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암은 어릴 때 너무나 어른 서럽고, 학문에 대한 관심과 현실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일반 서민들의 생활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또한 학문이 워낙 절윤한 지라 합천및 영남일대에서 그의 이름은 어려서부터 알려졌다. 사람들은 우리 나라에 두 번 다시없는 인물이 태어났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야산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랐고, 당시 불교의 대 사찰인 유명한 해인사의 종교적 분위기 등, 특이한 환경과 함께 성장해, 학문과 자연 그리고 인간에 대한 남다른 이해와 일반 백성들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뇌를 가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합천 만이 가진, 이런 특이한 환경에서 학문에 대한 어린 열정을 불태웠었다.
그는 열 다섯 살 때까지 집안에서 아버지 륜(倫)으로 부터 학문을 배우고 글을 읽으며 공부하다가, 당대 士類(사류)의 중심 인물이요, 후학을 가르치는데 전념하던 남명 조식선생이 본향인 협천 삼가에 돌아와 雷龍亭(뇌룡정), 鷄伏堂(계부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게 되자, 래암은 계부당으로 남명선생을 찾아가 그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남명 조식선생의 문하에 들어간 래암은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천재성으로 늘 조식선생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영특하고 총명하며 결단력이 강한 래암은 남명의 높고 뛰어난 기상(氣像), 경건하고 義을 숭상하는 학맥과 남다른 경륜(經綸)을 배워 스승의 가르침에 철저한 실천학문을 익혔던 것이었다.
그 당시의 영남 좌측에는 퇴계 이황선생의 퇴계학파가 성장하기 시작했고, 영남 우측에는 남명 조식선생의 남명학파가 그 일맥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1558년, 래암이 23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당시 선비로써 인증받는 최초 형식적 과정이었으므로 래암은 생원시에 응시 했다.) 그러나 이미 남명 조식선생의 학풍의 영향을 받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그의 스승을 본받아 후학을 가르치고 학문을 심화시키기를 노력하였다.따라서 그의 학문은 날로 깊어가고, 폭도 확대되어, 史書, 性理學은 물론 제자백가, 천문지리, 등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뒷날 朝廷의 逕筵(경연)에 나아가 왕과, 다른 신하들은 그의 박식하고 논리 정연한 학설에 경탄을 금하지 못했고, 국사를 논함에 사람들은 史實과 전고(典故)는 모두 그에게 자문을 청하였던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정인홍은 합천인이다. 어려서 조식에게서 배웠다. 조식은 그의 지조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 그의 뛰어난 영특함에 그를 귀하게 여겨, 持敬工夫를 가르쳤다.이로부터 그는 뛰어난 재능과 각고의 노력으로 밤낮으로 공부하여 조식의 학풍을 계승하였다. 1572년, 조식은 만년에 그의 방울과 칼을 가지고 다녔는데, 그 중, 칼을 래암에게 주면서, " 방울은 늘 차고 다니면서 그 소리를 듣고 자기 마음을 깨우치고, 칼은 머리맡에 두고 모든 義理의 결단을 위해 결심할 때 죽음으로 마음에 다짐을 스스로 하기 위해서다" 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학문이 이론에 치우쳐 실천과 행동에 태만하지 않도록,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래암은 늘 학문을 하며 꿇어앉아 칼을 턱밑에 대고 정신을 가다듬기를 죽을 때까지 하루 같이 하였다. 정말 학문을 위해 늘 깨어 있는 자세로 공부하였고, 그 학문의 실천과 행동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물론 훗날에 이것으로 인하여 많은 정치적 개혁 저항세력을 만들기도 하였지만 그는 일심으로 당시의 지식인으로, 경세가로, 정치가로, 학자의 양심으로서, 배운 학문의 실천과 행동으로, 임진왜란 전, 후의 어려운 정치상황과 국가재건, 민생의 안정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또한, 왕조실록에 [ 래암의 학식은 옛것을 상고함이 넓고 깊어서 스승을 능가하고 특히 이론적 정론의 글에는 매우 능했으며 사람들은 그와 다른 이견을 가졌어도 감히 그의 논리 정연하고 뛰어난 학식과 논리의 강함을 두려워해서 다른 논리를 제기하지 못했다. 이이(율곡 선생)는 그를 마음속으로 매우 좋아하고 그의 학문 또한 절륜 하였음을 알만하다] 라고 평하였다.
뿐만 아니라 래암은 효자로서 선비들간에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래암의 인격과 학문은 젊어서 조정에까지 알려서 마침내 탁행지사(卓行之士)로 왕에게 발탁되었으니 이를 당대의 五賢士라고 하는 데, 정인홍, 그리고 서화담文人의 이지함, 남명학파의 최영경, 퇴계학파의 조목, 이일제 文人의 김천일. 등이다.
이들 모두 그 당시 파격적으로, 勳戚(훈척)출신도, 科擧(과거)출신도 아닌, 朝野(조야)의 士林(사림)출신으로 (재야 학자 출신) 6품직을 제수받았던 것이었다.
이로 인해 래암은 그의 인생의 첫 갈림길인 실천 학문을 바탕으로 是非叢生(시비총생)하는 벼슬길에 나아간 것이었다.
<연구자 : 정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