내 간병을 하게하고 우찬성(右贊成)에 제수하자 래암은 이에 사직답(辭職答)을 올리면서 일반 정책건의와 함께, 이언적, 이황의 문묘종사가 부당하다고 논핵했다.
이 논핵에서, 퇴계학파 이황의 정치적 행적에서, 선현으로써, 그의 학문과 행동의 출처가 불분명했다고 비판하면서 그의 문묘 종사를 반대했다.(실제로는 퇴계학파의 이언적, 이황과 함께 남명학의 조식선생이 문묘종사되기 위해, 퇴계문도들의 승낙을 강하게 요구한 것임) 결국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간의 학파논쟁에서 비롯된 시비였는 데, 래암은 그 당시 개인의 명예와 욕심을 버리고 벼슬을 사양하며 시골, 합천에 머물렀고, 퇴계학파의 여러 문도들은 중앙 정계에 진출해, 여러 방향으로 남명학파을 비판해 왔던 것이었다.
이 문묘 종사 문제로 인하여 조정과 사림사이에는 큰 논란이 일어났다. 남명학의 학풍은 실제, 영남의 산청 지리산, 합천 가야산등에 은거하며, 실천적 학문으로 재야에서 그 전통이 이어져 왔고, 퇴계학파의 많은 선비들은 퇴계학문의 연결로 벼슬길에 나아가 중앙정계에서 활동하면서, 정치적(政治的) 문우(文友)로써 세력을 다져 왔던 것이었다.
이 당시 성균관등은 퇴계학파의 文友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유생들은 방문을 내걸고 권당에 들어갔으며 이어 성균관의 청금록에서 정래암의 이름을 삭제하자는 결의도 하였다. (편집자주: 이를 두고 아직까지 유림에서는 래암의 잘못으로 만 간주하고 있는 데, 실질적으로, 퇴계학파의 문우들이 학파의 인맥으로 많은 선비들이 성균관유생으로, 중앙 관직에 나가 있었다. 즉, 이는 문묘종사에서 학파간의 갈등이지. 인물의 잘잘못에 대한 사항은 결국 아니다.)
어떤 시각으로 보면, 래암의 잘못이 매우 큰 것으로 보일 수 도 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정치 상황이 얼마나 대중적 사림정치의 개화기였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즉, 광해군의 존경과 문병까지 받는 70세 國老인 래암의 권위에 도전하여 개방적으로 비판하고 데모까지 할 정도의 정치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는 래암의 꿈이었던 대중 사림정치의 示現이었다고 보면 조선역사상 새로운 정치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또 삼사에서도 래암의 箚子(차자)를 규탄하고 나섰다. 광해군은 이에 성균관 유생과 삼사의 규탄을 억제하고 靑衿錄의 削名을 엄히 막았다. 더욱이 削名을 주장한 유생을 가려내 啓聞하라고 까지 하면서 래암을 감쌌다.
또한,일제시대의 사학자들이 조선역사의 망한 이유를 ‘ 당파싸움과 광해군같은 폭군들 때문이다. 그 들은 사리사욕만 채우고 정치 싸움질만 하고, 민중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그래서 조선은 망했다.
그리고 일제의 의해 황국신민으로 다시 태어나는 게 좋다’ 라는 論理속에서 親日 史學者를 배출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도 이런 사류의 기존 사학자들이 우리의 초보적 정치상황에 기생하여 불구의 역사관을 만들어 냈다.이제는 우리의 역사를 정말 올바른 시각에서 새로 접근하고 진실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혼신으로 살다간 역사적 인물의 재조명이 필요한 시기이다.
무조건 적인 영웅화, 무조건 적인 역적화, 이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역사관과 진실을 후손에게 전해줄 필요가 있다. 동전에, 화폐에 누구의 얼굴을 그려 넣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역사의 많은 독재자들도 한때는 영웅이었다.
<연구자 : 정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