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경의 立身과 고려 원종 폐위사건 1269년 2월, 정인경이 29세가 되던 해, 원종의 아들 태자 심(충렬왕)이 고려의 사신으로 원나라 연경에 가게 되는데 이때 攝校尉(섭교위)이던 정인경이 태자의 護衛武官(호위무관)겸 외교관으로 태자 심과 함께 元의 수도인 연경으로 갔다. 그해 7월 태자 심과 정인경이 귀국길에 올라 파사부(지금의 의주에 속하는 압록강 서쪽의 작은 縣)에 도착했을 때 ‘원종이 병을 얻어 안경공 창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태자 심이 정인경에게 그 사태를 파악케 했다. 이에 정인경은 원나라의 연경으로 선위 서신을 가지고 가던 곽여필을 체포해 그 경위를 밝히고 권신 임연이 개경환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던 원종을 강제로 폐하고 안경공 창에게 왕위를 넘기게 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권신 임연이 원종에 의해 개경으로 환도하면 그의 권력이 약화되고 원종이 왕권을 더욱 강화해 그의 권력 기반을 잃게 되는데 위협을 느껴, 원종을 폐위시킨 것이었다.이에 정인경은 태자 심에게 사태를 보고하자 태자 심은 고려로 되돌아가면 즉시 감금될 것이므로 원나라로 되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함께 갔던 많은 사신들은 그들이 원나라로 되돌아갔을 때 고려의 권신인 임연이 보복할 것에 두려워하여 감히 원나라로 되돌아 가려 하지 않았다. 당시의 임연은 교정별감으로 고려 조정에서 왕권을 능가하는 군사권력을 가졌었다.
이에 29세의 젊은 정인경이 여러 신하들을 설득하여 태자 심을 보위하고 원나라의 연경으로 돌아 갔다. 충렬왕의 도움요청에 의해, 9월에 원의 세조 쿠빌리이의 원군이 서북병마사 김방경과 함께 압록강 지역으로 진군하고 정인경은 태자 심과 함께 귀국하게 되는데 또한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임연의 군사적 행동에 대비해 당시 인주太守로 麟州(인주;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를 지키고 있던 정인경의 부친 신보가 군대를 동원해 태자 심의 일행이 무사히 고려에 도착케 한다.
이런 결과로 원종은 왕위에 복위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임연은 원나라의 압력에 의해 권력을 잃게 되고 다음해 1270년 2월 병으로 죽게 된다. 이를 계기로, 고려 무신 독재 정권 100년이 무너지게 되나, 30여 년의 오랜 몽고와의 전쟁으로 국력는 거의 소진되고 백성들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다. 또한 허약해진 고려는 정치적으로 원나라의 많은 간섭을 받게 된다.
1269년 원종폐위 사건 이후 정인경은, 원종의 총애를 받아, 그가 죽고 충렬왕이 즉위 시까지 왕의 측근 신하로써 빠른 승진을 거듭하게 된다.1270년, 30세의 정인경은, 2월에, 散員(산원)겸 牽御龍行首(견어룡행수)의 벼슬을 지내며 왕을 가까이에서 경호하고 보위하는 일을 하게 되고, 4월에 攝別將(섭별장)으로 승진해서 神號衛(신호위) 第2領(제2령)에 근무하고, 12월에 神號衛 左部(좌부) 第1 馬別將(마별장)으로 보직이 전환된다. 이 神號衛(신호위) 군대는 개경(지금의 개성)의 수도를 경비하는 일이었다.
1270년 5월에 고려 조정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고, 그 달에 장군 배중손이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삼별초의 난이 일어난다.1271년 6월, 그가 31세되던 해, 左右衛(좌우위) 保勝將軍(보승장군)휘하에 있던 右部 第2郞將이 변방 근무중 도망가는 바람에 정인경이 右部 第2 郞將으로 보직을 받아 변방 방위 근무하게 된다.
왕권회복과 무신정권 종식시킨 공으로 고속승진! 그리고 7월, 太子府右指誘(태자부우지유)에 임명되어 태자 심을 보위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 시기, 정인경은 원종페위 사건을 계기로 동년배인 태자 심(훗날 충렬왕 즉위)과 절친하게 지내게 되며 태자를 보좌하는 임무를 가지게 된 것이다.
1272년 9월, 32세에,中軍 神騎都領(신기도령)으로 임명되어 中軍의 騎馬兵(기마병)을 이끄는 지휘관이 된다. 그리고 12월29일 將軍 공소 휘하의 中郞將(중랑장)에서 將軍 득림 휘하의 中郞將으로 보직을 옮기게 되고, 곧, 興威衛(흥위위) 精勇借將軍(정용차장군)으로 승진 발령을 받고, 1273년 12월, 33세에 興威衛(흥위위) 精勇攝將軍(정용섭장군)으로 승진하게 된다. 곧이어 金吾衛(금오위)의 攝將軍(섭장군)으로 보직을 옮겨 고려의 경찰 업무를 지휘하게 된다.그리고, 정인경은 1274년, 34세에, 興威衛 精勇將軍(정용장군)으로 승진 기용된다. 그는 1269년 원종폐위사건이후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이어 원종의 총애를 받아 고려군의 무관으로써 여러 군 요직을 거치며 빠른 승진을 거듭하게 된 것이다.
정인경은 또한, 무신정권 몰락 후, 원종의 왕권 강화 노력에 적극 보좌하게 되고 고려 조정의 정치 군사적 안정에 기여하게 된다. 이로써 결국 100여 년간 지속되던 무신정권은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되고 30여 년의 오랜 세월 동안 몽고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고려에 군권과 왕권을 강화시켜 고려의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고 한다.
그러나 오랜 무신정권 하에서 군부의 핵심 세력들은 원종의 개경 환도와 몽고의 세력에 반대해서 삼별초를 조직해 대항하게 된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우선 왕권을 강화하여 다시 국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몽고의 실체를 인정하고 몽고와의 더 이상 싸움이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1272년, 정인경이 32세 되던 해, 고려 원종은 원나라의 연경에 가게 되고 정인경은 원종을 보좌하는 외교관으로 원나라에 갔다. 이를 계기로 정인경은 본격적인 원나라와의 외교 교섭무대에 서게 된다.그리고 정인경은 中郞將(중랑장)으로 승진된 후, 2군 6위의 각 부대에 지휘관으로 순환 근무를 하게 되고, 곧 이어 將軍(장군)겸 入內侍(입내시)로 거듭 승진 제수 받는다.
1273년, 정인경이 33세 되던 해 3월, 門下侍郞 판추토사 김방경과 몽고의 연합군에 의해 장군 배중손 등 삼별초는 토벌되고, 그해 7월에 김방경이 문하시중이 된다.이해 6월에 고려 원종이 죽고 태자 심이 고려 충렬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1274년, 몽고의 원나라는 고려를 강압해서 일본의 정벌을 추진하게 되는데, 문하시중 김방경이 도독사 홍다구와 함께 추진하게 된다.그러나 34세의 젊은 정인경은 고려의 대몽 복속 정책과 여몽 연합군에 의한 일본정벌 정책에 반대를 함으로써 원나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어 충렬왕 즉위 직후부터 4년 동안 閑職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 후 원나라는 고려복속정책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요직에서 배제한 후, 고려의 행정 관제를 격하시키고 결혼 도감을 세워 고려의 부녀자를 공녀로 요구하는 등, 과도한 공물 요구, 일본 정벌을 위한 고려의 군대 요청 및 300여 척의 전함 요구 등으로 고려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
1274년 10월, 문하시중 김방경과 친원파 중심인물인 도독사 홍다구의 여몽 연합군은 장도의 일본 정벌에 나서게 된다. <연구자 : 정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