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의 이름(諱)은 인경(仁卿)이요 자(字)는 춘수()이며 서산군(瑞山君) 시호(諡號) 양렬(襄烈)이니 원외랑공(員外郞公)이 고려로 망명 5년째 되는 신축년(1241년) 8월 고창군부인(高敞郡夫人) 吳씨와 사이에 첫 득남을 하니 그 분이 곧 서정(瑞鄭)의 시조(始祖) 양렬공(襄烈公)이다.
공(公)은 초동(初童)시절부터 학문에만 열의를 보여 일찍이 성리학자(性理學者)인 아버지 원외랑공으로부터 성리학과 중국어를 배웠고 소년기에 문하시랑(門下侍郞) 한자희(韓自喜)에게 학문과 틈틈이 무술을 익혀 1254년 14세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16세 때인 병진년(1256년) 몽고의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자원종군(自願從軍)하여 수차 蒙軍을 물리침으로서 고려(高麗) 몽고(蒙古)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공의 나이 29세인 기사년(1269년)에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호위무관(護衛武官)겸 명성 높은 외교통역관으로 원종(元宗)의 아들 세자 심(諶) (충렬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 도강(渡江)을 준비하던 중 권신(權臣) 임연(林衍)의 모반(謀叛)으로 원종이 폐위(廢位)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일행들이 놀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할 때...
公이 나서 “나라가 위태로운데 자신들의 안위에 급급해서는 안 된다, 모두 자신과 가정문제 등을 뒤로하고 오직 나라를 구하는데 전력을 다 하자”며 주위를 설득, 일행들의 동요를 진정 시켰으며 원(元) 황제에게 조력(助力)을 청하여 국난(國難)을 평정함으로서 고려왕실 법통(法統)을 바로 세우고 무신정권(武臣政權)을 종식시키는 게기를 만들었다.
또한 공은 장군대장군판삼사찬성사(將軍大將軍判三司事贊成事)의 신분으로 십여 차례 충렬왕의 외교사절로 원나라를 오가면서 몽고의 침입으로 현 평양에 설친 된 동령부(東寧府)를 비롯한 서,북변 54성과 자비령 이북의 6개성을 돌려받는 등 빼앗겼던 국토회복과 피납 된 백성들을 귀화시키는 큰 업적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公은 국왕으로부터 항몽(抗蒙) 승전의 功과 무신정권 종식으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세운 공(功), 왕의 외교사절로서 빼앗긴 국토의 회복과 피납 된 백성들을 구하는 등의 공을 높이 사 특별 어명으로 一等功臣이 되었으며 단권(丹券)과 록권(祿券)을 하사 받았다
또한 公은 응양군상장군겸군부판서(鷹揚軍上將軍兼軍簿判書) 무관 최고위 직에 이르기까지 왕의 최 측근으로 국가에 많은 공을 세워 正一品의 벽상삼한삼중대광추성정책안사공신도첨의중찬(壁上三韓三重大匡推誠定策安社功臣都僉議中贊) 지금의 국무총리급의 직위에 오르는 등 문관과 무관의 여러 관직(官職)을 두루 거쳤으며
왕으로부터 본관을 서산(瑞山)으로 제수 받아 운주(運州) 지금의 홍성 등으로 분할 관리 해 온 부성(富城)의 행정구역을 다시 서주(瑞州) 서산군(瑞山郡)으로 승군(昇郡)시켰다.
공(公)은 예빈윤(禮賓尹) 진수(陳琇}의 따님 진씨(陳氏)를 배필로 맞이하여 슬하에 5남2녀를 두었으며 장남 유(柔)는 첨의사인(僉議舍人)이었으며 차남 신영(信英)은 판도정랑(版圖正郞)이었다 또 3남 신구(信丘)는 조계사(曹溪寺) 승려가 되었으며 4남 신화(信和)는 도염서령(都染暑令) 5남 신수(信綬)는 회릉직장(懷陵直長)이었다 또한 장녀는 삼사우윤(三司右尹) 채종서(蔡宗瑞)에게 차녀는 사복관좌랑(司僕官佐郞) 김광식(金光軾)에게 모두 政丞家門으로 시집을 갔다.
이렇게 자녀들 모두가 국가의 훌륭한 동량(棟樑)으로서 역할을 다 하도록 했으나 애석하게도 을사 1305년 경기도 수원에서 세수 65세(실기(實記)를 (고려사(高麗史)에는 69세로 기록) 일기로 세상을 떠나심에 임금이 이를 애도(哀悼)하고 有司에게 장례(葬禮)를 치르게 하였으며 襄烈이라는 시호(諡號)를 직접 내렸다.